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에서 건지실 것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5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6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7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시 91:1-7)

한국 속담에 ‘업친데 덥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더 사실적으로 표현한 속담이 있습니다. “염병에 까마귀 소리”라는 말입니다. 고치지 못할 병에 재수 없이 까마귀소리까지 들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습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에게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이와 같이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소망을 두면 다릅니다. 기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기쁜 소리가 성경에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오늘도 이 복음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9년 6월 11일, 세계보건기구가 H1N1 인플루엔자의 전염병 경보 수준을 대유행으로 격상했습니다. 이러한 전염병의 대유행 선언은 1968년 이후 41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1918년 인플루엔자는 스페인 독감으로 알려진 유행성 독감의 일종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유행하는 동안 5,000만 명에서 약 1억 명의 감염자가 발생하여 사망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1914년부터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으니까, 4년 4개월 동안의 전쟁은 1918년에 발생한 전염병 때문에 마쳤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습니다.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죽으니까요.
인류 역사상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사건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제1차 세계대전 때 4년 4개월 동안 약 900만 명이 전쟁으로 죽었는데 인플루엔자에 걸려 1년 동안 죽은 사람이 5,000만 명 – 1억만 명이니까 전쟁으로 사망 한 것 보다 전염병에 결려 죽은 사람이 약 10배 이상 많은 겁니다.
하나님은 보다 못해 전염병을 보내셨는지 모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의 주요 연합국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주요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웠습니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는 모두 기독교 국가입니다. 마찬가지로 독일에서 루터가 나왔고 개신교가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민족적인 감정 때문에 싸웠어요.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생명을 15년 동안 연장 받았습니다(왕하 20:1-11). 그가 회복된 후에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외견상으로는 히스기야를 축하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를 설득하여 앗수르 세력에 대항할 비밀동행을 맺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주의가 산만한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에게 그의 창고를 모두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사야는 그런 그의 행동을 크게 책망했습니다(왕하 20:12-19). 앗수르는 유다에게 강제로 과중한 조공을 요구하였고 예루살렘을 파괴하기로 결정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전염병을 보내어 하룻밤에 18만 5천 명의 앗수르 군을 죽게 함으로써 그 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전염병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재앙으로 나옵니다. 물론 그러한 관점에서만 기록된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심판하시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전쟁(칼)과 기근과 전염병입니다. 우리는 혹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는 구약의 상황과는 다를 지라도 이러한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는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회개할 것이 있는지 우리 자신들을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사명을 받고 애굽의 바로를 만나서 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출 5:3)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애굽을 떠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전염병으로 죽이실 것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애굽의 바로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 더 두려운 것입니다. 모세는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와 맞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의 정탐을 두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아름다운 땅과 과실은 탐나지만 그곳에 자신들이 이길 수 없는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실망감은 곧 하나님이 이 백성에게 실망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도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더 이상 이 민족에게 더 무엇을 보여 주어야 한단 말인가?”하는 하나님의 실망이 어찌나 크셨던지 민수기 14:11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 하겠느냐 …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하시면서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 14:12)고 모세에게 제안합니다. 이제 그들은 전염병으로 다 죽여버리고 다른 크고 강한 나라를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간청으로 이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죄에 대한 벌로 전염병을 보내십니다.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무리하게 인구조사를 하여 하나님께 범죄 합니다. 다윗은 이 일을 후회하면서 말하기를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삼하 24:10) 고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통계조사를 잘 했는데 왜 이것이 하나님께 범죄가 되었는지 언 듯 이해가 안됩니다. 우리는 24절에 요압장군의 보고를 통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전쟁을 위해서 인구조사를 했다는 겁니다.
성경의 민수기는 말 그대로 인구를 조사한 책입니다.
민 1:1-2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라고 말합니다. 2차 인구조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26:1-2).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했습니다. 자기의 생각에 의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 한다고 일을 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일은 안됩니다.

다윗의 이 불신앙으로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보내 세 가지 재앙의 벌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하는지라”(삼하 24:13) 다윗은 고민 끝에 사흘 동안 전염병을 선택했습니다. 그 때 죽은 사람이 15절 “칠만 명이라” 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면서 차라리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삼하 24:17) 자신의 집을 벌해달라고 통곡합니다. 이 양 무리가 무엇을 알기에, 또 무슨 죄를 지었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징벌에 놓일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다 이해가 안되실 것입니다. 왕의 범죄로 인하여 백성이 이유 없이 죽게된다는 사실을,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적어도 그랬습니다.

오늘 시편 91편은 이런 경험을 똑똑히 한 다윗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는 전염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전염병이 왜 백성에게 일어났는지를 알았습니다. 3절 “심한 전염병”(데베르 후오트)은 치명적인 전염병입니다.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자신의 불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전염병에서 벗어나려면
첫째, 본문 1절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하나님의 그늘 아래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벗어나면 안돼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그늘에서 사는 것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그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CF에 “집 나가면 개 고생이다”라는 카피가 있었습니다. 집 나가면 개 고생으로 끝나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품이 얼마나 좋습니까. 어머니의 품 같은 곳 아닙니까.

둘째, 본문 2절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7절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셋째, 여호사밧 왕이 기도하기를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대하 20:9) 했습니다. 교회에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요즘은 백신에만 의지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전염병이 한번 돌면 백신이 없고 치료제가 없었으니까 그냥 속수 무책으로 죽는 겁니다.
청일전쟁 후 심한 전염병이 서울에서 번져 나갔습니다. 이 때 두 분의 의사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닥터 윌리암 제임스 홀(미국 감리교 해외 선교회 소속)입니다. 제임스 홀은 30세에 조선에 온 선교사입니다. 그가 조선에 올 수 있었던 것은 17살 때(1877년 1월) 목수 견습공으로 일할 때 심한 기침과 열이 계속되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홀은 “이제 나에게 주어진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공부를 하기로 결심을 하고 당시 교실이 하나밖에 없던 그렌 뷰엘 학교에서 공부하고 교사자격증을 따서 2년 간 교사 생활을 합니다. 그는 그밖에 생명보험회사 세일즈맨으로 일해서 번 돈을 가지고 1885년에 온타리오주에 있는 퀸즈 대학교 의과 대학을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대학에서 선교회를 접하고 조선까지 오게됩니다. 처음 부산항에 도착하여 인천항으로 들어와 서울까지 오게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선교지인 평양에 이르게 됩니다.
당시 영국 영사관에서 철수를 권고했으나(당시 미국 영사관은 없었음) 의사로서 죽어나가는 환자들을 버리고 갈 수 없어 환자를 치료하다 과로와 전염병에 걸려 자신이 죽었습니다. 당시 평양은 외국인 금지 구역이었습니다. 자신은 죽었지만 1897년 2월 평양에서 개원한 감리교병원. 일명 기흘병원(홀 기념병원)이 세워졌습니다. 남편을 잃은 아내 닥터 로제타 홀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혼자서 나중에 서울로 와서 ‘동대문 부인 병원’(현 이대 부속병원)을 세우고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여자의학 전문학교’를 열었습니다. 이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파송한 미국 못지 않은 의료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덕분입니다. 복음 때문입니다. 주님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 버리면 안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신종 인플레인자만 위험한 전염병이 아닙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세계적으로 약 20억 명이 비만이라고 추정합니다. 지구 인구의 3분의 1이 비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은 알코올, 마약, 먹기 중독 등 3대 중독자의 나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미국 성인의 65%중에 6∼19세 청소년의 비만이 15%입니다. 비만은 고혈압, 심장병, 동맥경화증, 당뇨병의 원인이 되고 지방을 제외한 다른 영양소의 부족으로 각종 질병에 취약합니다. WHO는 비만을 악성 전염병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국제연합 산하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8억 명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으며, 매일 25,000명 이상의 사람이 기아로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1초에 다섯 명 꼴의 어린이가 기아로 굶어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 아무리 남의 큰 걱정이라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관계없는 일은 대단하지 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의 염장(염통) 썩는 것 보다 내 손톱 썩는 것이 아프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남의 아픔을 다 알고 함께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힘써야 합니다. 멀리만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째요, 또 다음이요 오직 이 한 법만을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낭비하지 맙시다. 주님은 그런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시 91:14)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에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의 이름을 아십니다. 나를 부르십니다.

저는 상이라는 것을 타본 적이 없어 제 이름을 부르는 경험을 별로 해 보지 못했습니다. 강수경 집사님은 어머님 말씀을 들으니까 어려서 공부를 너무 잘해서 학교에서 항상 맨 앞줄에 서 있었데요. 상타러 빨리 뛰어 나가야 하니까요.
저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한번 있었습니다. 군대 훈련소에서 훈련을 다 받고 퇴소식 하는데 제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상을 준 것은 아니구요, 퇴소식을 마치기도 전에 저를 장성이 타는 지프차에 태워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건 상보다 더 대단한 영광입니다. 많은 동료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그렇게 나왔습니다. 아마 동료들은 분명히 대단한 집 아들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감동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나를 높여 주기 위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초대입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 이름이 불려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부르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