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따라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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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25. 예수를 따라 살자) / 본문 : 요한복음 8:12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사람은 무엇을 따라, 누구를 따라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을 여행하는데 해는 뉘엿뉘엿 져 갑니다. 길을 잃었습니다. 방향을 잃었습니다. 해 지기 전에 오아시스를 만나야 되는데, 그리고,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마침내 모래 위에 있는 발자국을 발견하였습니다. ‘먼저 간 사람이 있구나’ 이 발자국을 따라가면 오아시스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발자국을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발자국을 따라가도 끝이 없는 거예요. 너무나 이상해서 자세히 보았더니, 그게 바로 자기 발자국이었습니다. 자기 발자국을 한평생 따라간들, 어찌 그에게 “새로운 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계속 사막을 맴돌 뿐이었습니다.
새해가 되면 다시 한번 우리 삶의 방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목회 하시는 목사님의 이야기가 그곳에서 살다 보니까 그곳 사람과 비슷해진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님들이 한 자리에 모이셨을 때 한 이야기가 ‘우리는 철이 없어!’라고 했습니다. 철없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일년 내내 더위가 계속되니까 철이 지나는 것을 모르고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철이 없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1월이면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철을 만나게 되고 이 때 다시 철이 들기 시작합니다. 한해를 잘 설계하고 다짐하고 시작하게 되니까 말입니다. 진짜 철이 들려면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1. 구약 사람들은 법궤를 앞세우고 살았습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할 때 행진하는 방법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 때에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법궤를 중심으로 감싸고 진군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때에는 법궤를 앞세우고 그 뒤를 백성들이 좇아가게 합니다(수 3:3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리고 언제나 이 언약궤가 앞에 나아갔습니다. 수 3: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고 했습니다.
왜 언약궤를 앞세워야 했습니까? 언약궤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이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언약궤가 가면 사람도 가고 언약궤가 멈추면 이스라엘 백성도 멈추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사람이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힘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앞세운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모세시대의 빛은 법궤였습니다. 이것만 따라가면 되었습니다.

2. 예수를 따라 살려면…
구약시대 사람들이 법궤를 따라 살았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따라 어떻게 살아야하겠습니까? 오늘 본만 말씀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을 따라 살면 됩니다. 식물들이 빛이 있는 곳을 바라보듯이 우리도 빛을 보면 됩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사람도 빛을 보고 나아가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어두움으로 들어가면 죽음뿐입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독일 소도시(Guetersloh)를 짙은 안개 속에 운전하던 두 운전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둘 다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차는 흠집 하나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나중에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이들이 진술한 바에 따르면 하도 안개가 짙어 중앙선조차 잘 보이지 않자 둘 다 운전석 창 밖으로 목을 내놓고 달리다가 맞은편에서 목 내놓고 달려오던 상대방 이마를 서로 박치기 한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세계 유일의 이마 정면 충돌사고였습니다. 사람은 빛으로 나와야 하며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없는 세상은 이보다 더한 끝없는 충돌 사고가 이어질 것입니다.

첫째, 예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이런 들을 수 있는 귀를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씨 뿌리는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마음이 완악한 자들은 들으려고 해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다 열린 분들입니다. 완악한 분은 교회 안 옵니다. 아니 못 오는지 모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예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지금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다른 음성을 따라가면 안됩니다.
아이를 잊어버릴 때 보면 아이가 잠시 다른 곳에 눈길을 주면서 부모님을 잊어버립니다. 요 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자기 목자의 음성이 아니면 따라가면 안 됩니다. 여러분 어디 잠깐 가셨다가도 누가 이상한 소리 하거든 얼른 일어나야 합니다. 계속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헌금 드리라고 말 안 한다고 좋다고 가만히 앉아 있다보면 아주 집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 세대를 풍자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둘러앉아 T.V를 보고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화면에서 뽀뽀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때 네 살 짜리가 말하기를 “뽀뽀 하는 거야?”하고 묻자.
다섯 살 짜리가 “저건 키스라는 거야”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섯 살 짜리 꼬마가 “그런데 키스하는 게 좀 서툴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이 세대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TV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창 19:23-26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롯의 가족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롯은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이성을 빠져 나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롯의 아내는 화려하고 큰 성 소돔과 고모라가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은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창 19:17)는 말씀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세상을 뒤돌아 볼 필요가 없습니다. 미련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다 재산을 탕진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이 지역의 아이들이 예전에는 “탄광과 새까만 시냇물을 그렸는데 이제는 전당포나 자살하는 사람을 그린답니다”
부흥사 무디는 “회개란 꽃 병 속에 넣은 주먹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가리가 좁은 꽃병 안에서 주먹을 움켜쥐면 손을 뺄 수 없습니다. 돈 명예 지위 권력 구습과 옛 생활 등을 고집하면 회개는 어렵습니다. 주먹손을 비운 ‘열린 손’이 회개입니다.
제가 예수님이 대해서만 오랫동안 설교하는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을 들은 주앙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금방 알아냅니다. 오직 예수님의 음성을 따라가시라고 예수님 말씀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가라
요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화합니다. “영감! 영감 죽으면 나도 곧 따라갈게” 바로 본문의 뜻이 이와 같습니다.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순교할 것을 명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당부드릴 것이 있다면 결단입니다.
본문 요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다 좋은데 결단이 안되고 행동이 안되어서 주님을 못 따라 가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그것이 제일 큰 행동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는 예수님을 직접 따라가면 되었지만 지금은 교회에 나오시면 됩니다. 교회 출석한다는 것이, 여러분! 생각에 따라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도 하면서 또한 제일 쉬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시는 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첫 걸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참된 길인지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삶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저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예수를 따라 살게되면 이 땅에서도 반드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요.

집사와 집
경상남도 어느작은도시에서 목회 하는 김목사님은 어느 주일 처음으로 교회를 나온 신입교인 한 사람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교회출석 잘하고 예수 잘 믿으면 세례 주고, 집사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교회 나오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신입교인은 김목사님의 말을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면 ‘집을 사’주겠다는 말로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 집 사줍니까?”
“그럼요, 목사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가난했던 이 신입교인은 집이 없어 남의 집에 전세 들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김목사님의 말에 감동을 받아 열심히 교회출석을 했습니다.
만 1년만에 학습 세례까지 다 받았습니다.
3년이 되던 신년 초에 그 신입교인은 서리 집사로 처음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 해 가을 어느 날, 그 집사는 목사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전세방을 면하고 자기 집을 구하게 되어 이사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사감사예배를 드린 후 그 집사는 목사와 여러 교우들 앞에서 고백할 게 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 처음 제가 교회에 나왔을 때 예수만 잘 믿으면 집 사주신다고 해서 열심히 교회에 다녔는데, 목사님이 집사 주신 뒤로 정말 제가 이렇게 집을 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시편 63: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잠언 11:19 “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고 하십니다. 주앙교회 성도여러분! 2006년도 한해 뿐 아니라 우리 평생에 예수님만을 따라 살아 우리 다시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릴리에서의 마지막 당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53. 갈릴리에서의 마지막 당부) / 마 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모든 날)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을 시키는 엄마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아이가 처음으로 초등학교에 갈 때 무어라고 말해서 보냈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엄마들은 망설일 것도 없이 한 마디로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전에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두고 ‘지상 대 명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 어떤 본문 보다 더 자세히 살피고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신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눈에 띄게 나타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모든’입니다. 모든 이라는 단어가 문단을 단단히 묶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모든 이라는 단어가 모두 4번나옵니다. 1) 모든 권세 2) 모든 족속 3) 모든 것 4) 항상(모든 날)입니다.
저는 목사가 될 때 문제가 걸렸던 것이 하나있습니다. 바로 이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였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모든 것을 가리 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모든’이라는 문제가 해결되시기를 바랍니다.

1.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자기가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속이려고 했습니다.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 4:6)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단에게 속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꿈적도 않으십니다.
여러분!
사단은 지금도 속삭입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사람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며 죽음만 기다릴 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모든 것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모든 권세는 사단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권세를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에게 전권을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했습니다. 못 고치시는 병이 없었습니다. 모든 병이 다 나았습니다. 회복되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 행 14: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했습니다. 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첫 번째 선교여행입니다. 선교라는 말은 처음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말로 사용된 것입니다. 같은 민족에게는 선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이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선교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믿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입니다. 여기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족별 차별을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못하며 예수님의 믿음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3. 모든 것을 가르쳐라

1) 가감 없이 가르쳐라
어떻게 우리가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을 수 있습니다. 설교도 갈수록 어려워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왜 설교가 어려워집니까?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유명한 목사님들이 명 설교를 하시기 때문에, 그와 같이 못하기 때문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이유는 자신에게 불리한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쓴 소리가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지 않으면 바른 사람이 안됩니다. 여러분! 자식들에게 만날 좋은 소리만 합니까? 진짜 필요한 말은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모님의 교육을 받지 않은 자식들은 잘 되기가 어렵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8-19)

2) 성령으로 가르쳐라
사람이 모든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똑같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다고 말할 사람은 예수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습니다(롬 3:23).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온전히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동양에서는 도를 닦으면 온전해지고 무에 이르면 도를 깨우쳐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은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죄의 문제가 깨끗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 중국에 요임금이라는 아주 어진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그 임금님 밑에 소부와 허유라는 두 선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도 역시 덕이 있고 욕심이 없는 깨끗한 선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주변에는 벼슬을 탐내고 욕심이 많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임금님에게 아부하고 남을 중상하고 하여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소부와 허유는 그 모습들이 아니꼽고 더럽게 보여 임금님 곁을 떠나 먼 곳으로 갔습니다. 영천수란 냇물이 흐르는 깊은 계곡에 움막을 짓고 소를 기르며 땅을 갈고 농사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요 임금님이 허유를 찾아 이 계곡에 왔습니다. 임금님은 허유에게, “한 마을의 통치자가 되어 주시오.”하고 나라 중 한 고을을 부탁하였다. 허유는 대답도 않고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는 못들을 소리를 들었다고 영천 수 흐르는 냇물에 귀를 씻고 있었습니다. 마침 이 때 소부가 밑에서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다가 허유의 행동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여보게, 왜 귀는 씻고 있어?”하고 물었습니다. “요 임금님이 찾아와서 나에게 벼슬을 하라 하지 않나? 더러운 소리를 들었기에 귀를 씻는 거야.” “그래? 그럼, 그 더러운 말을 들은귀를 씻은 물을 송아지에게 먹여서야 되겠나?” 하면서 송아지를 끌고 위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런다고 이 사람들이 깨끗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가르칠 때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전하지만 이 때 우리가운데 성령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가 왜 다른 연설하고 다릅니까? 오직 성령에 의지해서 전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의해서만 우리가 깨끗해 질 수 있습니다.

3) 사랑으로 가르쳐라
사람에게 모든 것 또는 온전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람은 똑같이 부족하지만 사랑은 그 부족한 것을 뛰어 넘게 합니다. 강아지도 저 좋아하는 사람을 압니다. 하물며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모르겠습니까? 어떤 선교사가 언어를 아주 뛰어나게 잘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원주민 말을 해야합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이 말로만은 안됩니다.
바울이 말한 사랑의 정의에 보면 고전 13:7절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모든’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하기 싫은 어떤 것을 빼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개와 돼지 동물들도 제 새끼는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만이 제자를 삼을 수 있습니다.

한 어린 소년이 아버지께 질문을 했습니다. “아빠, 전쟁은 무서운데 어른들은 왜 전쟁을 시작하나요?” 아버지는 현명한 대답을 하고 싶어 잠시 생각하다가 “얘야, 네가 알아듣기는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다. 그러나, 한가지 예를 들면, 1914년에 일어났던 세계전쟁은 독일이 벨지움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단다”라고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는 “여보, 아이에게 가르치려면 진실 되게 바로 알려 야죠. 그 전쟁은 처음에 누군가가 살해되어 복수하고 또 복수하다가 시작된 거죠”하며 남편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화가 난 남편은 아이에게 적절하게 전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내는 반대하여, 서로 언성을 높이다가 아내가 먼저 문을 꽝 닫고 나가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본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전쟁이 왜 시작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4. 항상(모든 날)과 함께 하신다.
본문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명령하다, 위임하다)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굳게 붙잡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모든 날)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의 이 마지막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분부한” 것은 명령한 것입니다. 단순히 명령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단어 속에는 복음전하는 일을 제자들에게 위임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선생님으로 이 땅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을 제자들은 보고 배웠습니다. 이제 배운 대로 예수님처럼 가르치면 됩니다. 이런 자에게는 항상(모든 날) 함께하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70년대 판자촌이었던 청개천에서 활빈교회(지금은 두레교회)를 개척하신 김진홍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판자촌 빈민 목회를 하실 때 동네에 사는 한 아주머니가 밤중에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아주머니를 등에 업고 동네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의사는 “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어서 큰 병원으로 가셔야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아주머니를 등에 업고 서울시내 굵직한 병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모두가 한결 같이 수술비가 없어서 받아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은 깊은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도무지 의욕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를 등에 업은 채로 터덜터덜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주머니가 자꾸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이미 아주머니는 목사님 등에서 죽은 것입니다. 목사님은 너무나 깊은 회의와 갈등에 사로 잡혔습니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이미 죽어버린 아주머니를 붙잡고 통곡했습니다.
“예수님 이 광경을 보고 계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합니까? 주님! 이 괴로움을 아십니까?”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다 알고 있다. 네가 나보다 더 괴롭겠니? 너의 모든 고통을 내가 같이 받고 있단다. 힘을 내라 힘을!” 주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모든 고통과 회의까지도.
 

발을 씻기는 선생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6. 발을 씻기는 선생) / 요 13:12-17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중세 어느 수도원에 수도원장이 수도사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원장은 어느 수도사에게 오늘은 당신이 설교하라 갑자기 시켰습니다. 무척 당황한 수도사가 강당에 올라갔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청중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무슨 설교할지 아십니까?” 아무도 알리 없었죠, 청중들이 모릅니다. 그랬더니 수도사가 “나도 모릅니다”하고 내려왔어요.
수도원장이 화가 나서 다음날 또 갑자기 시켰습니다. 그러자 이 수도사가 올라가서 전날과 똑같이 묻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어떤 설교할지 아십니까?” 어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청중들이 오늘은 “예. 압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알면 됐습니다. 다 아는데 무엇 하러 설교합니까?”
수도원장이 노발대발하면서 다음날 또 시켰습니다. 수도사가 올라가서 똑같이 묻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무슨 설교할지 아십니까?” 어제 그제 속았기 때문에 청중 절반은 예, 절반은 아니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수도사가 말하길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내려왔습니다. 크게 혼날 줄 알았는데 수도원장이 우리 수도원에서 했던 설교 중에 가장 뛰어난 설교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의 표어가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깨닫는 자가 희생하고 섬기면 모르는 자가 배우게 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섬겼으니 너희가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자, 먼저 깨닫는 자가 섬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조건적인 선생 허락
예수님은 마태복음 23:8-12절에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선생(랍비)들은 대접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자신에게 몸을 굽혀 인사하는 것을 즐기고, 잔치 집에 가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이 선생님을 대접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선생 자신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
예수님은 당시 선생(랍비)들 하고는 달랐습니다.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병자를 고쳐주고 이적을 행하니까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예수님을 선생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모함하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마 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중에 어느 계명이 …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마 19:16) 어떤 사람이(율법을 잘지킨 유대인)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마 22:16) 자기 제자들(바리새인)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요 3:2) 그가(니고데모-로마관원)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막 10:51)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막 9: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본문 13-14절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주요, 선생이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을 씻기신 것을 전제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선생이 되려고 한다면 남의 발을 먼저 씻겨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지 주인이 어떻게 종의 발을 씻어줍니까? 지금 식으로 한번 이해해 봅시다. 운전기사가 있다고 합시다. 운전기사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어야지 주인이 나가서 운전기사 문을 열어준다면 이해가 되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로 대접받고자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단이나 사이비라고 말하는 자칭 교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 싶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이비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예수님처럼 남의 발을 씻기는 사람인지 아닌지 보면 압니다. 예수님은 선생하고 싶으신 것이 아닙니다. 대접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틴은 25불을 자기고 고향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왔습니다. 그는 작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등록금은커녕 당장 먹고 지낼 돈도 없었습니다. 누가 버린 헌 자동차를 집으로 삽고 일자리를 구했는데 그는 점심을 싸갈 수도 없었습니다. 일꾼들은 나무 밑에 모여 식사를 하는데 마틴은 배고픔을 달래며 혼자 그늘 아래 누워있었습니다. 그 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감독의 목소리가 들여왔습니다.
“젠장 이놈의 마누라, 나를 코끼리로 아나봐, 혼자서 이걸 다 어떻게 먹으라고. 이봐 누가 샌드위치와 케익 한 조각 먹어주지 않겠나?”
마틴은 기꺼이 그의 하소연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후 감독은 계속해서 마누라 음식을 허비하는 불평을 늘어놓았으며 마틴은 오히려 그로 인해 배고픔을 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틴은 보름이 지나 금료를 받고 감사의 말을 전하려고 사무실에 들렸는데 사무실에 감독은 없고 여 사무원만 있는 겁니다. “감독님 들어오시면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감독님 부인에게 센드위치 잘 만드신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러자 그 사무원 놀라며 대답했습니다.
“감독님은 시내에 잇는 조그만 모텔에서 혼자 살고 있어요. 부인은 5년 전에 돌아가셨답니다.”

발을 씻어주세요.
1) 발은 제일 더러운 부분입니다.
깨끗한 것은 만지고도 싶고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발은 신체 중에서 제일 더러운 부분입니다. 냄새가 나는 곳입니다. 더러운 곳입니다.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예수님은 남의 더러운 곳을 씻어주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말은 잘해서가 아니라 잘못한 것을 사해주는 것입니다.

2) 발은 신체의 제일 끝입니다.
심장은 하루에 10만 번의 움직임으로 피를 전신의 구석구석에 보내는 작용을 하고, 심장에서 가장 먼 발은 그 움직임으로 온 혈액을 다시 심장으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해야하는데, 요즘은 문명의 발달도 교통수단도 많이 발전을 하면서 발의 움직임을 덜하게 되면서, 발의 피로를 느끼고, 발이 차가워지며, 다리의 부종이 비만이 되고, 혈행의 장애로 관절에 문제가 많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끝까지,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3) 발은 돌아다닙니다.
발은 가만히 있으면 병 생깁니다. 가능한 한 자주 움직여 주면서 피를 다시 돌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절도 운동을 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님이 오면 종을 시켜서 발을 씻어 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직접 손님에게 발을 씻어준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선생은 본을 보여야 합니다.
본문 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가장 훌륭한 제자 훈련은 백만 마디의 말로써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직접 삶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지난 수요일 케냐에서 오신 선교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한국 선교사님들은 너무 도시에 있으면서 부족에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도 안돼 지만, 부족에게 가는 분이 드물다는 겁니다. 그런데 서양 선교사님들은 시간만 있으면 부족마을에 간답니다. 신학교를 도시에서 하지만 학생들 집에 방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환경에서 왔는지 방문해서 그 가정에 복음을 전할뿐만 아니라 학생의 생활을 이해하므로 잘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지난번에 종엽이네 집에 방문했지 않습니까.
발로 뛰고 돌아다니다 보면 일이 됩니다. 지난 화요일(2005.5.10) 전세계 생물학계가 흥분하는 놀랄 만 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북미대륙과 유럽일부 지역에만 있다고 알려진 허파 없는 미주 도룡뇽(lungless salamamander)-한국명(이끼 도롱뇽)이 한국에서 서식하고 있는 것이 지난 5일 영국의 과학 전문지인 ‘네이처(Nature)’ 논문을 통해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이 도롱뇽은 꼭 도마뱀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아마 저도 어려서 시골에서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똑같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알려졌는지 아십니까?
지난 2003년 4월 대전 장태산 야산에서 기독교계 대전국제학교의 미국인 과학교사 스티븐카슨(Stephen J.Karson)씨가 학생들에게 돌을 뒤집어 어떤 생물이 살고 있나를 관찰하도록 했다가 우연히 발견된 것입니다. 카슨교수는 이 도롱뇽을 UC 버클리 대학의 생물학자인 데이비드 W. 웨이크박사에게 전했습니다. 웨이크 박사는 허파로 호흡하는 아시아 도롱뇽과는 달리 혀, 발목, 두개골을 가졌고 특히 허파 없이 피부 호흡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생물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번 발견은 놀랄만한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생물지리를 변경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끼 도롱뇽은 한국 내에 최소한 16군데 정도 있는 것으로 보이나 정확하게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한국 사람이 아닌 미국인 교수에 의해서였습니다. 지금쯤이면 한국도 이러한 생태계조사는 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 교수는 발견을 못하고 왜 미국 교수가 발견을 했습니까? 우리는 앉아서 가르치고 미국 사람들은 발로 뛰면서 현장 교육을 하는데 익숙해서 그렇습니다. 알아서 교과서 잘 만들어 놨겠지? 이것만 잘 가르치면 되지? 하는 안일한 생각입니다. 이렇게 교육을 받다보니 발로 뛰려고 하지 않습니다. 현장을 확인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들이 생깁니다.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실천하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제 운동도 해야하지만 몸으로 해야 합니다. 저도 다음달에 러시아와 동유럽 선교지를 방문하는데 제 자신이 보고, 배우려는 목적이 많습니다.

선교지에 가면 한국에서 자란 우리하고 미국에서 자란 한국인 2세가 다르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성장한 분들은 자기 것을 오픈하고 사역한답니다. 그런데 한국 분들은 감춘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짜 진돗개는 사람이 와도 짓지 않는 답니다. 개가 짓는 이유는 자기가 겁나니까 짓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돗개는 사람이 와도 짓지 않는 것은 자기가 무섭지 않은 겁니다. 왜냐하면 주인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도적질하러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똥개는 주인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도 짓습니다. 그러다 주인에게 한 대 맞지요. 수준이 비슷하면 싸웁니다.
자기가 자신이 없으면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 있는 사람은 보여주려고 합니다. 여러분! 초등학교 다니면서 선생님이 물어보지요. 그 때 내가 아는 문제면 나 시켜달라고 ‘저요. 저요’하지요. 그런데 모르면 꼬리 내리고 고개 숙이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자신 있게 그러나 겸손하게 행동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보다 더 겸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16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크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다시 보냄을 받는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육체적 질서로 보면 절대로 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부모님께 효도하면 복이 있는 것입니다. 경우 없고 건방진 자식들은 부모님이 나이 드시고 힘없다고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집의 자식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많이 배우시지는 못했지만, 아는 것이 부족하지만 부모님은 부모님이십니다. 아멘.
인천에 가면 인천에서 두 번째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인천제이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1948년에서 시작한 교회인데 김덕수 전도사님이 개척해서 1951년 이승길 목사님이 부임하고, 1957년 이삼성목사님(77년 총회장)이 부임하고, 그리고 지금 이건영목사님이 시무하고 계십니다. 이 교회의 자랑은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교육자 전원이 은혜롭게 은퇴하고 후임목사가 원로 목사님을 잘 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 후임자 문제로 고심하고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는 현재 이건영 목사님에게 부탁해서 목사님이 정해주시면 90%는 따르겠다고 말하는 교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이 교회의 목사님들이 섬기는 자세로서 먼저 성도가 아니라 원로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을 잘 보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뒤집어 업고 다시 시작하고 잘 해보겠다는 의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먼저 해 놓으신 분들에 대한 감사와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려도, 빨리 납득이 안 되는 일이 있어도 함께 기도하며 서로 섬기는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2개의 대야가 나옵니다. 하나는 빌라도의 손을 씻었던 대야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었던 대야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도록 하고서 책임지지 않겠다는 회피의 대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야는 사람을 섬기고 더러움을 씻는 대야였습니다. 섬김의 대야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아 섬김의 선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장애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2. 예수님과 장애인) / 요 9:1-7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미국의 한 보험회사가 100명의 젊은이가 65세에 이르렀을 때 어떤 형편에 놓이게 되는지에 대해 조사하였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1. 이미 죽은 사람(36명)
2. 가난하게 살며 가족, 친구 또는 정부의 원조를 받고 사는 사람(54명)
3. 일을 그대로 하고 있는 사람(5명)
4. 남부럽지 않게 사는 사람(4명)
5. 성공적 삶을 살고 있는 사람(1명)
모두 성공지향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성공의 문은 100대 1의 좁은 문이었습니다.
이 통계는 성공으로만 보자면 100:1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미국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 54명의 절반이 넘는 사람이 정부의 원조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애인 그러면 선천적 장애인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장애인 가운데 선천적 장애인으로 진단되는 사람은 장애인 전부 가운데 6%-10%에 불과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6%-10% 범주 안에 장애인들이 있어요. 이게 선천적 장애인지 후천적 장애인지 그 진단이 불가능한 확률이 10%정도라고 합니다. 나머지 80%는 다 후천적 장애인들입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는 인구의 10%이상은 장애인이란 것을 아십니까? 우리나라 인구가 5000만이라면 우리 나라에 장애인이 얼마나 될까요? 500만이 장애인이라는 통계입니다.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장애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저는 장애인 문제를 함께 나누기 앞서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고 장애인 후보라는 사실입니다. 장애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은 피할 수 없이 장애인의 운명을 살아가고 나하고는 상관없다는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예비 장애인이고 장애인 후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교통사고로 인해 해마다 4만여 명이 넘는 사람이 장애를 입고, 산업재해로 3만 여명, 각종 질병 및 의료사고로 인해 3만 여명, 그리고 기능 장애를 수반한 기형아 출산율이 2.7%로 매년 2만여 명이 넘는 기형아가 출산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각종 대형 참사로 인한 장애발생이 더해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렇게 더해지는 장애인은 매년 10만 여명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군대의 1개 사단병력이 1-2만 명으로 이루어집니다. 적어도 1년에 5개 사단에 해당하는 인원이 정상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장애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체적 장애인만을 장애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정신적 장애가 더 문제입니다. UN장애인 권리 선언에 보니까 장애인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장애인이란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신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원인으로 자기 자신의 힘으로 홀로 서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선천적 원인이든 후천적 원인이든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삶을 유지하기 어려운 장애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이미 우리 가족 중에 장애가 있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애인은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곧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장애를 함께 극복해 가지 않으면 우리의 삶을 올바로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장애를 극복하려면

1. 장애는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본문 2절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이면 누구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이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죄가 없이는 장애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출 20:5, 민 14:18, 례 16:15). 바로 이 죄의 결과로 장애가 생겼다는 편견 때문에 장애인을 소홀히 대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욥의 경우를 보면 자신의 죄 때문에 병이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세 친구들은 죄에 대한 보응이라고 강변했습니다.
신약에 바울의 경우는 하나님이 자고 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눈에 질병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세 번 기도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응답은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장애가 죄의 결과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본문 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중에 장애인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더 교만해 질 것입니다. 장애인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아울러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분들에게 빗진 자라는 것입니다.

2.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제자들을 가르치신 시간들을 뺀다면 거의 모든 시간이 어떻게 활용하셨는지 아십니까? 한마디로 장애인과 함께 보내신 것입니다. 장애인을 위해서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태 세리의 집에서 식사할 때, 바리새인들이 보고 너희 선생이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이 소리를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막 2:17, 눅 5:31)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병든자와 함께 지내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장애인들을 위해서 오셨다면 우리 역시 그분들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먼저 장애인에게 붙여진 그 타이틀, 그 편견의 타이틀을 우리가 먼저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깊은 편견은 먼저 언어 자체에 대한 여과 없는 전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빨리 버려야 할 언어들 가운데 병신 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저도 팔이 부러져 초등학교 때는 한 팔을 기부스하고 다시 내리면 다른 팔이 또 부러져 기부스하고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기부스를 너무 많이 하다보니 늘 친구들로부터 ‘팔 병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지냈습니다. 심지어 한국 문화재 가운데는 병신춤이라는 문화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뿌리깊은 문화적 편견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번역학자들은 우리가 새로운 시대에 이 성경을 다시 번역한다면 성경의 언어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소경이란 말 대신에 어떤 말을 써야 합니까? 시각장애인입니다. 시각 장애인이 어색하기 때문에 새 번역 성경에는 ‘눈먼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성경이 바로 번역되어 새롭게 나왔는데 우리가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보는 성경은 ‘개역한글성경’으로 1962년 판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와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대답한 본문이 마태복음 11:5절입니다. 이 본문을 ‘개역한글성경(1962)’과 ‘표준새벅역’(1993)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개역한글성경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표준새번역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저 또한 병신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저도 회개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남을 향해 돌 던진 한번 있습니다. 제가 살던 마석에, 지금은 성생농장에서 성생가구단지로 바뀌었는데 예전에 이곳에 나환자촌입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하고 이 곳을 지나다가 나환자촌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문둥병자라며 돌을 집어던지고 도망간 일이 있습니다. 그 때는 그분들이 무서웠습니다. 또 시골에서 소문이 어린아이 간을 빼먹으면 그 환자들이 낫기 때문에 어린이간을 빼먹는다는 헛소문까지 들었던 터라 필사적으로 돌을 던지며 도망간 일이 있습니다.

3. 장애에 대한 모세 오경의 오해
우리는 모세 오경의 창세기를 제외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보면 상처가 난 환자, 나환자 등을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구약의 사상에서 유대인은 장애에 대한 편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기록할 때 왜 그러한 기록이 필요했는가 라는 상황을 철저하게 면밀하게 연구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 당시의 이런 상황이 특별히 200만 명에 가까운 수많은 집단이 집단으로 광야에서 이동하고 있었던 상황 속에서 이 교훈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먼저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환자를 지속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거할 목적이지 사실은 그 사람 자신을 제거할 목적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군집된 공동생활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 그것이 어떤 전염병으로 발전할 우려 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일시적으로 격리하는 어떤 제도를 만든 것이지 사람 자체를 제거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에 보호가 필요한 분들을 위해서 이런 명령들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레위기 19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19:9절부터 읽겠습니다. 레위기 19장9절 이하의 말씀은 광야 생활과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종의 사회정의의 규례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가나한 자들에 관해서 연약한 자들에 관해서 장애인들에 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접근해야 하겠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주목할 만한 말씀들입니다. 9절 이하를 보시면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추수를 할 때 반드시 넉넉하도록 추수의 이삭들을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기 위해서 항상 그것을 남겨두라고 말씀하십니다. 10절에도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 하나님이 얼마나 가난한 사람, 또 나그네, 외국인은 자연히 편견 속에서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애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나그네, 장애인 이런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매우 균형 있게 연구하던 성경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의 이런 사람들에 관해 편애를 갖고 있는 듯이 보여진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슴이고 심정이예요. 11절 이하에서는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 다음에 정말 함께 주목하고 싶은 말씀은 사실은 14절입니다. 레위기 19:14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우리가 장애인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구약성경 안에서도 이미 밝혀놓았다는 말씀을 우리는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였던 격리의 일시적인 현상은 그 죄를 초래하는 원인을 격리시키려는 하나님의 마음이지 사람 그 자체를 격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장애인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을 넘어서야 됩니다.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편견을 넘어설 때 우리는 좀 더 자유롭게 당당하게 장애인 이웃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줄을 믿습니다.

4. 예수님처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가끔 안타까운 뉴스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려고 할 때 그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 학생이 한 학교나 반에서 공부하려고 할 때 부모님들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자기 집 값 떨어진다고 반대하고 아이들 교육에 방해받는다고 생각해서 대모 하는 분들 정말 사람도 아닙니다.
제가 한번은 약간 말이 불편한 자매와 지하철을 타고 갔는데 서로 말을 하는데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예요. 그 자매는 말을 하려면 몸을 약간 비틀면서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말을 했거든요. 그 사람들이 왜 쳐다보는지 아십니까? 이런 장면을 많이 보지 않아서 그럽니다. 처음에 외국인들이 거리를 지나다니면 사람들이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쳐다보지 않습니다.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주 대하고 함께하다보면 익숙해집니다.
어떤 장애인 문제 연구소를 보니까 장애인들이 제일 크게 느끼는 불편이 뭐냐 하면 세 가지 제일 큰 불편 가운데 육체적인 불편은 맨 마지막이었습니다.
첫째 불편이 경제적 빈곤입니다. 장애인이 되면 동시에 경제적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돼요. 저는 정의로운 사회는 약자가 보호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의 발생은 개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상당히 사회적 책임이 큽니다. 우리 사회가 이런 산업재해를 발생시키고 그리고 교통 시설도 그렇고 그렇다면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교회도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두 번째가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소외감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된다는 소외감.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 그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중의 한 사람, 식구 중의 한 사람, 우리 지체 중의 한 사람이 되는 것. 주님은 교회를 설명할 때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 부분의 지체라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 눈먼 장애가 있는 한 분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물론 이분 입장에서 보면 더 큰 선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렇게 장애가 있는 분들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장애가 있는 분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건강을 주신 것은 장애인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필요한 분들과 나누어 쓰라는 것입니다.

아기를 찾아라-목자의 경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25. 아기를 찾아라-목자의 경배-) / 눅 2:15-20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빨리 가라
“16 빨리 가서 …
목자들은 천사가 떠나자 곧바로 아기 예수를 찾아 떠납니다. 지체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일 귀한 분이 이 땅에 탄생하시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에게도 아기 예수를 보러 가는 것이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지키던 양떼를 두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데도 한가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목자들도 자기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잠시 뒤로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지금은 예수님의 탄생을 보러 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된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우선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우선 순위가 잘못되면 결코 잘 살았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차선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결코 차선이 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분량입니다.
먼저 천사를 만났던 마리아 역시 ‘빨리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눅 1:38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 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라고 했습니다.
‘빨리’하면 우리 한국사람 아닙니까? 동남아 여행가면 가이드들이 한국말 아는 것 하나가 있는데 “빨리 빨리”입니다. 노는 데만 바쁘면 되겠습니까? 자신의 일에만 바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한 일에 바쁘게 행동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기를 찾아라
“16 …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찾아서 ajneu’ran(아뉴란)”는 원문으로는 “끊임없이, 부지런히, 탐색하여 찾는다”는 뜻입니다. 천사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만 전해주고 떠났습니다. 아기 예수를 찾아야 하는 것은 목자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수고도 없이 아기 예수를 만날 수는 없습니다. 찾는 수고가 있어야합니다. 목자들은 “여기 산모를 보았습니까?, 혹 아기 나을 때가 다 된 아기엄마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라고 물으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마리아와 요셉이 방을 구하러 동분서주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아마도 여관집 주인들이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소식을 전해 준 것은 천사의 몫이었지만 아기 예수를 찾아 나서는 것은 목자의 몫인 것처럼 우리도 예수를 만나려면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찾아 나서는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사가 할 일과 우리가 할 일을 따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천사가 전하면 되지 이렇게 힘든데 우리가 해야되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큰 불빛을 비추이면서 “너는 예수 믿어야 산다!” 그러면서 겁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 많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으십니다. “누워 절 받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받기 싫은 절을 받을 때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강제 동원된 북한의 칠골교회, 봉수교회와 같은 사람들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아기 예수를 찾아야 하는 것은 목자의 일입니다.

복음을 최초로 듣고 전한 사람들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정확하게 아기 예수님 탄생하신 마구간에 얼마나 사람들이 모여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 예수만 쓸쓸하게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때 목자가 찾아왔다면 그 자체로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천시 받던 제일 하찮은 직업을 가진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고 또 이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달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복음은 전달됩니다. 또한 먼저들은 자는 전파해야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루시와 그의 여동생 빌마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그들의 부모는 가난했고 따라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루시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내가 열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실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크리스마스 때였는데, 우리에게는 아무 선물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동생과 나는 알았습니다. 크리스마스는 다른 날과 아무 다름이 없는 날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아침 우리는 식탁에 앉았습니다. 어머니는 주기도문을 외우셨습니다. 어머니가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는 구절을 말씀하실 때는 그 목소리가 가라앉았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울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내 동생과 나는 끝까지 주기도문을 다 외웠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막 끝냈을 때 어떤 사람이 우리집 문에 왔습니다. 그 분은 우리 이웃집사람인데 우리의 조찬을 위해 새 빵을 갖다 주셨습니다. 크리스마스 그날, 하나님님은 스스로 친히 우리에게 와 주셨습니다.

마음에 지키어
“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는 당연한 것입니다. 저 멀리 밖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어야할 목자들이 어떻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고 물어 물어 찾아왔는지 그리고 천사들의 이야기를 하니 모든 것이 기이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기적 그 자체이며 사람들의 생각에는 기이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이하다고 해서 그것을 믿지 못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고 기이한 것이 전혀 없다면 그것이 어찌 기적이고 그것이 어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곧 기이한 것입니다.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다른 사람들이 기이히 생각할 때 마리아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이미 마리아는 천사의 소리를 들었었고 그리고 아기를 잉태하고 있기 때문에 놀라지 않고 기이한 일로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자신이 그 경험의 장본인이고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험한 사람은 놀라지 않습니다. 자신이 먼저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을 압니다. 그리고 성령 받은 사람의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없는 사람은 기이히 여깁니다.
‘지키어’는 미완료 시제로서 ‘보호하다, 간직하다’의 뜻입니다. 마리아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목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루어진 말씀
“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사실 아기 탄생 그 자체로만 보면 평범한 아기 탄생에 불과하게 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특별한 배려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성령의 신비는 특정하지만 실제로 육체를 입고 오시는 예수님의 상황은 특별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평범한 사람들 이하의 환경 속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물론 자라실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보통 사람처럼 예수님을 탄생시키시고 성장시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목자들이 목격한 광경은 단순히 어린 하나가 태어난 마구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리였습니다. 천사들이 말한 그대로였습니다. 그분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들은 찬송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목자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유명한 복음성가 가수인 생키(Sanky)가 여객선을 타고 멜러웨어강을 건너고 있었다.
마침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승객들은 여객선에 생키가 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노래를 한 곡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생키는 캐럴송인

예수님처럼 가르치라

예수님의 생애(8. 예수님처럼 가르치라) / 누가복음 4:31-37

“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여러분들은 교회에 나오시면서 기도하시면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데 동의하십니까?
그렇다면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아동교육가들은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제든, 무엇이든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쉽게 손에 넣으면 인내나 노력이라는 소중한 정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자기 힘으로 성취해 나가는 기쁨을 모른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가진 아이는 양보를 모른다고 합니다. 이 말에는 동의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것에 먼저 ‘하나님의 뜻’이라면이 전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그 믿음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교육을 받아야 하고 교육을 시켜야합니다. 교회에 오셔서 잠깐 눈감았다 뜨고서 기도했다고 무엇이든지 다 되어있으면 여러분 우리는 망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가지고는 순교는커녕 작은 고난에도 이기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이 됩니다. 환난이 오면 쉽게 무너집니다. 포기합니다. 아이들도 ‘스스로 인내에 도전할 때 아이는 행복의 첫걸음을 내디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셔서 인내와 사랑, 그리고 이웃과 나눔에 대해서 배우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가르칠 수 있을까?
오늘 설교의 제목에 의아심을 품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님처럼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물음입니다. 그런 의구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본래부터 “죄가 없으셨으며”(요일 4:15, 히 4:15), “죄를 범치 않으셨으며”(벧전 2:22), “죄를 알지도 못하신”(고후 5:21)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아무도 “죄로 책잡을”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예수 님을 우리가 어떻게 따라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바로 예수님의 인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처음 이 땅에 보내실 때(초림)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보통의 사람과 같이 탄생하게 하시고 자라게 하셨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마지막 재림할 때처럼 공중에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천사를 대동하고 큰 나팔을 불고 하늘에게 직접 올리워 가실 때처럼 초림하셨다면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부정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바로 우리는 그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성장하셨고(눅 2:52), 피곤해 하셨으며(요 4:6), 배고픔을 느끼셨고 목말라 하셨습니다(요 4:7-8). 또한 주님도 유혹을 받으셨고(마 4:1-10, 눅 4:1-12, 히 4:15), 눈물을 흘리셨으며(요 11:35, 38), 분노와(막 3:5) 슬픔과(마 26:37-38) 기쁨과(요 15:11, 17:13) 죽음을(요 19:30) 경험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모습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 방식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지 예수님이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자신이 예수님처럼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을 넘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모든 일을 똑같이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성령 하나님이 직접 도와주시고 그분이 교사이기 때문에(요 14:26, 16:12-19, 고전 2:10-16) 우리의 부족함이 채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이 있지만 가르쳐야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내가 너희에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만 하시고 우리에게 교수법을 가르치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교사였는가?
예수님에 대한 호칭 중에서 두 개 이상의 복음서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28개가 있는데 그 중에 ‘예수님(615번)’, ‘주님(191번)’, ‘인자(80번)’, 그리고 네 번째로 많이 나타나는 단어가 ‘선생(70번)’ 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처럼 선생님이라고 많이 부른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한마디로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3-14)
여러분!
선생님이라는 말을 들으려면 무엇을 해야 됩니까?
가르쳐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기적만 베풀었으면 선생이라는 말보다는 ‘요술사’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선생이라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가르치다. 가르치심의 단어는 54번이나 나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에만 관심이 많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정말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초자연적인 이적을 보고 이분은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언제나 오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가난한 자의 모든 쓸 것을 공급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 26:1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요술사가 아니라 교육가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장소를 보면
‘회당’(마 4:23, 9:35, 13:54, 막 1:21, 6:2, 눅 4:15, 6:6, 13:10, 요 6:59, 18:20),
‘예루살렘 성전 뜰’(마 21:23, 26:55, 막 11:15, 17, 12:35, 14:49, 눅 19:47, 20:1, 21:37, 요 7:14, 28, 8:2, 20, 18:20),
‘집’(눅 5:17-18, 7:36-50),
‘마을이나 동네에서’(마 11:1, 막 6:6, 눅13:22)
‘야외에서’(산에서 마5:1-2), (호숫가의 배에서 막4:1, 눅 4:3), (거리에서 눅 13:26)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람들
서기관들(마 8:19-22, 눅 9:57-62, 막 2:6-10)
바리새인들(마 12:1-8, 19:3-9, 22:41-46, 눅 14:12-14)
대제사장과 장로들(마 21:23-46, 막 11:27-12:12, 눅 20:1-8)
사두개인들(마 22:23-32, 막12:18-27, 눅 20:27-44)
율법사(눅 10:25-37, 눅 11:45-53, 눅 14:1-6)
세례요한의 제자들(마 9:16, 11:2-6)
제자들(마 17:19-20, 막 9:14-29, 눅 10:1-20)
회당장(눅 13:14-17)
여인들(눅 10:38-42, 눅 11:27-28)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때와 장소, 대상을 가리지 아니하시고 기회만 있으면 가르치셨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가르치다보면 선생님이 이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가르치지 않으면서 선생이라는 말을 듣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정말로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하라!

질문과 대화
예수님이 하신 질문은 복음서에 모두 304개 나옵니다. 이중에 겹치는 것을 빼고도 225개의 다른 질문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토록 많은 질문을 던지신 것은 가르치신 내용이나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대화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사실과 반대되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동의를 얻기 위해서, 잘못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등입니다.
그러나 결코 사단하고는 대화하지 않는 예수님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도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질문을 많이 하신다는 것은 그만큼 대화를 많이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부부간에도 많은 대화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내 주장은 강하게 하는데 대화하는데 익숙하지가 못합니다. 대놓고 화내는 것이 대화가 아닙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대화입니다. 예수님이 질문을 많이 하셨다는 것은 대화하기를 좋아하신다는 뜻입니다. 요즘말로하면 상담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가셨다는 뜻입니다. 대화는 일방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상대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장난감을 자녀의 동의 없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하면 교육이 안됩니다. 어쩔 수 없이 장난감을 버려야 한다면 아이에게 직접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사주고 쉽게 버리면 그 아이는 물건의 소중함을 모를 것입니다.

확실함
본문 “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교육은 “아마”라든지 “그럴 것이다” 혹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등의 불확실한 상상적인 이야기는 없습니다. 언제나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와 같이 명확히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지도자인 랍비나 서기관, 율법연구가들은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라든지 “랍비는 이렇게 말했고, 율법과 예언가들은 이런 말을 했다”였습니다. 즉 오랜 전통으로부터 내려오는 방법이고 이것을 잘 할수록 많은 학식이 있는 선생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에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 1:27)고 했습니다.

겸손
거만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칭송과 찬양을 받으려 했던 율법학자들과 랍비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겸손을 보여주셨고 그것을 명하셨습니다.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2-14)곻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직접 오신 목적에 대해서도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과는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지적하신 후,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1-13)라고 하셨습니다.

일관성
우리(한국)의 교육은 이 문제를 일찍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바닷가의 ‘계’에 대한 비유를 잘 사용합니다. 자신은 옆으로 가면서 자식들에게 ‘앞을 보고 똑바로 가라’고 해야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만 됩니다. 학생들에게, 자식에게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한참을 그 이유의 타당성을 이야기하고 정작 자신이 담배를 피우면 학생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목사가 어려운 것은 말하는 것, 설교하는 것만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말한 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으로만 선교하는 것은 무의미 합니다. 그저 큰 교회의 단점을 자격지심에서 꼬집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내가, 우리교회가 바르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말한 대로 실천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조금도 모순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요 14:6)라고 말씀하시고 진리로 사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고(마 5:43-48) 자신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자신이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지키시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정신은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인다”고 어거스틴은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사랑과 고난에 대해서 말씀만을 하시고 자신이 그와 같이 살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이 모두 순교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선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모습대로 우리도 본을 받는 것이고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종적인 교육인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도 인류 역사상 제일 위대한 이 교육 대열에 참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때가 차매

예수님의 생애(1. 때가 차매) / 본문 : 누가복음 1:5-22, 갈라디아서 4:4-7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눅 1:5-22)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4-7)

어느 나라를 가든지 자신의 나라의 중심지가 있습니다. 지리적인 중심지가 있는가 하면 경제, 정치의 중심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능을 가지고 있는 도시를 수도라고 말합니다. 우리 나라는 요즘 신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으로 인해서 어수선합니다.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크바입니다. 그러나 지리적인 중심은 러시아 가운에 위치한 ‘노보시베리스크’입니다. 이 도시는 스탈린이 러시의 중심이라고 해서 세계에서 처음으로 과학도시로 계획해서 만든 도시입니다. 제가 이 도시에 가 본적이 있는데 지금도 하루에 두 차례씩 시 전체에 먼지가 나지 않도록 물 청소를 합니다.
그러나 한 나라가 아니라 지구의 중심지가 있다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은 모두 자기 중심적이어서 자신이 있는 곳이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선교지에 가면 모든 선교사님들이 하는 말은 자기가 있는 곳이 센터라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변방인데 선교사님은 여러 이유를 들며 그곳이 중심이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런 자세는 매우 좋은 것입니다. 현재 자신이 속해 있는 곳에 대한 열정과 관심은 어떤 일을 하든지 힘의 밑거름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있었던 자리에 성분묘교회(聖墳墓敎會)를 만들어 놓고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지리적인 관점에서도 과장만은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 대륙을 연결하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세 대륙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대륙을 한 바퀴 돈다면 모두가 만나게 되는 곳이 팔레스타인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이 지리적으로도 최 적지였다면 예수님이 탄생하실 시기 역시 최 적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증거한 것처럼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메시야의 예언에 대해서 약 300여번 소개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어느 때 보내셔야 할까’에 대해서 생각해 오시다 제일 적절한 시기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운동경기인 축구나 야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적절한 시기에 선수를 교체해야 합니다. 이 때 시기가 중요합니다. 운동경기 한 게임을 이기기 위해서도 때를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가 어디를 갈 때도 준비하고 상황이 되었을 때 떠납니다.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은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때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종교적인 제반 조건이 하나님 품에 계시던 독생자 그리스도가 탄생할 모든 조건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이 시기를 가리켜 우리는 인류 역사상 제일 암울했던 시기에, 제일 영광스런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고 말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예수님의 탄생을 “인간들의 사건에는 때(밀물)가 있는 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밀물을 받아들인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라는 찬송으로 전 유럽을 진동시켰고, 존 낙스는 “신앙의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외침으로 스콧틀랜드를 뒤흔들어 놓았고, 웨슬레는 영국을 성화로 불 붙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이 일제의 신사앞에 무릎꿇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지막 설교를 하고 스스로 감옥으로 찾아가 순교했습니다.

1. 정치적 준비
본문 5절에서 “유대 왕 헤롯 때에”라고 말합니다. 헤롯왕(Herod the Great, King) B.C. 37년에 즉위하고 이어서 아켈라오(Archelaus)가 B.C. 4년에 즉위할 때까지 팔레스타인 지방을 다스린 왕입니다. 이렇게 로마의 한 지방을 다스리는 왕은 로마 황제(아구스도:Augustus)가 임명한 것입니다.
이 시대의 로마는 대서양에서 카스피해까지, 영국에서 나일강까지, 하드리아 국경에서 유브라데에 이르는 모든 도로 및 지역에 로마 제국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더 이상 작은 국가들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로마가 통일왕국을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통일 왕국은 메시야가 오시는 것을 준비한 것이 되었습니다. 통일 왕국은 세 가지 관점에서 좋은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첫째, 로마 주변 국가의 안정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한 세기나 반세기 전, 후쯤에 오셨다고 가정한다면, 주변 국가들은 각각 쇄국 정책으로 문호를 폐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둘째, 교통의 편의입니다.
복음이 더 빨리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로마제국의 도로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자신들이 점령한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지 로마로부터 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았습니다. 로마로부터 닿을 수 있는 곳이면 모두 도로를 건설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1,2,3차 여행 및 로마 여행을 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시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 도로는 복음을 전하는 경로로 이용되었습니다.

셋째, 언어의 통일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좋은 외적인 환경이 도로라면 내적인 환경은 언어였습니다. 구 소련은 방대한 땅을 정복하고 제일 먼저 한 것이 언어통일 문제였습니다. 로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진정한 통일은 언어가 통일되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랜 지배가 계속되지 않으면 언어를 바꿀 수 없습니다. 당시의 헬라어는 표준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헬라어를 사용하면 갈라디아 거리에서나, 아덴의 모임에서나, 로마나 스페인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로마의 시대와 현재가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교통으로 말하면 로마 시대보다 훨씬 더 편리할 것입니다. 언어 문제도 세계가 하나 되고 있습니다(나만 빼고). 또한 로마 시대에는 없었던 인터넷도 있습니다. 진실로 복음을 전할 마지막 시대가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계 3:8)

2. 경제적 준비
로마의 찬란한 문화 뒤에는 사치와 낭비가 만연했습니다. 로마를 걸어가는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종이나 노예들이었습니다. 때로는 이 노예들이 사회에 적잖은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시인들은 지나가 버린 과거를 황금시대로 노래했습니다.
로마가 다스리던 전 지역이 것 모습과는 달리 황폐해 있었고 가이사가 다스리는 철의 통치만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는 팔레스타인 지역 역시 다른 지역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전쟁의 여파와 과중한 세금은 사람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국민의 생활은 걱정과 근심으로 불안했고 내일의 행복이 보장되지 않은 체 세월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세계는 일대 고민 투성이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토록 암담한 시대에 베들레헴에서 한 소망의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야 그분이 이 땅에 오시는 일이었습니다. 동방의 한 지역에서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별을 연구하던 사람들이 따라왔습니다.
오늘날에도 경제 부흥을 분석해 볼 때 잘 살게되는 나라보다는 어렵게 사는 나라 사람들이 복음을 더 잘 받아들입니다. 일본은 우상이 많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합니다. 인간의 모든 재물이 다 없어지고, 밑천이 다 달아나 버린 것은 세계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기회를 준 것입니다.

3. 종교적, 도덕적인 준비
헬라와 로마는 자연 숭배와 제우스(Zeus)와 디오니구스(Diny us), 아프로다일(Aprodite)을 섬김으로 행복을 찾으려고 했는데 예수의 출현과 함께 그 모든 이교 적인 신앙이 무너졌습니다. 지금도 서양에서는 동양종교를 신비스럽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런던에 갔을 때 길 거리에서 동양종교를 소개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호기심에 찬 모습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은 더 이상 제우신이나 아프로다일 신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제 싫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들은 동양의 신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헬라의 오림프스산에서는 동양의 우글거리는 잡신을 다 섬기고 있었습니다. 또한 로마에는 만신전(萬神殿)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로마 황제 자신이 신의 존재로 부각하여 모든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추종하도록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한줄기 소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을 통해서 내려오는 메시야 사상입니다. 이제 메시야가 오실 때가 되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계가 다시 질서를 잡을 것으로 믿는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나타났을 때 이 사람이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 정도로 사람들은 갈급해 있었고 유대인을 중심으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4. 하나님의 준비
이제 메시야를 보내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때를 기다려 오셨던 것입니다. 그 첫 반응은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준비해 두신 대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사가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론의 지파 자손이고 현재 아비아조에 소속된 제사장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아내는 엘리사벳입니다. 부부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며 계명과 규율도 잘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이 있다면 자녀가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였고, 두 사람은 이제 나이가 많아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가랴가 제비뽑아 차례가 되어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분향하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밖에서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분향하는 중에 천사가 내려와 분향하는 오른쪽 제단에 서서 놀라 떨고 있는 사가랴에게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 간구를 주께서 들어 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이 일을 믿지 못했습니다. 천사는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 천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이 이루어질 때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있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가 너무 오랫동안 성소에 머물고 있어서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사가랴가 성소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못하고 손짓 발짓으로 있었던 일을 어렵게 설명했습니다. 사가랴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대로 임신을 했고, 다시 가브리엘 천사는 여섯 달 만 에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로 가서 다윗 가문에 속한 요셉이라는 사람과 정혼하기로 약속한 처녀 마리아에게 찾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사가랴 부부를 통해서 요셉과 마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다음에 세례요한이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 말고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사가랴 부부를 통해서 아이를 전혀 낳을 수 없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낳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리아를 통해서, 여인의 몸에서 탄생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존 하워드 그리핀(John howard griffin)이라는 백인 미국 사람이 1959년에 흑인들이 받는 멸시와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가 하는 것을 몸소 체험해 보기 위해 자신을 흑인처럼 만들어 흑인 행세를 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피부가 검어지는 약을 먹고 피부가 잘 타는 약을 바르고 햇빛에 피부를 태우고 검게 보이는 약품을 바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났더니 승차 거부를 당하고 식당에서는 음식을 팔지 않고 호텔에서도 쫓겨나는 등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온갖 핍박과 천대를 받고 나서 “나 같은 흑인” 이라는 책을 써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기 위하여 선지자들은 통하여 말씀도 하시고 율법으로 다스려 보려고도 했으나, 인간이 돌이키지 아니하므로 창조주 되신 하나님이 친히 피조물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찾아 오셨습니다.

2차 대전 때의 일입니다. 필리핀이 잠시 일본에 점령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 유명한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을 떠나면서 “나는 꼭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약속했습니다. 2년 후,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의 레이투만 해안에 상륙하면서,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속대로 나는 다시 왔다.” 맥아더 장군이 자기 개인의 명예를 걸고, 그가 다시 온다는 약속을 지켰다면, 우리들의 구세주이며 역사의 주인이신 그분이 약속을 안 지키시겠습니까? 틀림없이, 우리 주님은 약속을 지키시고 반드시 오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처음에 오실 때는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지만 재림하실 때는 심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처음오실 때는 시대적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영접할 수 있는 제일 좋은 시기를 택하신 것입니다. 또한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기 좋을 지리적인 위치와 시기를 택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준비하는 사람에게 오십니다. 갈망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이 세상을 의지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오실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주님만을 앙망하는 주앙교회 성도여러분에게 주님이 찾아오실 것을 믿습니다.

나의 아멘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52. 나의 아멘이신 예수님) / 계 3:14, 계 22:16-21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계 3:14)
“16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17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16-21)

오늘은 성도가 제일 많이 사용하는 “아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깨어 정신을 차리고 들으셔야 합니다. 저를 믿어 주셔서 우리 목사님은 특히 주일 낮 예배는 예수님에 대해서만 설교하시기 때문에 안심하고 자도 된다고 생각하시고 주무시면 안됩니다. 오늘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설교를 지난 일년간 해 왔는데 그 마지막 번째이기도 합니다.

원문에서 아멘(ajmh;n)은 신약에서만 129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49개만 나타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다른 말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그 단어는 아멘의 뜻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바로 “진실로”라는 단어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복음서에 112번 나타납니다. 특히 원문 요한복음서에서는 “ajmh;n ajmh;n”으로 두 번씩 나옵니다. 그래서 번역성경에서도 “진실로 진실로”로 번역했습니다. 원래 헬라어에는 이 단어가 없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에서 온 것입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처음 이 단어가 나오는 곳은 민 5:22절에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로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아멘의 시작(민 5:11-22).
남편 모르게 아내가 바람을 피었습니다. 그러나 그 물증이 없는 것입니다. 심증은 가는데 증인도 없고 물증이 없습니다. 이 때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러주신 방법입니다. 또한 아내가 바람을 피지 않았는데 남편이 의심이 생겼을 때도 이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로 갑니다. 제사장을 만날 때는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위해서 보리 가루를 예물로 드립니다. 이것을 “의심의 소제”라고 하고 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장은 여인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제사장은 거룩한 물을 떠다가 성막 바닥의 티끌을 물어넣고 여자는 머리를 풀고 의심의 소제물(곡식제물)을 여자가 들고 있게 하고, 제사장은 저주를 내리는 쓴 물을 손에 들고서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맹세를 ‘어떤 남자와도 동침한 일이 없고, 남편을 배반하여 몸을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를 내리는 이 쓴 물이 네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 몰래 몸을 더럽혔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맹세를 시킵니다. 그리고 이 물을 먹게 합니다. 이 때 제사장은 맹세를 시킬 때 여자는 “아멘 아멘”하고 응답해야 합니다. 만일 거짓으로 맹세하면 배가 붓고 허벅지가 말라죽습니다.
만일 간통한 여인이라면 이 자리에서 아멘 할 수 있습니까? 아마 미리 도망갈 것입니다. 아멘 할 수 있는 여인은 남편 몰래 바람을 피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아멘은 하나님께 맹세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시키신 것입니다.

맹세에 사용된 언어입니다.
그 다음에 아멘은 신명기 27:15-26절까지 매 절 12번이 나옵니다.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신 27:15)
여기에 나온 아멘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속이거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든 백성이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하나님께 맹세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한 언어입니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대상 16:36)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느 8:6)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시 41:13)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시 89:52)
다윗 시대 때부터 아멘의 사용은 다시 왕성해 졌습니다. 이 때도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아멘 했습니다. 두 번째는 아멘 아멘 두 번씩 사용하는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분이 좋거나 확실하면 즉 거짓이 없으면 사람은 반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멘을 다른 말로 번역한다면 “정말, 참, 진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진짜 참 기름이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은 진짜 참 기름이냐는 말은 믿지 못하는 우리의 풍습에서 기인한 말입니다. 참기름이면 참기름인데 가짜 참기름이 있기 때문에 ‘진짜 참기름이냐’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믿지 못할 때 ‘정말 진짜 참기름이냐?’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에서 아멘 아멘 한 것은 하나님께 확인에 확인을, 맹세에 맹세를 하는 의미입니다. 즉 이 시대 사람들의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만 적용된 언어입니다.
아멘은 구약에서 하나님께 맹세할 때 사용한 언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이 용어가 예수님께 적용되었습니다. 이 의미는 무슨 말입니까?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아멘 하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아멘 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이 삼위일체이신 성자라는 뜻입니다.
개역한글판 성경에 아멘이라는 말이 무슨 말로 번역되었다고 했습니까? ‘진실’입니다. 이 말은 원문에는 ‘아멘’입니다.
이 말이 신약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실 때 “산상수훈” 팔복을 말씀하셨는데 이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 본문말씀 “19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19-21)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같은 뜻입니다. 앞에 것은 마태가 처음 복음을 전하실 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나중 것은 요한이 밧모섬에서 하나님께 보여 주신대로 기록한 요한계시록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한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렇게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실 때 “아멘”을 언제 하셨습니까? 문장 맨 앞에서 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입니다. 번역성경에서 혹 앞에 오게된 것인가 살피기 위해서 헬라어 원문 성경을 보았습니다. 원문 성경에서도 말씀 앞에 이 단어가 놓여있습니다.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약속을 할 때 상대방의 조건을 들어보기 전에 그 조건을 전재로 해서 약속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그 약속에 대해서 이행할 것을 다짐한 상태이고 내 조건을 들어달라는 약속입니다. 아멘의 경우고 구약에서 사용된 경우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사용된 경우가 다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맹세하기 위한 방법으로 아멘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도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고 아멘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면 아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멘은 아주 잘 해야 됩니다. 아무 때나 아멘 하면 큰일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멘 자체가 맹세요, 서약이기 때문입니다. 아멘은 최소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멘을 먼저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실 말씀은 예수님이 알고 계신 것이며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어보고 자신의 입맛에 맞으면 아멘 할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미리 다짐을 받아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멘을 먼저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멘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 아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아멘하고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떤 조건을 말할지 모르는 사람하고 미리 약속할 수 있습니까? 조건을 들어보지 않고 약속할 수 있는 사람은 부모님이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편이 무슨 조건을 말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이라면 무슨 말씀하셔도 내가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처지를 아시는 부모님이 무리한 조건이나 부탁을 하시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을 때 여덟 살 된 아들이 음식 투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도 맛이 없고, 저것도 맛이 없고, 나 밥 먹기 싫어!”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을 달랬습니다.
“애야, 아빠가 너처럼 어렸을 때는 밥 한 끼 먹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단다.”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에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지금은 우리랑 사니까 훨씬 좋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런 것입니다. 그냥 웃어야지요.

여러분! 복음서를 다시 보세요. 진실로가 다 앞에 있잖아요. 저는 이것을 보면 은혜 받습니다. 내가 들어보고 아멘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면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우리는 미리 아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은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는 아멘을 하지 못합니다.

아멘은 삼위의 하나님 말씀에만 적용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와 계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두 말씀은 모두 말씀에 관계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시카고에 있는 성도님과 한시간 반 가량 통화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오셔서 성경을 가르치는데 이분은 아까운 듯 조금씩 말씀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더 알고 싶어서 인터넷을 찾다가 제 성경공부 사이트을 찾아 연락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가르치는 방법이 성경에서 짝을 찾아야 한다. 비유를 모르면 안 된다 등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재림주가 한국 그것도 경상도에서 나온다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그분은 문제가 있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바로 보지 못하고 읽지 않다 보니 성경대로 살수도 없고 미혹하는 말에 쉽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조금 안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됩니다. 또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지 아는 척 하면 안됩니다.
어떤 초신자가 할렐루야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몰라서 어떤 집사님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집사님도 잘 몰라서 얼른 생각 나는 대로 대답하기를 남원에 가면 광한루가 있고 진주에 가면 촉석류가 있듯이 천국에 가면 할렐루가 있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는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에 대해서 벧후 3:16에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말에 ‘참’과 ‘개’를 구별합니다. ‘참’은 진짜를 ‘개’는 사이비를 나타내는 접두어로 사용됩니다. 개는 한자 ‘가(假)…’의 준말이며 참은 순수한 우리말인데 한자로는 ‘진(眞)’입니다. 때로는 참 대신에 한자를 사용해 ‘참달래’가 되어야 하는데 ‘진달래’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통 진짜를 나타낼 때는 ‘참’자를 쓰고 가짜를 나타낼 때는 ‘개’자를 사용합니다. 진짜 기름을 참기름이라고 하고 얼굴에 흐르는 쓸데없는 기름을 개기름이라고 합니다. 쓸모 있는 말을 참말이라고 하고 쓸데없는 말을 개소리라고 합니다. 나리꽃은 비슷하지만 산에 코고 아름답게 피는 것을 ‘나리’라고 하고 집 뜰에 나리처럼 흉내는 냈지만 작게 피는 꽃을 ‘개나리’라고 합니다. 나쁜 먹을 ‘개먹’이라고 하고 붓글씨를 쓸데 잘 못 쓴 글에 덧쓸 때 개칠한다고 합니다. 가짜 눈알을 개눈 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말대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만일 ‘개(소리)’말로 만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본문 계 22:19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앙교회 성도들은 오직 성 삼위이신 하나님의 참 말씀에만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이 아멘을 많이 하면 무식하다고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멘은 많이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아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장을 아무 데나 찍지 않지 않습니까? 그것과 같습니다. 아무 말에나 아멘 하면 도장을 남발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단 한번의 보증 도장을 찍어줌으로 평생을 고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멘을 잘못하면 이 보다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멘 하기 겁나시죠? 그렇다고 아멘을 안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아멘을 많이 하면서도 문제없는 방법 하나 알려 드립니다. 성경을 그대로 읽을 때 미리 아멘 하셔도 됩니다.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할 때도 성경구절 잃고 그대로 설교하면 아멘 하시면 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지키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아멘

나의 중보자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51. 나의 중보자이신 예수님) / 딤전 2:1-7

“1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3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을실 만한 것이니 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7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딤전 2:1-7)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심리적으로 3대 중요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① 자존심(자신이 중요한 존재로 평가받기 위하는 마음) ② 안정감(의식주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자유롭기 원하는 마음) ③ 소속감(어디엔가 속해 있지 않으면 불안하고 외로운 마음)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기본욕망을 만족하게 살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참 만족을 얻으실 것입니다.
세계적인 대재벌인 록펠러(J. D. Rockefeller)의 어머니는 생전에 아들에게 세 가지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첫째, 예배당에 가면 항상 앞자리에 앉아라. 둘째,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라. 셋째,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라. 록펠러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살아 하나님께 이 땅의 축복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생각과 인생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으며 모든 악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 ‘모든’이라는 단어가 모두 5번이나 나타납니다.
첫 번째 ‘모든’이 세 번 기록된 것은 ‘기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중보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모든’이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신약시대 사람들은 크게 새 부류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 헬라인, 로마인입니다. 이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민족성이 강하여 물과 기름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자신의 민족이 우선이요, 먼저였습니다.
얼마 전 이라크에서 한국 분이 한 명 무장단체에 의해서 피살되었습니다(김선일 25세 남, 2004년 6월 24일 이라크 팔루자 인근). 이 사건을 통해서 이라크 파병에 대한 국론분열 현상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라크 국민에 대해서 적대시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신약시대의 세 민족은 이런 반목이 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범 세계적인 사람을 말한 다기보다는 민족을 뛰어넘어 사랑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라크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 ‘모든’이 두 번 기록된 것은 ‘구원’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는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논쟁중의 제일 중요한 쟁점이었습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해석하기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설을 주장했습니다. 칼빈주의 자들은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준비되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믿는 사람)만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의 주장을 따르는 것입니까? 칼빈입니다. 그래서 장로교는 칼빈주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요지는 사회의 어떤 계층이나 종족의 특성 때문에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때 우리 나라를 침략했던 일본 사람들도 예수믿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북한 사람도 중국사람도 베트남 사람도 이라크 사람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조건 유대인이라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느 민족 어떤 지위에 있느냐가 구원의 열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중보도 한 분이십니다.
본문 5절에 헬라어 원문에는 ‘가르’(ga;r)가 나옵니다. 이 말은 ‘왜냐하면’입니다. ‘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구분되어 원수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모두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형제, 자매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 3:20에서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 중보하실 수 있는 분도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부모님이 두분 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낳아 주신 분, 길러주신 분으로 말할 때 부모님이 혹 여러분을 모시고 섬길 수는 있는 것이지만 낳아주신 부모님은 한 분 외에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주신 분도 한 분이시요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 역시 한 분뿐이십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질 무렵, 워싱턴의 백악관 대기실에는 검은 가방을 든 훤칠한 키의 미국 신사가 초조히 실내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바로 한국의 육영공원 교사로 왔다가 곧 미 감리회 한국 선교사였던 헐버트였습니다. 그는 지금 일본의 마수에 기울어 가는 국운을 바로잡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고종 황제가 미국의 루스 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밀서를 지니고 대통령의 면회를 요청하고 서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밀서는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려 하고 있으며 이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며 무력에 의해 강압으로 이룩한 것이다. 한.미 수호조약의 규약과 그 정신에 입각하여 미국은 한국의 입장을 도와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헐버트는 백악관 문전에서 대통령을 만나지도 못하고 나와야 했습니다. 이미 제국주의의 열강간에 즉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비밀협약이 진행되었고 일본의 한국 침략은 미국의 용인을 받고 있는 터였습니다.

미국 대통령께 중보하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국익을 위해서 결정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중보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우리의 영혼만을 위해서 결정하십니다.
히브리서는 다음 세 구절을 통해서 확실하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 이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히 8:6)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5)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

우리를 속전해 주셨습니다.
‘속전’에 해당하는 ajntivlutron(안틸뤼트론)은 헬라어 원문 성경에서도 이곳에만 나오는 유일한 단어입니다. 사람의 몸값을 말하는 lutron(뤼트론)과 대신을 말하는 ajntiv(안티)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당시의 노예들은 우리 나라의 노비와 같다고 보면 되는데 우리보다는 훨씬 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노예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만 주면 사람을 살 수 있었습니다. 노예들은 자신의 힘으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많은 몸값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평생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우리의 죄 값은 무엇으로도 대신 값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계속해서 양과 소등을 제물로 드렸으나 이것으로 죄를 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몸값을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텔레마코스(Telemachus)는 주후 4세기에 수도원에서 기도하며 살았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기도중에 “로마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반복해서 듣고 수도원을 떠나 무조건 로마로 왔습니다. 도착해 보니 로마 원형경기장에 사람들이 몰려있었습니다. 검투사들(gladiators)이 싸우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쓰러져 죽을 때까지 경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께서 이 땅에 다녀 가신지가 4세기가 지났는데 아직도 오락과 같이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 흥분하는 관중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기장으로 뛰어들어가 양손을 들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관중들은 소리쳤습니다. “그놈을 치워 버려라!” 그리고 그는 다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검투사 하나가 칼등으로 그를 쳐서 땅에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시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 그러자 다른 검투사가 그의 배를 칼로 찔러 그는 그곳에 엎드려져 일어나지 못하고 마지막 힘을 다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피가 모래위로 나오면서 어떤 한 사람이 먼저 일어나 경기장을 나갔습니다. 그러자 한 두 사람씩 경기장을 빠져나가 8만 관중이 모두 나가고 이때부터 로마 원형경기장에서는 다시는 검투 시합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하여…
7절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바울이 ‘이를 위하여’(7절)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전으로 내어주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전파하는 자’라고 말한 것의 원문은 임금이나 행정관, 군주 등의 명령을 받고 공공문서를 전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군대로 말하면 통신병입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고 복음을 전해야 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 드라마에서 왕의 명령서를 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시급성을 요하는 문서를 가지고 말을 빨리 재촉하여 왕의 급한 명령을 받고 가는 신하라는 뜻으로 빨간 깃발을 꽂고 빨리 달려가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바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가는 사도로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급하고도 중요한 명령을 받고 가는 전령이 가다가 쉬고, 딴 짓 하지 말고, 자신의 일을 보고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전령이 아닙니다. 사도가 아닙니다. 아마도 군법회의에 넘겨질 것입니다.

필리핀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처가 시장에서 암탉을 두 마리 샀습니다. 제가 가끔 비실대니까 몸보신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두 마리를 사서 한 마리는 끈으로 묶어 놓고 한 마리는 푹 고아서 아이들도 주지 않고 제게만 기름이 동동 뜨는 닭국을 가져왔습니다. 그때 그만 끈으로 묶어 두었던 닭이 끈을 풀고 담을 넘어 뒤편에 있는 수렁을 지나 건넛집 지붕으로 올라가고 말았습니다. 그 닭을 잡으려고 저는 발을 걷어붙이고 긴 장대를 들고 수렁을 지나 건너편 집에 가서 몇몇 아이들을 도움을 받으며 그 닭을 잡기 위해 이곳 저곳으로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필리핀 촌닭은 어찌 그리도 잘 나르는지! 이 지붕에서 저 지붕으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종횡무진 도망을 쳤습니다. 몇 시간을 따라다니며 저는 마음속으로 “주님 저 닭을 잡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저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므로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4-7). 저는 문득 저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이곳에 이사와서 천하보다 귀한 잃은 영혼들을 찾으려고 이렇게 열심히 이 집 저 집을 다니지 아니했는데 고작 암탉 한 마리 잡으려고 이런 열심을 가지다니, 나도 별수 없는 속물에 불과하구나. 저는 닭을 따라 다니다가 결국 자신의 무지와 게으름을 발견했습니다. “주님 잃은 영혼들을 찾으러 이와 같은 열심을 가지고 이 집 저 집을 다니게 하옵소서. 종에게 믿음과 지혜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는 겁니다.

중국복음화에 문을 연 사람으로 알려진 허드슨 테일러는 아버지로부터 “성경을 사랑하거라. 하나님은 절대 거짓말을 안하신단다. 그분은 너희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실패하지도 않으신단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공부에 흥미를 잃고 문제아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교장으로부터 더 이상 학교공부를 시킬 수 없다는 통지를 받고 그는 집에서 놀며 아버지와 함께 약국 일을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제임스 테일러)는 불어, 라틴어를 가리키며 산수도 직접 가르쳤습니다. 허드슨은 두 명의 누이동생들(아벨리아 세 살 아래, 루이자는 여덟 살 아래)과 함께 자랐습니다. 산수를 가르치며 아이들이 재미 없어하면 재미있는 화재로 바꾸었는데 “면적이 영국의 100배나 되고 표면 중 사람이 살 수 있는 부분의 10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요.” “맞았어. 만일 중국인이 1m 간격으로 쭉 한 줄로 늘어선다면 지구를 일곱 바퀴나 돌게 된단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훗날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허드슨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명령을 받았으면 그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령의 사명입니다. 주앙교회 성도들은 바울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전령이심을 믿고 복음을 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구주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50. 나의 구주이신 예수님) / 눅2:11, 행13:23-3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23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26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31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행 13:23-31)

우리 나라에는 성명학(姓名學)이라고 하는 이상야릇한 학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름 석자가 인생의 운명을 판가름한다고 믿는, 역학(易學)의 일종인 잡학(雜學)입니다. 성명학 관계자들은 성씨나 이름이 ‘금목수화토’ 오행(五行)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름을 연구해 보면 인간의 미래와 운명을 미리 점쳐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이런 성명학이나 사주팔자(四柱八字)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디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와 이름 석자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보고 있는 것입니다. 참 어리석고 미련한 짓입니다. 설령 사주팔자와 이름 석자가 인생 행로(行路)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할지라도, 우리 기독교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믿어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구주로 믿고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생일과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런고로, 육신의 부모로부터 태어난 날짜와 그 지음 받은 이름이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새 인생을 얻은 구원의 날과 하나님께로부터 새로 지음 받은 이름이 더 중요합니다. 그야말로, 팔자가 바뀐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도 물론 필요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얻게 된 새 이름은 그리스도인, 성도입니다.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주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밝히셨는데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인간의 구원입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의 높은 이상들을 설명해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방법과 길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즉 석가모니가 인간답게 사는 방법은 설명해 주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사해주거나 죽지는 않았습니다.
한사람이 강물에 빠졌습니다.
한 사람이 “왜 위험한 강물에 들어갔느냐? 가지 말라고 했지 않더냐?”
다른 사람은 “손을 이렇게 하고, 발을 이렇게 하여 수영을 하여 빨리 물에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웃옷을 벗고 물 속에 첨벙 들어가 그 사람을 붙잡아 나왔습니다.”
한사람은 유교이고, 다른 사람은 불교이고, 또 다른 사람은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달려 자신을 희생한 분입니다.
기독교가 왜 세상의 영화를 부러워하지 말고 경건한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이 땅의 축복이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이 구원을 받아야 되는 문제를 생각하면 이 세상의 축복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이 땅의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 땅의 축복도 의미가 있어집니다. 구원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향락을 위해 재물과 시간을 사용할 것입니다. 좀 나은 사람들은 사회의 구제를 위해서 재물을 나눌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드려지는 예물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인간에게 제일 기쁜 소식은 예수께서 나를 위해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미국의 대통령이 나를 만나기 위해, 나를 구원해 주기 위해서 한국에 온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난리가 날겁니다. 미 대통령이 나 한사람을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 땅에 온다면 그것은 최고의 영광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미국 대통령이 와서 이 세상의 물질과 권세를 어느 정도 줄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분도 내 영혼을 구원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정도이겠지 나를 위해 희생하지는 않을 겁니다.
성경은 분명히 전합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아멘-

예수의 이름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가 구원하실 것이다.” 또는 “구주”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누가 지어 주셨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누가 제일 권한이 있습니까?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아버지 되는 요셉에게 친아버지인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마 1:20-21에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직접 예수(구주)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 뜻으로 말하면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나의 “구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분을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름을 부르기는 해도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 뜻과 의미를 모른체 부르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
예수 이름이 왜 능력이 있습니까? 왜 예수이름만 부르면 마귀가 도망갑니까? 죄인은 누구를 보면 도망갑니까? 첫째는 자기가 죄지은 사람을 만나면 도망갑니다. 그리고 경찰을 보면 도망갑니다. 마귀는 예수님만 보면 도망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만 부르면 사단은 도망갑니다. 무서워서 벌벌 떱니다. 그분이 사단을 이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녀 가신지 2000년이 넘었습니다. 예수 이름 불러서 손해본 사람 있으면 말해 보세요. 예수 이름은 절망에서 소망을, 죽음에서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엡 1:21) 하셨으며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속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당신의 독생자를 “예수(구주)”라고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에 대해서 조금 더 증거 하고자 합니다.
기독교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음으로 종교적 삶(권리와 의무)을 시작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하나님은 그의 생애 속에서 생동력 있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학자들에게만 필요한 교리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우리 모두의 생활 속에 역사 하시는 실제적인 체험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나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변을 해 주어야 합니다.
(1)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2)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3)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구주를 증거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13:23-31의 말씀은 바울이 1차 선교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안식일날 유대인 회당에서 증거 한 것입니다(행13:14). 바울과 일행은 안식일에 이 유대인 회당에 가서 앉아있었습니다. 회당장이 성경을 읽은 후에 사람을 보내서 바울 일행에게 할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절호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바울은 손짓을 해가며 유대인에게 증거 합니다(행 13:16).
바울이 증거 한 핵심적인 것은 예수님은 구주라는 것입니다. “23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그리고 26절에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이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하셨습니다. 오래 전에 상표 인지도를 조사하여 보고한 것에 보면 전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코카콜라”라는 말을 들어보았느냐고 물어보고 그리고 “예수”를 들어보았냐고 질문했습니다. “코카콜라”를 들어보았다고 대답한 사람은 조사대상 사람 중에 90%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들어봤다는 사람은 70%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한 회사의 브랜드의 이름보다 예수의 이름을 더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전합니까? “예수” 이름만 전하면 됩니다. 그 이름 자체가 구원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7)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카톨릭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
예수님의 이름으로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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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거짓 증인들을 조심하십시오.
상표도 유명해지면 가짜 상표를 붙여 파는 악덕 상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유명하고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 24:5)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알렉산더 대제 휘하에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 병사는 형편없는 생활을 하면서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먹칠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알렉산더 대왕이 심문하게 되었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알렉산더입니다”
대왕은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냐?” “알렉산더입니다”
화가 난 대왕이 소리쳤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네 이름을 대라”
병사는 세 번째도 똑같은 말로 대꾸했습니다. 그러자 대왕은 “너는 네가 지은 죄만큼 벌을 받도록 하라. 그리고 이름을 바꾸든지 행실을 고치든지 선택하도록 하라. 아무도 내 이름 알렉산더를 자기 이름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링컨은 “남자 나이 40이 지나면 자기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이름과 역할이 있다. 역할과 이름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그 사람은 위인이 될 수도 있고 지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름 값을 다 못해 얼굴을 들지 못하곤 합니다. 특히 크리스천으로서의 명분과 책임을 다하지 못해 비난의 대상이 될 때마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부흥, 우리 가정의 문제, 나의 문제들 모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만 불러 보세요. 예수 이름 자체가 능력이요, 구원이요, 생명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주앙교회 이름에 자부심을 갔습니다. 어떤 분은 약간 현대적이지 못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의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만을 바라보라! 주님을 만을 바라보라! 온전히 예수 이름만을 부르라! 이런 성도들에게는 구원과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