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능력)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3)

혼자 농구 연습한 사람은 실제 경기에서 중앙선까지는 공을 잘 몰고 간답니다. 그러다가 중앙선이 나오고 상대방이 막기 시작하면 갑자기 방향을 돌려 자기 골대로 가서 공을 집어넣는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와 같은 것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교회 안에서는 참 성도가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세상 밖으로 나가면 힘 한번 못써보고 돌아서는 혼자 농구 연습한 사람처럼 되어있지 않은지 생각해야합니다. 1970년대에 미국의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한국에 오셔서 집회할 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신앙을 꼬집어 말하기를 ‘바구니 신앙’ 이라고 했습니다. 바구니가 물 속에 있을 때는 물이 가득한 것 같은데 바구니를 건져내면 물이 다 빠지고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물안 개구리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모인 것은 주님께 은혜를, 성령을 받기 위함이지만 우리가 나가는 것은 그 은혜를 나누기 위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포기하고 도망가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이 사라진 것은 이제 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망가트려 놓은 이 세상을 하나님께 뒤돌려야하는 사명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출 8:22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개역:나는 세상 중의)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왕상 2:2 다윗은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남자답게 떳떳하게 세상을 헤쳐 나가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왕상 8:60에서 기도하기를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번도 세상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을 포기 하셨다면 세상을 구원하러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을 구하려 하심입니다.
요 1:9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라고 증언합니다. 세상 속으로 오시고 그 가운데 계신 것입니다.

병 고침으로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마 4:24-25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병을 낫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 주실 때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마 9:6) 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죄를 사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옵니다. 바로 이러한 능력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중풍병자를 고쳐 주심으로 알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벧전 3:6)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 자체가 능력입니다. 다른 거 다 없어도 예수님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심리학 용어 중에 ‘윤형본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프스에서 조난 당하고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 홀로 남았답니다. 그는 13일 동안 넓고 험준한 얼음산을 방황하다가 구조대로부터 구조를 받았답니다. 13일 동안을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고 물으니 그는 얼어죽지 않으려고 계속 걸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걷고 잠깐 쉬고 또 걷고, 졸면 죽는다 하면서 조금씩 먹어가면서 13일 동안을 줄곧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조대가 그가 걸어온 과정을 살펴보았더니 반경 6킬로미터 내를 뺑뺑 돌고 있었더랍니다. 자기는 직선으로 간다고 갔는데 결국은 같은 길을 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가리켜 윤형본능(바뀌 윤, 모양 형)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눈을 가리고 실험을 해 보면 자신은 똑바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결국은 20미터나 100미터 반경 안에서 빙빙 돈다고 합니다. 우리 자신도 살펴보면 이런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해는 바뀌어도 늘 그 모습 그대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변화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참 잘 변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정신 의학자 해리스 박사에 의하면 인간은 세 가지 경우에 천성이 변한다고 합니다. 첫째, 현재 상황이 너무 괴로울 때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둘째는 소망이 안보일 때 인간은 변할 수 있으며, 셋째는 유레카 상황(Eureka Stage)에서 인간은 변할 수 있고 합니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큰 깨달음이 있을 때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그래도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진짜 우리가 변하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그리고 바로 오늘 본문이 이 사람들에게 증언하신 것입니다. 이제 병을 고쳤으니 소금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비추라는 것입니다.
본문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는 말씀을 가지고 많은 묵상을 했습니다. 소금이 맛 때문에 있는 것이지요. 짠 맛 없는 소금이 무슨 소금이겠습니까? 예지네 김치가 소금에 절인 김치를 어디서 사다가 김장을 했나봅니다. 그런데 좀 김치 맛이 영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번 윤미영 집사님에게 여쭤보았더니 그건 소금 때문이라고 그러시는 겁니다. 소금이 잘못되면 모든 맛이 흐트러집니다. 짠 맛 하나만 잘 다룰 줄 알아도 대단한 요리사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그 맛을 잃으면” 그러셨습니다. 그것은 소금의 맛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뜻인 것은 우리가 다 압니다. 죽을 때까지 소금의 맛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소금이 맛이 있을 때 일해야 한다. 혹 언젠가 맛을 잃어버리게 될 때가 오면 쓸모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원문으로 본문 13, 14절을 확인하다가 매우 중요한 단어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먼저 13절에 “ijscuvei e[ti eij”(이스퀴이 에티 에이) 라는 단어 3개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처음에 나오는 “ijscuvei”(이스퀴이)는 “할 수 있다, 선하다, 힘이 강하다, 우세하다, 완전하다, 많은 일을 하다.” 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ijscuv”"(이스퀴스)입니다. 이 뜻은 “강력한, 능력, 권세” 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본문 위에 3번 더 나옵니다.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역사하는(이스퀴이)가 번역된 것입니다.
히 9: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효력(이스퀴이) 입니다.
약 5: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역사하는 힘(이스퀴이) 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그 맛” 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두 개의 단어가 “e[ti”(에티) “아직, 이후에” 라는 부사 단어와 “eij”(에이) “…이라면” 이라는 접속사입니다. 이 뜻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에게 그것이 있다면 아직(이후에) 역사하는 일을 할 수 있다”입니다. ‘맛’이 능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맛’ 이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그분이 보내주신 성령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우리는 아직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말의 ‘맛’ 이라는 단어 또한 ‘멋’있지 않습니까? ‘맛’과 ‘멋’은 같은 것입니다. 맛이 있어야 멋있는 것이고 멋이 있어야 맛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맛없는 사람에게 “별 싱거운 사람 다 봤네.” 그럽니다. 그리고 멋없는 사람에게 “그 사람 참 멋대가리 없네.” 그럽니다. 여러분! ‘멋’이나 ‘맛’ 있으면 뭐해요? 예. 자랑합니다.

짐승의 이름에 스승 사(師) 자가 붙은 것은 사자(獅子)밖에 없습니다. 사자의 獅자는 개사슴 록변에 스승 사(師) 자를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子)는 공자, 맹자 할 때 사용하는 자로 스승에게 붙이는 존칭어입니다. 어떻게 짐승의 이름에 스승과 같은 말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자하면 생각나는 것은 폭력과 같은 힘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스승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그 생김새가 점잖잖아요. 늑대처럼 흉포하지도 않고, 여우처럼 교활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초식동물들은 발아래 풀만 보고 다니는데 사자는 멀리 지평선까지 바라봅니다. 사자가 호랑이와 다른 점은 호랑이는 밀림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멀리 보는 시력에서 사자에게 뒤진다는 겁니다. 사자의 눈은 무엇인가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통찰력과 사물을 조망하는 사색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승이란 바로 발아래 풀만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있는 것을 보고 가르칠 수 있는 사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힘 이것이 ‘맛’입니다.

14절 보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duvnatai … keimevnh:”(뒤나타이 … 케이마엔) “duvnatai”는 “능력”(뒤나미스)에서 온 말로 “할 수 있다. 가능하다. 능력 있다”는 뜻입니다. 맨 뒤에 나오는 “keimevnh”(케이마엔)은 “만들어지다. 세워지다. 지명되다”입니다. “세상의 빛”은 능력입니다. “뒤나타이”, 이 능력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keimevnh”(케이마엔)은 하나님께서 지명해서 세우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도록 하나님께서 지명해서 세워주셨습니다.

본문 15절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출 수 있을 때 비추세요? 등경위에 두세요. 언젠가 우리의 생명의 빛은 꺼지게 마련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때가 있습니다. 할 때 해야 합니다. 어느 때는 도와 주려고 해도 이미 도울 수 없는 상황이 되어있을 때가 있습니다. (종엽이 이야기) 그래서 바울도 경주하는 자처럼 살아있을 때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지난번 우리 집사람이 동창 모임 다녀와서 하는 말이 나중에 보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거예요. 그런데 서로 교회 다닌다고 말을 안 한답니다. 우리 집사람이 사모인줄을 아니까 한사람씩 와서 사실 나도 교회 다녀, 집사야 그런 다는 겁니다. 그냥 밝히면 그 사람들 속에 끼어서 불편한 거예요. 술도 먹고 해야 되는데 영 빛이 안될 것 같으니까 그냥 말 안 하는 거예요. 우리가 빛이라면 어두운데 감춰 놓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이 됩니다. 비추세요. 빛이 흘러 나가도록 감추지 마세요.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영광된 것인데 감춥니까? 세상 자랑은 다 헛된 것입니다(약 4:16) 히 3: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입니다. “그의 집”은 성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겁니다.

스코틀랜드 주일학교에서 한 선생님이 장난꾸러기 소년만 모인 반의 담임을 자청하고 나섰습니다. 그 중에 보비라는 소년은 다룰 수 없는 골칫거리 아이였습니다. 여선생님이 보비의 집을 방문했을 때 보비는 씻지 않아 땟물이 흐르는 얼굴에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아 헝클어져 있었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진흙에 뒹굴어 거의 걸레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선생님은 보비에게 새 옷을 갈아 입히고 교회에 잘 나오도록 부드럽게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보비는 또 더러워졌고 교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선생님은 다시 보비를 방문했습니다. 이미 새 옷은 다 망쳐지고 걸레가 되어 있었습니다. 또 한 벌의 새 옷을 선물하고 잘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보비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선생님은 힘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용기를 잃지 말고 계속해 보십시오.” 하고 격려했습니다. 그 여선생님의 계속적인 노력으로 고삐 풀어진 망아지 같은 이 소년은 나중에 훌륭하게 성장하여 중국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가 바로 로버트 스미슨 선교사입니다. 그는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수백만의 영혼을 주께로 인도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비록 험할지라도 포기하지 맙시다. 이제 주님은 육체로 이 땅에 계시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최선을 다합시다. 충성을 다합시다. 기도하며 합시다. 주님이 함께 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