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눅 5:18-26)

오늘 본문에 중풍병자가 나옵니다. 중풍 병에 걸린 이 사람을 사람들이 침상 그대로 메고 나왔습니다. 스스로 일어나거나 걸을 수 없는 중증환자입니다. 이런 병에 걸려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환자의 심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과 함께 병들면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떠나는 것이 더 슬프고 외로운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이 사람은 비록 중풍 병이 걸리기는 했지만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잘 나갈 때야 주위에 사람이 많겠지요. 그러나 병들어 보세요. 사람이 떠납니다. 싫어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병자나 친구들은 서로를 아끼고, 신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친구들이 하는 행동을 보세요. 보통 사람이 생각하지도 못할 일을 합니다.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장애를 극복해야 합니다.
병든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장애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쉽게 만날만한 환경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떤 일이든 장애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 어려움 없이 뜻을 이루게 된다면 그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강원도 경제를 살린다고 카지노를 만들어 놓았는데요, 다른 사람 노름해서 사람 버려놓고 그 돈으로 잘살면 뭐하겠습니까? 생각의 틀을 바꿔야 합니다. 노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거져 얻으려는 것입니다. 결국은 노름을 해서 망합니다. 혹 돈을 딴다고 해도 이 사람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안됩니다. 돈의 가치를 모릅니다. 땀흘림의 수고를 모릅니다. 잘해보려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병자의 친구들이 주변 환경을 탓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면, 내일 오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면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남의 집을 헐었을 때, 책임은 누가 질 것이며, 변상은 누가 할 것입니까? 먼지가 날 것을 염려해서 지붕을 뜯지 않았다면 병을 고칠 수 있었을까요? 집수리 비용을 누가 낼 건가? 이러면서 토론하고 싸우고 있다면 지붕을 뜯지 못했을 겁니다. 희생이 없이는 결과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먼지를 뒤집어 써야했고, 누군가가 수리비용을 지불해야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친구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친구들은 모두 하나만을 생각했습니다. 이 친구를 살려야 한다.

예수 앞에 가야 합니다.
18절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어디로 갑니까?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 같지만 예수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께 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지 못하면 아무 기적도 능력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라가는데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주님께 데려가듯이 나도 가야하고 우리 민족도 주님께 메고 가고 세계를 주님께 메고 나아가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자녀들도 주님께, 친구도 주님께로 우리의 이웃도 주님께로 우리의 집안 모두를 안고, 이고, 메고 중풍병자와 같이 예수 안에 들어갑시다. 그러면 마음에 중풍병, 가정에 중풍병,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풍병. 못쓰고 버림받은 인생도 살아나고 희망을 찾고, 쓸모 없는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 되고 능력 있는 사람되어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20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친구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가면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행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병자를 대신하여 예수님께 나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이 자기 하인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 왔었습니다. 나사로는 누이들이 예수님께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셨습니다. 환자 본인의 믿음이 강조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친구입니다. 친구는 누구입니까? 이런 어려움이 있을 때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미 이 친구의 믿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상관이 없는데 이런 수고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사정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실 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20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의 병은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근본은 죄입니다. 이것을 용서받는다면 죄의 결과로 인한 육체의 질병은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솔직히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병 고침을 할 수 있느냐 할 때 저는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사님 참 믿음이 없으십니다. 그렇게 말씀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예수님처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입니다. 그 누구도 이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모든 종교는 다 거짓된 것이며 그들의 교주 또한 거짓입니다.

옛날 한국에 김익두 목사님이 그랬다고 하잖아요. 교회 바로 앞집에 앉은뱅이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베드로, 요한도 고쳤는데 나도 한번 고쳐 봐야지!” 그리고는 열심히 기도를 하고 하루는 새벽기도 마치고 사람들 없는 틈을 타서 나가서 “일어나 걸으라!”고 하면서 머리채를 잡아 당겼는데 그만 머리카락만 한 줌 빠지고 못 일어났데요. 병자가 아프다고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창피해서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죄가 사해지니까 중풍병자가 낳았습니다. 이 기적이 일어날 때 예수님 바로 앞에 앉은 사람들이었는데요. 이들은 색안경을 끼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서기관들입니다. 서기관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학자들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열심은 또한 어느 정도였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그곳에서 예수님과 마주 앉을 정도였으면 아마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부지런을 떨고 왔어야 합니다. 앞자리를 차지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부지런했고 열심을 냈을까요? 그런데 이들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었지요.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 마음을 열고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예수를 책잡을까? 이런 비판적인 태도로 와 앉아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생각과 다를 때 즉각적으로 비판을 하였습니다.
본문 21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합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 때문에 예수를 못 믿었습니다. 조금만 겸손했더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1절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옛 개정성경에서는 “참람하다”는 말로 번역했었습니다. 이 말은 “블라스페미아”로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계 13:6). 예수께서 죄를 사하실 때(막 2:7), 메시야 임을 주장하실 때(막 14:64), 하나님과 동등하고 주장하실 때(요 10:30)에 신성모독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형 역시 이 죄목으로 고소당하신 것입니다(막 14:64).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교만이 문제입니다.

옛 성현은 마흔을 가리켜 ‘불혹(不惑)’이라 했습니다. 마흔이 되면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삶과 일상을 단단히 간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즘은 마흔이 되어도 흔들리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세상 유혹에 흔들리고 시대가 빨리지나가서 그런지 40대가 불안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다른 것에 유혹을 받지 않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마흔이 되면 그만큼 자기 철학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 고집이 있는 겁니다. 이것이 불혹이 세상에 유혹되지 말라는 것이지 예수께 문을 닫아놓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께 마음을 여세요. 마음을 열고 아이들을 보세요. 마음을 열고 이웃을 보세요. 마음을 열고 세계를 보세요.

제가 여러 번 러시아에 갔었습니다. 2005년도 갈 때는 공항심사대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별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여권 가지고 가더니 인터폴에 검사해 본다고 하더니 나타나질 안는 겁니다. 이렇다 저렇다 말도 안 해주고 1시간을 세워두는 것입니다. 함께 비행기 타고 온 사람들은 다 나갔고 또 다른 비행기가 왔습니다. 밖에 짐도 걱정입니다. 그러나 러시아 사람들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너 어디한번 골탕을 먹어봐라 하는 심정입니다.
처음에 이 사람들이 공산국가 만들려고 불만 세력이 일어났습니다. 자기들이 사회주의 건설을 하여 잘사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자기들의 철학 때문에 하나님도 버렸습니다. 이 나라들이 어떤 나라였습니까? 소련이 100% 기독교국가였고, 폴란드,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동독 다 100% 기독교국가였어요.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동독이 본산지인데, 공산주의가 들어갔습니다. 왜 들어갔습니까? 세계적인 교회가 있고, 세계적인 오르간이 있고, 세계적인 예배가 있는데 왜 공산주의가 들어갔습니까? 교인들이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고 불평불만만 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는 불평불만만 하면 문을 열어놓는 거예요. 이 사람들 다 모아서 공산주의 만들었습니다. 교회생활이, 신앙이 무너지게 되고 감사가 떠나가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져 버릴 때 그 자리에는 어둠의 세력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23절에서 서기관들에게 뭐라고 질문을 하셨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여러분! 어느 것이 쉬워요? 분명히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이 쉬울 것입니다. 왜냐 하면이요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그 결과가 일어났는지, 안 났는지 표시가 안 나지만, 일어나 걸어가라고 했는데 안 일어나면, 김익두 목사님처럼 금방 들통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사실은 죄 사함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24절을 보면,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 “인자”라는 말이 14번 나오는데요. 막 8:29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이후부터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14번 중에 12번이 막 8:29절 이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 24절 인자(호 휘오스 안드로푸)는 누가복음의 핵심사상으로 34회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요 12:34를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 자신을 사용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원문상의 의미로는 人子(사람의 아들)아들을 의미하지만 이 말은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세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문자 적으로는 ‘인자’이지만 의미상으로는 다니엘이 이상 중에 본 ‘인자’가 장차 올 메시야였던 것입니다(단 7:13). 인자로 오신 목적은 예수님의 고난을 우리의 죄를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다 주시는 것입니다.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틀러가 그랬고 나폴레옹이 그랬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35세의 나이에 스스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대관식 때 교황 비오 7세에게서 왕관을 뺏어 스스로 쓰고 황후인 조세핀에게도 씌워 줄 정도로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하면서 정신력으로 한때 전 유럽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정신력이며 물질의 기여도는 10대 1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얼마나 유럽을 평정했으면 1808년에 나폴레옹에게 쫓겨 도망간 포르투갈의 돈 페드로 황태자가 브라질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1888년에 독립 선언을 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그곳 세력가들을 쫓아내고 1969년에 브라질을 세웁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에게 패하고 도망간 사람들이 세운 나라가 세계에서 5번째로 큰 브라질입니다. 나폴레옹의 불똥이 브라질까지 틴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당시에 유럽의 천하무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영국이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 지중해 건너편에 있어 나폴레옹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말을 잘 듣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영국을 길들이기 위해서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립니다. 유럽 국가로 하여금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일제히 금지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이 명령 때문에 자신들이 죽게된 것입니다. 결국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맙니다. 이로 인하여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도시와 곡식에 불을 질러, 프랑스군이 손대지 못하게 하고 시베리아로 깊숙이 달아났습니다.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만 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러시아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결국 퇴각하게 됩니다. 이 순간을 기다렸던 러시아군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가 공격하여 멸망시켰습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 지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실수는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이라고 했습니다. 이 당시 러시아는 정교회(기독교) 국가입니다. 하나님 믿는 나라를 쳐들어갔다가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망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결국은 멸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본문 25절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6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병자를 데리고 주님께 나아가는 일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희생을 감수하며 어려움이 이겨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부족함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 때는 그 뿐입니다. 그냥 가난한 것입니다. 그냥 불쌍한 것입니다. 그냥 장애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달라집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가난함, 우리의 장애를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러한 축복이 오늘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나오신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