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함성-자블라니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계 14:1-5)

지난 6월 25일은 한국전쟁이 발발(1950.6.25)한지 60년이 되는 날입니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의 연장선에서 일어났습니다. 전쟁 발발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의 사전 모의로 일어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특히 당시 소련의 전략적인 계획에 의해서 발생했습니다. 소련은 미국의 막강한 힘을 다른 곳에 쏟아 붇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국력이 약화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내심 중국의 부강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은 소련 입장에서는 더 좋은 기회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싸우면 자신들은 앉아서 손도 안대고 코푸는 격입니다. 그래서 한국전쟁에 미국과 중국이 싸우게 만들어서 소련은 강대국의 미국과 중국의 국력을 약화시키고 화약고를 다른 대로 돌려 자신들의 나라를 방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김일성이 말려들었고 소련의 좋은 먹이 감이 된 것입니다. 김일성의 야욕이 부른 동족상잔입니다. 소련 스탈린에게 남침을 도와 달라고 무려 48번이나 요청했습니다. 북한은 20만 명의 병사, 대한민국은 절반인 10만 명, 탱크 242대 우리는 한 대도 없었습니다. 전투기는 북한이 211대인데 우리는 연습용 비행기 22대가 다였습니다. 상대가 안 되는 전쟁입니다.
여러분! 힘이 있다고 무력을 사용합니까? 그것도 같은 동족에게 총을 겨눕니까? 만일 소련에서 먼저 부추겨도 절대 안 된다고 방어를 해야 합니다. 언제나 악은 늘 두 가지 조건이 성립이 되어야 가능한 것을 봅니다. 악한 사람이 있어서 그것을 이용하려는 무리들에게 늘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야욕 때문입니다. 힘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남을 비웃고 넘어뜨릴 수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진 사람입니다. 돈이든 지식이든 뭐든지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을 가르치는 종교입니까? 기독교는 무소유를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소유가 남을 죽이는데 사용된다면 무소유가 났습니다. 기독교는 소유하되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소유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축복이란 그 소유를 나눌 때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라는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과 성도라는 이름은 ‘구별된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르게 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구별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구별된 존재임을 많이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했습니다.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하늘에 기록된 자가 구별된 자입니다.
고전 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샀다고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으로 팔렸습니다. 나의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주어진 것입니다.

어제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골을 넣었습니다. 사람들의 함성이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옵니다. 우리 아파트 위에서는 발을 구르고 난리도 아닙니다. 그런 소리를 우리가 언제 들어보겠습니까? 민족이 하나되어 외치는 소리, 정말 감격적입니다. 빼앗아 갈 때는 눈물과 고통과 비참함이 있지만 나눌 때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땅에 다시는 고통의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오는, 기쁨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번 월드컵 공인구가 ‘자블라니’라는 공입니다. 공 이름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잡을 라나?, 잡을 래면 잡아봐’ 뭐 그런 뜻처럼 들립니다. 자블라니는 아디다스가 제작한 공으로 남아공 공식언어인 줄루어로 ‘축제를 위하여’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나라 사람들은 그 공에 대해서 말하기를 동네 슈퍼마켓에서 파는 공 같다고 했습니다. 우습게만 여긴 것입니다. 그런 나라들은 16강에도 못 오르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공을 쉽게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갑자기 익숙해지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 세트피스 중심으로 연습을 한 것입니다. 힘을 너무 넣어서 차면 자꾸 뜨니까 힘을 빼고 차는 연습을 많이 한 것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골이 약속된 세트피스에서 절반이 나왔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성도라는 말과 또 유난히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나팔 소리, 큰 음성(우렛소리)입니다(계 4:1, 5, 5:2, 11, 12, 6:1, 7:10, 5 11:12, 15 등) 계 10:3에는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고 했습니다. 천둥치는 소리 들어 보셨지요? 어떤 때는 연속해서 계속 울리는 때가 잇습니다. 그래도 동시에 울리는 것은 아니고 하나씩 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말씀을 보세요.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고 합니다. 일곱이 동시에 울리는 것입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일곱이라는 숫자는 7도 되지만 완벽한 음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들에 의해 나는 소리입니다.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십사만사천명이 부르는 새 노래입니다. 아마 최고의 교향곡 베토벤의 운명, 헨델의 메시야가 이 소리를 연상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흉내는 내보고 상상은 해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실제 이 소리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막 불어대는 ‘부부젤라’ 소리가 아닙니다. 이 노래는 인류 역사상 제일 아름다운 노래, 제일 웅장한 스케일의 노래입니다.
여러분! 이 악단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이 노래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대학을 나와도 안됩니다. 레슨을 많이 받아도 안됩니다. 이 노래는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본문 3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배우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된 자들만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악단의 수는 십사만사천 명입니다. 그러나 이 수는 보이는 수가 아닙니다. 영적인 수입니다. 우리는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모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영적 수입니다.
‘뉴욕 필하모니, KBS교향악단’ 이 사람들이라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악단의 지휘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여기 들어가는 겁니다. 대단합니다. 이 악단은 인류 최고의 악단입니다. 다른 데서는 다 떨어져도 됩니다. 그런데 여기는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악단에 반드시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이 악단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본문 4절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남자들이 독신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에 여자의 기준은 없지 않습니까? 영적인 의미에서 성도의 절개를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하는 것을 하나님은 남녀의 관계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간음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까? 아마 인간 관계에 있어서 이보다 더 배신을 하는 행위는 없을 겁니다. 바로 우상 숭배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렘 2:20, 호 2:5). 하나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위입니다. 잠언서는 5, 6, 7장에 걸쳐 음녀에게 빠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육적이든 영적이든 음녀는 우리는 망하게 합니다. 잠 5:5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라고 했습니다. 죽음입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지금도 가정이 왜 망합니까? 이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가정이 파탄나는 것은 음란의 문제입니다.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전 11:2)고 했습니다. 정결해야 신부로 소개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입니다.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3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때로는 복음을 위하여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린양이 그리로 인도해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셋째,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월드컵을 보면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모두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무조건적인 국가관 때문에 하나님께 가는 길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유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혈통이 유태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 어린양에게 속해야 합니다. 어느 정당보다, 이데올로기보다 우선해야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인으로는 일본 사람을 용서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께 속해 있으면 용서해야 됩니다.

넷째, 5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거짓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거짓의 영입니다. 거짓은 사탄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흠이 없는(a[mwmoi:아모모이)”는 ‘흠, 얼룩, 명예롭지 못한 사람, 치욕, 불명예, 결점, 오점’을 뜻하는 모모스(mw’mo”)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생활의 정결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 단어의 이미는 구약성경에서 왔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 흠이 없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성도가 살아갈 때에는 매 순간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시간만이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예배인 것입니다. 삶으로 예배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3-4) 주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받는 진정한 축복은 그리스도 앞에 설 수 있는 흠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새 노래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소리는 2절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엄청난 소리입니다. 대단한 소리입니다. 단순히 큰 소리가 아닙니다. 리듬이 있습니다. 부부젤라 소리가 아닙니다. 이 소리는 파도치는 소리나 폭포수의 소리처럼도 들립니다. 그러나 듣기에 따라서는 관현악기의 소리처럼도 들립니다. 크라이막스 어느 정점에 도달 했을 때는 큰 뇌성처럼 들립니다. 어쨌든 상상할 뿐이지만 이 노랫소리는 대단합니다. 성도의 마지막 승리의 함성입니다. ‘자블라니’ 축제의 함성입니다. ‘자블라니’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십사만사천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이 노래는 승리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기쁨이 충만한 상태에서 부르는 것입니다. 월드컵에서 우승한 정도가 아닙니다. 마지막 승리의 함성 ‘자블라니’ 입니다. 이 노랫소리를 부르는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