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놀라다

세 번째 ‘놀라다’에 해당하는 단어 헬라어 어근 탐베오(qambevw)이다. 탐베오는 “마비시키다, 놀라다, 경악케하다”는 동사이다. 탑베오의 어근 탐보스(qavmbo”)는 말문이 막히다 와 유사한 “마비, 경악”을 뜻하는 ‘남성형 명사’이다.
좀더 자세한 것은 from 2285; TDNT – 3:4,312 에서 확인하실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동사로 다음 두 곳에서 사용되었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막 10:24)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설명하실 때 제자들이 놀랐다.

막 10:30-31절에서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말씀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막 10:32) 예수께서 고난 당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 놀랐다.

동일한 단어가 막 1:27절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누가는 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눅 4:36) 모든 사람이 놀라고 탄복했음을 ‘탐보스’란 단어를 명사로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믿음과 의인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합 2:4 절은 멘 앞에 ‘보라!’(히네)가 나온다. 이 단어를 ‘오직’으로 번역한 것이 아닌가 보인다. 그리고 맨 뒤에 어근 ‘하야’ 살게 하다 동사가 이끌고 있다. 사는데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이다. ‘믿음’으로 번역된 ‘에무나토’는 ‘확고함, 안전, 신실성, 믿음, 안정성, 진실, 참으로’로 번역할 수도 있는 여성형 명사이다. 
원문과 일치하는 단어가 구약 히브리어에 한번 더 사용되었다.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 96:13)에서 “진실하심으로”에 사용되었다. 이로 볼 때 ‘믿음’으로 번역된 ‘에무나토’는 ‘진실’로도 변역 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하박국의 ‘베에무나토’에 ‘오’라는 소유 대명사가 있다.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이를 따라(KJV, RSV, NIV 등) ‘나의 믿음으로’로 번역하였다. 칼빈을 이를 신앙의 성장 과정으로 해석한다. 
바울은 ‘베에무나토’를 ‘에크 피스테오스’로 본문을 번역했다고 보아도 좋다. 본문을 이용하여 이른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 칭의’의 교리를 가르쳤다. 헬라어 역시 맨 뒤에 나오는 ‘살다’에 해당하는 어근 ‘자오’가 기본동사로 본문을 이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살기는 사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합 2:4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바울은 그대로 신약에서 헬라어로 옮겨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오직’ 으로 번역된 것으로 보이는 원문의 ‘호’ 관사와 접속사 ‘데’가 기본 불변사로 나타난다. 변할 수 없는 절대 진리임을 강조한 것이다. 

한편 ‘의인’으로 번역된 ‘디카이오스’(공정한, 흠 없는, 거룩한, 의로운)는 모두 19번 나타난다. 
마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눅 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눅 23: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행 10:22, 롬 1:17, 롬 3:10, 갈 3:11, 딤후 4:8, 히 10:38, 11:4, 벧전 3:18, 4,18, 벧후 2:8, 요일 1:9, 2:29, 3:7, 계 16:5, 22:11)에 나타난다.
복음서 4번, 사도행전 1번, 바울서신 4번, 히브리서 2번, 베드로 3번 요한 5번 사용하였다.
이 단어는 헬라어에서 ‘믿음’의 중심 축을 이루는 단어이다. 반면 구약에서 사용한 ‘에무나토’(진실)은 신약에서 사용한 ‘믿음’의 개념하고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울은 이 부분(진실)을 믿음과 연계시키고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절재된 성경해석

성경을 보고 바로 이해가 되면 별로 해석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고도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해석이 필요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절제된 해석이 필요합니다. 확대해석, 과잉해석은 금물입니다. 

조금만 벗어나도 탈선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은 소설이 아니고, 또 저작자가 보이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능력이 많이 나타날 수록 위험요소가 많은 겁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 정치적인 판단, 이데올로기 등이 첨가되면 성경에서 통일교도 나오고 몰몬교도 나오고, 구원파도 나오고, 여호와의 증인 등 헤아릴 수 없는 이단이 나옵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카톨릭에서 성경을 보는 것을 금지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절대 잘못된 판단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염려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해석을 염려했던 것 아닐까요?

도스토예프스키의 변화

도스토예프스키는 16세 때 자신의 아버지가 농노들로부터 살해되는 것을 보았다.그는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사형수들을 싣고 가는 열차가 간이역에 멈췄을 때 그는 어느 부인으로부터 작은 책 한 권을 받았다.그것은 신약성경이었다.

사형을 기다리면서 그는 감옥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작은 성경책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를 만났다.도스토예프스키는 “누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다’라고 증명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나는 진리보다도 차라리 예수와 함께 있고 싶다”는 신앙고백을 했다.그는 사형 직전 기적적으로 사면돼 고향으로 돌아온 후 세계 최대의 문학가가 되었다.성경은 인간을 변화시킨다.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영혼의 눈을 뜨게 될 때 기적은 일어난다.

영웅, 신격화와 성경의 진실

흔히 나라를 세운 사람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하여 영웅시합니다. 영웅도 모자라 신격화시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조선의 첫 왕인 단군을 신격화 시켜 신으로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를 세운 사람은 밀양 박씨의 조상이 되는 박혁거세입니다. 박혁거세 역시 그를 신격화하기 위하여 그의 출생을 신비스럽게 미화시켰습니다. 하늘에서 백마가 내려와서 박 만한 큰 알 하나를 두고 갔는데 그 알에서 깨어난 인물이 신라의 첫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박처럼 큰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은 “박”이라 하였고, 이름은 나라를 밝게 비추어 준다고 하여 ‘불구내’라고 하였습니다. 이름을 ‘혁거세’로 고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혁’은 빛난다는 뜻이며, ‘거세’는 세상에 있다는 뜻입니다. 혁거세는 13살이 되던 기원전 57년에 왕으로 봉해졌다고 합니다. 

사울 왕이 기원전 1100년 전 사람이고 보니 신화적인 인물로 소개할 만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은 미화시키거나 신격화시키는 것은커녕 있는 모습 그대로 소박한 면을 가감 없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의 잘못된 행실에 대해서 숨김없이 소개해 줌으로 인해서 후세 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2) 놀라다

1-2) 놀라다
두 번째 ‘놀라다’에 해당하는 단어 헬라어 어근 다우마(qau’ma)이다.
좀더 자세한 것은 
apparently from a form of 2300; TDNT – 3:27,316
에서 확인하실 수 있다.
‘다우마’는 명사로 “경이, 놀랄만한 일, 이적, 기적” 등으로 쓰여진다.
동사형태로는 다우마조(qaumavzw)로 “칭찬하다, 이상히 여기다, 놀라다, 칭송하다”로 쓰여진다. 좀더 자세한 것은 
from 2295; TDNT – 3:27,316
AV – marvel 29, wonder 14, have in admiration 1, admire 1, marvelled + 2258 1, vr wonder 1; 47에서 확인하실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 동사형태로 7번 사용된 예를 보면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막 5:20)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눅 1:21)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 4:22)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요 4:27)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요 7:15)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행 2:7)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행 4:13) 이다.

‘다우마조가’가 위의 본문에서 “놀랍게, 이상히, 신기하게”로 사용되었다.

늘 기억하며 삽시다.

1.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2:25
2. 예비하라 ……………………………………………눅12:40
3.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라……………………눅12:35-36
4. 그날이 너에게 뜻밖에 오지 않도록 주의하라…..눅21:34
5.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17:31-32
6. 아무도 너를 속이지 못하게 주의하라………….. 막13:5-6
7. 주인이 언제 올런지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 막13:35-3

아름다운 눈물

시편은 온통 눈물 바다입니다. 감정의 극치입니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시 80:5).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시 102:9).

[1] 눈물의 원인
○ 후회로 인하여 –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창27:34).
○ 죽을병으로 인하여 – 왕하 20:1-5 ○ 대적을 인하여 – 시 6:6 (7을 보라)
○ 학대로 인하여 –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4:1)
○ 패배로 인하여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나의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너의 여름 실과, 너의 농작물에 떠드는 소리가 일이남이니라(사16:9).

[2] 귀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눈물?
1) 회개의 눈물
○ 다윗-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 베드로 – 닭이 곧 두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막 14:72).
2) 사랑의 눈물
○ 바울-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2:4,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21).
○ 나사로를 위한 그리스도의 눈물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요 11:34-36).
3) 감사의 눈물
○ 예수의 뒤로 그 발곁에 서서 올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7:38, 44).

[3] 아름다운 눈물을 흘린 자에 대한 보상
○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고 하였습니다.
하늘에서는 눈물이 없을 것임
1)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8).
2)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믿을 수 없는 사회

어느 국회의원 예비후보라고 하면서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하겠습니다’
왜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지? 약속은 당연히 지키려고 하는것 아닌가요.

북한에서 오신 분들이 교육받는 하나원 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서 교육하는 것 중의 하나가 뭐냐하면 정착금주면 몇일 못가서 대부분 다 탕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한사람 믿지말라!’는 슬픈 교육을 합니다. 광고믿고 투자했다 다 날리고, 책 사서 공부하면 자격증 따고 돈 많이 번다고 해서 했는데 그렇지 않고
북에서 있을 때 소원이 자동차 타는 것이라 당장 자동차(중고) 뽑으러 갔는데 그만 사기 당하고, 그 피해 사래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는 그대로 믿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는 교육하러 오신 분 중의 교수님이 명함을 돌리고 갔습니다.
탈북하신분이 급할 때 필요할 때 연락하라고 준 것인줄 알고, 연락하니 왜 했냐는 식입니다. 이분이 하는 말이 그러면 자기에게 왜 명함을 주었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명함 없습니다.

노아의 방주

예전에 “천지창조”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는 하나님의 창조부터 시작하여 출애굽까지를 영화한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 중간에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엄청나게 큰배를 만들고 그 배에 그렇게 많은 짐승들을 태우고 그리고 문을 닫자 폭우가 쏟아집니다. 그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은 바로 8명뿐입니다. 노아와 그 아내와 3아들과 자부들과 그 배 안에 있던 짐승들만 구원받았습니다. 
방주를 배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배와 방주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방주는 바지선과 같은 땟목과도 같은 것입니다.
배는 배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배 안에 있습니다. 돛단배는 돛이 있고 증기선은 화구가 배 안에 있습니다. 전기선은 전기장치가 있고 동력선은 동력이 배 안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배를 어거하고 제어하는 제어장치가 배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방주는 그렇지 않습니다. 동력장치도 없고 제어 장치도 없습니다. 
방주는 오직 하나님이 인도하시기를 바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방주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조정해서 가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안됩니다. 
우리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