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단의 사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삼상 20:17)

마음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벗 하나 있었으면 / 도종환>

성경에 이런 벗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정치의 세계에는 마음이란 없고 오로지 머리만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과 다윗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머리가 아닌 마음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은 다윗을 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천년동안 성경역사에서 눈길과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 요나단입니다. 이 땅에 남긴 것이라곤 ‘절름발이 아들’ 뿐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실천한 사람입니다. 오늘 ‘요나단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빠지시기를 바랍니다.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우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중국 제(齊)나라에서, 포숙은 자본을 대고 관중은 경영을 담당하기로 하고 동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관중이 이익금을 혼자 독차지하였습니다.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가난한 탓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하였습니다. 또 함께 전쟁에 나가서는 관중이 3번이나 도망을 하였는데도 포숙은 그를 비겁한 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그를 대변하였습니다. 포숙은 관중을 끝까지 믿어 그를 믿어 주었고, 관중도 훗날 포숙을 가리켜 “나를 낳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아는 것은 오직 포숙뿐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동양에서는 우정을 이야기할 때 보통 관중과 포숙의 우정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 우정하면 다윗과 요나단을 이야기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은 성도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사랑을 예표합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있는 사랑을 알면 그리스도와 성도사이에 있어야 될 사랑이 무엇인가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여호와께서 주셨다”는 뜻입니다. 요나단은 그의 이름답게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이 누구입니까 사울 왕의 장자입니다. 왕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울 왕 다음에 왕이 될 제1순위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왕자라는 자리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왕자의 자리보다 소중한 것은 사랑하는 친구 다윗이었습니다. 왕자의 자리도 그 사랑을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요나단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이었고 천명의 군사를 거느린 군대장관이었습니다. 그의 주둔지역은 기브아였습니다. 기브아는 당시에 제일 전투가 치열했던 블레셋과 마주 대한 진지입니다.
한번은 병기 든 소년과 함께 적진에 들어갔습니다. 블레셋군의 주둔지역에서 20명을 도륙했습니다. 한 나라의 왕자가 제일 위험한 전투를 한 것입니다. 그는 전방에 있었습니다. 그는 블레셋군의 혼전으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때에 남긴 유명한 말이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12절에도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관계는 무엇이 있습니까 바울이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관계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라를 사랑했습니다.
요나단은 탈선한 아버지 때문에 전쟁에 나갔습니다. 길보아산에서 아버지 사울과 함께 전사합니다. 요나단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버지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버지 사울이 폐역한 왕이었지만 그는 반역을 꿈꾸지 않습니다. 아들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자기의 역할을 다한 사람입니다.

셋째,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본문에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라고 했습니다. 삼상 20:4절에서는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 18:1) 여기 잘 보세요. 다윗이 먼저 요나단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요나단이 먼저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또 삼상 18:3에서 “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다윗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요나단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요나단은 왕자입니다. 다윗은 목동에 불과합니다. 요나단이 입고 있던 군복을 다윗에게 입혀준다는 것은 왕자의 복장을 다윗에 준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왕권도 요나단은 다윗에 준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주인은 종에게 비밀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종이 아닌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요 12:15) 예수님은 주인이나 스승의 관계를 뛰어넘어 속마음을 주고받는 친구의 관계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무엇이든 하신 분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나 할만한 그런 사랑을 요나단은 다윗을 위하여 한 것입니다. 친구 다윗을 마치 자기의 분신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요나단의 이런 사랑이 있었기에 다윗도 사울을 두 번씩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한 사람의 사랑은 또 다른 사람에게 이동됩니다. 사랑의 바이러스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그토록 사랑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첫째, 권력을 뛰어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다윗은 사울을 이어 새로운 왕이 되어야 할 촉망받는 차세대 지도자입니다. 사무엘에게 이미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시기하고 죽이려는 현재의 왕 사울의 장자입니다. 요나단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은 자기 아버지의 권력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아니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해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이 욕심이 있다면 지금 왕권을 가지고 다윗과 한판 붙어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다윗을 끝까지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그는 힘센 아버지보다는 아무런 힘도 없는 다윗의 편을 들었습니다. 사울인 아버지가 볼 때는 한심한 놈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자신을 완전히 비운 사람입니다.

둘째, 혈연을 뛰어넘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끈끈한 혈연 관계를 뛰어넘었습니다. 물론 다윗은 사울의 사위입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매형과 매제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다윗을 사위로 삼은 것은 순전히 정략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비록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다윗을 사위로 삼기는 했지만, 사울이 다윗을 사위로 삼은 것은, 이 사실을 올무로 삼아 블레셋 사람이 다윗을 쳐서 죽이도록 하려는 사울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삼상 18:20-21). 요나단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은 자신과 피 한 방울이 섞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끝까지 아버지 편에 설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친구 사이를 이용해서 아버지를 이롭게 하고 자기가 왕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의 사랑은 혈연관계를 뛰어넘었습니다. 적어도 요나단의 입장에서 보면, 물이 피보다 진했습니다.

셋째, 연륜을 뛰어넘었습니다.
요나단이 죽었을 때에 다윗이 요나단을 형이라고 불렀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삼하 1:26)
다윗은 요나단을 형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다윗이 좀 어렸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설령 한 살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서열을 매우 중시했던 옛날 유대인에게는 한 살의 나이 차이도 결코 적은 차이가 아닙니다. 아마도 한 살 이상의 차이는 났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다윗을 동생이라고 우습게 생각하여 대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때 비로소 사랑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어떻게 그런 위대한 사랑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요나단”(여호와께서 주심)의 이름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칼과 전쟁을 통해서라도 빼앗는 것입니다. 피를 흘리게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게 합니다. 의와 평화를 위하여 자기를 헌신할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2:13) 라고 하셨습니다.

미국의 정신적인 스승 중의 한 사람이었던 에머슨은 “친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요나단은 자기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내가 다 가지려고 하는 사람만 사는 세상에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하세요. 사랑을 하면 행복해 집니다. 사랑을 하면 세상에 모든 일에 기쁨이 넘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소망이 있습니다. 사랑을 기다리기보다는 사랑을 찾아 나서보세요. 요나단처럼 먼저 다윗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예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먼저 사랑함같이 복음을 먼저 받은 우리가 먼저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남자들끼리는 잘 안 안습니다. 그렇다고 여자는 자주 껴안는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선교지에 가면 가끔 껴안습니다. 공항에 도착해서 반갑게 껴안습니다. 저는 이 재미 때문에 선교지에 자꾸만 가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도 한번 껴안아 보길 원합니다. 축도 하기 전에 시간을 드릴 테니까 남자 분들끼리, 여자 분들끼리 한번 껴안아 보세요. 잘 보고 껴안으세요. 바뀌면 안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안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