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예수님의 생애(11. 사마리아) / 요 4:3-10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돼지를 잡아서 잔치를 합니다. 다른 짐승도 많은데 왜 돼지를 잡는지 이유를 아십니까? 주인이 소를 잡으려고 하니까 소가 하는 말이 “주인님, 내가 죽으면 밭농사는 누가 합니까?”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럴 듯해서, 주인은 개에게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개가하는 말이 “주인님, 내가 죽으면 집은 누가 지킵니까?” 그 말도 그럴듯해서 주인은 고양이에게 갑니다. 고양이가 하는 말이 “주인님, 내가 죽으면 쥐는 누가 잡지요?” 그 말도 그럴듯해서 주인은 돼지에게로 갔습니다. 돼지는 잠만 쿨쿨 자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인은 잔치를 위해서 사명이 없는 돼지를 잡게 된 것입니다.
1950년대 세계 선교의 영웅 짐 엘리어트가 정글에서 피를 흘려 죽은 후 그의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답니다. “나의 사명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또 하나의 발자국을 남기셨습니다. 바로 사마리아로 가신 것입니다.

사마리아로 가시는 예수님
“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의 원문에는 e[dei(데이)가 있습니다. 이 말은 “반드시 ...을 해야한다” 또는 “틀림없이”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반드시 지나쳐 가시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길(사마리아)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남 유대에서 예루살렘이나, 갈릴리로 가려면 요단 동편으로 돌아서 가는 길은 대략 6일 정도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로 지나가면 3일정도가 걸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택하신 것은 시간적인 단축의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유대인이 사마리아 땅으로 지나서 가지 않은 이유는
B.C. 722년전 앗수르에 의해서 북 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이 때 앗수르 사람들에 의해서 혈통과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왕하 17:24).
이로 인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깊은 반목이 생겼습니다. 스스로 거룩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이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마리아인들 역시 그들의 통행을 막았습니다.
이런 깊은 반목과 역사성을 뒤로하시고 꼭 이 길을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동사하나가 나옵니다. “통행하여야”로 번역된 dievrcesqai(디엘마코이)는 “가다, 통과하다”의 뜻입니다. 본문 4절을 원문으로 다시 번역한다면 [사마리아로 반드시 통과하겠다]가 됩니다. 본문의 뜻으로 보아 예수님은 사사로이 고집을 부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로 가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그에 순종하시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 길로 가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인 것입니다.

역사의 책임을 함께져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을 보면서 유대인들의 이기적인 면을 볼 수 있습니다. B.C. 722년 전에는 하나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자신의 나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살지 못해서 나라를 앗수르에게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들이 앗수르의 혈통과 섞여있고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라고 상종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중국 땅에 사는 조선족 약 200만 명과 러시아 46만 명이 있습니다. 대부분 주변국의 해외동포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희생양으로 버려진 것입니다. 러시아에는 초기 거의가 농업 이민이었으나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 이민이 이어졌습니다. 고려인들은 그 땅에 재대로 정착하기도전에 스탈린의 이른바 대숙청 당시 연해지방의 한인들은 유대인, 체첸인 등 소수민족들과 함께 가혹한 분리차별정책에 휘말려 1937년 9월 9일부터 10월말까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이들은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내팽개쳐졌는데, 당시 고려인 수는 17만 5000여 명으로, 이 가운데 1만 1000여 명이 도중에 숨졌습니다. 사실 이들이 없었다면 구 소련이 해체되고 선교사가 중앙아시아로 들어가서 빨리 정착하게 된 것은 고려인의 덕분이었습니다. 현재 중국선교도 비슷합니다. 사업도 그렇습니다. 조선족이 없었다면 중국에 정착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을 미국에 사는 캐나다, 호주 등 서방에 사는 분들과 어떤 면에서는 차별하고 있습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서방으로 가신 분들은 잘살려고 이민을 가신 분들이고 고려인이나 조선족은 대부분 이 민족의 아픈 역사 속에서 생겨난 분들입니다.
서울에 화양리가 있지요. 그 이름의 유래는
1970년 전까지 110번지 32호에 화양정이 있엇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고, 또 일설에는 회행리(回行里)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 단종이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이곳에서 하루를 유숙하고 송씨 부인과 이별하면서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하여 회행리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잘은 모르지만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속된말로 좀 노는 여자들을 “화냥년”이라고 했습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여자들을 보냈었는데 그들이 다시 돌아와 정착한 곳을 잡아준 곳이 서울 외곽의 강나루 아래랍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화냥년”이 사는 곳이라고 해서 “화양리”가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사람들은 왕래하지 않고 멀리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민족의 희생양이었는데 말입니다. 일제 때는 우리가 나라를 지키지 못해 정신대라고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던 분들도 있습니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나라를 지키지 못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문제에 우리는 공동 책임을 져야하는 것입니다.
바로 사마리아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수가에 도착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수가라는 야곱의 우물이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 때의 시간은 6절 “때가 제 육시쯤”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은 로마식 계산으로 오후 6시를 말합니다. 유대인의 시간으로는 정오 12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때 물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을 만납니다.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대답하기를 “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지금 물길을 그릇도 없다는 것을 모르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12년 혈루병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졌을 때도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사람이 많은데 누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는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얻으시지도 못할 물을 달라고 하셨습니까?
이 여인하고 대화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여인은 곧바로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이 어떻게 사마리아인에게 말을 건네냐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사마리아를 피해 다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과 상종치 않으려고 입니다. 즉 말하기 싫고 함께 있기 싫어서입니다. 유대인은 늘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죽여야 합니다. 베드로가 고기 많이 잡고, 주님을 알아보고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나를 떠나소서”입니다.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떠나시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에게 말을 건네오는 유대인인 이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유대인이라면 자기에게 말을 걸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상하기는 이 여인이나 예수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더 그럴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대화하고 있다보니 예수님이 물 달라고 한 것은 순전히 대화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 사람이 고향을 묻고 나이를 묻고, 집안을 묻고, 학교를 묻는 것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다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분을 알고 상대를 카스트적인 개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잘못이지만 또 막상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면 대화가 안되지 않습니까? 어쩌면 대화를 시작하려고 사전 준비작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은 꼭 알 필요는 없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묻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통이며 상대와 대화하려는 노력임에는 분명합니다. 아마 서양 사람에게 갑자기 그렇게 묻는다면 상당히 이상한 눈으로 처다 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에게 말을 건넴으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이 물을 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우물은 깊고, 물길을 그릇, 두레박도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제6시(로마시간) 유대시간으로 12시인데 학자들 간에 이 시간 논란이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해하기로는 유대식 시간 정오 12시가 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의 일기로 볼 때 보통 물긷는 시간은 태양 빛이 강하지 않은 오후 시간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우물에 바가지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왔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매일 이 시간에 물을 길으러 왔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물을 길을 줄 알고 왔는데 낭패 아닙니까? 다시 바가지 가지러 동네로 들어가야 하니까 말입니다. 이 여인은 부정한 여인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이 시간에 물 길러 왔던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예수님께 물도 드리지 못하고 자신도 물을 푸지 못하는 이 여인은 잠시나마 난감해 졌습니다. 이 때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어렵게 된 상황 속에서 물을 달라고 하신 이가 누구인지 알면, 그분이 생수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알아보면 문제가 있을 때 그분에게 구하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 기도하지 않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알아보셨으면 그분에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물이 떨어졌을 때, 우리가 난감 할 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분은 무엇이든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제 대화가 재미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문제에서 영적인 문제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아주 무식한 여자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몰라보는 이 여인은 예수님께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면서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바로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십니다. 지금 문제는 ‘물’, ‘생명수’의 문제입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어떤 물입니까? “샘물”입니다. 샘은 마르지 않습니다.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영원한 생명을 위해 솟아나는 물의 샘]이 됩니다.
구약에서 시편기자들은 영혼의 갈증을 물로 비유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에서는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1-3)
이 여인은 영원히 물을 해결해서 여기에 물길로 오지도 않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15절). 그런데 예수님은 난데없이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고 하십니다.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하고, 예수님은 “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자는 놀랐습니다. 그리고 “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분이 결혼하는 신부에게 축하 전보를 쳤습니다. 전보는 짧게 써야 하잔아요. 그래서 “요한일서 4:18”만 써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만 주례사가 요한복음 4:18로 잘못 알고 읽었습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결혼식장은 순간 분위기가 이상해졌습니다. 주례가 다시 보니 요한일서 4장 18절 이었습니다. “사랑안에서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였습니다.
우리의 갈급 한 심령에 영원히 물을 줄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에게서만 샘물이 나옵니다.
타이완에는 신을 사 가지고 와서 일년 동안 집에 모셔놓습니다. 그리고 별로 도움이 안되면 다시 사왔던 곳으로 가져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충전을 시킵니다. 즉 큰 신 옆에다 두고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집에 가져와 다시 일년을 지내봅니다. 그래도 별 도움이 안되면 다시 가져가고 다른 신으로 바꿔옵니다.
우리도 비슷한 것이 많습니다. 조상신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 조선시대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유교’를 신봉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이해하는데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조상신이 생겨난 것입니다. 부모는 떠나도 언제나 자식을 위해서 돌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솔직히 이야기 해 봅시다. 우리도 나이가 들면 죽습니다. 어른이 되고 죽으면 무슨 능력이 생길 것 같습니까? 젊었을 때보다 더 힘이 없고 무능력해집니다. 그러다 죽는 것인데 죽어서 무슨 능력이 생기고 귀신이 됩니까? 치사하게 죽어서 자식들이 제사지내고 잘 대해주면 자식에게 잘해주고 안 해주면 자식 잘되는 것 해방 할 겁니까? 세상에 그런 부모는 없습니다. 죽어서 그럴 생각하지 말고 살아서 주님말씀하나라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능력이십니다. 그분만을 의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은 우리가 버린 곳입니다. 관심이 없어진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 계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주님은 결코 사마리아를 버리지 않습니다. -아멘-

예배의 문제
(요 4:20)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2)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 4:23)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5)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 4:26)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요 4:27)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니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요 4:28)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 4:29)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 4:30)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 4:31)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요 4:32)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요 4:33)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요 4: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5)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 4:36)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4:37)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 4:38)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요 4:39)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요 4:40)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요 4:41)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요 4:42)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여인

예수님의 생애(10.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여인) / 마가복음 5:25-34

“25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모노 뉴클레오시스란 병이 있습니다. 피에 단핵을 가지고 있는 세포들이 많아지는 전염병입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입맞춤을 하면 환자가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그 병에 걸리게 됩니다. 모든 병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감기에 걸린 사람과 있으면 건강한 사람으로 인해 감기에 걸린 사람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감기에 걸립니다.
올바른 소수가 잘못된 다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며 바른 사상이 잘못된 사상을 바꾸기가 힘듭니다. 좋은 말 열 마디보다 나쁜 말 한 마디가 더 힘이 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악한 사람보다 몇십 배, 몇백 배 더 건강해야 하고 영적 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살아있지만 살아가기가 힘듭니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지 모릅니다. 이 여인에게 제일 안타까운 것은 건강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목사님 모임에 나갔었습니다. 공부할 때 함께 하신 분인데 그분은 저보다 신학을 20여 년이나 더 늦게 하신 분으로 나이가 있으십니다.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건강을 잃으니까 모든 사람이 떠나가고 다 소용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과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해도 건강을 잃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개인만 병든 것은 아닙니다. 교회도 병들 수 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욕심에서 축복만 받으려고 오시는 것이나 자신의 교회만을 위해서 큰 건물만 지으려는 욕심은 병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질책했습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6)고 했습니다. 이사야 때의 사람들은 병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 당시 때의 병들었던 자가 건강하게 된 사건을 통해서 오늘 우리도 말씀을 통해서 건강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여인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혈루증 병을 앓았습니다. ‘혈루증’은 혈관 조직이 약해서 혈관의 틈을 통해서 피가 흘러나오는 병을 말합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을 혈루증 병으로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한마디로 만성 질환입니다. 이 여인은 본문 26절에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12년 동안 병을 고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고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중하여 지고 가지고 있던 재산도 다 써버렸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제 더 방법이 없습니다. 병은 심하고 돈은 없습니다.
우리는 물밀듯 밀어닥치는 절망감을 이 여인에게서 봅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이 여인과 같은 사람들을 봅니다. 우리 중에도 이와 같은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더라도 영적으로는 이 여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흔히 증권가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닥을 치면 언젠가 다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도 내려가고 내려가면 더 이상 갈곳이 없어집니다. 이제 희망이 보이는 것입니다.

희망이 보입니다.
이 여인에게 희망은 다름 아닌 병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27절 본문에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의원에게 가고 싶어도 갈 돈이 없습니다. 간다해도 지금까지 고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닥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관한 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온 갈릴리와 유대지방에 퍼졌습니다. 사실 지금 노정도 예수님은 또한 병자를 고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기 위해서 가시는 노중에 이 혈루증 여인이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가깝게는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중이라는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회당장의 어린 딸은 더 중한 병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는 그가 죽었습니다.
이렇게 병자를 고치시는 능력이 온 이스라엘에 퍼져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이미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믿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심할 바가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수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소문”이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생명입니다. 예수님 이름 자체로 구원이 일어납니다. 누구에게 일어납니까? 예수을 부르는 모든 사람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신약에만 “누구든지”라는 단어가 무려 196번 나오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신분의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모두가 동일합니다.

(마 7: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10:14)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마 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 10: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마 11:6)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2: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
(마 12: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 15:5)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마 16: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8: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여러분! 예수 믿고 특권층 행세하려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임을 부각시키려는 분이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은 차별을 하지 않으십니다. 부활과 심판에 있어서도 ‘누구든지’입니다. 즉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님께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이 예수님께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에 해당하는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해결 받은 비결은 무엇입니까?

믿음을 행함으로 옮겨야 합니다.
27절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이 믿음은 있었지만? 행함이 없었다면 그 믿음이 믿음입니까? 즉 행함을 통하여 믿음이 옮겨진 것입니다.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고 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 앞에서서 “제가 예수님을 믿으려고 했걸랑요.” 아니면 “제가 교회를 가려고 했는데요…”하면서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 예수님이 그래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하면서 모두 용서해 주실 까요? 기회는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시대인 지금입니다. 이 때가 지나가면 끝입니다.
이 여인에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일도 그렇게 쉽게된 것은 아닙니다. 많은 무리가 뒤섞여가고 있었습니다.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이 여인이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뒤로 와서”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정확한 상황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 틈에서 재빨리 뒤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앞에서만 보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다른 방법을 택했습니다. 바로 뒤입니다. 예수님의 뒤편은 좀 한가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리고 간 것입니다.
모든 일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차선이 최선이 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제일 좋은 컴퓨터를 사야 좋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차선으로 그 다음 사양을 선택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최선의 상태에서만 일하고 최상의 조건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차선이 곧 최선이라는 것을 잃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바울도 선교할 때 자신의 생각으론 당시 소아시아로 알려진 해안 지방의 도로를 따라 한바퀴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길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 바울이 ‘이제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자’라고 생각하고 돌아왔다면 그것으로 바울의 선교여행은 마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현재의 그리스지역인 지중해를 건너 유럽 땅을 밟은 것입니다.

믿고 행해야 합니다.
본문 28절에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데는 앞이나 뒤도 관계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이 여인만 만진 것은 아닙니다.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이 말은 지금 사람이 많아 “예수님도 아시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누가 손을 대었는지 압니까? 또는 많은 사람이 데었는데 누가 대었냐고 물으심이 합당합니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많은 사람이 손을 대었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믿고 행한 이 여인만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똑같이 교회에 나옵니다. 하지만 믿고 나와서 말씀을 듣는 분하고 “이 작은 교회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하면서 이영제 목사가 어디 설교나 좀 하는지 들어보자 하는 분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앞을 보려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잘 생기셨는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다투어 예수님을 보려고 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 없이 많은 사람 중에 앞에서 예수님을 본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이런 식으로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건물과 목사의 브랜드가 하나의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데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분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주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본문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누가 손을 대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은 32절에서 누가 만진 것을 아셨습니다.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여자인 것을 아셨습니까? 제자들이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을 못할 것을 아셨지만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을 통해서 제자들을 교육시키는데 활용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주님의 신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가시는 것과 여인이 만졌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앞에서 보지 않았지만 뒤의 여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여인은 모든 고백을 드렸습니다. 감격적인 대화입니다. 이미 병고침을 받았으나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교육과 말씀으로서 평안의 축복을 해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말씀을 안 하셨으면 지금 일어난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또한 혈루병 여인은 몰래 예수님의 능력을 도둑질하여 고침을 받은 것 같아 떳떳하지 못하게 될 뻔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아시는 주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하심으로 영적인 축복까지 받게된 것입니다.
이미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다가오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앞이 아니라 뒤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믿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행함을 통해서 우리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개를 훈련시킬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마룻바닥에 아주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를 가져다 놓은 후 개를 데리고 온다. 개가 그것을 보고 뛰어가 그 고깃덩어리를 물면 몇 차례 개를 때려주고 고기를 빼앗아 놓습니다. 그 다음 또 그 자리에 고깃덩어리를 갖다 놓고 기다리면 개는 또 그것을 향해 달려듭니다. 그때 주인은 “안돼!”하고 명령을 합니다. 그러면 개는 멈칫하고 섭니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훈련을 하고 나면 개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고깃덩어리를 갖다 놔도 개는 그것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얼굴을 쳐다봅니다. 주인이 무엇이라고 명령을 하나? 개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행동할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가 물질을 가지고 와서 시험을 합니다. 세상의 인기와 권력을 가지고 와서 시험을 합니다. 그때 그것을 쳐다보지 말고. 먼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마귀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여러분!
자신 있게 주앙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적 명령을 받드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뒤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그곳으로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부록
(마 7: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10:14)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마 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 10: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마 11:6)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2: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
(마 12: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 15:5)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마 16: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8: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 18: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
(마 19: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마 20: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 20: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3:12)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 23:16)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마 23:18)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막 3:29)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막 3: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막 8:3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8)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
(막 9:37)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
(막 9:41)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
(막 9:42)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막 10:11)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막 10: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
(막 10:43)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막 10:44)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1: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
(눅 7:23)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눅 8:16)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
(눅 8:18)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
(눅 9:5)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눅 9:24)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9:26)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눅 9:48)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
(눅 11:33)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눅 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눅 12: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눅 14: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33)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8: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
(요 6:65)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
(요 7:37)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9:22)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
(요 10: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1:57)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행 2: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행 3:23)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행 8:19)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행 25:11)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
(롬 2: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
(롬 8: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
(롬 10: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롬 10: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4: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고전 3: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 3: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 3:15)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전 3: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 3:18)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
(고전 3:21)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전 8:2)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고전 8:3)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고전 8:10)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
(고전 9:15)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
(고전 10: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11:27)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고전 11:34)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
(고전 12: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
(고전 14:37)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고전 14:38)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고전 16:11)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고전 16:22)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고후 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11:16)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
(갈 1: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
(갈 3: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
(갈 3: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갈 5:10)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
(갈 6: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엡 2: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5:6)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엡 5:29)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빌 3: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빌 3:15)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
(골 2:16)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8)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
(살전 3:3)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살후 3:10)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딤전 4:12)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딤전 5:8)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전 6:3)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 하면
(딤후 2: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
(히 3: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 4:11)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약 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23)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약 1:26)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약 2: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자가 되나니
(약 2: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것을 주지 아니하면 …
(약 4:4)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
(벧전 4: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벧후 2:19)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요일 2:5)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
(요일 2: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 4:15)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일 4: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
(요일 5:16)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
(요이 1:10)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계 3: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
(계 11:5)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하면 반드시 …
(계 13:9)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
(계 13:17)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 14:9)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
(계 14:11)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
(계 16:15)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
(계 20: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 22:18)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
(계 22:19)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데로 가라

예수님의 생애(9.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데로 가라) / 누가복음 5:4-11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되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어느 목사님이 중국 북경에 가서 성도들을 방문했습니다. 가정예배 처소였는데, 그곳에서는 예배를 드릴 때, 외부에서 온 사람은 절대로 설교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일어서서 말하면 설교요, 앉아서 말하면 좌담이 되어 외부에서 온 사람도 앉아서 말하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좌담식으로 앉아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말씀 더하라는 회중의 권유에 따라 두 시간이나 설교를 했답니다. 이야기가 끝나 경청하던 청년 하나가 벌떡 일어나 소리칩니다. “오늘의 교양, 전적으로 접수합니다.” 공산당이 교양 할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접수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전적으로 접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 명령
고기를 잡으려면 고기가 있는 곳으로 가야합니다. 지금 고기가 어디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깊은데”있다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고기잡고 빈 그물을 털고 있는 어부들의 심정이란, 하루종일 땀흘려 일하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경험을 하신 분들은 이해합니다. 허무하고 허탈한 것입니다. 저희 어머님이 지금도 저에게 하시는 말이 있는데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오다가 돌을 차면서 왔는데 하필이면 그게 앞집 가게 유리에 맞아 쨍그랑 깨졌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저를 알았기 때문에 가만히 계셨습니다. 차라리 혼을 내주면 좋은데 그냥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일 없이 집에 왔는데 저녁에 어머님이 일 다녀오시면서 하루 품삯을 그 아주머니에게 주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일을 생각하시면 그렇게 허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부들은 밤새도록 고기잡이하고 빈 그물을 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깊은데로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지금 고기들은 아침이 되어서 깊은 데로 몰려있습니다. 이곳에 어망을 내리면 됩니다.
여러분 밑천 없는 분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시려면 어디를 가시면 되는지 아십니까? 돈이 굴러다니는데 가시면 됩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시장입니다. 시장에 가면 돈이 돕니다. 지금 시장은 또 형편이 다른가 봅니다. 즉 기회가 있는 곳에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할 일이 있는 곳에 가야합니다. 선교지에 가면 사회가 역동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불평만 합니다. 이건 아직 이렇고 저건 저래서 불만이고, 그러나 기회를 보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다 되어있으면 내가 필요 없지 않습니까? 아직 부족한 것이 있는 곳 그곳에 내가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깊은 곳입니다. 그곳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에 따르기 싫었을 것입니다. 어망을 깨끗하게 했는데 이제 더 헛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기다 고기잡이는 밤이 제일이지 이제 아침에는 적격이 아니다, 또 적당인 깊이가 제격이지 깊은 곳은 아니다, 고기잡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목수의 말을 듣다니 하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이 이와 같이 불합리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절) – 순종
처음에는 예수님의 이 명령에 베드로는 반신반의하였습니다. 그래서 변명을 합니다. “우리들이 밤이 되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말을 안 해도 예수님은 지금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안 해도 될 말을 합니다. 이 말속에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우리들이 한시간도 아니고 그것도 밤 세도록 잡았는데 얻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나가 고기를 잡아본들 잡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며 목수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육신적 배경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한들 얻을 것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바다로 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수님께 순종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사람은 누구의 말을 듣고 사는 것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철학이다라고 말합니다. 다 철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누군가의 철학을 이어받거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아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억지에 불과합니다.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사회로부터 사람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론, 환경에 영항을 받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책일 질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축복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여러분 말씀에 의지하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의 배경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말씀” 의지하였습니다.
신석구 목사는 어떤 장로와 길을 가던 도중에 자신의 목회 철학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장로님, 신바닥의 진리를 아십니까? 이 신바닥은 주인이 가자 하는 대로 순종만 합니다. 자갈길로 가자면 가고, 가시밭길도 지나가고, 더러운 오물도 마다하지 아니하고 불평불만 없이 따라갑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목사나 장로는 자기 주장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의 길은 바로 순종의 길입니다.

가득 차는 육신적 축복(6-7절) – 축복
순종은 항상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고(삼상 15:22) 하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노하우(KNOW-HOW)만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할 때 비로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베드로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 인도의 성자 선다 싱이 네팔지방의 산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쳐 한치 앞이 보이지 않으므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모르는 사이지만 같은 방향으로 가는 길동무가 한 사람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그들이 추위와 눈보라를 헤치며 한참 가니 인적도 없는 외진 산비탈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싱이 동행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을 데리고 갑시다. 그냥 두면 틀림없이 죽고 말 거요.’
동행인은 펄쩍 뛰었습니다.
‘미쳤소? 우리도 죽을지 모르는 판에 어떻게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단 말이오’
그는 화까지 내면서 혼자 서둘러 떠나버렸습니다. 싱은 할 수 없이 쓰러진 사람을 등에 업고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한파는 갈수록 심해지고 기운은 떨어져갔으나 이를 악물고 나아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온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등에 업힌 사람도 싱의 따뜻한 체온으로 얼었던 몸이 녹으며 차츰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가자 마을이 나왔습니다. 희망이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서 눈 속에 얼어죽은 시체 하나가 발에 걸렸습니다. 놀랍게도 바로 그 동행이었습니다. 이 판국에 누구를 돕느냐고 서둘러 간 사람은 얼어죽고, 죽어가던 사람을 업고 간 싱은 살게 된 것입니다.
경제불황이 닥치면서 우리 모두 그들처럼 혹한 속의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앞길은 전혀 보이지 않고 너나없이 불안과 절망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이기심의 만연입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어떻게 남을 돕느냐는 동행인 같은 사람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를 녹여주고 생기를 넣어줄 수 있는 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서로의 체온입니다. 싱과 쓰러졌던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함께 나누면 죽음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그것은 사랑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누구나 어렵지만 자신을 잘 살피면 그 중에서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걸 다같이 주고받으면 어떤 역경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물을 던졌을 때 놀랍게도 엄청난 물고기가 잡혀 올라옵니다. 그물이 찢어지려 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청합니다. 그래 그들이 와서 고기를 퍼담는데 두 배에 잠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도 경험하는 바지만 어려울 때 도움 청하기는 쉬워도 넘칠 때 도움을 청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밤새도록 고생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어떻게 고기를 잡았습니까?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것은 자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고기를 자기 혼자 가져도 누구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다른 배의 친구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의 마음, 동역하는 마음, 도움을 청하는 마음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혼자서 하면 매우 힘이 들지만 누가 옆에서 조금만 거들어 주어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우리를 위대한 인물로 성장시키는 비결이요 또한 상대편을 위대한 인물로 함께 자라게 하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협력자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7절까지는 이세상의 육신의 축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축복 받는 것이 이 세상의 것으로 끝난다면 그야말로 허무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분 중에는 그래도 좋으니 돈벼락이나 한고 죽으면 소원이 없고 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의 안타까움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저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돈 한번 벌어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고민해 왔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세상의 고난에 대해서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제 고향이 경기도 마석인데 그곳에 당시 서울에서 등산하러 오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산 정상에 올라가면 갈증이 나고 물이 귀하여 아이스 통에 하드(아이스께끼)를 넣은 통을 가지고 천마산을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 산은 해발 812m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드 값을 배 이상 불러도 잘 팔립니다. 그렇게 돈맛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는 뒷전입니다. 어떻게 학교 빨리 마치고 돈벌러 가느냐 하는 것이 제 고민이었습니다. 학교를 마치자 마자 달려가 도매로 빵을 구하고 그 빵을 경춘선 기차에 올라가 파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홍익회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아무나 팔면 되는 것으로 알고 빵을 팔다 홍익회 아저씨들한테 혼나고 내려온 적도 있습니다. 겨울방학 때는 탄광에 가면 돈을 번다기에 친구를 꼬셔서 강원도 황지 탄광촌에까지 갔었습니다. 더 할까요? 이 정도만 말씀드리면 저도 보통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런 저에게도 봄날의 햇빛이 따스하게 내려 쬐듯이 어느새 예수님이 제 마음에 들어오시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드렸던 고백이 저의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 – 회개의 고백
고기가 많이 잡힘을 보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9절 하반). “놀라고(담보스)”는 매우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말문이 막히다와 같은 표현입니다. 어부들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밤새도록 잡아도 잡히지 않던 고기가 한배에 실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배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축복해 주시면 감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고기만 잡고 놀랐으면 되었지 베드로의 행동이 이상합니다. 갑자기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같이 있을 수 없는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광채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드러난 것입니다.
아마 당시의 대제사장이나 율법사, 랍비들, 산헤드린공의회 회원 정도가 되면 죄인과 함께 있지 못하겠다고 떠났을 것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그냥 유대인들도 죄인들의 곁을 떠났습니다. 오히려 돌로 치려고 합니다.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을 위해서 죄인의 세상에, 죄인을 대신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취하리라(10절) – 예수님의 약속
베드로만 놀란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같이 동업하는 야고보, 요한도 놀랐습니다. 놀라서 떨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무서워 말라”고 하십니다. 이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진정시키십니다. 오히려 세례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을 때보다 더 돌란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을 때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도했지만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만큼 자신들의 생각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기라고는 잡아보지도 않으시고 목수 일만 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넘치도록 많은 고기를 잡고 놀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렇게 고기를 잡았던 것과 같이 사람들을 사로잡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11절) – 제자됨
저는 솔직히 이 상황에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흔히 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력한 신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따라가서 어떻게 할까?, 지금 저 많이 잡은 고기는 어떻게 하고? 그런 걱정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강력한 하늘로부터 오는 힘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배와 고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아멘
더 이상의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된 것이 제일 큰 축복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도가 된 것이 제일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에서 한 가족과 같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여 선교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사역을 같이 하시는 분 가운데 한국인 아가씨가 한 분 있는데, 킴 윅스라는 맹인 아가씨입니다. 한국전쟁 때 실명을 했고 고아원에서 자라났는데, 어떤 미군 중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인디아나 주립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오스트리아에서 성악 수업을 하여 훌륭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녀가 예수를 믿고 놀라운 간증을 갖게 되어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집회를 할 때마다 간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녀의 간증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장님인 나를 인도할 때, 저 101미터 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뛰라고 말하고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놓으라고 말합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분을 내가 믿고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 성실할 때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꼭 도착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10년 후를 알지 못합니다. 20년 후도 알지 못합니다. 또 알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보이시는 그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오늘을 살면 하나님은 내일을 인도하셔서 마침내 내 생애를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그곳에 도달케 하실 것입니다.”
순종하면 지금도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역사 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이것은 주님의 영원한 명령입니다. 이 부름에 우리모두 아멘으로 응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가르치라

예수님의 생애(8. 예수님처럼 가르치라) / 누가복음 4:31-37

“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여러분들은 교회에 나오시면서 기도하시면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데 동의하십니까?
그렇다면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아동교육가들은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제든, 무엇이든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쉽게 손에 넣으면 인내나 노력이라는 소중한 정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자기 힘으로 성취해 나가는 기쁨을 모른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가진 아이는 양보를 모른다고 합니다. 이 말에는 동의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것에 먼저 ‘하나님의 뜻’이라면이 전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그 믿음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교육을 받아야 하고 교육을 시켜야합니다. 교회에 오셔서 잠깐 눈감았다 뜨고서 기도했다고 무엇이든지 다 되어있으면 여러분 우리는 망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가지고는 순교는커녕 작은 고난에도 이기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이 됩니다. 환난이 오면 쉽게 무너집니다. 포기합니다. 아이들도 ‘스스로 인내에 도전할 때 아이는 행복의 첫걸음을 내디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셔서 인내와 사랑, 그리고 이웃과 나눔에 대해서 배우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가르칠 수 있을까?
오늘 설교의 제목에 의아심을 품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님처럼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물음입니다. 그런 의구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본래부터 “죄가 없으셨으며”(요일 4:15, 히 4:15), “죄를 범치 않으셨으며”(벧전 2:22), “죄를 알지도 못하신”(고후 5:21)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아무도 “죄로 책잡을”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예수 님을 우리가 어떻게 따라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바로 예수님의 인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처음 이 땅에 보내실 때(초림)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보통의 사람과 같이 탄생하게 하시고 자라게 하셨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마지막 재림할 때처럼 공중에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천사를 대동하고 큰 나팔을 불고 하늘에게 직접 올리워 가실 때처럼 초림하셨다면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부정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바로 우리는 그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성장하셨고(눅 2:52), 피곤해 하셨으며(요 4:6), 배고픔을 느끼셨고 목말라 하셨습니다(요 4:7-8). 또한 주님도 유혹을 받으셨고(마 4:1-10, 눅 4:1-12, 히 4:15), 눈물을 흘리셨으며(요 11:35, 38), 분노와(막 3:5) 슬픔과(마 26:37-38) 기쁨과(요 15:11, 17:13) 죽음을(요 19:30) 경험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모습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 방식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지 예수님이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자신이 예수님처럼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을 넘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모든 일을 똑같이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성령 하나님이 직접 도와주시고 그분이 교사이기 때문에(요 14:26, 16:12-19, 고전 2:10-16) 우리의 부족함이 채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이 있지만 가르쳐야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내가 너희에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만 하시고 우리에게 교수법을 가르치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교사였는가?
예수님에 대한 호칭 중에서 두 개 이상의 복음서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28개가 있는데 그 중에 ‘예수님(615번)’, ‘주님(191번)’, ‘인자(80번)’, 그리고 네 번째로 많이 나타나는 단어가 ‘선생(70번)’ 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처럼 선생님이라고 많이 부른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한마디로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3-14)
여러분!
선생님이라는 말을 들으려면 무엇을 해야 됩니까?
가르쳐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기적만 베풀었으면 선생이라는 말보다는 ‘요술사’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선생이라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가르치다. 가르치심의 단어는 54번이나 나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에만 관심이 많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정말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초자연적인 이적을 보고 이분은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언제나 오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가난한 자의 모든 쓸 것을 공급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 26:1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요술사가 아니라 교육가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장소를 보면
‘회당’(마 4:23, 9:35, 13:54, 막 1:21, 6:2, 눅 4:15, 6:6, 13:10, 요 6:59, 18:20),
‘예루살렘 성전 뜰’(마 21:23, 26:55, 막 11:15, 17, 12:35, 14:49, 눅 19:47, 20:1, 21:37, 요 7:14, 28, 8:2, 20, 18:20),
‘집’(눅 5:17-18, 7:36-50),
‘마을이나 동네에서’(마 11:1, 막 6:6, 눅13:22)
‘야외에서’(산에서 마5:1-2), (호숫가의 배에서 막4:1, 눅 4:3), (거리에서 눅 13:26)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람들
서기관들(마 8:19-22, 눅 9:57-62, 막 2:6-10)
바리새인들(마 12:1-8, 19:3-9, 22:41-46, 눅 14:12-14)
대제사장과 장로들(마 21:23-46, 막 11:27-12:12, 눅 20:1-8)
사두개인들(마 22:23-32, 막12:18-27, 눅 20:27-44)
율법사(눅 10:25-37, 눅 11:45-53, 눅 14:1-6)
세례요한의 제자들(마 9:16, 11:2-6)
제자들(마 17:19-20, 막 9:14-29, 눅 10:1-20)
회당장(눅 13:14-17)
여인들(눅 10:38-42, 눅 11:27-28)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때와 장소, 대상을 가리지 아니하시고 기회만 있으면 가르치셨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가르치다보면 선생님이 이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가르치지 않으면서 선생이라는 말을 듣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정말로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하라!

질문과 대화
예수님이 하신 질문은 복음서에 모두 304개 나옵니다. 이중에 겹치는 것을 빼고도 225개의 다른 질문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토록 많은 질문을 던지신 것은 가르치신 내용이나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대화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사실과 반대되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동의를 얻기 위해서, 잘못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등입니다.
그러나 결코 사단하고는 대화하지 않는 예수님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도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질문을 많이 하신다는 것은 그만큼 대화를 많이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부부간에도 많은 대화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내 주장은 강하게 하는데 대화하는데 익숙하지가 못합니다. 대놓고 화내는 것이 대화가 아닙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대화입니다. 예수님이 질문을 많이 하셨다는 것은 대화하기를 좋아하신다는 뜻입니다. 요즘말로하면 상담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가셨다는 뜻입니다. 대화는 일방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상대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장난감을 자녀의 동의 없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하면 교육이 안됩니다. 어쩔 수 없이 장난감을 버려야 한다면 아이에게 직접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사주고 쉽게 버리면 그 아이는 물건의 소중함을 모를 것입니다.

확실함
본문 “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교육은 “아마”라든지 “그럴 것이다” 혹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등의 불확실한 상상적인 이야기는 없습니다. 언제나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와 같이 명확히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지도자인 랍비나 서기관, 율법연구가들은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라든지 “랍비는 이렇게 말했고, 율법과 예언가들은 이런 말을 했다”였습니다. 즉 오랜 전통으로부터 내려오는 방법이고 이것을 잘 할수록 많은 학식이 있는 선생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에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 1:27)고 했습니다.

겸손
거만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칭송과 찬양을 받으려 했던 율법학자들과 랍비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겸손을 보여주셨고 그것을 명하셨습니다.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2-14)곻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직접 오신 목적에 대해서도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과는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지적하신 후,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1-13)라고 하셨습니다.

일관성
우리(한국)의 교육은 이 문제를 일찍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바닷가의 ‘계’에 대한 비유를 잘 사용합니다. 자신은 옆으로 가면서 자식들에게 ‘앞을 보고 똑바로 가라’고 해야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만 됩니다. 학생들에게, 자식에게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한참을 그 이유의 타당성을 이야기하고 정작 자신이 담배를 피우면 학생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목사가 어려운 것은 말하는 것, 설교하는 것만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말한 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으로만 선교하는 것은 무의미 합니다. 그저 큰 교회의 단점을 자격지심에서 꼬집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내가, 우리교회가 바르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말한 대로 실천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조금도 모순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요 14:6)라고 말씀하시고 진리로 사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고(마 5:43-48) 자신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자신이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지키시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정신은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인다”고 어거스틴은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사랑과 고난에 대해서 말씀만을 하시고 자신이 그와 같이 살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이 모두 순교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선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모습대로 우리도 본을 받는 것이고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종적인 교육인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도 인류 역사상 제일 위대한 이 교육 대열에 참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복음

예수님의 생애(7. 천국복음) / 마태복음 4:17, 마가복음 1:15, 누가복음 4:43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눅 4:43)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그 때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모아 두었다 땔감으로 사용했습니다. 부잣집은 돈을 주고 장작을 많이 사다 놓습니다. 저희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산에가서 직접 나무를 해와야 했습니다. 아버님은 장사를 하시기 때문에 여러 장터를 옮겨 다니십니다. 그래서 집에서 어머님하고 저하고 나무하러 갑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님은 밤이 되어 어두워서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무를 하셨습니다. 저는 무서워서 “그만 가 엄마!”라고 보챘습니다. 그러면 저희 어머님은 “그래 조금만 더 참아”하시면서 점점 어두워지는데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맘놓고 일할 수 있는 것은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둔 밤일지라도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그 맘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갈 집이 없는 나그네는 해가 지기 전에 벌써 ‘오늘은 어디서 하룻밤을 묵어갈 것인가?’하고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영혼이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죽음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낙엽이 떨어져 굴러다니는 것을 보면서도 그리 슬퍼하지 않습니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돌아갈 집이 예비 되지 않은 영혼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낙엽을 보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돌아갈 곳이 없다면 큰 낭패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을 가지고 성공했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은 우리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1. 기독교의 슬로건
역사상 새롭게 등장하는 모든 사상은 하나의 슬로건이 있습니다. 불란서 혁명의 표어는 “자유, 평등, 우애”이며 이슬람교의 표어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은 없으며 모하메드는 하나님의 사도이시다”입니다. 무슬림들은 이 표어를 기도할 때마다 반복합니다. 앞부분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뒤 부분은 ‘모하메드만이 하나님의 사도’로 인정하는 잘못된 고백입니다. 북한의 표어는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입니다. 위대한 사상가나 단체는 모두 슬로건이 있습니다. 요즘 기업의 슬로건은 아마도 손님을 왕같이 모시는 최고의 서비스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름대로의 슬로건이 있는데 기독교의 최대 슬로건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말씀의 제목을 따라합시다. “천국복음”입니다.
복음서에만 “천국,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100회 이상 언급되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핵심주제이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 하시면서 “8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눅 10:8-9)고 하셨습니다.

2. 예수님 설교의 중심 주제
예수님의 첫 설교 제목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입니다.
그 유명한 산상복음의 팔 복에서 처음 말씀하신 것도 천국입니다.
(마 5: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루터는 “율법의 방망이로 얻어맞은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천국은 회개한 자의 심령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찌할꼬”의 찔림에 몸부림치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구약이 없는 곳에 신약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회개가 없는 곳에 사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가난하다”는 말은 “나에게는 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실제의 의도 없지만 혹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철저하게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그 때 천국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팔 복의 마지막 여덟 번째도 천국입니다.
(마 5: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 역시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요한복음 3장 1-12절까지 니고데모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관원(70명의 산헤드린회원 중 한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밤중에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그는 세상 적으로 볼 때 더 필요한 것이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솔직히 자신도 선생의 위치에 있었지만 천국에 관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공부 많이 하면 천국에 관한 문제가 해결됩니까? 아니면 국회의원쯤 되면 천국에 관한 문제가 해결됩니까? 아니면 사장님, 회장님쯤 되면 천국에 관한 문제가 해결됩니까? 안됩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예수님께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전한다는 소문이 유대에 다 퍼져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에서 이영제 목사가 주일날에 예수님에 대해서만 설교한다고 소문이 나야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수 있는 분들이 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같은 표적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3:2).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마음을 아시고 묻기도 전에 천국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3-5)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증거하신 말씀도 천국입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국”이라는 말이 예수님께 처음 나온 말이 아닌 것도 알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천국사상이 흠뻑 들어있는 민족입니다. 구약성경에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4)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천국 사상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이며 세속적인 천국으로 변질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로마의 통치와 압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이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행 1:16)라고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현대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민족주의자들을 발견합니다. 이탈리아의 마지니, 중국의 손일선, 인도의 간디, 베트남의 호치민과 같은 사람들은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의 민족으로 볼 때 민족을 새롭게 발전시키는 혁명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는 최선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민족주의자가 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의 민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역사상 제일 지독한 민족주의자들을 말하라면 ‘유대인’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요 4:9)“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유대인이 범한 실수 중 큰 것은 첫 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라고 소리친 것이고, 두 번째가 성전을 이방인에게 닫은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유대인들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진 경계선이 있습니다. 〔이방인은 이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 누구든지 이 규칙을 위반하는 자는 죽임을 당한다.〕입니다. 그러면 다른 이방인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산에 예배할 곳을 만들어 놓고 나름대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나라”사상은 있었지만 이처럼 왜곡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처럼 잘못된 천국을 바로잡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민족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그의 친구들의 것입니다. 천국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이 땅의 물질주의 적인 것이나 정의를 실현한다고 공평을 말하면 공산주의처럼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또한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
(고전 6:9)“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 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 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고전 6:10)“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갈 5: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엡 5:5)“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
(살후 1:3-5)“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리라”
(약 2:5)“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벧후 1:5-11)“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천국으로 갔더니 천국 문에 천사가 떡 버티고 서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곳에 온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꿈이었지만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이 안에 누가 들어가 있습니까? 로마 카톨릭 신자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장로교인들은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아니! 로마 카톨릭 사람이라면 몰라도 장로교 신자들은 왔을 텐데 그러면 성공회 교인들은 몇 명이나 있습니까? 그 사람들도 없습니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럼 감리교인들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누가 있습니까? 이곳에는 교파를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예수 믿는 사람만 있소. 그 다음에는 천사의 안내를 받아 지옥문에 갔는데 거기도 문지기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여기도 혹시 카톨릭 신자가 들어왔습니까? 예, 많이 들어왔습니다. 장로교인들도 있습니까? 네, 많이 왔습니다. 성공회 신자도 있습니까? 예, 많이 왔습니다. 그럼 감리교신자도 있습니까? 예, 많이 왔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아니! 감리교인들도 왔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이곳에 어떤 분이 들어왔다는 말입니까? 거듭나지 못한 사람, 예수님을 건성으로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만 들어왔습니다. 거기에서 요한 웨슬레가 꿈이었지만 엄청난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장로교를 믿습니까? 감리교를 믿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스코틀랜드 성도들이 박해를 받아 사방으로 흩어져 황무지와 토굴 속으로 숨어 다닐 때 적은 스칼취의 한 사람을 잡아 “스코틀랜드의 모교회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대답하기를 “스코틀랜드의 깊은 산골에서 기도하는 남녀 젊은이들이 모인 곳, 그곳이 바로 스코틀랜드의 모교회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와 같이 누가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모인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앙교회가 이와 같은 교회인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입니다.
(마 5: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팔 복의 첫 번째도 마지막 여덟 번째도 천국입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예수님께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 있는 사람을 말하겠다.”하시고 만일 “시험을 본다든가, 달리기를 한다든가, 돈일 많이 벌어야 한다든가.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든가”하셨으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천국이 저희 것이랍니다. 할렐루야

 

나의 빛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26. 나의 빛이신 예수님) / 본문 : 요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하나님께서 넷째 날에 창조한 것은 해와 달과 별의 빛입니다. 태양에 빛이 없으면 이 지구 위에 사람들이 살 수 없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이나, 날 짐승이나 벌레도 살 수 없습니다. 햇빛이 없으면 식물도 자랄 수도 없습니다. 식물이 꽃을 피지 못하고 곡식이 성장하여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빛이 없으면 금수 초목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인생들까지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캄캄한 밤에 전등불이 없으면 작은 촛불이라도 켜야합니다. 캄캄한 밤에 불이 있어야 합니다. 불 없이 잠시라도 지내기가 힘이 듭니다. 빛은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입니다.
우리의 현대문명은 빛의 문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컴퓨터나, 텔레비전, CD플레이어 등은 알고 보면 모두가 빛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전자기기들은 레이저에서 방출되는 광선을 이용하여 우주 통신, 정밀 공작 등에 널리 응용되고 있습니다. 병원에 의사들이 현대최신 기계(엑스레이)를 가지고 사람의 내부를 들어다 봅니다. 이것은 다 빛의 작용입니다.
우리나라 포항제철에 만든 ‘포항방사광가속기(PLS : Pohang Light Source)’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체 부지는 660,000㎡로서 이중 조성한 부지는 110,000㎡이며 축구 경기장으로 비교하자면 약 20개 정도의 크기에 해당하게 되는데, 8개 동의 건물은 42,000㎡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재 방사광가속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12개국뿐이며, 더욱이 ‘포항방사광가속기’처럼 광범위한 영역의 빛을 만드는 최첨단 3세대형 가속기는 6개국밖에 없습니다.
단일 실험 장치로서 건설비가 무려 1400억원이 소모되었고 건설 기간만도 5년여 남짓 걸려 완성되었습니다. 이 장치는 에너지가 25억 전자볼트를 이용하여 전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보통 실험실에서 얻을 수 있는 적외선, 자외선, X선 보다 그 밝기가 몇백만 배에서 수억 배에 달하는 강력한 빛이 나타납니다. 이 빛을 이용하면 생명공학, 의학, 4G D램 이상 초고집적회로 등 첨단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과학기술을 선도할 ‘미래를 밝히는 빛’이라고 말합니다. 빛이 없으면 현대문명도 이만큼 발전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로 선포하신 두 번째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축제 기간인 초막절이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두 가지 의미 있는 예식행사가 있는데 하나는 성전 제단에 물을 끌어들이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좋은 기회를 교육에 활용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7-38)라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신 동기가 된 예식입니다. 4개의 황금 촛대를 밝히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젊은 제사장이 사닥다리에 올라 황금 촛대에 점화함으로 온 성전과 예루살렘을 빛으로 밝히는 상징적인 행사인 것입니다.
이 두 예식은 초막절에 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것을 상징화 한 것입니다(출13:21-22, 14:19-25).
요1:5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예수님을, ‘어두움’은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빛이 계속하여 세상에 비취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으로 온통 덮혀 있어서 어디를 보아도 빛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빛이 비취고 있지만 어두움이 이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두움과 빛은 서로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공존할 수도 없고 합쳐질 수도 없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이 빛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에는 ‘이기지 못한다’(overcome)는 뜻이 있습니다. 어두움이 아무리 강해도 빛이 비취면 단숨에 물러갑니다. 우리는 어두움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두움에 파묻혀 그럭저럭 살아가고, 빛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은 희망과 기쁨이 없습니다. 세상을 보고 잘 살아보려고 노력들 하시지만, 미안하지만 세상에서 그것을 얻으실 수는 없습니다. 혹 얻었다고 해도 영원한 것이 못되며 오히려 여러분을 착각 속에 빠지게 하여 영원하신 빛을 바라볼 수 없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쁨과 소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빛이십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라고 말했습니다. 하바국은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합 3:4)하셨습니다.
모세와 대화하실 때도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신 방법중의 하나로 빛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빛으로 말씀하신 것은 그가 곧 하나님 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빛으로 오실 것을 갈망하던 사람들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시27:1, 잠6:23). 이사야는 오실 메시야를 가리켜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사 49:9)이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이 누가복음 1:78-79에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요1:4-9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해 주심으로 이 예언된 말씀들과 이루어진 말씀에 대해서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4:16에서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하나님이 빛이시고 예수그리스도가 빛이시니 당연히 우리도 빛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 5:14)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라고 했습니다.

단체의 [신곡] 가운데 나오는 내용입니다. 단테가 한번은 지옥에 가서 구경을 합니다. 한 구석에 가보니 여러 사람들이 등에다 무거운 돌을 지고서 있습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고 서 있습니까?” 그가 말하기를 “저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에 교만해서 허리를 굽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올라가는 문은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 하기 때문에 그 연습을 하느라 저 모양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리 허리를 굽히는 것을 배웠더라면 얼마나 좋을 뻔했습니까?
우리가 빛을 발한다는 것은 높은 지위나 명예가 있어서만 비추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개인택시기사 한 분 소개할까요. 이분 성함은 강박수입니다.
이분은 낙천적인 성격에 하나님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눈 비시시 부비며 일어난 아내는 “당신은 매일 뭐가 그렇게 신나요?”라고 묻는다. “당신은 가서 잠이나 한잠 더 푹 자구려”하면서 아내를 두드립니다. 강집사는 휘파람을 불면서 “하나님 오늘 으싸으쌰~ 한번 살아볼 텐데 하나님 오늘도 팍팍 밀어주세요? 달구지도 잘 굴러가게 하시구요. 아무리 사랑스럽지만 다른 달구지하고 절대 키스는 안됩니다.”하면서 집을 나섭니다.
첫 번째 만난 손님은 길 저쪽에서 안경쓰고 손을 높이 흔드는 여자. 예전 같으면 안경쓰고 특히 여자를 이른 아침부터 태우면 재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손 흔드는 사람은 무조건 OK
“어서 오십쇼! 굿모닝!” 형식적인 아침인사가 아니라 씩씩하고 우렁찬 소리로, 그러나 손님은 요즘같이 무서운 세상에 혹시? 긴장을 하면서도 아니지. 기사양반 성질 건드렸다간 나만 손해보지… 하는 쪽으로 사고가 진전되면서 마지못해 ”네 좋은 아침입니다.“ 조용히 말합니다. 강집사는 손님의 표정을 흘깃 거울 속으로 바라보니 표정은 좋은 아침이 아니다.
”어디로 모실갑쇼?“ ”세브란스 영안실이요!“ ”저런 누가 돌아가셨군요.“ ”네가 젤 존경하는 친척분 한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요새는 왜 그리 폐암이 부쩍 많답니까?“ ”그분은 술, 담배도 안하셨는데…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처음엔 귀찮았는데 이제 대화가 되었습니다. ”어느새 다 왔습니다. 이거 섭섭합니다. 살다보면 또 만나겠지요. 건강하세요“
두 번째 여자손님. 무엇에 쫓기는지 아니면 무엇을 쫓는지 여간 급하지가 않았다.
“기사 양반 남대문으로 빨랑 갑시닷!” 사뭇 명령조다. 그렇다고 기분 나빠할 강집사님이 아닙니다. “아마 누가 기다리시는 모양이죠?” 여자는 흘깃 쳐다보면서 뭐 이딴사람이 다 있어? 데려다주고 돈만 챙기면 되지 하는 눈치입니다. 강집사님은 이럴 때는 음악을 틀어줍니다. “클레식을 좋아하실 것 같은데…. 어디 베토벤 없나?”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음악은 달콤한 뽕짝을 틀어줍니다. 일단 클래식으로 허영의 사다리를 타본 여자는 뽕짝의 추억에 조금씩 풀어집니다. “사실은 내 돈 떼어먹고 도망간 여자가 남대문에서 장사를 한데지 뭐예요. 지금 안가면 못 만날까봐 잠도 설치고 지금 갑니다.” “아이쿠 오래 되셨나요?” “5년도 넘었어요. 내가 받은 고통은 말로 다 못해요. 이혼까지 할 뻔했어요.” “그러게 사람일은 한치 앞을 모른답니다.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하고!” 여자는 이제 손뼉이라도 칠 기세였다. “맞아요. 맞아!”
이렇게 이야기하다가는 밤 세웁니다. 저녁때로 갑니다. 어둑어둑 해질 때 아파트 입구에서 할머님 한 분을 태웠습니다. 며느리로 보이는 젊은 여인은 돈을 두둑이 주면서 “말죽거리에 가면 박 의원이 나와있을 겁니다. 그곳에 안내해 드리면 돼요!” 그러나 할머니는 내릴 곳이 다가오자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며늘애가 날 버린 거라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우.” 말로만 듣던 신종 고려장에 직접 동참을 한 꼴이 되었다. 하도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할머니를 다시 집으로 모셔다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집이 몇 동 몇 호인지 아십니까?”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할머니는 서글픈지 고개만 저으며 말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태웠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한참을 해매고 수소문해서 그 집을 찾았다.
골치아픈 암 덩이리 하나를 치운 것으로 생각했던 며느리는 돌아온 할머니를 다시보자 경악을 했다. “아니 누가 당신더라 남의 집일에 감 나라 콩 나라 하랬어?” 시퍼런 여자가 늙어가는 강집사에게 퍼붓는 소리다. “돈도 푸짐하게 주었는데 눈치껏 내려주기만 하면 될 거 아냐?” 더 이상 대화가 안 되는 이 여자와 말할 가치를 없어서 무뚝뚝하게 “주인 양반 안 계십니까?” “남의 주인을 왜 찾아? 외국 출장 중인데 왜?” ‘아 남편 없는 틈을 타서 시어머니를 버리시겠다? 하이고 잔머리 한번 요란하게 군리셨군 그래?’라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래도 당신 남편을 낳아주신 분 아니오? 잘 좀 돌봐드리십시오!”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오늘은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았지만 가는 길에 서울역에서 아줌마가 탔습니다. “아자씨, 이거 보고 요기로 데려다 줘유.” 얼굴에 기미가 덕지덕지 낀 시골 아줌마는 주소, 약도, 전화번호까지 적힌 너덜~너덜~한 종이를 내민다. 아줌마는 시골에서 더 이상 먹고살기가 힘들어 가족 대표로 여관집에서 식모 살러 오신다고 했습니다. 월급은 130만원인데 이 액수에 황홀해 있었습니다. 꿈이 부푼 아줌마에게 말도 못하고 약도를 따라 그 앞에 내려드리면서 ‘하나님 이분이 어린양 아닙니까? 지켜주세요.’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일하시면서 힘들고 어려우시면 가까운 교회에 나가세요. 그곳에 아줌마를 지켜주실 하나님이 계십니다.”라고 말할 때 고쟁이 속바지에서 돈을 꺼내주려는 아줌마에게 웃으면서 “아줌마 서울에 오신 것을 기념으로 제가 무료 서비스합니다. 돈은 그만 두십시오.” “아자씨, 시방 머라고 하셨당가유? 돈을 안내도 된다구유?” 강집사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줌마는 모두지 믿을 수 없다면서 말합니다. “아니 왜유? 밸일도 다 있구만유. 서울가면 코 베어간다고 조심하라고 하든디 다 거짓말 이네유? 아자씨 참말로 공짜란 말이어유?” 강집사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아줌마 행복하게 사세요. 꿋꿋하게 사세요. 예수님 믿으시구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앗 뜨거워 앗 뜨거워 주님의 사랑”을 찬양한 졸라맨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표현된 주님의 사랑인데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웨일즈에 나이 많은 설교자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유능한 노인이고 훌륭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기 거북하지만 그는 비꼬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예리한 비평가였습니다. 어느 기회에 그는 두 사람이 강사로 되어 있는 두 집회의 마지막 시간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신학교 교수들이었습니다. 처음에 한 강사가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설교를 마치자마자 이 문제의 설교자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빛만 있지 열은 없군”하고 말했습니다.
두 번 째 강사가 설교했는데 그는 전번 설교자 보다 나이가 많고 다소 열정적이었습니다. 그가 설교를 마쳤을 때 그 냉소적인 교수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고개를 돌리고 “열만 있지 빛이 없군”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경우에 있어서 그분들은 다 바른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설교자가 다 결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빛과 뜨거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뜨거움이 없는 빛은 결코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빛이 없는 뜨거움은 영구한 가치가 없습니다. 모르지요. 지나가는 비처럼 당분간 화끈하는 효과가 있을지.

빛은 불에서 나옵니다. 불은 뜨겁습니다. 사람의 몸도 차가우면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잃으면 금방 차가워집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뜨거운 것입니다. 사랑하면 뜨겁습니다. 한마디로 불이 납니다. 차가운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불타오릅니다. 그리고 빛이 발산됩니다. 뜨거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처음 표적

예수님의 생애(6. 처음 표적) / 요한복음 2:1-11

“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우리 나라 최고기온이 연일 경신되고 있습니다. 35도는 이제 ‘그것도 더위냐’ 할 정도로 별 것 아닌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름에는 무서운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더위도 식힐 겸 제가 무서운 이야기 하나 해 드릴께요.
45층 짜리 아파트 꼭대기에 사는 잉꼬부부가 있었습니다. 꼭 퇴근시간을 맞추어 함께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걸어서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45층까지 올라갈 생각을 하니 암담했습니다. 그래서 지루함을 잊고 재미있게 올라가기 위해서 번갈아 가며 무서운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처녀귀신, 몽달귀신 등 갖가지 무서운 이야기가 다 나왔습니다. 드디어 44층까지 올라왔습니다. 이번에는 아내가 이야기를 할 차례였습니다. 아내는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남편을 기절시킨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여보, 나 수위실에서 열쇠 안 찾아왔어.”
이렇듯 사람들은 뜻밖의 결과에 깜짝 놀랍니다. 오늘 본문도 깜짝 놀랄 사건이 소개됩니다.

갈릴리의 작은 마을 가나에서 혼인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정확히 누구의 혼인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친척 중의 하나이거나 제자들의 친척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 제자들이 초청을 받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1-2주간에 걸쳐 길게 진행됩니다(창29:27, 삿14:12).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이 잔치에 예상외로 많은 손님이 왔습니다. 이 때는 혼인 잔치가 끝날 무렵이었기 때문에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막바지에 이른 잔치 집의 흥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주인으로서는 기분 좋은 잔치를 망치는 것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 마리아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진 이 상황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4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어머니를 부를 때 사용한 “여자여”는 한글개역성경에서 어색한 표현으로 들리게 번역되었습니다. 원어의 guvnai(귀나이) 존칭 호격으로 “여성, 부인”을 뜻하며, 그리스에서는 자신의 아내를 다정스럽게, 그리고 최고로 높여 부르는 존칭어입니다. 이 말은 왕후를 부를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사용하는 “마담”이라는 단어도 프랑스에서는 여성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프랑스 대사관에서 한국정부에 건의도 하고 압력도 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화가 되어버려서 정부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한 것은 포도주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마리아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다시 표현한다면 “나에게 무슨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다면 그것은 마리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한에 의해서 이루어 질 수 있음을 묻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들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리아도 잘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와 자신의 육신 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밝혀두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로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의 여러 경우를 예수 이상으로 신격화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격렬한 어조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거의 다 빼앗아버린 미친 헛소리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은 이런 일을 염두 해둔 예수님의 질문이었습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4절 하반)
w{ra(호라) “정한 때”는 일반적으로 지정된 시간을 말합니다(눅14:17, 행3:1).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의 시작을 자신이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 때를 기다려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때를 회피하거나 서두르지는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운전하실 줄 아시지요. 처음에 면허증 따고 너무 기뻐서 운전면허 시험장 나무껍질이 벗겨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면허증 교부 받아 가지고 그것만 쳐다보고 오시다 나무를 받아서 껍질이 다 벗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운전할 줄 알면 운전하고 싶어서 몸살이 납니다. 이런 증상은 1년 이상 간답니다. 차만 보면 운전하고 싶은 겁니다.
아마 우리가 능력이 있으면 못써서 몸살이 났을 겁니다. 태권도 처음에 배워보세요. 내가 정말 힘이 쌘 건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한번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괜히 시비를 겁니다. 싸움에 자신 있는 것 같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진짜 고수는 길거리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러시아 선교사님 한 분 중에는 합기도 9단에 태권도 7단의 소유자입니다. 그런데 몸집도 작고 선교사가 고단 수의 운동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어설픈 사람들이 조금 힘이 있으면 사용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있는 사람은 결코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직 한번도 사용해 보지 않으셨기 때문에 시험을 해 볼만도 하신 데 안 하십니다. 사실 처음에 사단이 시험할 때 그 능력 사용하시기를 시험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믿음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에 섭섭하기보다는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고 말했습니다. 따라합시다. 기적은 믿음에서 일어난다. 기적은 순종에서 일어난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됨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6절) 유대인의 집 입구에 놓인 이 항아리는 민19:1-22에서 유래한 정결 의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는 매우 큰항아리로 약 70-120리터 정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항아리가 6개이면 적어도 420리터에서 720리터에 달하며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충분히 마실 양이 들어갑니다.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기적은 일어났는데 그 흔한 주문 같은 것 하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컨데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어라”라고 명령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잘 보세요. 그런 말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본문은 ‘물을 항아리 아구까지 채우고 그냥 그 물을 떠다 주어라’고만 했습니다. 이후에 일어나는 기적도 대개가 하나님께 미리 감사의 기도를 하시거나 교훈을 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 밖에 없습니다.
“아구까지 채우니”는 그들이 100% 순종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순종이란 하다말면 소용이 없습니다. 99% 순종하고 한번 거역하면 그것은 거역한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순종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기적을 일으키게 합니다.

하루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 지휘관이 그날의 전투 상황에 대해 장교들과 함께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이 물었습니다. 어느 군인이 그 날 가장 탁월한 군인이었는지 생각들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어느 장교는 가장 탁월한 군인은 그 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군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장교들은 이 군인, 저 군인 자기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지휘관은 말했습니다. “아니오. 여러분 모두가 다 틀렸어요. 오늘 전장에서 최선의 군인은 적을 죽이려고 칼을 들어 막 내리치려는 순간 퇴각 나팔 소리를 듣고 적을 치지 않고 팔을 내리고 나팔 소리대로 후퇴한 군인입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오늘의 가장 고귀한 일인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순종함으로 된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땅에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17:7-8절에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출애굽기 6:8절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의 시작은 이렇게 합니다.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마 1:1-2) 하나님의 세계는 순종의 믿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건축 설계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집을 설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많은 손님들은 이미 마음속에 원하는 모양의 집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모양대로 설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만약에 제가 설계한 것이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은 몹시 못 마땅해 합니다”
물론 집이야 자신들이 원하는 모양으로 설계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들의 삶을 자기가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을 설계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서 설계하신 인생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연회장은 오늘 우리로 말하면 주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주례처럼 잠시 교훈적인 주례사만 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연회가 마칠 때까지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연회장은 신랑, 신부를 잘 아는 동네의 어른이며 잔치에 제공되는 음식을 감별하는 임무도 연회장에게 있었습니다. 포도주를 연회장에게 먼저 갖다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에 의해서 좋은 포도주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서 보통은 먼저 좋은 것을 내어놓고 술이 어느 정도 취한 다음에, 한마디로 맛을 잘 모를 때 나쁜 것을 내놓는 것이 일반인데 잔치 끝 무렵에 좋은 포도주가 나온 것입니다. 한마디로 당시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형식주의에 이미 오래 전부터 빠져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우리의 양반 풍습하고 비슷합니다. 유교문화에서 나온 풍습이야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백성에게서 형식주의가 나온 것은 믿음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바뀐 것입니다.
옛날 백제에서는 불교 행사의 하나로 짐승을 놓아주는 날이 있었습니다. 불교 중생의 자비에서 나온 풍습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래 자비 사상은 이해하지 못하고 그 형식만을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 날에 놓아주려고 짐승을 잡아 가지고 있다가 그날 놓아주는 난센스가 있었습니다. 꼭 흥부처럼 제비의 멀쩡한 다리를 부러뜨려 다시 고쳐주는 선심처럼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이런 형식주의로 변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오늘 혼인잔치의 주인은 사실 정말 좋은 포도주를 숨겨놓았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와 같은 칭찬을 듣게 된 것입니다.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9절)
그러나 정녕 이 연회장은 이 좋은 포도주가 어떻게 나왔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마리아의 부탁대로 예수께서 무엇을 시키든지 그대로 할,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순종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오지 않으시는 분들이 교회에 다니는 재미를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순종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눈빛만 보아도 압니다. 목자는 양을 알아봅니다. 양은 자기의 목자를 알아봅니다.
여러분! 연회장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순종하고 그 기적을 예수께서 일으켰다는 것을 알게된 이 하인들이 복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믿게되기 때문입니다.

영광을 나타내고, 제자들이 믿음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절) 우리는 예수님의 처음 기적에서 이 기적의 목적이 두 가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혼인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져 좀 창피하고 문제가 생겼다고 합시다. 솔직히 그것이 예수님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처음에 예수님은 스스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간청과 순종하는 하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을 보고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솔직히 본문을 해석해온 지금까지의 입장을 보면 혼인집 주인의 난처한 입장을 너무 많이 부각시켰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혼인집의 안타까운 사정은 익히 알겠지만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다시 따라합시다. 기적은 믿음에서 일어난다. 기적은 순종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적을 절대로 자신의 이익과 사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주신 능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만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이 기적을 통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께서 친히 능력을 나타내신 적이 없으시고 이 기적이 처음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이 기적은 표적이 된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도 하나님의 주신 헌금예물,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개인에게 주신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재능,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의 이익을 위해서, 내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 미련한 것이며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의 생애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를 좇으라

예수님의 생애(5. 나를 좇으라) / 요한복음 1:35-51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처음 만남(부모님)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친구와 선생은 선택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인생은 만남입니다. 우리 서로 인사하십시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너와 나의 만남이 있었기에 인생은 시작됩니다.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현재 만나는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최선을 다해 선을 베푸는 일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처음 하신 일
본문은 예수님과 첫 제자들의 만남에 대해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하신 사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제자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길러주어야 고마움을 모른다는 뜻으로 “머리 검은 짐승은 기르지 말라”는 비하 적인 발언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선교에 대해서만 20여 년 연구하고 고민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선교를 위해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란 질문을 늘 스스로 던지는데 역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을 가르치는 일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처음 사역의 시작이 제자를 만드시는 일부터 하십니다. 그리고 다음 요한복음 2장에 첫 번째 이적인 잔치 집의 포도주가 없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일이 소개됩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처음제자 두 명은 세례요한을 따라다니던 사람인데 예수님께 옵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이 36절에서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소개하면서 따라갔습니다. 두 명중의 한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40절)인 것을 밝혔습니다. 본문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사실 안드레가 처음 예수님께 온 제자인데도 불구하고 소개할 때 “베드로의 형제”로 말합니다. 사람들이 누구를 말하면 안드레가 소개된다는 것입니까? “베드로”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임과 동시에 그의 활동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한 제자는 누구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사도요한”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 성경을 누가 쓰고 있습니까? 요한입니다. 요한 자신은 다른 제자가 나올 때는 모두 빠짐없이 그 이름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유독 자신이 있는 곳에서는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요한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을 좇아오자 예수님은 첫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을 구하느냐?(38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본문 “구하느냐”(제테이테:zhtei’te)는 ‘찾아다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물어보다, 질문하다’로도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너희가 찾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지금까지 “메시야”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제자들만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 모두, 아니 인류가 찾고있었던 것입니다. 이 동사는 구원에 관계되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마 18:12, 눅 19:10). 본문은 요한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첫 말씀입니다. 이것은 죄악 된 세상에서 “사람이 참으로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두 제자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참 진리를 찾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랍비”(@Rabbiv)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에게 랍비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부모가 부르고, 랍비가 부르면 랍비에게로 먼저가야 합니다. 모든 우선 순위가 랍비에게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랍비라는 것은 단순히 학문을 가르치는 선생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인도해야 되는 전적인 선생인 것입니다. 유대인이 왜 오늘날도 세계의 중심이 되는 민족이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선생을 믿고 따르는 절대적인 교육에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따르겠다는 고백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와 보라!(39절)
고 하셨습니다. “오다”(에르코마이:e[rcomai)는 말은 “미래 중간태 직설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것은 구원에 대한 예수그리스도께 나오는 사람에게 초청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생각하는 구원이 여기에 있다. 참 잘 왔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내용과 관계없이 갑자기 요한은 시간을 말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41절)
정확히 옮기면 “우리가 찾던 메시야를 발견했다”입니다. 이 제자들은 메시야를 간절히 소망했기 때문에 먼저 세례요한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메시야를 만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시몬’에게 전했습니다. ‘시몬’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유대인이면 누구나 “메시야”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시몬’역시 그랬을 것입니다. ‘시몬’은 구약시대 ‘시므온(쉬메온)’ 12지파의 한 지파의 자손으로 야곱의 둘째 아들의 명칭과 동일한 이름입니다(창 34:25-31). ‘시므온’은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베드로’역시 성미가 급합니다. 이런 급하고 충동적인 성격의 소유자 ‘시몬’을 파악하신 예수님은 앞으로는 ‘게바(베드로)’로 불러지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슬픈 일이 닥칠 때 “오! 하필이면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하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지만 기쁜 일이 일어났을 때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오! 하나님 이런 일에 나에게 일어난 것을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좇으라
43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셨습니다.
“좇으라(아콜루데이:!Akolouvqei)”는 현재 명령형으로 지금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지금까지 예수님의 부르심이 열려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도 첫 번 제자들처럼 예수님 만난 것을 나다나엘에게 전합니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첫 번 제자들이 예수님을 소개한 방법과 지금 빌립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방법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 번 제자들(안드레, 요한)이 베드로에게 전한 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입니다. 베드로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따지고 묻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곧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전한 두 제자의 말도 간결하고 명확했습니다.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나름대로 조금 더 자세한 소개를 한다고 복잡하게 말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여기 까지는 “메시야”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길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말은 처음부터 안 해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인식이 “나사렛”을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국회에 신청한 법안 중에 하나가 사람을 고용할 때 일과 무관한 개인적인 정보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엄격하게 제한하는 법률입니다. 이 법은 업무에 관계된 일과 상관없는 “출신지역, 가족사항 등”을 의무적으로 적도록 한 인사양식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록들은 사람들을 개인의 능력과 관계없이 단순히 “어느 지역의 출생이다. 누구의 자손이다.” 라는 것으로 사람을 바르게 평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빌립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구태여 처음부터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을 말할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앙교회로 사람을 인도할 때 목사인 저에 대해서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 만일 “이영제 목사님은 경기도 마석에서 출생한 분입니다.”라고 소개하면 “복음하고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마 전해듣는 사람들이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빌립의 소개에 대해서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
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고있었습니다(미 5:2).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마을로 율법주의자들은 이 지역을 여러 모에서 무시했습니다(요 7:52). 특히 학문적인 견지에서 나사렛에서는 큰 인물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강경한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와 보라”는 말로 강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는 반신반의하면서 빌립을 따라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다가오는 나다나엘을 보고 예수님은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절)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장점을 파악하셨습니다. 그리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은 겉과 속이 진실하고 같다는 말입니다. 이런 칭찬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칭찬하면 고래도 춤을 춘다”는 책도 있습니다.

격려와 칭찬은 삶의 활력소가 됩니다. 화학을 전공하는 한 학생이 중간고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시험문제는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님의 생애(4. 사탄아 물러가라) / 마태복음 4:1-11, 마가복음 1:12-13, 누가복음 4:1-13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 4:1-11)

한 경건한 남자가 만원버스를 타고 가는데 버스가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옆에 앉아있던 아줌마에게 몸을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즉시 마음속으로 “주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차가 기우는 바람에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몸이 쏠렸습니다. 그러자 이 남자가 이번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사람들은 시험에 직면하게 될 때 하나님이 이런 환경을 허락하셨다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시험은 그런 종류의 시험하고는 다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사단과 대 전쟁이 이었습니다. 어떤 설교에 대한 책에 보니 설교제목도 잘 정해야 하고 특히 사람들의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광야 대 전투”로 해 보았다가 그냥 제 스타일대로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목도 물론 중요하지만 늘 말씀의 본질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말씀에 젖어 드시기 바랍니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본문 1절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고 했습니다. 같은 사건이 마가복음은 두절을 사용하며 아주 간단하게 기록했는데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막 1:12-13)고 했으며 누가복음 4장 1절은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라고 했습니다.
공관복음서 모두가 “성령에게 이끌리어”라고 했습니다. 시험을 받는데 왜 성령에게 이끌리셔서 가셨습니까? 예수님의 시험은 ‘마귀에게 이끌리어’ 받은 시험이 아니라 “성령에게 이끌리어” 받으신 것입니다. 성령에게 이끌리셨다는 것은 마귀의 시험(도전)을 받아들이셨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사단이 처음부터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거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성령에게 이끌리어”입니다. 원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시험 또한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마귀를 멸하려 오신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피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역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단의 시험을 받아들인 것은 이제 사단과의 정면대결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 사단에게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1절 “그 때에”는 예수님 세례 직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마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아담 이후 마귀가 왕 노릇하며 지내온 시대가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에 차단하는 것이 마귀의 생각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도 시험했습니다. 하물며 우리를 시험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때는 사역초기였습니다. 지금도 사단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을 시험합니다. 처음부터 방해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시험을 이겨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십 일을 금식하신 후에
본문 2절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시험할 때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주 마귀는 영악합니다. 보통은 금식기도를 못하도록 처음부터 방해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 마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굶주린 상태에서 육체를 입으신 약점을 파고들었습니다.
우리도 시험을 당할 때에 마귀는 우리가 열심히 찬양하고, 기도할 때는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직후 낙망에 떨어지거나 육체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찾아옵니다. 시험에 떨어진 학생에게 다가옵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여러분! 마귀를 지나치게 무서워해도 안되지만 얕봐도 안됩니다. 마귀는 영적인 존재입니다(엡 6:11, 12). 마귀는 원래 천사가 타락한 것인데 에스겔 28:12에 보면 천사 중에 탁월한 존재였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잊어버렸던 부끄러운 과거도 다 알고 있습니다. 나에 대해서 아는 것 만 아닙니다. 우리 조상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귀는 사람에게 들어갑니다. 사실 여러분 마귀가 행동을 강하게 안 할 뿐이지 성령을 받지 않은 분들은 마귀가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내버려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가면 그 성령을 몰아내려고 찾아옵니다. 그래서 시험을 당할 때는 육체적으로 약할 때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성령이 충만할 때이기도 합니다. 바울도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했습니다. 영악한 사단은 예수님께 3번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시험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험(물질적 약점)
본문 3절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것이 사단의 첫 번째 시험입니다. 사단의 이 시험은 세 가지를 집중 공격하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실제로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사단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야! 그까짓 꺼 한번 시험해 봐라! 여기 돌들이 널려있지 안냐! 네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아니냐?”고 유혹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큰 일을 위해서 너를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런데 광야에서 굶어 죽어서야 되겠느냐?”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만 배고픈 것이 아닙니다. 이 시절의 사람들은 로마 압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양식이 없어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단은 예수님께 “이제 네가 이 많은 돌들로 떡을 만들어 너도 먹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면 좋지 않냐?”는 유혹입니다.
이 그럴듯한 사단의 유혹에 대해서 예수님의 대답은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단의 말에 귀가 솔깃하여 넘어갔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으니까 한번에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실제로 배고프지 않고 떡이 완전히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예수님)는 하나님을 말씀을 듣지, 너(사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제가 왜 그토록 성경을 읽으라고 권면 합니까! 성경말씀 그 자체가 우리 믿음의 뿌리요, 사단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사단의 말대로 예수님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하였다면 예수님은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위해 오셨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의 배고픔조차 이해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정신적 허영)
본문 5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광야 40일 기간에 금식만 하신 것이 아니라 금식기도를 하셨다고 믿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도하시겠지만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은 인류 대 구속사역을 위해서 어떻게 공생애를 준비해 나가 실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에 사단은 그럴듯한 제안을 해 온 것입니다.
공생애 시작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되면 얼마나 사역하기 쉽겠냐?”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복잡하게 성전에서 가르치지 않아도 되고, 무식한 제자들을 불러모을 필요도 없을지 모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능력이 있는데 무엇을 고민하느냐?”는 유혹입니다.
성전은 해발 750m의 고지 위에 약 54m의 높이로 세워졌기 때문에 성전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을 느끼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일 예수께서 사단의 말대로 했다면 서커스단의 묘기처럼 사람들에게 한번은 박수갈채를 받으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매일처럼 그런 광대 같은 일만을 하라고 예수께 부탁을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눈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았지만 표적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8-39)

세 번째 시험(본질적인 영적 신앙의 문제)
본문 4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시험했습니다. 이 시험의 주체는 마귀입니다. “천하 만국”이 사단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운행하십니다. 사단을 이해할 때 한가지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사단은 파괴하는 것, 죽이는 것은 하지만 살리는 것은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 이러한 시험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담은 사실 이 시험에 넘어간 것입니다. 사단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다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번에도 강하고 호되게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체 명령 481개인데 그 중에 마태복음에 162개가 나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는 그 중에 첫 번째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에 사단은 굴복했습니다.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단에 완전히 떠나거나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되겠다고 하실 때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마 16:22). 이 때에도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호통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참기 어려운 고통 중에 계실 때도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마 27:40)고 조롱하며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의 싸움은 사람이 아니라 사단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단의 방해였습니다. 우리 속담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 1:28-29)라고 했습니다. 사단을 이기는 것은, 모든 불의를 이기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성경의 다른 기록은 제자들이 함께 다니면서 목격한 사건 위주로 되어있는데 예수님의 시험은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님에 의해서 전달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었을까요?
첫째, “시험을 당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따를 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꿈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당하고 어려움이 다가올 때는 쉽게 낙망해 버립니다. 바로 이 때 우리는 우리와 같이 육체를 입고 오셔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신 예수님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이 사단을 이기실 수 있는지를 통해, 우리 또한 사단의 시험을 이기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 “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2:18-3:1) 예수께서 당하신 시험이 있었기에 시험 당하는 우리들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능히 도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어떤 병원에서 젊은 간호사가 처음으로 간호 책임을 지고 의사를 도와 수술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봉합하는 차례가
되었을 때 간호사가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사용한 가제는 모두 12개인데 11개밖에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다 빼냈습니다. 자, 이제 상처를 꿰매도록 합시다.“ “안돼요, 분명히 12개를 사용했습니다.”
“내가 책임지겠소. 봉합합시다.”
“선생님,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 간호사의 태도는 완강했습니다.
마침내 그 의사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띄면서 자기의 한쪽 발을 치워 마루 위에 떨어져 있던 12번째의 가제를 보여 주었습니다.
“미안하구려. 내가 당신의 성실성과 능력을 시험해 보았소. 당신은 훌륭한 간호사가 될 자격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의 자녀들을 극심한 시험에 빠뜨리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참모습을 살피십니다. 욥이 그 전형적인 실례입니다. 험한 시험과 고난을 극복하고 나서 욥은 말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참고] 사탄은 시험의 대상자를 선택한다. 아담을 유혹하려고 하와를 택했고 하와를 넘어뜨리려고 뱀을 택했다.
① 처음 믿으려는 이
② 은혜 받았다고 자랑하는 이
③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이(요셉 그리고 밧세바)
④ 열심 있는 이(교만, 이단, 분쟁의 씨)
⑤ 불평분자(가롯 유다 옥합을 깨친 여인에게 구제를 종용)
⑥ 신앙의 잠을 자는 이 (잠자는 동안 가라지를 원수가 뿌리고 감)들은 시험받을 대상들이다.

사탄의 시험 목적은
① 성도를 낙심케 하여 기도 줄을 끊으려 한다.
② 회개치 못하게 하려고(가롯 유다)
③ 감사가 멎게 하고
④ 충성치 못하게 하려는데 있다.
 

내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의 생애(3. 내 사랑하는 아들) / 마태복음 3:13-17, 마가복음 1:9-11, 누가복음 3:21-23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제가 몇 일전 육군본부에 있는 군인교회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계신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대한민국 군대에서 일년에 병사 2십만 정도에게 세례를 준답니다. 어마어마한 인원입니다. 그리고 이분이 하시는 말씀이 군대에서 이렇게 세례를 베풀어 사회로 내 보내는데 지역교회에서는 왜 이들을 교회로 인도하지 못하고 그렇게 전도를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군 제대한 병사들만 모아도 교회가 부흥하는 것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언 듯 이해하면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안됩니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진심으로 원해서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회개를 말하는데 이들이 정말 회개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면 대단한 것입니다. 제가 다른 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그분이 군에 있을 때에 연병장에 모이라고 해서 모였는데 갑자기 소방 호수로 물을 뿌리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 친구에게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물어 보았더니 “응! 세례 주는 거야”하더랍니다. 극단적인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경우까지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근래에 군대가서 세례주신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가끔 “저는 세례 받았는데요.”라고 고백하는 군인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쉬려고 세례 받으러 왔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세례 주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반대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제일 기쁜 날일 있다면 그것은 세례를 받는 날입니다. 그러나 회개치 않고, 구원의 확신 없이 세례를 받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는 달랐습니다. 우리는 세례에 대해서 생각 할 때 예수님의 세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본문 13절에 “이 때에” 이 시간 접속사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3:23에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정확하게 때를 따라 계획적으로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이야기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요 2:4에 어머니 마리아와의 대화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 4:23에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때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30세가 되어야 공적인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참고 민4:3). 요셉은 30세에 애굽에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창 41:46).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었습니다(삼하 5:4). 이제 예수님께도 때가 되었습니다. 육신을 입으시고는 30세이지만 창기부터 구원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실로 오래 동안 기다린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소년시절의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에는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서 잊혀져가고 메시야에 대해서 잊어갈 즈음에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된 것입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원 하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죄인의 몸을 입고 있는 요한이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어떻게 세례를 준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 “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는 말씀으로 보아 성경은 단순하게 기록되었지만 사실은 좀더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 없다고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인 요한이 하나님인 예수님께 세례를 준다는 말입니까? 이 사실을 요한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바로 이분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서 온 사람입니다.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교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인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경악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은 있을 없는 일입니다. 바로 이분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인간의 교만을 통해서 눈을 멀게 합니다. 교만하면 앞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단의 꾀임에 빠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앞에서 문자쓰는 것도 어려운데 어떻게 예수님께 세례를 준다는 말입니까? 우리교회에는 목사가 저 한 사람인데 원로 목사님 모시고 목회하는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설교가 하기가 부담스럽다는 겁니다. 가만히 앉아만 계셔도 젊은 목사는 교수님 앞에선 학생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함부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주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를 이루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15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의 설득에 요한은 순종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주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아들은 그가 광야로 나가서 하는 일을 구경거리로 삼고있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어떤 빌미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언제나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할 때는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요 13장).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교훈하신 분이 아닙니다. 당신의 몸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단순한 ‘겸손’만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인 요한에게 자처하여 세례를 받으시려고 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본심이 무엇입니까? 그냥 사람들에게 “그분 참 겸손하시다.”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의”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우리와 같은 죄인의 입장에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는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와 같아지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시지 않습니까? 세례 역시 죄인 가운데 오셔서 죄인인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해야 살길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몸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눅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심으로 세례요한의 세례가 끝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심 그것이 예수께서 받으셔야할 마지막 세례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자기의 신분을 높이려고 찾아가시는 분들도 있나 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 불만이 가득 차게 됩니다. 여러분 절대로 하면 안될 것이 교회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오직 예수!” 예수님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작은 예수가 되어 존재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루시고 했던 “의”입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낮추셔서 인간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면 우리가 의를 이루기 위해서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구분을 잘해야 합니다. 겸손과 사단에게 무릎꿇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교회의 화목과 화평을 위해서라면,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협력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그 무엇이든 겸손을 가지고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아버지인 하나님과 성령님이 동시에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은 육체의 제한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체의 한계를 가진 우리와 또 2000년 전에 육체를 입고 오셨던 예수님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은 예수님과 늘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보이는 형태로는 늘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나타나십니다.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이 오시기 위해서 16절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하늘이 열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닫히면 암흑 세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 없이는 우리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늘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하와가 쫓겨난 다음에 닫혀버렸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세상에서 살기가 힘들 때마다 몇 번을 이 동산 근처에 서성거렸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천사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늘 문을 연 사람은 없습니다. 모세와 말씀하신 하나님도 완전히 하늘 문을 여신 것은 아닙니다. 제한적인 의미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다른 선지자나 왕들에게도 하늘 문을 여신 적은 없습니다. 하늘 문이 열려야 빛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이문은 종교 철학으로 여는 것이 아닙니다. 도를 닦아 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열 수 있습니다. 이제 그분을 통해서 이 길이 열린 것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10:20에서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미친 사람들이라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하늘 문을 여는 사람 이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이 교회가 축복을 받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습니다. 성령의 상징으로 보인 것입니다. 비둘기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비둘기 깨끗합니다. 겨울에 잡은 비둘기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더러운 것도 먹습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한 것이 노아의 홍수 때입니다. 홍수 후 40일이 지났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처음 날려보낸 새가 무엇입니까? “까마귀”입니다. 까마귀는 방주에서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창 8:7). 땅이 마르기까지 왕래했다고 했습니다. 왜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먹을 것이 많으니까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아마 각종 시체 썩은 것이 물위에 널려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다닌 것입니다. 그런데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자 다시 비둘기를 내 보냈습니다(창 8:8).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 들이고 10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 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12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창 8:9-12)고 했습니다. 까마귀는 방주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더러운 것을 먹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방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세상의 더러운 것을 먹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방주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필요합니다.
둘째, 제사에 드려진 제물입니다.
날 짐승 중에 제일 깨끗한 것이 비둘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에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나타난 성령의 모습 속에 비친 비둘기를 보고 모여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비둘기는 깨끗한 동물이다.” 그러나 이 생각보다는 하나님께 드린 제물중의 하나라는 것이 더 연상되었을 것입니다. 부자들은 소, 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드러나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위로의 성령인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하나님의 아들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드려질 제물이라는 것도 상징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도, 성경을 잃고도 무감각한 분은 병원에 가봐야 합니다. 저는 전율이 왔습니다. 지금도 이 말씀을 대하면서 몸이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 합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소리를 들으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낍니까?
흔히 자식을 두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또 비슷한말이 있는데 “눈에 밟힌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어느 대학에서 교수님이 학생에게 물어 보았는데 70%정도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했답니다. 어머님이 자식이나 손자를 보고 싶을 때 이 말을 사용합니다. 이런 말이 외국에도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정말 좋은 말입니다. 아무리 인터넷 시대이지만 지켜가야 할 우리말입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전교생들이 초콜릿을 먹으면서 울고있는 것입니다. 내용인 즉은 식당에 한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아이들 식탁을 정성스레 준비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암에 걸려 얼마 더 살지 못한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하는 수 없이 식당 일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학교에서는 8월에 그만두어야 하는 이분에게 10월 달까지 계약하신 분이라 미리 월급을 당겨서 두 달치 더 지급하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스스로 저금통을 모아 퇴직하시는 이분에게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금한 돈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아줌마는 학교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백 만원을 내 놓으시면서 학생들 초콜릿을 사주라고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절대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제가 이 땅에서 할 수 마지막 일인지도 모릅니다.”라는 말을 하셔서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바로 이 아주머니의 돈으로 초콜릿을 먹으며 학생들은 고마운 마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이 은혜, 이 감사의 마음으로 우리는 오늘 힘차게 살 수 있으며, 선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