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9.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 마 26:36-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존 낙스(John Knox)는 “기도하는 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부르짖으면 기도하지 않는 한 나라보다도, 한 민족보다도 훨씬 큰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도하시러 간 곳이 ‘겟세마네’라는 작은 동산입니다. 예루살렘 동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곳인데 감람산 기슭에 있습니다. 아람어 명칭은 ‘기름 짜는 틀’(oil press)입니다. 이곳에서 감람산의 기름을 짰기 때문에 생긴 이름입니다. 이곳에 예수님이 기도하던 장소가 있었습니다(눅 21:37, 22:39). 기름을 짜는 곳에서 예수님은 피와 같은 땀을 짜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지금은 이곳에 ‘땀흘린 교회’(The Chaple of the Sweat)가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땀을 흘려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도합니다. 기도제목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릅니다.

예수님의 기도제목은
39절 하반 절에 나오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입니다.
기도는 나의 소원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의 필요를 말하는 것과 같다.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는 아버지의 판단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나의 소원을 아뢰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라야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는 기도는 아무리 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 기도는 응답이 없다고 했습니다(약 4:3).

① 나의 원대로
예수님의 원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죽지 않고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면케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참 사람이십니다. 38절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라는 표현에서 인간적 고뇌가 깊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지금 나이가 33세입니다. 인간적인 나이로는 아직 한참 때입니다. 지금 죽기에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기도 속에는 십자가를 영원히 지시지 안겠다는 것이 아니라 미루어 달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십자가상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육체적으로도 어머니를 더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더 가르쳐야 하는데… 하시는 아쉬움도 있으실 것이고 아직도 병들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사람들과 좀더 함께 하셔야 하는 아쉬움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도 너무 빨리 해어지게 되는 섭섭함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물론 육체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도 피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창으로 찌르면 아픕니다. 예수님도 목이 마르십니다. 예수님도 고통이 있습니다. 이런 육체적 아픔 위에도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런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이 예수님의 고뇌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예수님은 혼자 고민만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② 아버지의 원대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예수님 기도의 결론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까지 아들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에 거스리는 기도를 하지도 않으셨지만 하나님도 기뻐하심으로 모든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오천명이 넘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의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모든 기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기도하시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신 것 외에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이 중요한 기도를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최고의 기도는 순종입니다. 순종 없는 기도는 자기 고집, 아집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순종할 줄 아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기도 제목은
41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기도제목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지만 제자들의 기도제목은 다릅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데 따라오는 여자들을 보고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이 돌아 가시면서도 누구 걱정합니까? 자식걱정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지만 고통이 있으시지만 제자들에게, 자신을 행하여 우는 여인들에게 자기 자신의 믿음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주기도문(마 6:9)에서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의 모든 내용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마 6:13절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이 기도를 할 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험은 두 가지로 다가옵니다.
첫째는 영적 곤경에 처하는 것이고, 둘째는 육체적 곤경에 처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올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영적 곤경에 처하는 시험이 훨씬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영적 곤경에 처하는 것보다 육적 곤경에 처하는 것을 더 두렵게 생각합니다.
잠 18:14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했습니다. 사람의 심령은 육체적 곤경과 시험을 능히 이기게 합니다. 그러나 심령이 상하면 육체적 곤경도 이길 수 없을 뿐더러 육체의 능력으로는 심령의 곤경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오늘 기도는 한마디로 말하면 실패입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당부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함께 기도한 제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왕의 나라에서 좌우편의 보좌는 탐이 났어도 정작 예수님의 간곡한 기도의 장소에서 그들은 모두 졸았습니다. 예수님은 마 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상황과 십자가를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깨어있기를 당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혼자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수시로 체크하셨습니다. 눅 22:41에 보면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수시로 돌아보시려고 이 정도 거리를 두셨던 것입니다.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①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②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③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④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⑤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⑥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중에 모두 6번이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하지 못한 이유는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배 때, 기도할 때 조는 분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안타깝습니다. 깨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얼마나 피곤하면 지금 졸까”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하루종일 예수님 따라서 다녔을 것입니다. 정말 피곤한 사람들하고 하루종일 있었습니다. 병 고쳐 주어야지요,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입씨름해야지요. 정말 지금 조는 것이 어떤 면으로는 이해됩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곳은 안락한 침대가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야산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잠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다 이해한다해도 지금 상황은 그래도 그렇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제일 간곡한 기도를 하는 마지막 밤인데… 본문의 제일 가슴 저려오는 구절이 어디입니까? 46 ⑥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칫 예수님의 이 기도는 무의미한 기도가 아니었는가 생각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잔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열어주시지 않았지만 잔을 마실 수 있는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심령을 강화하는 기도였습니다. 심령이 강건해 져야 육체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였고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에 매어 죽게 되는 것이라면 이를 감당 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달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는 기도를 하셨을 때, 하늘의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눅 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린다면 세상에 필요 없는 기도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힘을 얻도록 도우십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를 통하여 힘을 얻게 되자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눅 22:44). 땀방울 속에 피가 맺혀 있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 장면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의 기도는 십자가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는 처음 기도와는 달리 천사로부터 힘을 얻어 간절히 기도할 때에는 “죽음을 이길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실 때에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아뢰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후 죽음을 이겨야 만이 모든 택한 백성들을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필사적인 기도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육체의 연약함으로 깨어있지 못하고 시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졸아도 성전 안에서 조는 것은 다릅니다. 교회에 오면 조니까 오지 말라고 하시면 안됩니다. 졸아도 교회에가서 좁시다. 하고 일으켜 세워서 모시고 와야 합니다. 조는 사람은 예수님도 못 말렸습니다. 본문 45절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바로 이렇게 무능력한 우리를 돕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또 다른 이유는 시험 당한 성도들을 효과적으로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험 당하여 고민하는 성도들을 도우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
빌리 썬데이(Billy Sunday)는 “어떤 마귀도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녀를 빼앗아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나라의 운명이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선교사를 깨우며 그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루즈벨트(Roosevelt)대통령은 “기도하는 어머니들은 미국의 가장 귀한 자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자산은 바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은 “비상기도는 하늘나라의 싸이렌을 울리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합심해서 비상기도를 올리면 하늘나라에 싸이렌이 울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마치 119로 신고하면 소방차가 와서 불을 꺼주듯이 우리가 비상기도를 올리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는 간절히 해야합니다.
한 청년이 교회의 목사님의 찾아가, “목사님, 기도는 어떻게드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 청년을 데리고 강가로 갔습니다. 목사님은 청년의 옷을 벗게 하고는 무턱대고 손을 끌고 강으로 들어갔습니다. 깜짝 놀란 청년은 “아니, 목사님. +
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려는 것일세”라고 말한 다음, 갑자기 청년의 머리를 잡아서는 물 속으로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물 속에서 발버둥을 치며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제 서야 그 목사님은 청년을 건져내 주었습니다. 겨우 살아난 청년은 숨을 몰아 쉬며 ”아니, 목사님. 제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 물 속에서 죽여 달라고 했습니까?” 라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그래, 물 속에 있으니까 어떻던가? 숨을 쉬고 싶지? 살고 싶다는 생각 밖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을 거야! 이것이 바로 내가 자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일세. 기도는 바로 그렇게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의 마음도 바로 이와 같아야 합니다. 익사직전에 우리가 살기 위해 결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것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게 할 수 있으며, 우리의 믿음도 보다 더 성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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