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세기 3)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오늘은 창세기의 다섯 번째 주제 ‘죄’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전재합니다. 만일 사람이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경을 보지도 않을 것이며 믿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 책이냐 하면 사람이 어떻게 해서 죄인이 되었고 그 죄를 어떻게 사함 받느냐를 가리키는 책입니다. 그런데 죄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가르칠 것도 없고, 예수님의 죽음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분명히 죄인입니다.

먼저 죄가 어떻게 사람에게 들어오게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다음 하신 일을 알려줍니다. 창 1:27 부분에 2장이 들어가도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곳이 ‘에덴’ 입니다(2:8). 그리고 그 동산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 2:9) 그리고 16-17절에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최초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모든 명령 중에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하와가 18절 이후에 지음을 받기 때문에 이 말을 아담 혼자 들었다는 것입니다. 성경 순서 상으로 보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하와에게 이 사실을 주지시켜 주어야 되었고 가르칠 책임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쁜 것만 좋아서 바라만 보고 있으면 안됩니다. 아내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날 제일 심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내들이 남편에게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 또한 가르칠 자격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둘째는 “16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이고, 그러니까 먹지 말라고 한 나무는 한 개이고 나머지 모든 나무가 다 허락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충분합니다. 못 지킬 것이 없습니다. 유혹을 받아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보세요. 무슨 부족하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풍족해 지면 죄를 짓기 싶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백성들에게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신 31:20)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육신의 편안함만으로 안됩니다.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한 것도 말씀을 가리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질문에 하와가 대답한 것으로 보아 하와가 알고는 있었습니다(창 3:2-3). 뱀이 아담에게 접근하지 않고 여자에게 접근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배우자, 가족 모두 가정의 주가 되는 남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사탄은 항상 허약한 곳으로 들어옵니다. 우리의 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의 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여기서도 두 가지가 나타납니다.
첫째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유혹은 그럴 듯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유혹하는 것도 다 그럴 듯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보는 것도 바로 이점을 알아내기 위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켜내기 위함입니다. 또 하나는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했습니다. 여자가 준다고 다 먹으면 안됩니다. 최종적인 책임이 남편에게 있습니다. 핑계나 일삼는 자가 아니라 책임을 지는 남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의 죄가 곧바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 사람의 결혼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이 가인과 아벨입니다. 바로 그 첫 사람의 제사가 자기 동생의 제사보다 잘못 드려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한번으로 안되면 또 하면 됩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다시 아벨보다 더 잘 드리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잘 보세요.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왜 가인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에 화를 냅니까?
이에 대해서 하나님도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창 4:6)고 하셨습니다. 아무 분하여 해야 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실 만 했으니까 받으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날도 우리가 “우리는 죄인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어?” 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이슬람 사람들이 다 신의 탓으로 돌리는 ‘인솰라’하고 같은 것입니다. 자기가 약속을 어기고 늦게 오고 다 ‘인솰라’하면 끝입니다. 다 신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가인의 핑계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첫 부분에 죄인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낯을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중요한 부분이 이어집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고 합니다. 선이 무엇입니까? ‘토브’ 좋게, 기쁘게 살면 됩니다. 그런데 좋은 생각이 없습니다. 시기와 질투만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의 죄를 알지 못한다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화인을 맞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자기 죄를 알고 있습니다.
선을 향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떠나지 않습니다. 대기 상태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원하나 개역한글:소원-테슈카(사모함, 갈망하다))라고 했습니다. 죄가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죄가 원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탄이 원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욥 1:7, 2:2) 사탄은 두루 돌아다닙니다. 자기의 먹이 감을 찾아 돌아다닙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겁낼 것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죄는 다스릴 수 있습니다. ‘다스릴지니라’ 어근은 ‘마솰’은 ‘지배, 통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탄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사탄에게 먹이 감이 되어 질질 끌려 다니며 사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지배하며 살아야 됩니다.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본문을 다시 보세요. “선을 행하면…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선입니다. 자 여기서 ‘선’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선은 분명히 죄에 대한 반대말입니다.
일단 그 근원이 어디서 왔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죄는 사탄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면 선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는 것은 선이 아닙니다. 우리 생각,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운 것, 우리 생각이 맞는 것 같은 것. 이런 것들은 선이 아닙니다. 자 다시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봅니까? 바로 그 선을 찾기 위함입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찾기 위함입니다. 내 생각가지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면이야 아무 문제없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죄:하타트(taF;j’)'는 ‘화살이 과녁을 비켜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한자의 죄(罪)는 사방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디로 가도 답이 없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죄로는 길이 없고 선을 찾아야 합니다. 선을 따라야 합니다.
“선”(야타브:byfiyT)입니다. 이 뜻은 ‘좋게 만들다, 유익을 끼치다, 단장하다, 성공적인, 올바른, 수정하다’ 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바로 따라오는 단어가 “행하면”(나싸:taec)입니다. 이 뜻을 ‘들어 올리다, 열망하다, 감당하다, 일어나다’입니다. ‘야타브 나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열망 뜨거움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것이 죄입니다. 그러면 이제 돌아가면 됩니다. 이 죄 사함의 문제는 하나님께만 길이 있고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달리 길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로 돌아가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야타브 나싸’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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