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음성을 들으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예레미야 애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4)

예레미야 애가의 명칭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자기가 저술한 책에 제목을 붙이는 일이 없었습니다. 후일에 다른 사람들이 그 내용을 보고 합당한 제목을 붙였습니다.
히브리성경의 원 제목은 1, 2, 4장에 나오는 첫 단어인 ‘에카’를 따라 ‘에카’라고 불렀습니다.
‘에카’는 “아!, 어찌하여!”라는 비통함과 놀라움을 뜻하는 감탄사입니다. 우리 성경의 ‘예레미야 애가’라고 사용하는 것은 칠십인역과 불가타역을 따른 것입니다. (더 보기…)

땅을 사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6 예레미야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8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9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0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12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3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렘 32:6-15)

지난 수요일 제가 택배 두 개 5천 원에 보내야 하는데 200원이 모자라 정집사님께 200원 빌려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낮에 우리 집사람이 왔길래 우체국에 우편물 하나 보낼 것이 있어서 돈 좀 있으면 주고 가라고 했더니 지금 막 은행 들려서 오는 길인데 마지막 2만원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마이너스 통장인 것 아시죠? 하고 돈 만원 주고 가버렸습니다. 우리 집사람에게는 참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혼자 생각해보면 올해도 참 잘 살았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남겨놓는 것 없이 다 쓰고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할 일 다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목사가 돈 남겨 놓아서 뭐합니까? 나는 가난하지만 하나님의 일이 되어 가는 것을 보니 감사합니다. 2010년도 한 해에도 너무 감사할 제목이 많습니다.

성도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양입니다. 양은 늑대처럼 사납거나 똑똑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기능정도 하나씩은 있답니다. 뿔이 있던지,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가 있던지, 눈이 좋던지, 냄새를 잘 맡든지… 그런데 양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딱 하나 있는 것은 귀로 목자의 음성을 구별하고 목자를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는 양이었고, 우리도 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라면 목자 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는 잘 들어야 합니다. 설교는 안 듣고 졸다가 가시면 우리 목사님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셨구나 그렇게 생각하시기 쉽습니다. 그럼 그렇지 목사님이 현실을 보시는구나! 역시 투자할 곳은 땅 뿐이 없어! 그렇게 생각하시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었습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8)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 23:5-2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땅을 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라가 죽자 사라를 장사지내기 위해서 매장 지를 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헷 족속으로부터 땅을 살 때, 헷 족속은 그냥 묘실을 사용해도 된다고 합니다.
“6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7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창 23:6-7)라고 했습니다. 12절에도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 아브라함에게 그냥 좋은 땅을 골라 쓰라고 하지만 아브라함은 몸을 두 번씩이나 굽히고 겸손하게 대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물됨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겸손하게 그 땅의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그리고 땅 값 사백 세겔을 주고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을 사서 사라를 이곳에 장사했습니다.
이 땅에 사라, 아브라함,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야곱과 레아도 이곳에 장사되었습니다(창 49:30-31). 요셉이 애굽에 가서 총리가 되어 야곱이 거기서 죽었지만 요셉에게 유언하기를 가나안 땅, 바로 아브라함이 묻힌 그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하고 죽고 요셉은 그 유지를 받들어 야곱을 가나안 땅에 장사지냅니다(창 50:11).
땅을 산 목적은 투기가 아닙니다. 장사지내기 위해서입니다. 매장 지를 산 것입니다.

다윗도 땅을 샀습니다.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군사를 의지합니다. 그래서 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하나님께서 이에 노하사 “…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삼하 24:15)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갓 선지자를 통해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바로 이 땅이 예루살렘의 터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서 땅을 쌌습니다. 자기를 위해 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두 그냥 가지라고 했지만 돈을 지불하고 땅을 샀습니다. 값을 치르고 차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도 땅을 삽니다.
예레미야의 사촌인 하나멜이 예레미야에게 와서 땅을 사라고 합니다. 하나멜은 참 약삭빠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다른 족속에게 팔 수 없습니다. 자기 족속만이 땅을 매매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분배해준 땅이 다른 지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지파 사람에게는 팔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사촌인 하나멜에게 땅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은 이미 바벨론 군대가 포위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해졌기 때문에 이미 가치가 없었습니다. 망해 가는 나라의 땅을 사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은 십 팔 세겔을 주고 당시의 법에 따라 정확하게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0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그리고 14절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다 망한 땅을 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지 마지막 15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지만 반드시 돌아와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예레미야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남북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면서 국내 은행 고객들 사이에서도 “전쟁나면 은행에 맡긴 내 돈은 어떻게 되나”라는 걱정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내 은행들은 전쟁이나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천재지변 등을 대비해 마련해 놓은 비상대책(컨틴전시 플랜)에 따라 위기대응에 나설 수 있어 큰 문제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다른 시중은행 IT기획부장은 “해외 백업을 검토했지만 국내와 똑같은 시스템을 해외에 두고 관리하는데 비용부담이 커서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전면전 상황에서는 고객 정보를 완벽히 지켜낼 대책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은행에 저금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시의 선지자들이란 사생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바쳐야 합니다. 호세아는 창녀 고멜과 결혼해야만 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도망가려고 시도했지만 자기의 뜻대로 안됩니다. 결국 니느웨로 갑니다.
이사야가 활동한 시대는 앗수르의 침략에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가 몹시 곤욕을 당하는 때이었습니다. 이미 주전 840년 예후 왕 때부터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 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이사야가 아직 젊은 시절인 734년에 앗수르는 북왕국으로 부터 많은 포로를 붙잡아 가고 북왕국은 완전히 멸망해 버렸습니다. 수 년 후에 앗수르는 남왕국 유다에 침입하여 46개의 성을 파괴하였고 20만 명을 포로를 붙잡아 갔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메시야에 관한 예언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제일 암흑 시대에 제일 밝은 빛을 보여 주셨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당장 돈주고 산 땅은 이미 바벨론의 소유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으로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바보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바보 같습니다. 다 망한 땅을 사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좌절의 짙은 구름을 뚫고 비취는 소망의 빛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다른 가짜 선지자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렘 23:17) 할 때에 비록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을 예언했지만 그 다음에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마치 공증하듯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땅을 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지만 절대적인 절망이 아닙니다. 민족과 개인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아무리 북한이, 중국이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러시아가 일본이 있어도 우리는 절망에 빠지거나 사로잡혀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 개인과 나라의 운명은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잠 29:26) 세상에서 권력을 잡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전 4:8-10) 인간의 절망이 있는 곳,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 하실 장소가 됩니다. 인간의 힘이 존재하는 곳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이 절망적인 곳에는 하나님의 힘이 역사 하는 곳이 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분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만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다. “개의치 않으시더니”라고 했습니다. 무서운 형틀의 십자가만 생각하면 어떻게 됩니까?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주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셨습니다. 부활을 바라보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요, 사랑의 종교요, 소망의 종교입니다.

바로가 꿈 꾼 것을 요셉이 풀어줄 때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창 41:16)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대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8) 자신이 애굽으로 형제들이 팔았지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이 먼저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팔아먹은 형제들을 원망만 하고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버리고 가는 땅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버려진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망을 사는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팥죽으로 산 것도 이것입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0-13)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바울과 이들 일행보다 오늘날 더 영광스럽게 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만물의 찌꺼기”는 마치 공해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쓰고 남은 쓰레기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는 쓸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버립니다. 우리가 비록 그러한 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다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에바다, 우리의 영이 열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십자가 언약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11:4)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2-25)

지난 26일 미시령 울산바위 전망대 인근 내리막길에서 단풍 관광객들을 태우고 가던 관광 버스가 긴급 제동시설 옆 비탈면을 들이받아 1명이 숨지고 39명이 다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오래 전 스위스에서 어떤 분이 관광버스를 몰고 내려가다가 관광버스 브레이크가 파열되었습니다. 내려가는데 어린 아이가 도로 가운데서 놀고 있었습니다. 안에 있는 분들도 놀랍니다. 이 운전사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두 말도 못하고 정말 우리 모두가 죽느냐? 저 아이는 어떻게 하느냐? 이런 긴박한 순간에 있었습니다. 그 때 운전기사는 방향을 트는 대로 이쪽으로 가면 이쪽 다 죽습니다. 낭떠러지에 다 떨어집니다. 그런데 운전기사는 아이 있는 쪽으로 가서 아이를 치고 그 아래에 내려가서 섰습니다. 버스 승객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죽었습니다. 모두 너무 놀랐지만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은 하나도 안 우는데 운전기사가 우는 것입니다. 운전기사가 비통에 빠졌습니다. 그 아이는 바로 자기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살리려고 하나님의 아들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치고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십자가 때문에 살았습니다. 십자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나 욥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을 보았을까요? 보지 못했을까요? 예!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욥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출애굽의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았고 믿었을까요?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입니다. 저는 오늘 이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욥보다 그 다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보다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마 11:23, 눅 10:11)고 하셨습니다.

오늘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배웁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믿음보다는 자꾸만 어떤 증거를 더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고 했습니다. 십자가 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더 이상의 증거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전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의 죄를 사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많은 것 가운데 이 십자가를 오페라로 말하면 크라이막스로 만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모두 맞춥니다. 그래서 우리가 슈퍼스타나 좋은 기독교의 뮤지컬이나 영화를 보면 모두 어디에 맞추느냐? 포인트가 어디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알면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우리 모두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두 담겨 있는 것, 하나님 은혜의 모든 것, 우리를 위해 대답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대답하십니다. 이 한 분이 지신 이 하나의 사건이 온 인류의 문제를 천만가지 억만 가지 많고 많은 인간의 고민과 문제를 풀어주고 짐을 벗겨주며 길을 열어줍니다.

법을 공부하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미국의 법은 많은 내용이 성경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 졌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미국에는 어떤 법이 있느냐 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그것이 설령 지나가는 말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이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따라했다가 손해를 보았다면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책입니다. 약속의 책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받았던 십계명을 담았던 궤의 이름은 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말합니다. 신학용어 중에는 계약신학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계시 내지는 특별한 은사를 사모하는 경향이 많지만 신앙이 깊어질수록 거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못 믿을 때 그런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그런 증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그 증거를 더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이스라엘 출애굽 백성이 있었습니다. 홍해의 바닷물이 갈라졌습니다. 이것이 어디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그러한 광경입니까? 지금이라면 비디오로, 사진으로 찍어놨을 텐데 정말 아쉽습니다. 정말 대단한 광경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목격한 백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 때도 사람들은 수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나는 음성도 들었습니다. 남자만 오천명이 넘게 먹은 오병이어의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수만 명이 먹었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다 뒷걸음질 쳤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향해 그분의 죄는 없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 소리만 울렸습니다.

하나님의 증거가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증거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나 욥은 아무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시기 전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했을 때 이 한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75세면 살만큼 살았습니다. “이 나이에 무슨 이사를 갑니까? 새 땅은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면서 있었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여기 잘 보세요? 하나님의 증거가 먼저 아브라함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 양털시험을 한 것과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냥 같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라고 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욥에게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 어떤 증거를 보여 주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욥은 정직하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영혼에 선악을 알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7) 사람의 양심은 속일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다른 사람 다 속여도 자기는 속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속이지 못합니다. 사람의 깊은 곳 ‘양심, 영혼’을 알고 게십니다.

반도체가 요즘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아십니까? 나노(nano)시대입니다. 하도 어려워서 쉽게 말하면 머리털 하나로 천 개를 나누는 것이 나노라합니다.
밀리(milli)가 천 분의 일이고, 마이크로(micro)가 백만 분의 일입니다. 그 다음이 나노(nano)입니다. 십억 분의 일을 말합니다. 머리털 하나로 10만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시간으로 말하면 1초의 1/10억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나노는 세계에서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영국이나 독일이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이 비슷하게 가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우리가 대단히 앞서있습니다. 인터넷이나 컴퓨터는 우리가 한 30년 늦게 시작했지만 나노는 지금 같이 가고 있습니다. 대단합니다.
사람도 나노를 만듭니다. 지금은 머리카락 같은 것 하나에 넣을 수 있는 것을 불과 30년 전 방만한 컴퓨터였습니다. 이것이 나노시대입니다.
구약시대가 아날로그 시대였다면 지금은 나노시대입니다. 구약이 율법시대이면 지금은 십자가 시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무리 깊은 것도, 아무리 어려운 것도 모두 풀어주고, 모두 대답해주며, 모두 해결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 승리합니다. 어떤 문제에서도 승리합니다.

동물에게 본능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거북이가 바닷가 모래언덕에 올라와 알을 낳습니다. 알에서 막 깨어난 새끼는 물이 있는 바다로 가야 산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서 바다로 갑니다. 연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태어났던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왜 이 정직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있습니까?

사탄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는데 사탄은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최초의 거짓말입니다. 이 거짓말은 누구에게서 왔습니까? 사탄입니다. 사탄은 모두 거짓입니다. 예수님께 세 가지 시험을 할 때도 다 거짓입니다. 거짓으로 유혹합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눅 8:12)

사탄의 거짓 속임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회개치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잠 15:32)고 했습니다. 영혼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모르는 겁니다. 여러분도 혹시 영혼을 우습게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무슨 영혼이 있어?’ 그러면 큰일납니다. 세상축복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득이 되는지 해를 입히는지 알고 세상의 축복을 말해야 합니다. 사탄은 세상의 것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예수님은 범죄한 팔다리 끊고, 세상의 것을 버려서라도 영혼을 구하라고 말하십니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잠 16:17) 구약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저 거짓말 안 시키고 정직히 사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정직히 사는 것만으로 안 됩니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정직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 정직한 것의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표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정하셨습니다. 그 표준을 정하셨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막8:3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오래 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산중턱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여섯 명의 희생자를 내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현장 가까이에는 교회훈련센터가 있음을 알리는 68피트 높이의 철탑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AP통신이 전한 사고의 원인은 그 철제십자가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날 따라 그 십자가의 전등불이 꺼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지역을 운항하는 항공기들은 십자가 탑이 밝혀주는 불빛을 보고 그곳을 지나곤 했는데 그 날은 불이 꺼져 있었기 때문에 방향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불꺼진 십자가는 생명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믿을 때 불이 들어옵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십자가입니다. 천하를 모두 넘어뜨려도 십자가 앞에는 맥을 못 춥니다. 십자가를 말해야 합니다. 십자가만 말하고 보여주면 사탄은 벌벌 떱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진실이 어디에 있습니다. 진리가 어디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십자가에 계십니다.

본문 22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를 전하니” 이것이 참 소망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유대인처럼 표적만 구해서는 안됩니다. 헬라인은 지혜만 찾습니다. 다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보다 먼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십자가와 바꿀 수 없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4) 주님과 함께 십자가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이영제 목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본문 : 마태복음 16:13-17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어려운 신학을 꼬집는 일화로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난해한 신학자인 폴 틸리(Paul Tillich)가 주님이 이 땅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 날에 예수님를 만났다면, 그리고 예수께서 가이샤랴 빌립에서 베드로에게 물었던 중요한 질문을 폴 틸리에게 묻는다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폴 틸리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존재의 존재론적 근거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목적론적 근거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뭐야!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려운 말이나 신학이 마치 수준 있는 신학이나 설교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질문에 베드로는 짧게 그리고 핵심 있는 내용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이 주앙교회 성도 여러분의 고백도 되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인생의 의미나 삶의 목적을 찾고 싶어하는 깊은 갈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직업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 ‘되느냐’ 보다 무엇을 ‘하느냐’에 가치를 둡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쉬지 않고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무엇을 소유했는가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짓습니다. 이들은 새 차, 새 집 또는 새 옷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경제적인 문제에 연연하고 마음을 졸입니다. 항상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뿐인 진리는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존재는 그저 광활한 우주를 떠다니는 잡동사니에 불과합니다. 예수를 바로 아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우리의 가치관 목적의식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여론
예수님께서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회적 평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예수는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은 지식으로 예수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나의 지식으로 또는 사람의 지식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소위 “4대 성인”중의 하나라고만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TV나 신문에 불교행사에 카톨릭 신부나 개신교 목사가 참석해서 예불하는 행위를 보여주며 “종교계가 마음을 합하고 있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이런 영향하에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종교다원주의 사상에 물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이것을 반대하는 개신교 목사는 이 시대를 거스리며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하는 목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의 마음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성인중의 한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2000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복음주의 자들이 209개국으로부터 1만 7천여 명이 모여 자신들의 복음주의적 입장을 재 천명하는 “암스테르담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이 선언문의 내용들 속에는 ‘우리는 타종교인들에게도 예절 있는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복음 전도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타 종교인에 대해서 배타적 태도로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동네로 통행하시고 유대인으로서는 만날 수 없는 여자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대화하셨습니다. 타 종교인과 대화 할 수는 있으나, 우리는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복음의 유일성(uniqueness)의 진리를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세상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의 대답을 잘 보십시오.
14절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나 여전히 예수를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모두 사람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 또는 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몰라본 사람들
“가로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16:14)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각각 느끼는 데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따라 다녔습니다. 창세기부터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많은 제사장과 왕들을 통해서 그렇게 누누히 약속하시고 약속하셨던 분이 실제로 오셔서 그 증거들을 또한 그렇게 많이 보여주셨건만 양을 잡으면서도, 성경을 읽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것의 실체 되신 그 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이들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포로로, 노예로, 식민지로 고통을 당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예수를 몰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비슷하게 봤지만 그들은 전혀 틀리게 보고 있는 것이고, 그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희미하게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 –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채찍질하시며 정화시키시는 모습과, 부정과 부패를 일삼으면서 형식과 제도에 빠졌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아”하며 책망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약대털옷을 입고 광야에서 외치면서 헤롯 같은 권력자의 비리를 꾸짖으면서 시대와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세례요한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는 그러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를 개혁하려고 오신 게 아닙니다. 비슷하게 생각을 했지만 전혀 예수님을 잘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썩어빠진 제도와 권력을 향해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드셨던 민중의 지도자로 여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한 일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오신 분은 아닙니다. 아무리 제도를 바꾼다 해도 하나님을 떠나 죄와 저주와 사단에게 빠져 있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로 사회를, 세상을 개혁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 – 5병2어로 오천명을 먹이고, 물위를 걸으시고, 소경을 고치시고 하는 엄청난 신비한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리고,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구약시대 최고의 신비한 능력을 소유했던 엘리야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러 오신 엘리야로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시기 위해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신비한 능력을 보이시기도 하셨지만 그 능력자체를 보이시기 위함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을 신비한 능력을 체험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수련회를 하면 무엇인가 불을 받아야 하고, 방언을 하지 못하면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계속 무언가 신비한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일생을 보냅니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쓰러지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비한 어떤 체험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정말 잘못 본 것입니다.

예레미야 – 민족과 국가의 아픔과 고난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눈물의 선지 예레미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셨던 예수님을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예레미야로 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창녀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 가난한 자들과 함께 식사하셨으며 불쌍한 고아인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 유하시기를 기뻐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박애주의를 실천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본 받으라고 오신 게 아니십니다. 예수를 믿어서 하는 가장 고귀한 일이 마더 테레사와 같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돕는 자선사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체 자선만이, 박애주의만이 최고의 선인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 가난을 조장하고 빈곤을 가져다주는 근본적인 존재한테 이용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박애주의를 보여주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레미야로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단히 착각을 한 것입니다.

선지자중의 하나 – 산상보훈을 비롯해서 성경을 풀어서 권세 있게 말씀을 전해 주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훌륭하게 전달 해주는 훌륭한 선지자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훌륭한 가르침과 삶의 지표를 제시하시는 인생의 선생님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이요 선지자적인 요소가 있으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단히 착각한 것이고 잘 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단순히 우리가 따라야 되고 실천해야될 삶의 규범을 제시하시고 가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행위자체와 말씀자체를 지키고 실천하는 게 기독교라면 기독교도 이슬람교나 불교나 똑같은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들도 마호멧을 석가모니를 존경하고 그 들이 제시한 삶의 규범과 원리와 실천강요를 따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호멧처럼, 석가처럼 우리에게 규범을 던져주시고 하늘나라에 가신 분이 아니십니다. 종교를 창설하시고 교리를 실천하고 율법과 규범을 실천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선생으로만, 선지자중의 하나로만 여기기 시작할 때 기독교는 종교에 빠지고 제도에 빠지고 교리에 묶이게 되고, 생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형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율법에 빠지고 윤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천할 무언가를 가르치고 떠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생명으로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관심은 이 질문으로 대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한 제자들에게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못된 버릇하나가 있습니다. 눈치입니다. 아마 전 세계에서 눈치하면 한국사람일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눈치가 너무 빨라 속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내 심중의 마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고 하셨습니다. 나의 고백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베드로의 고백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디서 배워서 알게된 것이 아니며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친히 역사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개혁가도 박애주의자도, 신비운동가도 아니신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수 천년동안 하나님의 가슴속에 감취었던 비밀이 터지는 순간이요. 수 천년 동안 그의 조상과 선진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요. 모든 고통받고 저주가운데 있던 인류가 기다리던 소리였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이 단어 하나에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화가 다 들어있습니다(골 2:3). 그리스도안에 하늘과 땅이 통일됩니다(엡 1:10). ‘그리스도’이 단어 하나에 창 1장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계시록 마지막에 나타나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모든 권세가 다 포함된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이 이름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 후에 세상은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이 발견하고 미친 듯이 전세계로 들고 뛸 수밖에 없었던 그 이름 ‘그리스도’입니다. 원형경기장에 죽어가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칼과 창 앞에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도 찬송하게 만들었던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그리스도
우리는 눈치가 빠르니까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카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도 받았고 “이제 따라만하면 되지”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마다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각기 다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의사로 믿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인정이 많으신 은행장쯤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입학 시험장에서 인심이 후한 체점관이나 심판관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세상의 출세와 성공의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범 답안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가 필요할 때만 찾아가는 병원이나 은행으로 생각하고 내 사업의 방패막이로 생각하면서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는 때로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결국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을 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필요할 때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예수와 함께 한 몸이 되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워싱턴이 대통령이 된 후의 일입니다. 한번은 각료들과 고향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각료들은 인사를 드릴 때에 너무 송구스러웠습니다. 대통령의 어머니로 하여금 구차한 일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각료들은 대통령에게 건의하였습니다. “각하,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 나라의 어머니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일하게 하고 어머니는 쉬시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통령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그런 의견을 건넸습니다. 그때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대통령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서 일하라 하셨으므로 나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나는 일할 것이오.”

여러분! 손을 가슴에 얹어봅시다.
진심으로 예수가 나의 주님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을 차례입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행위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행위를 쉽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 봉사하는 것, 헌금하는 것, 전도하는 것, 선교하는 것은 모두가 행위입니다. 이것이 다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입니까?
요한계시록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 본문 : 누가복음 7:24-30, 렘 1장

“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27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다”

오늘은 추석입니다. 주앙교회에 오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인사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올해(2005년) 명절은 추석이 주일이고 크리스마스가 주일입니다. 그리고 2006년 신년이 주일입니다.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은 상당히 억울해 하십니다. 쉬는 날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 가야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쉬는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은 교회에 왜 오셨습니까? 주님이 하신 질문으로 할까요. “무엇을 보려고 오셨습니까?”

어느 마을에 나뭇짐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믿음이 어지나 좋던지 혼자 살면서도 늘 신앙 생활에 힘쓰며 입에서는 찬송이 떠나는 날이 없었습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 가지고 내려올 때에는 언제나 교회 앞에 나뭇짐을 세워 놓고 성전에 들어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도를 드린 뒤에 기쁜 얼굴로 나오곤 했습니다. 날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목사님이 하루는 그 할아버지한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슨 소원이 그렇게 많아서 늘 기도를 하십니까 ?” 할아버지가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저는 특별히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지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얼굴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저를 내려다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마주보는 것만이 저의 유일한 행복입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세례요한이 감옥에 있을 때 예수님께 두 제자를 통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리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20)질문하게 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24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고 자문자답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심리를 다 읽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택하실 때 도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그와 같은 말로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묻고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바로 이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택하실 때 “네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를 많이 질문 하셨습니다. 모세를 택하실 때도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하시면서 손에 든 지팡이를 보게 하셨습니다. 에스겔, 아모스, 스가랴 선자들에게도 “무엇을 보고 있느냐?” 질문하셨습니다. 예레미야에게도 “네가 무엇을 보느냐?”(렘 1:11-12)고 먼저 질문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왜 먼저 보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하셨을까요? 사람이 무엇을 보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산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파악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30평 아파트입니까? 로또 복권입니까? 어떤 목사님이 20억 짜리 로또 복권에 당첨되어 교회를 짓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예레미야가 본 것

예레미야는 살구나무 가지와 기울어진 끓는 가마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곧 시대를 바라볼 줄 아는 영적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살구나무”는 히브리어 말로 솨켓트 인데 이 뜻은 “지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삼국유사에 보면 살구꽃을 보고 봄이 깊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살구나무는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나무로 예레미야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살구나무는 겨울 추위와 가뭄에도 잘 견디며 100년 이상 자라는 것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예레미야 1:7-9 “7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모두 신속하게 이루어 질 것을 분명하게 믿는다는 증거로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당시에 북 이스라엘은 B. C 721년 앗수르에게 멸망당하였고, 강력한 앗수르는 바벨론이 멸망시키고 초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더욱 악한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세 가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의 눈과 지식의 눈과 영의 눈입니다. 육신의 눈은 세상에 보이는 세계를 구별하고 인식하며 보게 하는 눈입니다. 지식의 눈은 배움과 경험으로 살아가는 눈입니다. 영안의 눈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눈입니다.
계시록에는 본다는 의미의 말이 72번이나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마지막 때에는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만 듣고만 끝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대 똑똑히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볼 줄 알아야 만이 영안이 열리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선포하는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두 번째 “끓는 가마를 보았나이다”(렘 1:13)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끓는 가마가 반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남 유다가 당할 심판을 끓는 가마를 통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마가 북에서부터 기울었다는 것은 북방에서 오는 세력에 의해서 심판을 당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북방에서 오는 세력이 누구입니까? 바벨론 입니다.
남 유다가 왜 이런 재앙을 당하게 되는 이유는
1.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2. 우상을 만들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3.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남 유다는 바벨론에게 3차에 걸쳐 공격을 받고 B. C 586년 비참하게 멸망당하여 70년간 바벨론 포로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긴다면 재앙을 당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인데도 미련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이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라고 질문하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예레미야처럼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멋있게 대답하면 좋겠지만 여러분에게 그것을 부탁드리는 것은 무리인 것 같고 쉽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예레미야 것을 우리 식으로 조금 벤치마킹하자면 “개나리를 보나이다”하면 될 것 같습니다. 개나리는 살구꽃과 마찬가지로 입이 나기 전에 꽃이 피며 봄에 제일먼저 피는 꽃입니다. 개나리는 추위와 공해에도 잘 견디며 씨로 번식하기도 하고 꺾꽂이해도 잘 자랍니다. “개나리처럼 빨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믿겠습니다. 그리고 잘 번식하며 추위와 공해 속에서도 잘 자라겠습니다.”

본 자만이, 깨달은 자만이, 비밀을 아는 자만이 이 놀라운 사실을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깨닫지 못하는데 무엇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비밀을 모르는데 무슨 비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광야로 간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옷 입은 사람을 구경하려고 간 것도 아닙니다. 선지자를 보려고 갔던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출 4:16, 사 1:24, 렘 1:15).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왜 주앙교회에 나오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주님을 보기 위해서 나오신 것입니다.

근대 실존주의사상의 선구를 이룬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든 예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가을날 따뜻한 지방을 찾아 떼지어 날아가던 철새들이 옥수수 밭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내려앉아 쉬면서 옥수수를 쪼아먹었습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나서는 다시 그대로 날아서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이렇게 먹을 것을 많이 두고 왜 날아가나’ 라고 생각하는 철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철새는 동료 새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그곳에 하루를 더 머물면서 배불리 옥수수를 더 먹었습니다. 날아간 새들은 모두 바보요 자신만이 똑똑하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는 이 많은 양식을 두고, 이 좋은 자리를 두고 구태여 멀리 가려고 하는 새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한동안을 머물다보니 어느새 겨울이 다가와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눈보라가 휘날렸습니다. 결국 그 철새는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26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은”(페릿소테로스) 비교급으로 “더욱 풍성한, 더 많은”이라는 뜻입니다. 세례요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뜻을 좀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세례요한이 직접적으로 물은 “당신이 오실 메시야 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이 모호하게 대답하셨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메시야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셨지만 오히려 더 강력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구를 기다린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메시야(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실상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메시야 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야로만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왕도 되시며, 선지자도 되시며, 대제사장도 되십니다. 단순한 메시야 하고는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올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세례요한과 비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바라봅니다. 어떠한 절망도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의 주님의 바라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