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릅니다. 디모데는 에베소교회 목회자이며,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사역적 호칭이 아닌 존재론적 호칭으로 부릅니다. 기능적 호칭이 아닌 인격적 호칭으로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역과 기능만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그런 부름을 은근히 좋아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목사보다 박사라는 말을 더 듣기 좋아하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선교사, 목사라는 말도 사실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도 직분과 직책의 부름입니다. 존재론적 부름이 아닙니다. 디모데도 에베소교회 목회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동역자나 목회자나 선교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복음으로 낳았다고 했는데 디모데도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아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 아들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디모데에게 사역자 이상의 존재가 되라는 충고입니다. 유능한 사역의 기술자보다 먼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역이 먼저가 아니라 인물이 먼저입니다. 먼저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축복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안되면 다 소용없습니다.
조금 잘 사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생은 어느 날 덧없이 가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화살 같은 것입니다. 들의 꽃이 얼마나 빨리 집니까? 들의 꽃과 같은 존재입니다. 뭐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육신의 인간은 별것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사나 죽으나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을 빼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그 말이 맡습니다.
제가 병원가서 머리 촬영 한적 있지 않습니까? 저는 무서운 공포영화 잘 못 봅니다. 치과에 갈 때도 우리 집사람 손잡고 가야합니다. 그런데 머리 촬영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MRI 레이저 광선으로 찍으니까 내가 아닙니다. 그 머리, 얼굴 모양이 아니라 제가 끔찍하게 여기던 그 해골 모습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게 나입니다. 가장 혐오스러운 모습 해골이 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싸매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해골에 불과합니다.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 103:14-15)

우리가 포장할 것은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더 추해질 뿐입니다. 회칠한 무덤이 됩니다. 사람들은 멋지게 보이려고 회칠을 했지만 추하게 보여질 뿐입니다. 자연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름답습니다. 사람에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평균 자살 시도를 960명이 한답니다. 이중에 35명이 사망한답니다. 2008년 자살사망자는 12,858명으로 전년 대비 5.6%나 늘어났고 이는 하루 평균 35.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셈입니다. 10년 전인 1998년 자살자 8천622명과 비교하면 49%나 늘어난 수치입니다. 한국자살예방협회의 기준에 따르면 연예인이나 사회 유명인이 자살해 보도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후속 자살율이 14.3배 증가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살 안 합니다. 못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좀 어려우면 죽지 뭐 하러 사냐고 합니다. 이길 힘과 능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두들겨 보라. 또 두들겨 보라, 열릴 것이다. 또 찾아 보라. 그러면 찾게될 것이다.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비전을 주십니다.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더 나은 사람을 만든다고 하십니다. 고난을 통해서 겸손을 배웁니다. 진리를 깨닫습니다.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만들어집니다. 고난 없이는 진주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욥에게 고난이 찾아옵니다. 왜 이런 고난이 찾아왔는지 우리는 알지만 욥은 알 수 없었습니다. 사탄은 친구들을 보내 네가 무슨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있으니까 이런 고난이 찾아 왔겠지 아무 이유도 없이 고난이 오겠느냐고 합니다. 분명히 잘난 채 하며 살았지만 숨어서 죄지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사탄의 참소 와 침탈로 절망의 심연을 배회하며 눈먼 사자처럼 포효하는 슬픈 사람 욥을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 38:1-3)

욥은 나름대로 교만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 천둥소리가운데 말씀하셨지만 욥은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낮추는 것하고, 하나님 없이 낮추는 것 하고는 다릅니다. 사람들이 혼동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무소유도 가치가 있는 것이며, 많이 가진 것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는 다 소용 없습니다. 가진들, 갖지 못한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9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10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11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욥 40:9-11)

하나님은 욥의 피 흘리는 영혼을 어루만지시며 위엄(Majesty)과 존귀(Honor)와 영광(Glory)과 영화(Splendor)를 그의 상처 난 인격을 어루만져 주시고 다시 옷 입혀 주셨습니다. 우리는 욥이 고난 후에 물질 축복과 이생의 축복을 더 받은 것만 이야기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욥이 달라졌습니다. 더 겸손해 진 것입니다. 없는 자를 이해하였고 고통을 당하는 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매우 큰 고통을 당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소중한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다 귀한 것입니다. 쓸데없는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고통과 고난과 어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밖에서는 그냥 고통일 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링컨은 “하나님이 사람과 같은 존재를 하루살이로 만들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고 했습니다.

본문에 “너 하나님의 사람아!” 부를 때 앞에 한 단어가 더 나옵니다. “오직(알라)”입니다. 알라는 유일한 것입니다. 하나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이 이슬람에서는 신을 가리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똑같이 하나님이라는 말로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약간 다르게 부릅니다. 기독교에서는 ‘알라’ 이슬람에서는 ‘아울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충돌을 피할 수 있었는데 말레이시아에는 발음이 같아 이슬람에서 기독교가 이것을 사용하는 것을 문제삼고 핍박을 합니다.
중국에서 하나님이라는 말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말은 ‘쌍띠’입니다. 이 단어는 사실 제우스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중국에서 활동한 선교사 였는데 그곳에서 한약장수였던 이응찬을 만납니다. 그리고 처음 조선말(한글)로 번역된 성경,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번역합니다. 1885년 『예수성교젼서』에 신약성경을 완성합니다. 이 성경에 처음으로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이 있습니다. 이 때는 한글에 띄어쓰기가 없었습니다. 모든 단어가 다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주, 예수)라는 말이 나오면 앞에 한 칸씩 띄어썼습니다.
이것을 대두법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대두법은 옛날에 최고의 경의를 표해야 하는 왕에게만 적용하던 것입니다. 로스선교사가 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 이응찬이 한 것입니다. 로스 선교사에게 이것을 말했을 때 로스는 조선의 이 문화를 수용한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는 왕을 능가하는 경의를 표기를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유일하다는 뜻도 되지만 하나님만 믿는 사람, 하나님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제일입니다. 이 존재론적인 것을 알면 다 안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 확인되어야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사명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 하면 바로 존재에서 나옵니다. 이단에게 넘어가고 사탄에게 넘어가는 것은 자기 존재를 모르는 겁니다. 50년 전에 러시아의 한 여인이 69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것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대단한 것입니다.

중국 춘추 시대에 개자추(介子推)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진(晉)나라 문공(文公)과 함께 19년 동안 함께 숨어살았습니다. 문공이 망명을 갈 때 문공을 살리기 위해 사냥하여 잡은 고기라고 속이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탕을 끌여 주었습니다. 문공은 나중에 개자추의 허벅지 살임을 알고 눈물을 한없이 흘렸습니다. 19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문공이 왕이 된 후 개자추는 산 속에 들어가 숨어살았습니다. 벼슬자리를 주려고 별 공을 다 들여도 개자추를 데려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개자추는 오지 않고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문공은 산에다 불을 지르면 개자추가 나오겠지 하고 온 산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나 개자추는 나오지 않았고 어머니와 불타 죽었습니다. 이것이 한식의 유래입니다. 산 사람들이 더운밥을 먹기 미안하여 찬밥을 먹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인물은 인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개자추만도 못한 충성과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사람이 확인되는 순간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한 때 서구에서는 모라비안들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모라비안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존재감이 얼마나 확실히 나타나느냐, 그들의 선교형태에서 잘 나타납니다. 심지어는 선교하고 전도하기 위해서 자청하여 노예 선을 타기도 했습니다. 이 행렬이 줄을 서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노예 선은 평생 바다에서 노 젖다가 죽는 겁니다. 그런데 왜 노예 선을 타느냐 그곳에 있는 사람들 전도하려고 탑니다. 이런 모라비안의 열심을 보고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시를 쓴 존 뉴톤(J. Newton 1779년)을 회개하게 만듭니다. 뉴톤은 노예상이었습니다. 인신매매 범입니다. 모라비안을 살린 것은 진젠도르프였습니다. 자기의 영지를 다 팔아서 모라비안들을 멸절시키려는 구교의 박해에서 구해냈습니다. 모라비안들은 노예선만 탄 것이 아닙니다. 전 미국을 돌아다녔습니다. 미국 전도여행에서 좌절하고 돌아오는 웨슬리 형제에게 돌아오는 배에서 위로하였습니다. 서구의 기독교 대 각성운동의 주역인 D.L 무디를 전도했습니다. 무디는 대학생 선교운동을 일으켜 1901년-1909년까지 300명의 대학생 선교사를 만들어 냅니다. 이중에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목격하고 돌아간 로잔대회장인 존 R. 모트가 있었습니다. 존 모트는 지구를 세 바퀴나 돌 정도로 발로 뛰어다닌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도 YMCA을 세웠습니다. 모트를 도운 사람은 미국의 석유 왕 록펠러입니다. 그는 어머니가 8세 때 죽으면서 한 말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교회에 언제 일찍 와서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십일조를 8살 때부터 했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생선교단체들도 무디와 록펠러의 이 정신을 받은 겁니다.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에서도 61년에 세 명의 간호사를 안수해서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62년에 국가에서 봉제공을 선발해서 외국에 파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독일에 간호사로 간 것도 비슷하지만 사람을 보내서 돈을 벌어오게 한 것이지요. 그 당시에 간 분들은 돈 벌어서 자기가 다 갖지 못했습니다. 나라가 절반이상을 가져갑니다. 그 돈으로 경제성장해야 하니까요. 영국이 300년 이상 걸린 경제성장을 우리는 50년 만에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로 당시에 가려고 하니까 갈 길이 없어서 봉제연습을 했습니다. 그 중에는 박사학위 소지자도 있었습니다. 집에서는 미쳤다고 했습니다. 지하실에 30대의 미싱을 갖다놓고 밤낮으로 연습을 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으니까 바늘에 손이 박히고 피를 보면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래서 국가 시험에 합격해서 간 사람이 30명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