자유와 스팸(SPAM)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2-36)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가혹한 차별 대우를 받은 사람이 조선시대의 백정입니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지 못하게 하였고 비단 옷도 입지 못하게 하였으며, 공부도 못하게 하였고 항상 허리를 구부리고 다니게 했습니다.
이런 일을 안타깝게 여긴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양반과 상놈의 구분 없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면서 고종의 주치의인 의사 에비슨과 함께 백정들에게 전도했습니다. 첫 번째 예수를 믿은 사람이 박성춘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었고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왕에게 탄원하여 마침내 1895년 6월 6일 백정 신분을 철폐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박서양은 1908년 6월 세브란스 의과대학 제1회 졸업생 일곱 명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32). 사람을 자유케 하는 일을 실천하는 자가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하신 일을 이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내 명예와 학식, 물질 등으로 다른 사람을 자꾸만 노예로 삼으려고 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는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참다운 자유는 아무리 높이 평가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 투쟁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투쟁은 대부분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혁명이나 명예혁명, 불란서의 대혁명,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노예해방을 위한 남북전쟁 우리나라의 3.1. 만세운동 등이 모두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어느 역사학자는 『세계사의 의의와 가치는 자유와 해방을 위한 투쟁에 있다』고 했습니다. 페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스탈린의 딸도 철의 장막인 소련 공산체제에서 망명해 나왔습니다.

종이 왜 됩니까?
정신 못 차리고, 가난하니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가난은 왜 옵니까?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게 오는 가난은 하나님에 의해서 오는 것입니다. 축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처음 하신 말씀이 복입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에도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고 하셨습니다.
모세에게도 신 4:40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시며 복을 주시기 위해서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복을 주시려고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더 발전된 상태로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32절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불러주신 것은 구약성경에도 명백히 기록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벨론 70년 종살이했다는 것 역시 지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예수님께 자기들이 종살이 한 적이 없다고 한 것은 거짓일 뿐만 아니라 교만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습니다. 종살이하는 것입니다.

자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적 자유와 또 하나는 영혼의(정신적) 자유입니다. 에덴 동산의 선악과를 하나님은 만드시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꾀임과 인간의 교만으로 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인 용어로 ‘원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원죄’와 내가 지은 ‘자범죄’가 있습니다.
본문 3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때린 사람은 오그리고 자도 맞은 사람은 다리 뻗고 잔다.”고 했습니다. 육체적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신적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 정신적 자유가 죄인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2호선 전철을 타고 당산역을 지나 한강을 건너가면 바로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절두산입니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쓰면서 여기서 천주교인들을 무참히 학살했는데 정확한 수는 알 수 없고 약 1만 여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때 목을 베던 자가 칼로 한 사람씩 목을 베면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칼을 주면서 내 목도 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예수님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사람들은 자유를 잃은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토스트예프스키의 대표작 『죄와 벌』에 보면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사회의 암적 요소인 고리대금업자 노파만 없어지면 그 사회의 여러 사람들이 경제적인 압박에서부터 자유 하리라고 생각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그 노파를 살해합니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는 정당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정의와 자유가 실현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 자신이 노파를 살해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에는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형벌을 받게 될 때에 그는 비로소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자유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종의 멍에가 무엇입니까? 본문의 말씀처럼 바로 죄를 범하는 자입니다. 죄를 범하면 종이 됩니다. 누구에게 종이 됩니까? 죄에게 종이 됩니다. 사단에게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천하만국을 다 보여주면서 그것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것인데 사단이 뭘 주겠다는 겁니까? 그것은 유혹이었습니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사단에게 빵을 받아먹으면 사단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것은 선언입니다. 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인간의 원죄와 나의 자범죄를 모두 해결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유케 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신 15:18 “그가 육년 동안에 품군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종이 안식년이 되어서 나가겠다고 하면 자유롭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남을 속박하려고 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 일 수 있습니다. 공산당은 사람을 속박하였습니다. 자유를 빼앗았습니다. 그 결과 망했습니다. 사람을 자유롭게 해 주세요.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스팸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창의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산업시대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손으로 만든 것은 싸고, 기계에서 나온 것은 다 비싸다.” 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이 많아서 인권비가 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이 하는 일은 아무리 정교해도 100% 똑같기는 어렵습니다. 조금씩은 다릅니다. 그러나 기계가 찍어낸 것은 다 똑같습니다. 창의적이지 못합니다. 이런 대표적인 것이 음식 문화에까지 파고들어 1920년대부터 미국인들의 식탁에 올라오게 된 호멜(Homel Foods)사의 돼지고기 햄 통조림 상표인 스팸인 것입니다. 요즘 우리 김치를 지나치게 획일화(표준화) 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김치에 표준이 어디 있습니까? 만드는 사람마다 집집마다 맛이 다른 것이지요. 획일적인 것은 다양성을 헤치기 때문에 창의성을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스팸이 한국에는 미군부대를 통해서 의정부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여기에다 김치를 넣어서 끓여 먹었습니다. 이것이 ‘부대찌개’의 원조가 된 것입니다. 한국에 오면 스팸도 변화됩니다.

둘째는 강제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스팸이 지금처럼 보통 명사가 된 것은 영국에서였습니다. 광고로 이루어진 드라마에서 손님이 좋아하든 아니하든지 간에 끊임없이 강제로 제공되는 것입니다. 광고 제작자는 마치 정보의 홍수시대를 예견이나 한 것처럼 마구 밀어 부쳤습니다. 결국 “무차별적으로, 쓰레기 같은” 이미지가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에 이러한 스팸메일이 전체의 80%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요즘 선교로 사용하는 영어단어 Mission에 대해서 굳이 고집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용어일 뿐 아니라 너무 남에게 밀어붙이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선교를 제한하는 나라들에 갈 때는 굳이 Mission을 사용하지 말자는 의견입니다. 대신에 ‘서비스’를 강조하자는 것입니다. 섬기는 사람 또는 도와주는 사람으로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강제로 밀어 붙여서 되는 일이 아니라 섬기며 봉사할 때 자연스럽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고전 8: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자유함의 절제
벧전 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우리가 자유하게 되어서 약한 자를 핍박하고 내 악을 가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속된 말로 남을 등쳐먹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출 22:22),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신 10:18) 라고 말합니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자유는 스스로 다스려질 수 있을 때 빛을 발하게 됩니다. 자유가 내게 주어진 것은 나 혼자 잘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그의 저서 『기독교인의 자유』에서 『기독교인은 모든 것 위에 서 있는 자유로운 군주로서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고 종으로서 누구에게도 예속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유자인 동시에 종인 것입니다.

본문 35절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란 종이 아닌 아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종은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다릅니다. 아들은 영원합니다. 아들만이 자유를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주인이 종을 풀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자유자 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자유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시 사용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