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빛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26. 나의 빛이신 예수님) / 본문 : 요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하나님께서 넷째 날에 창조한 것은 해와 달과 별의 빛입니다. 태양에 빛이 없으면 이 지구 위에 사람들이 살 수 없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이나, 날 짐승이나 벌레도 살 수 없습니다. 햇빛이 없으면 식물도 자랄 수도 없습니다. 식물이 꽃을 피지 못하고 곡식이 성장하여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빛이 없으면 금수 초목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인생들까지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캄캄한 밤에 전등불이 없으면 작은 촛불이라도 켜야합니다. 캄캄한 밤에 불이 있어야 합니다. 불 없이 잠시라도 지내기가 힘이 듭니다. 빛은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입니다.
우리의 현대문명은 빛의 문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컴퓨터나, 텔레비전, CD플레이어 등은 알고 보면 모두가 빛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전자기기들은 레이저에서 방출되는 광선을 이용하여 우주 통신, 정밀 공작 등에 널리 응용되고 있습니다. 병원에 의사들이 현대최신 기계(엑스레이)를 가지고 사람의 내부를 들어다 봅니다. 이것은 다 빛의 작용입니다.
우리나라 포항제철에 만든 ‘포항방사광가속기(PLS : Pohang Light Source)’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체 부지는 660,000㎡로서 이중 조성한 부지는 110,000㎡이며 축구 경기장으로 비교하자면 약 20개 정도의 크기에 해당하게 되는데, 8개 동의 건물은 42,000㎡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재 방사광가속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12개국뿐이며, 더욱이 ‘포항방사광가속기’처럼 광범위한 영역의 빛을 만드는 최첨단 3세대형 가속기는 6개국밖에 없습니다.
단일 실험 장치로서 건설비가 무려 1400억원이 소모되었고 건설 기간만도 5년여 남짓 걸려 완성되었습니다. 이 장치는 에너지가 25억 전자볼트를 이용하여 전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보통 실험실에서 얻을 수 있는 적외선, 자외선, X선 보다 그 밝기가 몇백만 배에서 수억 배에 달하는 강력한 빛이 나타납니다. 이 빛을 이용하면 생명공학, 의학, 4G D램 이상 초고집적회로 등 첨단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과학기술을 선도할 ‘미래를 밝히는 빛’이라고 말합니다. 빛이 없으면 현대문명도 이만큼 발전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로 선포하신 두 번째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축제 기간인 초막절이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두 가지 의미 있는 예식행사가 있는데 하나는 성전 제단에 물을 끌어들이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좋은 기회를 교육에 활용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7-38)라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신 동기가 된 예식입니다. 4개의 황금 촛대를 밝히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젊은 제사장이 사닥다리에 올라 황금 촛대에 점화함으로 온 성전과 예루살렘을 빛으로 밝히는 상징적인 행사인 것입니다.
이 두 예식은 초막절에 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것을 상징화 한 것입니다(출13:21-22, 14:19-25).
요1:5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예수님을, ‘어두움’은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빛이 계속하여 세상에 비취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으로 온통 덮혀 있어서 어디를 보아도 빛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빛이 비취고 있지만 어두움이 이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두움과 빛은 서로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공존할 수도 없고 합쳐질 수도 없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이 빛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에는 ‘이기지 못한다’(overcome)는 뜻이 있습니다. 어두움이 아무리 강해도 빛이 비취면 단숨에 물러갑니다. 우리는 어두움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두움에 파묻혀 그럭저럭 살아가고, 빛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은 희망과 기쁨이 없습니다. 세상을 보고 잘 살아보려고 노력들 하시지만, 미안하지만 세상에서 그것을 얻으실 수는 없습니다. 혹 얻었다고 해도 영원한 것이 못되며 오히려 여러분을 착각 속에 빠지게 하여 영원하신 빛을 바라볼 수 없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쁨과 소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빛이십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라고 말했습니다. 하바국은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합 3:4)하셨습니다.
모세와 대화하실 때도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신 방법중의 하나로 빛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빛으로 말씀하신 것은 그가 곧 하나님 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빛으로 오실 것을 갈망하던 사람들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시27:1, 잠6:23). 이사야는 오실 메시야를 가리켜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사 49:9)이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이 누가복음 1:78-79에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요1:4-9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해 주심으로 이 예언된 말씀들과 이루어진 말씀에 대해서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4:16에서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하나님이 빛이시고 예수그리스도가 빛이시니 당연히 우리도 빛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 5:14)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라고 했습니다.
단체의 [신곡] 가운데 나오는 내용입니다. 단테가 한번은 지옥에 가서 구경을 합니다. 한 구석에 가보니 여러 사람들이 등에다 무거운 돌을 지고서 있습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고 서 있습니까?” 그가 말하기를 “저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에 교만해서 허리를 굽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올라가는 문은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 하기 때문에 그 연습을 하느라 저 모양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리 허리를 굽히는 것을 배웠더라면 얼마나 좋을 뻔했습니까?
우리가 빛을 발한다는 것은 높은 지위나 명예가 있어서만 비추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개인택시기사 한 분 소개할까요. 이분 성함은 강박수입니다.
이분은 낙천적인 성격에 하나님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눈 비시시 부비며 일어난 아내는 “당신은 매일 뭐가 그렇게 신나요?”라고 묻는다. “당신은 가서 잠이나 한잠 더 푹 자구려”하면서 아내를 두드립니다. 강집사는 휘파람을 불면서 “하나님 오늘 으싸으쌰~ 한번 살아볼 텐데 하나님 오늘도 팍팍 밀어주세요? 달구지도 잘 굴러가게 하시구요. 아무리 사랑스럽지만 다른 달구지하고 절대 키스는 안됩니다.”하면서 집을 나섭니다.
첫 번째 만난 손님은 길 저쪽에서 안경쓰고 손을 높이 흔드는 여자. 예전 같으면 안경쓰고 특히 여자를 이른 아침부터 태우면 재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손 흔드는 사람은 무조건 OK
“어서 오십쇼! 굿모닝!” 형식적인 아침인사가 아니라 씩씩하고 우렁찬 소리로, 그러나 손님은 요즘같이 무서운 세상에 혹시? 긴장을 하면서도 아니지. 기사양반 성질 건드렸다간 나만 손해보지… 하는 쪽으로 사고가 진전되면서 마지못해 ”네 좋은 아침입니다.“ 조용히 말합니다. 강집사는 손님의 표정을 흘깃 거울 속으로 바라보니 표정은 좋은 아침이 아니다.
”어디로 모실갑쇼?“ ”세브란스 영안실이요!“ ”저런 누가 돌아가셨군요.“ ”네가 젤 존경하는 친척분 한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요새는 왜 그리 폐암이 부쩍 많답니까?“ ”그분은 술, 담배도 안하셨는데…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처음엔 귀찮았는데 이제 대화가 되었습니다. ”어느새 다 왔습니다. 이거 섭섭합니다. 살다보면 또 만나겠지요. 건강하세요“
두 번째 여자손님. 무엇에 쫓기는지 아니면 무엇을 쫓는지 여간 급하지가 않았다.
“기사 양반 남대문으로 빨랑 갑시닷!” 사뭇 명령조다. 그렇다고 기분 나빠할 강집사님이 아닙니다. “아마 누가 기다리시는 모양이죠?” 여자는 흘깃 쳐다보면서 뭐 이딴사람이 다 있어? 데려다주고 돈만 챙기면 되지 하는 눈치입니다. 강집사님은 이럴 때는 음악을 틀어줍니다. “클레식을 좋아하실 것 같은데…. 어디 베토벤 없나?”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음악은 달콤한 뽕짝을 틀어줍니다. 일단 클래식으로 허영의 사다리를 타본 여자는 뽕짝의 추억에 조금씩 풀어집니다. “사실은 내 돈 떼어먹고 도망간 여자가 남대문에서 장사를 한데지 뭐예요. 지금 안가면 못 만날까봐 잠도 설치고 지금 갑니다.” “아이쿠 오래 되셨나요?” “5년도 넘었어요. 내가 받은 고통은 말로 다 못해요. 이혼까지 할 뻔했어요.” “그러게 사람일은 한치 앞을 모른답니다.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하고!” 여자는 이제 손뼉이라도 칠 기세였다. “맞아요. 맞아!”
이렇게 이야기하다가는 밤 세웁니다. 저녁때로 갑니다. 어둑어둑 해질 때 아파트 입구에서 할머님 한 분을 태웠습니다. 며느리로 보이는 젊은 여인은 돈을 두둑이 주면서 “말죽거리에 가면 박 의원이 나와있을 겁니다. 그곳에 안내해 드리면 돼요!” 그러나 할머니는 내릴 곳이 다가오자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며늘애가 날 버린 거라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우.” 말로만 듣던 신종 고려장에 직접 동참을 한 꼴이 되었다. 하도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할머니를 다시 집으로 모셔다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집이 몇 동 몇 호인지 아십니까?”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할머니는 서글픈지 고개만 저으며 말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태웠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한참을 해매고 수소문해서 그 집을 찾았다.
골치아픈 암 덩이리 하나를 치운 것으로 생각했던 며느리는 돌아온 할머니를 다시보자 경악을 했다. “아니 누가 당신더라 남의 집일에 감 나라 콩 나라 하랬어?” 시퍼런 여자가 늙어가는 강집사에게 퍼붓는 소리다. “돈도 푸짐하게 주었는데 눈치껏 내려주기만 하면 될 거 아냐?” 더 이상 대화가 안 되는 이 여자와 말할 가치를 없어서 무뚝뚝하게 “주인 양반 안 계십니까?” “남의 주인을 왜 찾아? 외국 출장 중인데 왜?” ‘아 남편 없는 틈을 타서 시어머니를 버리시겠다? 하이고 잔머리 한번 요란하게 군리셨군 그래?’라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래도 당신 남편을 낳아주신 분 아니오? 잘 좀 돌봐드리십시오!”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오늘은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았지만 가는 길에 서울역에서 아줌마가 탔습니다. “아자씨, 이거 보고 요기로 데려다 줘유.” 얼굴에 기미가 덕지덕지 낀 시골 아줌마는 주소, 약도, 전화번호까지 적힌 너덜~너덜~한 종이를 내민다. 아줌마는 시골에서 더 이상 먹고살기가 힘들어 가족 대표로 여관집에서 식모 살러 오신다고 했습니다. 월급은 130만원인데 이 액수에 황홀해 있었습니다. 꿈이 부푼 아줌마에게 말도 못하고 약도를 따라 그 앞에 내려드리면서 ‘하나님 이분이 어린양 아닙니까? 지켜주세요.’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일하시면서 힘들고 어려우시면 가까운 교회에 나가세요. 그곳에 아줌마를 지켜주실 하나님이 계십니다.”라고 말할 때 고쟁이 속바지에서 돈을 꺼내주려는 아줌마에게 웃으면서 “아줌마 서울에 오신 것을 기념으로 제가 무료 서비스합니다. 돈은 그만 두십시오.” “아자씨, 시방 머라고 하셨당가유? 돈을 안내도 된다구유?” 강집사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줌마는 모두지 믿을 수 없다면서 말합니다. “아니 왜유? 밸일도 다 있구만유. 서울가면 코 베어간다고 조심하라고 하든디 다 거짓말 이네유? 아자씨 참말로 공짜란 말이어유?” 강집사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아줌마 행복하게 사세요. 꿋꿋하게 사세요. 예수님 믿으시구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앗 뜨거워 앗 뜨거워 주님의 사랑”을 찬양한 졸라맨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표현된 주님의 사랑인데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웨일즈에 나이 많은 설교자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유능한 노인이고 훌륭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기 거북하지만 그는 비꼬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예리한 비평가였습니다. 어느 기회에 그는 두 사람이 강사로 되어 있는 두 집회의 마지막 시간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신학교 교수들이었습니다. 처음에 한 강사가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설교를 마치자마자 이 문제의 설교자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빛만 있지 열은 없군”하고 말했습니다.
두 번 째 강사가 설교했는데 그는 전번 설교자 보다 나이가 많고 다소 열정적이었습니다. 그가 설교를 마쳤을 때 그 냉소적인 교수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고개를 돌리고 “열만 있지 빛이 없군”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경우에 있어서 그분들은 다 바른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설교자가 다 결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빛과 뜨거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뜨거움이 없는 빛은 결코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빛이 없는 뜨거움은 영구한 가치가 없습니다. 모르지요. 지나가는 비처럼 당분간 화끈하는 효과가 있을지.
빛은 불에서 나옵니다. 불은 뜨겁습니다. 사람의 몸도 차가우면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잃으면 금방 차가워집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뜨거운 것입니다. 사랑하면 뜨겁습니다. 한마디로 불이 납니다. 차가운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불타오릅니다. 그리고 빛이 발산됩니다. 뜨거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