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를 드린 사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21:1-5) 

사람의 진실함과 진정성을 알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의 마지막 길을 살펴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브라질 살바도르에 있는 여섯살 난 선교사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매튜입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열병으로 끙끙 앓더니만 열이 높아가면서 눈의 초점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차에 싣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매튜는 병원으로 가는 동안 엄마 무릎 위에 누워서 허공으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엄마가 손을 잡자 뿌리치고 또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엄마는 어리둥절해서 “매튜야 뭘 잡으려고 하니?” 물었습니다. 매튜는 “예수님 손을 잡으려는 거예요.” 라는 말과 함께 눈을 감았고 혼수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틀 후에 매튜는 세균성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매튜는 비록 여섯 살 밖에 못살았지만 죽음의 순간에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매튜보다는 많이 살았습니다. 많이 산 것이 자랑이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입니다. 우리에게도 어느 날 마지막 순간이 홀연히 온다면 예수의 손을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걸으신 마지막 길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좀더 가깝게는 감람산 가까이 있는 벳바게라는 동네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사실 여기까지 참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은 결코 여리고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시작된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여행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던 그 순간에 예수님을 갈보리를 향해 출발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나이는 33살입니다. 사실 유대 청년의 나이로는 너무 젊습니다. 예수님은 도 닦다가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공부하시다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병에 걸려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18-19)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아시고 가신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도 육신의 삶으로는 이 땅에서 마지막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도망가기는 했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래도 제자들이 많이 훈련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사실 오늘 명령은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두 제자에게 명령하시기를 본문 2-3절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본다면 “정말 거기가면 나귀가 있습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말 그 주인이 그 나귀를 주겠습니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된 일인지 말을 잘 듣습니다. 아마 이 두 제자는 얼마 전에 변화 산에 함께 올라갔던 제자인지 모릅니다. 하늘에서 빛이 비추이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을 목격한 제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어쨌든 이 두 제자들은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주님이 다 아시기 때문에 보내는 것이겠지 하고 갑니다.

그런데 정작 언 듯 이해가 안 되는 되는 것은 나귀의 주인입니다.
나귀는 유대민족이 야생 동물 중 처음으로 길을 드려 가축으로 사랑 받는 유용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저는 천국에 가면 만나보고 싶은 사람도 많고 질문할 것도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나귀주인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도 성도 모릅니다. 그러니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예수께서 나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는가? 환상을 보았는가? 천사가 나타나 알려 주었는가? 편지를 받았는가? 이 메일을 받았는가? 우리는 여러 추측만 할 뿐이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선 듯 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나귀는 군마가 아닙니다. 요즘 자동차로 말하면 소형차입니다. 참 예수님도 이상하십니다. 탈것이 없으면 그냥 들어가시면 되지 굳이 뭘 타고 가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소형차타고 들어가면 이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사람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삼으셔야 하겠다고 광야로 끌어내려고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사람이 어디있겠습까? 개인이든 국가든 하나님 대적하다가는 다 망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을 못 내줍니까? 자기들의 소유물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가지 것 인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내 것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자식도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으면 마구간에 매어 있어야할 나귀 새끼에 불과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주님이 쓰시고 나면 찾아오면 됩니다. 아주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작은 나귀 새끼에 불과하지만 예수님께 드려졌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타고 가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친절이 이처럼 고귀한 목적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받치기 원하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러나 확실치 않기에 드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여러분! 돈벌기 위해서 얼마나 기회를 봅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드릴 기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드리고 싶어도 드릴 것이 없는 때가 있습니다. 있을 때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군마는 아니지만 부끄러워하지 말고 주임이 쓰시겠다고 할 때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크고 소중하기 때문에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이 경우가 더 많겠지요?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을 때 이까짓 것이 무슨 보탬이 되겠나 하면 그 헌금 못합니다. 이까짓 작은 것이 하나님께 드려져서 무슨 유익이 있게나 생각하면 못 드립니다.
우리는 누구나 작은 나귀 새끼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성경타자 프로그램 만들면서 성장아이콘을 표시하는데 처음에는 화분을 하나씩 줍니다. 가입만 하면 누구에게든지 기본으로 제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기본으로 주신 것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심을 수 있는 화분 같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노래하는 재주일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베려하는 마음일수도 있고, 언어능력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 모두에게는 나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용하신 용어는 고대의 왕이 세금을 징수할 때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신하의 소유물에 대해 권리를 가지고 있는 왕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성경은 특별한 것을 드린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것을 드린 이들이 가는 곳인지 모릅니다. 라합은 밧줄을 드렸습니다. 다윗 소년은 물맷돌을 드렸습니다. 모세는 잡고 있던 지팡이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렸을 때 모두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생명을 구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을 때는 그냥 마굿간에 있는 새끼 나귀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타고 갑니다. 귀하게 사용됩니다.

미국에서 19세기 무렵에 구두를 수선하던 한 청년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주일학교 선생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킴벌(Kimvall)입니다. 여러분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다릅니다. 킴벌이 전도한 사람은 여러분이 잘 아는 바로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입니다. 그 후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무디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무디가 전도한 사람은 수를 셀수가 없지만 무디의 설교가 프레드릭 B. 마이어(Frederick B. Meyer)라는 젊은 설교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마이어는 대학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월버 채프만(J. Wilbur Chapman)을 회심시켰습니다. 채프만은 YMCA에서 일했는데 이 때 야구 선수 출신의 빌리 선데이(Billy Sunday)를 노스 캐롤라이나의 찰로테에 부흥강사로 청했습니다. 찰로테 지역의 지도자들은 열심히 생겨 또 다른 운동을 전개했으며 모르드개 함(Mordecai Hamm)이라는 사람을 강사로 초청했습니다. 이 집회에서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이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보스턴의 주일학교 교사 한 사람이 일으키게 될 역사를 우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나귀 하나가 변화시킬 세상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 드려졌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제 일산에 있는 십자성 선교회라는 곳에 다녀왔습니다. 자주 강의를 가는 편인데 그곳 선교회를 세우신분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분이 다른 곳에 계시고 일을 하시기 때문에 제가 만나지를 못하고 제 강의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선교단체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십일조를 가지고 내가 살게 하소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십의 구조를 드리고 십일조를 자기가 살아가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십일조 가지고 살아야 하니까 돈을 많이 벌어야지요.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지금 사업을 잘하고 계시고 약속대로 십의 구조를 하나님께 드린답니다.

내가 먼저 우리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먼저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갑자기 성의 없이 아무대서나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지정하시고, 부르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물건을 살 때 마음을 드는 것을 고르기 위해서 흠이 없는지 잘못된 것은 없는지 살펴봅니다. 한참을 서서 고릅니다.
신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사탄은 사람을 선택할 똑똑하고 약삭빠르고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선택한답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다 가져가고 나머지를 선택하셨답니다. 똑똑하지도 않고, 가진 것도 없고 쓸모 없이 버려진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쓰레기 같은 우리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사실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새끼 나귀는 단지 잠시 빌리자는 것입니다. 구원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3:1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보세요. 예수님은 너희가 성공한다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혹은 너희가 정상에 선다면 구원을 얻으리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만약 네가 견디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만약 네가 마지막까지 매달려 있다면…”, “만약 네가 끝까지 가기만 한다면”이 됩니다.
제법 오래된 한 오렌지주스 TV광고 중에 ‘따봉(TA BOM)’이라는 포르투갈어(브라질)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말이 최고라는 뜻으로 이해하는데 TA(지금, 그래) BOM(좋다)로 적당히 좋다라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지가 적당히 익어야 좋기 때문에 오렌지 주스에는 그렇게 사용하면 최고로 좋다는 표현이 됩니다. 그러나 식당에서 음식 먹고 서비스하는 사람에게 ‘따봉’하면 그저 그렇다 정도로 이해한답니다. 최고로 좋다는 다른 말은 ‘오찌무(OTIMO)’라고 합니다.
‘견디는 것’은 ‘마지막까지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왕 포르투갈어로 예를 들었으니까 브라질 사람들이 잘 쓰는 말하나를 더 배우겠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따봉 보다 더 쉽습니다. 포루투갈어로 결코 포기하지 않고 매달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가라(garra)”라고 합니다. ‘가라’의 원래 뜻은 ‘집게발’을 의미합니다. 낭떠러지에 매달려서도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집게발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낭떨어지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고 버텨야 합니다.

영화 벤허를 촬영하는 동안 철톤 헤스톤은 마차 타는 것을 배우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도 연습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많은 연습을 한 후에 마침내 마차를 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이 되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감독인 세실 드밀(Cecil. B. DeMille)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마차는 탈 수 있는데 경주에서 이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드밀이 말하기를 “단지 경주에 남아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기도록 해 줄 겁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런 확신을 주십니다. “단지 포도나무에 붙어만 있어라 그러면 내가 열매를 맺게 해줄 것이다.”

우리의 ‘가라’ 집게발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마지막에 할 일이 무엇입니까? 순종이 집게발입니다. ‘가라’입니다. 나귀를 드렸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음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끝까지 붙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