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의 위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막 10:28-31)
중국고사에 고대 중국인들은 심장이 오른쪽에 있고, 간장은 왼쪽에 있는 것으로 전승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과학자요 신부였던 이탈리아의 쟈크롱호가 ‘인체해부학’ 이라는 책을 중국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심장은 왼쪽에, 간장은 오른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해부를 해서 과학적으로 공인된 의학이론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은 중국인들은 ‘아, 서양인과 동양인은 얼굴이 다르듯이 속 내부도 다르구나! 우리는 심장이 오른쪽에 있고, 간장이 왼쪽에 있는데 그들은 심장이 왼쪽에 있고 간장이 오른쪽에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참 심각한 무지요 편견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성경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에게 무능보다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지는 더 무섭습니다. 나아가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것은 편견입니다. 편견보다 더 무서운 것은 편견을 정당화하고 보편화하는 것입니다. 무능한 것은 불행합니다. 알기는 아는데 잘못 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결혼에 실패한 한 여성이 “모든 남자는 다 늑대와 같다.” 라고 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한 남자에게 상처를 받은 그 자신의 편견이 모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여성은 여우와 같다.” 한 여성에게 상처받은 남자가 모든 여성을 그렇게 평가하는 것도 편견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자기 편견을 남에게 보편화하는 강요입니다. 친구를 보고 “너 결혼하지 마라. 남자들은 다 늑대야.” 자기가 경험한 그 불행을 가지고 그것이 기준인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 보편화하는 것은 매우 무서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편견이라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심각한 지경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 뿐 아니라 인간이 모인 공동체 안에 있는 인간관계의 가장 두꺼운 장애물은 편견입니다. 부부간에도 편견이 있습니다. 친구간에도 편견이 있습니다. 사회 정치에도 편견이 있습니다. 내가하고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면 모든 것이 잘못된다는 시각, 이것이 편견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있는 편견을 씻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권 의식이 문제입니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본문 28절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베드로의 이 말은 아주 무서운 편견의 말입니다. 베드로가 주님 앞에 이 말을 한 것은 그는 당당한 제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정당한 예수님 앞에 합격자로 자처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우등생으로 자처합니다. 예수님은 이 베드로를 볼 때 아직 더 성숙해져야 하는데 그는 우등생 의식만을 가지고 주님 앞에 큰 소리를 칩니다. “보소서(!Idou;:이두)” 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시기 위하여 자주 사용하시는 단어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말하면서 다른 제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만 겸손히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도 들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베드로의 이 편견은 오늘 우리 안에도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이 특권 의식, 주님 앞에는 미달하고 있는데도 나는 우등생인 것처럼 편견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 베드로를 향하여 염려스러운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당당한 줄 알고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예수님이 요구하는 제자도의 기준은 너무 높습니다.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본문 29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이 높은 수준에 미달하는데도 베드로는 당당한 줄 알고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세 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 혈육과 인간관계입니다. 이것은 가족과 인간관계의 파괴적 의미가 아니라 가정과 인간관계에 우선하는 믿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집이나 전토”를 버려야 하는 문제입니다(마 19:29 “집이나 형제나”, 눅 18:29 “집이나 아내나”). 집이나 전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자기를 부인하고” 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은 것은 앞의 두 가지를 버렸던들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딱 베드로처럼 되니까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의 자랑거리가 됩니다.
어떤 율법사가 주님께 와서 “선생님, 사람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럽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아느냐?” , “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그러나 제가 다 지켰습니다.” 그 때 주님이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그러면 영생이 있으리라.” 이 율법사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재물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생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게 하는 한 가지가 모든 인생에게 다 있습니다. 이 율법사는 재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재물만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념, 자신의 예술관, 자기의 쾌락을 추구하는 탐욕, 욕심 때문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사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뜨리지 않고는 주님께 갈 수 없습니다. 이 율법사가 그 한 가지, 본인에게 있었던 그 재물관이 예수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돌아갔습니다. 베드로는 버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아직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본문 31절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들이 많으니라.” 는 이 말씀에 는 두 가지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현재성을 강조합니다. 이 본문은 과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현재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제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잠시 틈을 내서 기도하러 가시든지 제자들과 함께 없는 그 시간에 제자들끼리 무슨 놀이를 했습니까? ‘누가 크냐’ 는 것으로 시비했습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 8명이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비 어부출신 중에 가룟 유다는 그 당시에 독립운동 단체의 멤버입니다. 상당히 수준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열심당 시몬도 상당히 수준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 열심당은 율법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마태도 세리입니다. 그가 로마의 식민지하에서 그래도 공직자입니다. 그러므로 어부들과 비 어부들, 이 사람들이 누가 크냐 라고 다툴 여지가 있고 어부들끼리도 누가 크냐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중에 누가 크냐?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탄식을 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서로 의논하느냐? 왜 다투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누가 크냐는 내 관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배드리는 교회에 와서 누가 크냐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일까요? 네가 앞자리에 앉았는가? 뒷자리에 앉았는가? 그것이 성령의 관심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가 해야되고 우리교회가 해야되는 편견입니다. 선교지에서도 이런 편견이 있습니다. 나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되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여러분! 경기장에서 게임하는 선수들이 선배냐 후배냐 그것이 문제입니까? 축구경기 하는 선수들은 누가 넣든 골을 넣어 팀을 이기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야, 선배가 골을 넣기 전에 너는 넣지 마.” 하면 이런 팀은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먼저 받은 은혜입니다. 잘 누리시기 바랍니다. 먼저 받은 기회를 잘 살리시기 바랍니다. 먼저 받은 충성에 사명을 감당하기 바랍니다.
둘째는 삶의 평가와 심판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먼저 된 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 서기관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먼저 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특권층입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서기관으로 태어나는 자체가 놀라운 기득권입니다. 이 사람들과 항상 함께 대치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리와 창기들과 병자들과 죄인들입니다. 여기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리새인입니까? 세리와 창기들입니까?
예수님은 성경을 가르치실 때 이 두 부류를 항상 염두에 두고 가르칩니다. 마 21:31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언제나 두 부류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을 싫어합니다. 좌냐 우냐가 아닙니다. 좌도 치우쳤고 우도 치우쳤습니다.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기준에 돌아온 세리와 창기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특권의식이 마치 결국은 자기들의 심판을 자기가 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엡 2:8).
오늘 우리는 실력을 높여야 합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몸을 화목제물로 주려 하심이라” 영적 실력의 최고봉은 섬김입니다. 알고 잘난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는 분량을 높이는 것입니다. 때로는 알고 있지만 상대방이 스스로 알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미덕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모르느냐는 식으로 몰아세워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진정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기다려 줄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기다려 주셨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해야 하는 그 자리에서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지금 예수님보고 “왕이 되실 때가 지금입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에이트 빌로우(Eight Below)란 영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남극에서 활동하는 한 탐험대원들이 사고를 만나 거의 죽을 뻔했지만 8마리의 썰매 개들 때문에 간신히 살아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상악화와 부상치료로 탐험대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살려준 8마리의 개를 남극에 남기고 급히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개를 사랑했던 주인공은 곧 돌아온다는 약속을 하고 남극을 떠났지만 여러 사정으로 그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개들은 남극에서 175일 동안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고, 주인공은 자기들을 살려준 개를 배반할 수 없다고 개를 찾아 나서 결국 찾는 이야기입니다. 은혜를 입은 개에게도 이같이 해야하는데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나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까?
몇 일전 컴퓨터를 고치고 있던 정 집사님이 계속해서 하드디스크 하나가 인식이 안 된다고 시모스(SMOS)에서 확인하고 마스터와 슬라이브를 조정하면서 땀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고생하더니 나중에 하는 말이 전원을 연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해 놓고 전기를 공급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컴퓨터라고 해도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것 다 해 놓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전원을 연결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시 29:11)
우리는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 다른 자랑이 너무 많이 튀어나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계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등뒤로 돌려놓고 우리가 아무리 나서도 해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힘이 우리의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