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라의 합창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시 3:8)

오늘 설교제목 멋있지요? 여러분이 화답을 하여야 합니다. ‘아멘’이라고 하셨으면 그것은 말로 화답한 것입니다. 악기로 화답했다면 그것이 ‘셀라’입니다. 아멘과 마찬가지로 셀라는 화답의 표시입니다.
원래는 심벌즈를 통해서 합창의 단조로운 흐름을 막기 위한 지휘자의 신호입니다.
셀라는 시편 39편과 합 3:3, 9, 13에 모두 71번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시 9:16) 학기욘 셀라의 뜻은 조용히 묵상하는 속삭임 속에서 심벌즈를 한번 치라는 지시입니다.
실벌즈를 한번 치면 그 다음에 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셀라를 쉬라는 뜻으로 보기도 합니다. 제가 너무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으니까 미국에 갔을 때 목사님이 저보고 ‘이 목사 쉼표도 음악이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바로 그런 쉼, 하나님을 위해 다음을 준비하기 위한 음악의 쉼표 같은 것, 그것이 셀라입니다.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셀라를 하려면 전체 음악에 집중해야 합니다. 단 한번 비록 마칠 때 단 한번의 심벌즈를 치지만 그 때를 놓치면 안됩니다. 한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한번은 전체 음악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합창은 혼자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합창은 자기에게 맡겨진 것 그것을 잘 해야합니다. 아무 때나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공동체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지만 그에게 혼자사는 축복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축복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
모세를 부르신 목적도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바울을 부르신 것도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말할 때 성경에 꼭 따라다니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너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너와 네 민족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본문도 잘 보세요.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시편 기자는 주의 백성에게 구원을 내려 달라고 노래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신약성경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같혔을 때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렸습니다. 그 때 간수가 자결을 하려고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나가지 않고 간수에게 우리가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10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합니다.
바로 앞에 행 16:12-15에 바울이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에 안식일에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혼자만 구원받지 않습니다. 네 집이, 네 백성이 모두 구원받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집에 형제, 자매가 없는 분들은 교회에 오면 좋습니다. 다 형제고 다 자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고 백성입니다. 교회는 개인적이지 않습니다. 함께 가는 곳입니다. 더불어 사는 곳입니다.
어떤 분이 서양에는 농기구들을 보면 함께 하는 것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혼자 하는 기구들 ‘지게’ 같은 것이 발전했다고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악지형이 많아 도로가 늦게 닦였습니다. 그러나 보니 지게가 유리한 것입니다. 오히려 서양에 보면 손수레는 혼자 끌고 다니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리어커는 함께 당기고 밀게되어 있습니다.
제가 한번 선교에 칼럼에 ‘가레 선교’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어려서 가레질을 한번 해 보면 참 재미있었습니다. 힘도 덜 들면서 재미있게 고랑을 파고 물길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레 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줄을 잡아당길 때와 놓아줄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아무 때나 당기면 안됩니다. 또 돌맹이 같은 것이 걸렸을 때는 힘을 더 주어야 합니다. 가운데 있는 사람은 삽을 또 잘 대야합니다.

합창은 다른 사람을 배려합니다.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 14:21)
하나님은 합창을 원하고 계십니다. 혼자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돌아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친구들과 함께 달리기를 합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그만 돌에 부딪쳐 다리를 다쳤습니다. 절뚝거리며 더 이상 달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혼자 1등으로 들어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19-21)
이 때부터 사람들이 온전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괜히 온전해 지고자 했다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8-31) 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주의 백성이 누구입니까?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주의 백성입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 1:9)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하다가 밧모섬까지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교지에 가보면 여러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을 보게 되었는데 이 선교사님 사모님은 아이들 교육에 올인 했습니다. 교육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합니다. 아무리 선교사 이지만 자기 자식 교육시키는 것을 가지고 뭐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선교비를 자녀교육에 다 써버린다면 이해가 되겠습니까? 결국은 나중에 미국으로 가더라구요. 그것도 알고 보면 자녀교육 때문에 간 것이지요. 지금 중심이 누구입니까? 자녀 아닙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교회에서 세습을 반대하는데도 무리하게 밀어 부쳐 많은 불신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너무 이기적입니다. 할 사람이 없으면 모르지만 많은 사람이 좋지 안게 보면 그만두어야 합니다. 누가 진정한 형제이냐는 것입니다. 누가 진정한 주의 백성이냐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해답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석학들하고도 많은 토론도 벌였습니다. 답을 얻지 못한 톨스토이는 어느 날 동네에서 농사꾼 친구에게 “사람이 왜 사느냐” 그랬습니다. 그 농부는 당연하다는 듯이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지요” 그랬습니다. 이 간단한 한마디가 톨스토이를 살렸습니다. 그는 훗날 불후의 명작 부활이라는 명작을 저술했습니다.
태평양 건너에 아내 보내놓고 자녀 보내놓고 ‘꺼억 꺼억’ 하면서 기러기가 되어 가지고 살지 마세요. 자녀 따라다니면서 살지 마세요. 자녀 중심으로 살지 마세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됩니다.
자녀교육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녀교육은 내가 먼저 하나님께 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후손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황금이 현재에는 좋아보이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듯이 보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면 훗날에 큰 기쁨을 찾이 할 것이다. 재물에 눈이 멀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에 눈이 멀어야 하겠다”(1954.11.14 정재학 목사)

정재학 목사님의 사모님(차은숙:합일학교(1901년 신식교육으로 감리교가 세움) 교사 차경창(후 감리교 목사 됨) 여동생)은 김차열 목사님 부부가 방문했을 때 말씀하시기를 “내가 눈이 먼 것도 해산했으나 먹을 것이 없어서 영양실조로 이렇게 되었고, 지금도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다오.” 하시면서 목사님 사모님 고생하신 이야기를 할 때 함께 울기 시작하였는데 말씀이 떨어지자 마자 나는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면서 한나절을 울었습니다(김차열 목사 추모사 중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너무 많이 먹었습니다. 너무 많이 모았습니다. 너무 욕심을 부렸습니다. 차사모님은 정재학 목사님이 서산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섬에 홀로 남아 있을 때에 딸을 잃었고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서산으로 이사 나오는 중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재학 목사님은 인천 앞 바다에 있는 덕적도 서포리에 살았습니다. 1926년 12월 덕적도진리감리교회에 이용도목사가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아껴주시던 선생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어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용도 목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롬 8:28-29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라” 성도들은 밤새도록 울부짖었습니다. 이후 성결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성결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정재학 목사님은 우리교회 정 선교사님의 할아버님이 되십니다. 그리고 택민이 증조할아버님이십니다.

정목사님은 ‘바보 같은 성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서산학교 설립 초기에 전교생 교복을 인천에다 주문했는데 오다가 없어졌습니다.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정 목사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백희씨가 동행했습니다. 이 분의 증언입니다. 서산에서 인천으로 배를 타고 가서 굶주린 상태에서 주막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거지가 와서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드릴 점심을 거지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거지는 저녁때 또 왔다는 겁니다. 또 그렇게 했답니다. 몇 끼를 이 거지에게 다 주고 당신은 몇 끼를 굶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한 선생님은 처음에는 참 바보 같은 짓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이분은 진정 성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돌아와 이 말을 전했던 것입니다.
최정화 권사님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야, 목사는 정 목사 밖에 없어. 참말이지 그 목사 밖에는 진짜 목사는 없어, 옥녀봉 꼭대기에서 밤새 기도하는데 호랑이가 한참 보다가 그대로 갔대” 그것뿐이 아닙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그 큰 소나무들이 정 목사님 눈물 받아먹고 컸다네”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당시 서산지역으로 가신 목사님들은 교파를 초월해서 정 목사님을 먼저 찾아뵈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1943년 10월 20일 밤 일경들이 방문하여 구둣발로 차고 비밀문서를 찾는다고 목사님의 집을 뒤졌습니다. 이 때 돌을 넘긴 딸과 장남 현웅(정 선교사님 아버님)이 네 살이었습니다. 그때 잡혀가서 홍성경찰서를 거쳐 공주교도소에 옥고를 치루고 있었습니다. 일제에 의한 죄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패망을 예견한 내용’의 글을 유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집은 흉가처럼 바뀌고 찾아오는 사람도 끊겼습니다. 목사님의 사택은 흉가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4년 1월 2일 현웅(정 선교사님 아버님)이 5살 순자(고모)는 3살 그리고 막내 송자가 태어났습니다. 이 때 산모는 영양실조로 아이를 낳는 바람에 실명을 하게된 것입니다.
그리고 1년 5개월 간의 옥고로 온 몸이 동상과 영양실조로 만신창이가 되어 풀려난 후 5개월만에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목사님은 목회와 함께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원인이 우리 민족의 무지로 인한 국력의 세약함에 있다고 보고 교육의 기초건립을 위해 해방이 된 그 이듬해(1946년) 초부터 뜻 있는 인사들과 함께 서산에 중학교 설립을 추진, 서산경찰서 옆에 있던 양잠소를 개조해 서산중학교를 설립해 1946년 3월 15일 개교했습니다. 이후 은산중학교 설립에도 힘을 쏟았으며, 홍덕유 씨, 홍산웅 의사와 함께 상춘학원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올해(2010) 국가보훈처는 8·15 광복 65주년을 맞아 338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독립유공자 정부포상 전수식에서 늦게나마 포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왕 말씀드리는 것 하나 더 소개하지요.
정 선교사님은 아버님이 할아버님이 너무 고생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버님처럼 목회자가 되시지 않았다고 했는데 혹시 잘 모르는 것이 있지 않나 해서 알려드립니다.
정재학 목사님은 평소에 늘 선교를 부르짖었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이 꿈도 못 꿀 1억원 재단을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0년 6월 20일 서산교회(박광훈 목사)에서 ‘정재학 목사 선교재단’ 설립예배가 드려졌습니다. 본 선교재단은 고 정재학 목사의 유지에 따라 그 자녀들이 재산을 기부하면서 시작 되다고 합니다. 정 목사의 자제 정현웅 씨가 현금 1억원과 부동산(경기도 평택의 대지와 서울 중랑구의 한 건물)을 선교재단 기금으로 쓰도록 김차열 목사에게 의뢰함으로써 아버님의 뜻이었던 1억으로 재단을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정 선교사님 아버님이 제산 다 기증했다 그 이야기입니다. 너무 허무해 하지 마세요? 저는 아버님이 훌륭한 결단을 내리셨다고 생각합니다.

장기려 의사가 부산 영도 피난민 촌 천막병원에서 구슬땀을 흘리면서 젊은 조수에게 “자네도 나처럼 살아” 하였습니다. 젊은 조수는 “선생님처럼 살면 바보소리 듣는데요?” 라고 말하자 대답하기를 “사람이 한 평생 살고, 바보 소리 들으면 잘 산 거야!”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 잘난척하고 잘나게만 살려고 하는 것 아닌가요? 사람에게 바보처럼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잘 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조금은 바보처럼 삽시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셀라는 더 높은 음으로 가기 위한 쉼입니다.
하나님께 충성, 봉사한 것 혹 이 땅에서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습니다. 하나님은 냉수 한 그릇의 대접도 잊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 믿고 행한 것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예전에 처음 국민 연금 시작할 때 몇 만원 붙고 나중에 돈이 많이 나오니까 그 때 좀더 불 것 그러는 분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백배나 받게되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막 10:30).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