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어야 삽니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2009년도 한해도 몇 일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또 한 살을 더 먹습니다. 우리는 나이도 먹습니다. 사실 살 나이가 한 살 줄어들었으니까 빼야 되는데 우리는 더합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었으면 나이 값을 해야 합니다.

초등학교선생님이 “사과 세 개가 있는데 하나를 먹으면 몇 개가 남느냐?” 고 문제를 내었습니다. 한 아이가 “세 개입니다.” 그러는 겁니다. “하나를 먹었는데 어떻게 세 개가 남느냐?” 고 선생님이 물으니까 학생이 “우리 엄마가 그러시는데요, 먹는 게 남는 거래요.” 그랬다는 겁니다.
사자성어에는 식이위천(食餌僞天) “백성들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회사를 뜻하는 ‘Company’라는 영어단어는 ‘함께’라는 뜻을 가진 ‘com’과 라틴어의 빵을 의미하는 ‘pany’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베트남에 갔더니 길가에 ‘껌(com)’이라고 써있는 가게들이 있었습니다. 인터넷 PC방인가 생각하고 들어가 보니 식당이었습니다. 쌀, 밥을 껌이라고 부릅니다. 회사는 빵을 함께 먹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나)을 먹기 위해서 모인 곳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베푸신 첫 이적은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요 2:1-10). 어머니 마리아가 난처한 표정으로 예수를 바라보며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의논했을 때 예수님은 “아직 내 때가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혼인잔치의 기쁨을 망칠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첫 기적을 베푸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만들어 내십니다(요 6:9-13). 그리고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주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음식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더 소중한 것은 목숨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먹는 문제도 목숨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다. 영입니다. 살리는 것입니다. 생명입니다. 목숨입니다. 이제 영적 양식을 받아먹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양식을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께 오셔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예수께 오셔야 해결됩니다. 와야 해결이 됩니다.
우리속담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는데 중국에는 “산을 옮기는 사람은 작은 돌멩이부터 옮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그 일이 크던지, 작던지 일단 시작을 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께 오셔서 예수께 먹을 때만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원문의 “!Elqev::아르코마이”는 ‘나타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께 나타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같은 단어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다 풍랑 속에서 빠져 들어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바다 가운데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무서워 유령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베드로가 “만일 주님이시라면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18)라고 할 때 29절에 “오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 1:46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와 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생명수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생명수는 값이 없습니다. 누구나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값이 없다는 것은 계산할 수 없다는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돈주고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값없이(어근 dwreavn:도레안)’은 ‘값없이’이도 되지만 다른 말로는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했습니다. 선물은 내가 돈주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수를 먹을 수 있는 다른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본문에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듣는 자입니다.
듣는 “ajkouvwn:아쿠온”입니다. 같은 단어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7:26)에 사용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귀로는 아마 많은 사람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순종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즉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한다고 외치라는 겁니다. 요나는 가기 싫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하시기 때문에 재앙을 내리신다고 하시고 그들이 회개하면 내리지 아니 하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생각에는 원수의 나라가 망하기를 바랄 뿐 회개하고 구원 얻는 것을 원치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뜻을 앞세웠습니다. 이쯤 되면 요나가 하나님께 기도 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는 기도할 필요도 없이 다시스로 도망을 치고 있었습니다. 지중해에서 풍랑을 만난 그는 형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잘 될 것은 없습니다. 결국 그는 남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 자신은 바다에 던짐을 받는가 하면 큰 물고기에 삼킨바가 되었습니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고 끝장을 맞게 됩니다. 자기의 힘으로 살길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 살길은 하나님의 도우심뿐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기도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문제가 풀리기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요나는 죽을 고생만 하고 원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 때는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예루살렘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나중에 로마로 가고 싶어하던 바울에게 죄인의 몸으로 갈 기회가 왔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배에 탔습니다. 바울이 탔던 배는 요나가 만난 풍랑보다 더 심한 유라굴라 광풍을 만납니다. 바울이 그 배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276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멜리데 섬의 사람들은 이 일로 주님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도망가지 마세요. 요나처럼 돌아올 뿐입니다. 제자리예요. 만일 영영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면 그것은 더 불행한 것이지요. 예수께 오지 않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둘째,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목마른 자입니다.
목마른 어근 “딥사(diyavw)”는 “목마르다, 갈망하다, 갈급해 하다”는 뜻입니다. 제일 맛있는 것은 비싼 음식이 아닙니다. 갈급 할 때 먹는 물 한 컵입니다.
2002년 월드컵의 영웅이었던 히딩크 감독은 16강, 8강에 올라가서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라고 했습니다.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눅 8:44, 마 9:20)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마 9:21)
마가는 이 여인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6)라고 말합니다.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해 볼 만큼 해 보았습니다. 예수가 그 여인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옷을 스쳤겠지만 그것은 다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예수의 옷을 만진 이 여인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셋째, “원하는 자”입니다.
원하는 “델론(qevlwn)”은 “선택하다, 기울어지다, 사랑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예수께 기울어져 예수를 사랑하기로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하이레오마이(aiJrevomai)” 자력으로 취하다, 택하다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자기 자신이 간절히 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윗이 아리우나 타작 마당에 딱 서 보니까 자기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 한 감동으로 충만하고, 그리고 주님을 예배하고 싶고, 찬양하고 싶고, 그런 감동으로 꽉 찼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제물을 드리고 싶다. 그런데 제물이 없었어요. 그걸 알아차린 아리우나가 왕이시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제물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소와 양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제물로 제공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때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양하면서 그러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삼하 24:24절에 보면. 따라서 하세요.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값 없이는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 하리라 이런 응답을 했어요. 다시 말하면 나는 공짜로 주는 그것으로 바치지 않겠다. 제물에는 내 정성이 있어야 되고, 내 땀흘림이 있어야 되고, 내 희생이 있어야 한다. 내가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겠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신앙입니다. 다윗의 희생 정신입니다. 여러분! 원하세요.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세요. 전도하시기를 원하세요.

기도에 대한 응답은 우리가 생각할 때 느린 것인지 하나님은 모든 기도에 적절하게 주실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에스더의 기도는 3일 만에 응답되었지만, 벧엘에서의 야곱의 기도는 20년 만에 응답되었습니다. 19세기의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는 친구 5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1년 반만에 응답을 받았고 2번째 친구는 6년 반만에 세 번째 친구는 19년 만에, 그리고 네 번째 친구는 24년 만에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친구는 결실하지 못하고 죠지 뮬러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친구는 죠지 뮬러가 죽은 장례식장에 들어와 조지 뮬러의 마지막 유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위해서 40년 동안 끝임 없이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자는 하게 되어 있습니다. 먹게 되어 있습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