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자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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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18. 소자를 위하여) / 본문 : 마 18:10-14

“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아프리카에는 산양의 일종인 ‘스프링 벅’이란 동물이 살고 있습니다. 이 짐승들은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다가 갑자기 질주를 시작하는데 뒤에서 풀을 뜯던 양들이 앞쪽으로 나오면, 앞에 있던 양들은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더 빨리 앞으로 내달린다고 합니다. 이 양들은 목적 없이 질주를 계속하다가 눈앞에 낭떠러지를 보고서도 가속 때문에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목적지도 모른 채 덩달아 앞을 다투어 경주하는 과속 인생을 사는 현대인들이 흡사, 이 미련한 짐승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소자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만나시면서 세상 속에서 무엇인지도 모르고 덩달아 달리지 마시고 주의 길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축하를 하기 위해서 “..위하여!”라고 위칩니다. 정치하시는 분들이 “위하여!”는 여당 분들이 하니까 우리는 야당이니까 “…위하야!” 한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어느 교회 모임에서 “위하주!” 그리고 축하한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좀더 엄밀히 말하면 사람들에게 경배만 받으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까요? 하나님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경배를 받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경배만 받기 위해서 오셨다면 이 땅에 오지 않는 편이 더 났습니다. 하나님의 우편에서 그저 편하게 계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 6:19-20) 우리는 헌금을 하면서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한다고 생각하기 싶습니다. 아닙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본 받고 따라오라고는 하셨고 나의 명령을 지키라고는 하셨지만 나만을 위하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0-32)

안질로 고생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눈이 찌르고 아팠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왕의 눈병을 고치겠노라 나섰습니다. 왕은 그를 따라 궁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왕이 생각했던 것보다 백성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 때 슬픈 통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곳을 찾아가 보니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단칸방에 누더기를 걸친 시체 옆에 어린 자식 셋이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참한 정경에 왕도 눈물이 터져 통곡을 했습니다. 얼마 후 자신을 진정 하고 난 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눈의 통증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습니다.

우리 한글에는 백성을 가리키는 단어 중에 ‘국민’과 ‘인민’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글개역성경(1952년 이전)에 보면 역대하 17:9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 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성읍으로 순행하며 인민을 가르쳤더라” 라고 나옵니다. 유다 4대왕이었던 여호사밧 때의 일입니다. 남북한이 말을 나누어 갖다보니 북한에서 자주 쓰는 용어를 남한에서 사용하지 않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 남한에서는 인민이라는 말보다는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국민은 한 개인이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개념이고 많고, 인민은 나라가 한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북한과 남한의 용어가 바뀌어 사용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북한 공식명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중국에는 “인민일보”가 있습니다. 이 나라들이 정말 인민을 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민을 위해 오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자(인민)를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소자(mikrw’n touvtwn:미크론 투톤)”는 “가장 작은 사람, 미미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헬라어에서 “작다(소자)”는 의미를 “키가 작은”, “범위가 작은”, “의미가 적은”, “시간 적으로 짧은(연령적으로 어린)”이라는 것을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누가복음 19:3 에 삭개오는 “키가 작았으며” 마가복음 15:40 에는 야고보도 “키가 작은” 또는 “나이가 어린”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단어는 “의미 없는”이라는 뜻으로 보잘것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우리 식으로 말하면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결코 경멸의 의미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숨겨진, 장래의 위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창세기 49장에서 예수님이 나신 유다지파에 대해 예언하기를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창 49:9)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고 가난한 자들을 부르십니다(마 11:25, 29).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어린아이처럼 낮아지게 됩니다(마 18:4). 그러나 이 땅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장래에는 큰 자가 될 것입니다(마 18:1, cf 5:19).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 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마 11:11).
본문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에게 리포터가 뛰는 동안 가장 힘들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물었다.”호흡입니까? 아니면 갈증 때문입니까?” 그러자 마라토너는 “저를 힘들게 한 것은 호흡도 갈증도 아닙니다. 신발 속에 모래알 만한 작은 돌멩이 하나가 굴러다니며 저를 가장 힘들게 했습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제일 작은 나 자신이 주님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라를 VIP로 대접하십니다.

VIP로 대접하시는 하나님

VIP(very important person) 국어사전에 보면 “정부 요인이나 국빈 등과 같이 특별히 대우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인물. ‘귀빈’, ‘요인’ “을 말합니다. 신어로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가 있는데 이 말은 VIP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VVIP로 우리를 대접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그런 단어가 성경에 있습니다. 시 13:6을 봅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또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시 116:7). “후대하심”이라는 단어는 원문에 두 단어가 나옵니다. “lm’G:가말(혜택, 관대하다, 섬기다)”과 “l[‘:알(넘어, 위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데 넘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예수께서 처음 이적을 행하실 때의 물 항아리도 아구까지 가득 채웠습니다(요 2:7). 우리 하나님은 차고 넘치게 주십니다. 아이작 와츠의 찬송시(141장)처럼 1절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 5절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소자의 가치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막 9:42) 연자 맷돌은 혼자의 힘으로 돌릴 수 있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나귀나 말의 힘으로 돌릴 수 있는 곡식을 빻는 멧돌을 말합니다. 연자 멧돌과 같이 큰돌을 목에 메게 하여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형벌은 부모를 죽이거나 반역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을 때 로마가 집행하던 당시 형벌이었습니다. 소자를 실족케 하는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해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비교로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고 하셨습니다.
본문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성경에서 천사들은 국가(단 10:13, 12:1), 교회(계 1:20), 개인(행 12:15)을 위한 수호(守護) 천사가 있습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천사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지금도 잘못된 신앙을 가지면 천사를 숭배하게 됩니다. 천사는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도록 명령을 받은 하나님이 일꾼이지(히 1:14) 우리가 섬겨야될 대상은 아닙니다. 하늘에서 항상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천사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천사가 돌보는 소자가 얼마나 귀한지를 말한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고 하셨습니다.

길을 잃었으면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얻은 이 구원의 은혜를 따라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다시는 길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에게 맡겨진 책임 또한 여러분은 잘 인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길을 잃어버린 양은 찾아 나서야 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목자로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모세는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7)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입니다(딤전 2:4). “만일(eja;n:에안)”은 접속사이지만 이 단어는 “a[n:안” 소원을 말하는 기본 조건 불변사에서 유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꼭 찾기를 원하신다는 애절한 소원이 들어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소원에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80대 중반이 되신 노(老)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얼굴에 주름을 찾아보기 정말 힘든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교인들이 장로님을 부르는 애칭이 “보톡스 장로님!” 성품은 밝고 친절하여 많은 교회 후배들이 본받고 싶은 분이라고 합니다. 그 장로님께서 부흥 사경회 중 목사님께 점심식사를 대접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오늘 점심은 천국에 가신 저의 어머님께서 대접하는 것이라 생각해 주세요.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부흥회가 개최되면 저의 어머님께서 정성을 다하여 강사 목사님의 식사를 대접하셨답니다. 그 때는 이렇게 식당에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했죠. 그래서 제가 일 년 중 제일 맛있는 것들을 먹는 날이 바로 부흥회 하는 날이었답니다. 지금 어머님은 돌아 가셨으나 그 때 그것을 보고자란 대로 저도 늘 이렇게 부흥강사님을 대접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예수님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하셨습니다.
 

꽃이 아닌 꽃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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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17. 꽃이 아닌 꽃씨를) / 본문 : 행 1:6-8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열두 명의 장정들이 부모를 버리고 하던 일도 모두 포기하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들 중에는 어부도 있었으며 세리도 있었습니다. 예수의 부름을 받고도 따르지 않은 사람도 있었는데, 자기의 신앙은 자랑했지만 자기의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없어 예수님을 쫓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부모의 장래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쫓지 못한 이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은 일생을 건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씨는 생각하지 않고 꽃만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메시야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대 속에 예수를 따라 다닌지 3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민심은 잘 얻으시고도 대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산헤드린공의회의 모함과 고발로 로마인의 재판자리에 섰습니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예수를 풀어주려고 애를 썼지만 자신이 어려움을 겪어가면서까지 예수를 풀어줄 마음은 없었습니다. 결국 목소리 큰 사람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제는 끝이 났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언대로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다시 가다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전처럼 함께 계시지도 않고 가끔 보여주시고(11번) 확인만 시켜준 상태입니다. 이렇게 시간은 어느덧 40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승천하신다는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 이건 또 웬 일인가 싶어 제자들은 부랴부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다급한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감람산 현장에서 예수님의 옷소매에 매달려 그냥 가실 수 없다고 애절하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합니다. “예수님 단 한번만 저 로마를 향해 입김 한번만 불면 불바다가 될 것 아닙니까? 이대로 그냥은 못 가십니다.” 이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북쪽 이스라엘은 B.C.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고 남쪽 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바벨론이 다스리다가 다음에 바사(페르시아제국), 헬라에 이어 지금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시달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일제 36년의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무려 700년 간의 나라 잃은 슬픔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면 자신의 나라를 찾아야 된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엉뚱합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행 1:7) 제자들은 오늘 승천하시기 전에 결판을 내자고 하는데 예수님은 매정스럽게 느긋하신 태도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고 하십니다. 유대인인 제자들은 자신의 나라를 찾고자 하는데 관심이 있는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찾으시는데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선순위 첫 번째가 무엇인지 정해졌습니다. 예수님께 더 땡 깡을 부려 받자 소용없습니다. 워낙에 단호하신 모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결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하라고 보내시면서 전대도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훈련시킨 적이 있습니다. 돈 한푼 없는 제자들이니 상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 정도는 하셔야 했습니다. “배 삯은 염려 말아라. 얼마 전 내가 병 고쳐 준 자에게 배 삯을 부탁해 보겠다.” 한다던가 “여전도 회장 막달라 마리아가 마련해 줄 것이다” 하든지 해야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아무 조치도 없으시고 그냥 “가라!”고만 하십니다. 대책이 없으신 분입니다. 3년 간이나 12명, 70명, 5천 명, 수만 명 떼지어 다니면서도 교단 이름하나 지어 놓지 않으시고 가셨습니다.

오직 단 한가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ajlla;:알라)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인데, 헬라어의 이 말은 “a[llo”:알로스”의 중성 복수형에서 왔습니다. 알로스는 ‘다른’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이 다른 것이겠습니까?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의 권력과 물질로 일을 이루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성령으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이동휘 목사님은 1983년 전주안디옥교회를 개척하여 교회 재정의 60%이상(실제로는 70%사용)을 선교비로 지출하며 2007년 현재 바울선교회를 통하여 전 세계 87개국에 372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2007년 9월 현재). 이렇게 많은 사역과 세계교회에 찾기 어려운 모범적으로 선교를 실천한 교회를 담임하셨던 이동휘 목사님은 “돌이켜 보면 나는 실패했다. 나는 내 교회를 믿었고 이 교회의 헌금을 의지했다. 하나님께 직접 구하기보다는 바쳐진 헌금에 울고 웃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과 그때 그때마다 필요한 하나님의 방법을 수없이 놓쳤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러나 전주안디옥교회 만큼 절약하며 선교하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접대비 명목으로 된 지출이 없다보니 찾아오시는 손님들에게 성도님들이 사온 음료수를 접대하게 되었는데 한번은 목사님께서 박카스를 오신 장로님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 장로님이 시무 하시는 교회에 목사님이 집회를 가시게 되었습니다. 장로님은 목사님을 소개하시면서 전주안디옥교회는 박카스도 반병씩 아껴서 먹습니다. 그러시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실수하신 것을 알고 얼굴이 벌개 지시면서 그만 하셨으면 하셨지만 장로님은 자랑스럽게 계속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손님들이 오시면 계속 물만 마실 수 없으시니까 박카스 반병을 마시고 옆에 놓아둔 것을 그만 실수로 장로님에게 드린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한 다발의 화환과 한 봉지의 꽃씨 중에서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 링컨은 노예 주인들의 요구에 양보했더라면 그는 화환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돌아올 화환보다는 울부짖는 흑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장은 어렵고 힘든 싸움이 일어났지만 먼 훗날을 위해서 씨를 뿌렸습니다.

선교의 대책은 오직 성령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잘 살펴보면 답이 나옵니다. 어떻게 사람들과 다르게 사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남을 정죄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남을 정죄하는 것은 막대한 에너지가 새어 나가는 일로 간주하셨습니다. 세상을 정죄하거나 심판하시기 오신 것이 아니라 도와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수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시간도 허비하지 않고 그의 에너지를 창조와 복구에 사용했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것은 예수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죄는 왜 하게 됩니까? 원한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나라 찾기에 원한에 싸여있습니다. 그래서 그 원한이 창조와 회복이 아닌 정죄와 파괴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도 알고 보면 불쌍한 민족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약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정죄는 진전을 가로막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눅 19:22)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요 5:45)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다 기록하고(20장까지) 21장을 마치 ‘추신’처럼 기록했습니다. 다 기록을 하고 나니까 베드로에 대한 중요한 부분을 누구도 증거하지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정한 기록은 있는데 그가 예수께 돌아와 회복된 이야기가 다른 복음서 모두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다시 펜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21장을 써 내려갔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나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치라” 세 번 같은 말이 이어지고(요 21:15-17) 베드로의 요한에 대한 엉뚱한 관심이 나옵니다. “주님 저 사람(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2)고 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 엉뚱한 관심으로 에너지를 낭비할 때가 많습니다. 누구는 땅을 샀습니다. 누구는 50평 짜리 아파트를 샀습니다. 누구는 교회를 크게 지었습니다.
여러분!
북한에 이런 구호가 이더라구요. “우리는 우리식대로 산다” 우리는 예수식대로 산다. -아멘-

둘째, 프로의 삶을 사세요.
프로페셔널이란 말에는 하고 싶지 않을 때라도 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프로는 일시적으로 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는 프로 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가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서는 예수님의 이 모습을 가리켜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차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사 50:7) 예수님이 잡혀가시게 되자 베드로는 칼을 뽑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잡혀가시면 끝장나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께서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 18:11) 이 말은 다시 번역하면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입니다. 우리가 프로정신이 없을 때 하기 좋은 일만 골라한다면 시골교회는 누가 담임하고, 장애우들은 누가 돌봅니까? 먼지 날리는 황무지 같은 땅에서 오늘도 죽을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꽃이 아닌 꽃씨를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기도의 씨를 뿌리세요.
불교인들은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합니다. 가톨릭인들은 십자가 모양으로 성호를 긋고 합장합니다. 무슬림들은 모스크에 가거나 그곳을 바라보고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 몇 번씩 절을 합니다. 힌두교도들은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서서 따로 기도했습니다(눅 18:11).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제멋 대로입니다. 정해진 형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양을 가르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요 11:41에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구약서부터 보면 기도의 보습이 다양하게 나옵니다. “꿇어 엎드려”, “두 손들고”, “가슴을 치며”, “머리를 숙이고”, “하늘을 쳐다보며” 등의 모습이 나오지만 모두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의 모습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골방에서 하라”(마 6:5-6)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원수와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마 5:44), “중언 부언 하지말고”(마 6:7), “무엇이든지”(마 18:18), “믿고 구하라”(마 21:22)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런데 원문에 보면 중요한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te:테”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앞에 나타납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연관이나 첨가의 기본 불변사입니다. 뜻은 “역시, 양쪽의, -까지도, 둘 다”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는 순서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다 되면 그 다음에 유대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10명의 성도만 있을 때는 하지말고 100명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테’의 강력한 불변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선교 명령은 최소 될 수도 없으며 그 곳이 어디든지, 언제든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어느 곳에 있던지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나의 선교지 입니다. 주님의 간곡한 이 마지막 부탁을 성실히 이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라진 교회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6. 사라진 교회들) / 본문 : 마 4:21-23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대한민국 개신교인수는 통계 조사이래 1995년이 8,760,066명(19.6%)으로 제일 많은 수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를 기점으로 감소세를 보였습니다. 10년이 지난 2005년에는 인구는 4천 4백만 명에서 4천 7백만 명으로 300만 명이 늘어난 반면 개신교인구는 8,616,438명(18.3%)으로 오히려 143,628명이 줄었습니다. 이것은 1,000명의 교회가 143개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명목상 기독교인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이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명목상의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명목상의 신자들조차도 줄고 있답니다. 지난 1990년대 초 프랑스인들은 전 인구의 80%가 자신이 카톨릭 신자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51% 줄어들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프랑스만의 현상이 아니라 종교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고 응답한 이탈리아의 경우 27%, 독일 21%, 프랑스, 체코 11%, 미국 60% 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질문에 대해 이슬람 국가에서는 90% 이었습니다. 이슬람 국가들 보다 휠 씬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2004년 조사에서는 영국인들의 44%만이 신이 존재한다고 답하였으며, 35%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였고, 21%는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미국인들의 40%, 영국인들의 15%, 독일인들의 12%,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 국민들의 5%만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간다고 했습니다. 유럽 국가 전체의 평균 수치는 20%가 채 되지 않으며, 2000년 조사에서 미국인들 중 16%, 프랑스인들의 60%, 영국인들의 55%,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의 40~50%가 거의 또는 한번도 교회에 가지 않았다고 답변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노르딕 국가(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나라들은 국기 모양이 노르딕 모양으로 모두 십자가 국기입니다. 국기는 십자가인데 교회는 5%만 다니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라진 나라들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이제 경각심을 가져야할 때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 수가 80~100%까지 되었던 유럽 국가들하고는 다릅니다. 유럽 나라들은 힘들고 어려우면 옛날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이 말은 예전의 신앙을 회복하자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신교인 20%을 넘어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나라가 옛날로 돌아가면 불교나 유교 또는 무교, 샤머니즘으로 가자는 이야기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라진 교회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어원의 뜻

본문 21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라고 했습니다. “부르시니”는 원어의 “ejkavlesen”(에클레시안)으로 어근 부르다(kalevw:칼레오)에서 온 말입니다. 이것을 라틴어에서 에클레시아(Ecclesia)로 그대로 읽었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 히브리어 ‘카라’에서 왔는데 로마서 11장 29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의 부름, 소명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이 단어가 영어로 부름(call), 소명(calling)으로 불러지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칼라가 칼라치아가 되고 영어에서 회중을 의미하는 church 라는 단어로 보편적인 측면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영어 발음에서는 칼라가 약해지고 치아의 발음이 살아나 church가 된 것입니다.

에클레시아(ejkklhsiva/)는 대부분의 단어들이 단수형으로 나옵니다(행 2:47, 5:11, 7:38, 8:1, 9:31). 이것은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 1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30)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
교회는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는 둘이 될 수 없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복수형으로 사용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교회의 수적 증가를 말할 때 복수로 나옵니다. 또 한가지는 의미심장한 뜻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28절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굳이 다른 곳과 같이 단수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해서 교회를 세우지만 그러나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

교회의 어원적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오늘날 변화된 가톨릭이나, church가 아니라 원래 이 말의 뿌리가 가지고 있는 칼레오(부르다), call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고 타락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 22:1)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출 19:20)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삼상 3:4)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을 무르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사용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나 예수께서 부르신 것이나 똑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시며(마 9: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자신에게로 구원에로 부르십니다(롬 8:30).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를 부르실 뿐만 아니라(롬 9:7),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부르셨습니다(롬 9:24)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

‘에클레시아, church, 가톨릭’의 단어는 모두 ‘칼레오’ 부르다와 동시에 엔칼라오, 엔클레마(ejpikalevoma 에피칼레오마이:고소하다)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이 친구들하고 놀다가 부모님께 와서 일러바칩니다. 사실은 유치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 일러바치는 것이 교회입니다.
공산주의가 부패하는 것은 언론을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려면 바른 언론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모두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이 기능이 바르게 작동될 때 사회는 그만큼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일러바치는 사람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9절에 보면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출애굽을 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9장 40절에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부르짖지 않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회관

본문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오늘날의 교회도 예수님이 불러서 행하신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해야 참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르치시며” 교육과
둘째는 “전파하시며” 전도, 선교와
셋째는 “약한 것을 고치시니” 능력 행함과 공동체적인 봉사의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역할을 하지 않을 때 교회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미국에 사는 감리교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미국 감리교회는 일년에 700개씩 교회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조사해 보니까, 첫째는 기도하지 않고, 둘째는 성경을 보지 않고, 셋째는 전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교회는 모이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동경의 모리야마 목사는 수요일 날 기도회도 많은 분들이 모입니다. 교회에서는 주일날 저녁에 모이지 못하는 부인들을 위해서 금요일 오전에 ‘감람회’라 해서 모이는 모임이 있다. 그리고 금요일 날 저녁에는 철야기도회를 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철야기도회를 하니까 얼마나 피곤할까 해서 모이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한 것은 새벽 기도회와 철야 기도회 때문이라고 말하고 그래서 일본에서도 이것을 배워야 하겠다 하는 데서 철야기도회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철야기도회의 인원도 점점 늘게 된 것입니다.

사라진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열왕기서에 보면 북왕국 20대왕 남왕국 19대 왕국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 왕들에게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이방인들이 조롱과 우롱거리가 되는 것을 감수하시면서 이스라엘 나라와 예루살렘 성전을 버리십니다. 역대하 마지막 36장 17-21절에서 하나님은 갈대아 왕을 통해서 이 성의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다 죽이게 하고 하나님의 전은 노략을 당하고 불에 타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동안에 예루살렘 성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었고 부르짖는 사람도 없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성은 갈대가 날리는 황무지로 변해 버렸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바벨론에서 나와 예루살렘성을 건축하러 돌아옵니다. 이 성을 재건하고 찬송을 하고 제사를 드립니다. 노인들 중에는 예전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에스라 3:12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라고 했습니다.

서양인들의 묘지는 저 멀리 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동네 가운데 혹은 교회당 뜰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 가지런히 줄을 지어 서 있는 묘비에는 주로 앞서 간 이에 대한 추모의 글이나 아쉬움의 인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묘지를 돌며 묘비들을 읽고 다니다 어떤 묘지 앞에 발길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묘비의 글이 상당히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묘비의 글을 알려줍니다.
글은 단 세 줄이었는데 ①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②두 번째 줄이 이어졌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이 글을 읽자 그는 이게 그냥 재미로 쓴 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된 마음으로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③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시오.

느헤미야 10:39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스펄전 목사님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디를 가십니까? 어느 교회에 설교하려 갑니다.
아니 목사님 그런 작은 교회에 가서도 설교하십니까?
형제여! 작은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다 위대한 교회입니다.
 

껍데기 종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5. 껍데기 종교) / 본문 : 마 20:29-34

“29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 갈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30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홈런을 쳐 본 선수는 배트에 와 닿는 공의 느낌으로 담장을 넘길 만큼의 비(飛) 거리를 알아챌 수 있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정미함과 완전함은 그것을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라면 실존적으로 깨닫기 어렵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늘 설교를 하지만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귀가에 메아리치는 소리가 아니라 가슴을 파고드는 생명의 소리가 되게 달라고 말입니다.
사실, 삶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소경입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미래는 가리워 져 있고 내일은 우리의 손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우리 삶의 방향타를 우리가 어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믿음은 껍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이라야 합니다.

누에나 애벌레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자기가 살던 집을 쏙 빠져나와 집은 버리고 자신은 나비가 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빠져나온 집은 이제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껍데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껍데기를 버리고 나온 나비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매여 있고 형식에 빠져있다면 우리는 새것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껍데기 종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껍데기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그리고 두 소경과 무리가 나옵니다. 같은 본문이 마가복음 10:46-52절에도 나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한 소경의 이름은 바디매오라고 일러줍니다. 그리고 소경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소경뿐만 아니라 주변의 상황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31절에 무리라고 소개된 사람들 속에는 제자들이 중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막 10:46)라고 나옵니다.
마태는 왜 소경들이 예수께 나아오는 것을 무리(제자)가 금했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명을 수행 중에 있습니다. 본문이 마치는 시점에서 바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됩니다(마 21장, 막 11장). 이것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마지막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병자와 환자들이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나아오는 것도 금하는 제자들을 호통치신 적이 있습니다(마 19:14). 지금 예루살렘성에 입성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마지막 주간을 보내시게 되지만 지금 제자들은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은 예수님이 한마디로 충분히 민심을 얻으신 것이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왕이 되실 예수님께서 이제 미천한 소경 따위에 신경 쓰실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전처럼 예수님께 아무나 나아오는 것을 금지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냄새나고 역겹고 성가신 자들일 뿐 예수가 왕이 되실 분인데 예의범절도 모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는 그들을 이제 더 이상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의도가 아무리 순수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천하고 무능한 자에게 관심을 두실 틈이 없다면, 품위 없는 자들에 대해서 박대하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 또한 그러한 자들이 아니었습니까. 그 누구라도 예수님의 주변에서 예수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다면 그것은 텅빈 공허한 종교, 껍데기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일이 교회에서도 생겼습니다. 제1년 후배가 아시아 00나라에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제일 큰 초, 중, 고 사립학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후원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 후원해 주던 교회인데 목사님과 장로님들 사이에 오해가 생겨서 그만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안에서 두 그룹으로 갈라져서 서로 주일 오전 예배 때 강대상을 차지하려고 몸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이런 모습은 절대 교회에서 일어나면 안 됩니다. 결국 교회가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재판을 담당한 분은 또 다른 교회 집사님 이었습니다. 그 앞에 장로님 목사님이 선 것입니다.

그 교단은 보수적으로 유명한 교단입니다. 예전에 미국의 선교사님 한 분이 비행기 타고 공항에 도착했는데 마침 주일이었습니다. 잠시 공항에 마중을 나간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교단으로부터 탈퇴를 당했습니다. 좀더 지혜로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다른 분을 대신 나가게 했더라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또 문제가 생기겠지요. 목사님은 안되고 집사님은 나가도 되는지… 이런 일을 가지고 토론을 하면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한 사람은 저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자신들은 필요한 조치를 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을 꼭 만나할 소경의 길을 막은 것입니다. 우리는 바른 일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께 가려는 소경의 길을 막고있지는 않나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예전에 남왕국(유다) 13대왕인 종교개혁을 실시한 히스기야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짓 신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 왕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이 유월절을 너무나 오랫동안 지키지 않았기에 어느 누구도 유월절을 지킬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제사장들조차 우상 숭배를 했었기 때문에 유월절 의식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첫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는데 히스기야기 백성을 소집한 달은 둘째 달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유월절은 부정한 자들에 의해서 한달 늦게 지켜져야 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18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의 많은 무리는 자기를 깨끗케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기록한 규례에 어긴지라 히스기야가 위하여 기도하여 가로되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19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아무 사람이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케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대하 30:18-19)
비록 방법은 빈약했지만 동기가 순수한 경우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을 고치셨더라”(대하 30:20)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쉽고도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도입니다. 기도가 제일 쉬운 것 같지만 제일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사단이 제일 방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기도를 왜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면 기도는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뿐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껍데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아빠를 위해서 배운 노래를 들려줍니다. 음악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박자와 음정은 모두 엉망입니다. 그러나 아빠를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부릅니다. 아빠는 이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모든 절차와 형식을 무시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바른 동기와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위해서는 충분히 준비하고 정결케하여 정해진 일정에 맞추어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 하지 못할 상황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소경의 입장이 그렇습니다.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시끄럽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그 엉터리 같은 의식을 중단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빠는 최선을 다하는 아이에게 “그만 됐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소경과 히스기야 어린아이는 모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제가 중학생 때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집 뒤에 일본으로 시집가서 살고있는 여자 분이 계셨습니다. 일본에서 친정 집에 오는데 동네 사람들 선물까지 사 가지고 온 것입니다. 우리 집도 가깝게 지냈으니 당연히 선물이 왔습니다. 큰 박스가 하나 도착했는데 밥통이 왔습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전기밥통은 꽤 인기가 많았습니다. 너무 귀한 것이고 어머님은 꼭 같고 싶어하시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잘못 왔다면서 라면 두세 개와 바꿔 갔습니다. 전달한 사람이 잘못 전달한 것입니다. 우리 집 식구들은 몹시 민망하고 황당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선물이라고 하면 겁이 납니다. 저는 그 때 빨리 돈 벌어서 어머님 밥통을 먼저 사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습니다(롬 11:29). 하나님은 배달사고가 없으신 참으로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쁜 것을 놀라운 축복으로 바꿔주십니다. 우리의 수치스러운 것을 자랑으로 바꿔 주십니다. 소경의 부르짖는 소리를 아름다운 노래 소리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들은 눈을 뜨고 깡총 깡총 뛰면서 호산나를 부르며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의 무리와 함께 향했을 것입니다.

본문 34절에서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라고 합니다. 3년이 넘게 함께 지낸 제자들이 이제 일주일이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가르칠 시간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앞서서 예수님께 나오는 소경의 앞을 막았다는 것이 예수님을 민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출퇴근하는 목사님께서 늘 다니시던 지하철역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장애인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너무 측은한 생각과 마음의 영적 충동이 생겨 그의 주위를 서성거렸습니다. 마침 오고 가는 행인들이 뜸하여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셨다고 합니다. “형제님, 저는 목사입니다. 제가 형제님의 영육을 위해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어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기를 기도하겠으니 눈을 감으세요!”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걸하면서 먹고살도록 저를 그냥 이대로 놔두세요. 그리고 은과 금이 없다고 하시는데 혹시 사모님 몰래 숨겨둔 것이 있으시면 다음에라도 좀 주시겠어요?” 이분은 목사님을 참 민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를 잃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얼마나 민망하게 만들어 드렸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전한다고 하면서 주님 앞으로 가는 사람들을 막고 있지는 않은 지요? 기독교가 이슬람에 비해서 왜 전파가 느린지 한가지 단서는 기독교는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신학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 알맹이를 잃어버리는 껍데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소경을 무시해 버려야 하는 세상 왕은 하나님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자기 성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4. 자기 성찰) / 본문 : 막 7:15-16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오늘 제목을 보고 벌써 듣기(보기)싫어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남의 이야기하면 재미있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싫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성찰에서 멀어집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 믿지 말아야 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고 했습니다. 우리는 원래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신은 아무 흠이 없다거나 깨끗하다고 하면 그것이 곧 거짓말입니다. 우리나라 3대 거짓말은 나이 드신 분들이 ‘빨리 죽어야지’ 두 번째 처녀가 ‘시집 안 간다’ 세 번째는 ‘물건 밑지고 파는 거야’랍니다. 3대 거짓말 다음으로는 중국집에 전화하면 ‘방금 출발했어요~ ‘, 정치가들이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교장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옷가게 주인이 ‘어머! 언니한테 딱이야~ ‘, 간호사가 ‘이 주사는 하나도 안 아파요’인데 제가 맞아봤는데 엄청 아픕니다. 그런데 진짜 거짓말은 자신은 거짓말 안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기억력이나 이해력이 부족해서 총명하다고 하는 분들도 조금만 방심하면 곧 잃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너무 무지해서 자아 성찰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로 인해 악행을 저지르기 쉽고, 자신을 변명하다가 더 나쁜 죄악으로 빠져들곤 합니다. 우리는 간혹 격정(激情)에서 비롯된 행동을, 열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잘못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면서도 자신의 큰 결함은 보지 못합니다(마 7;3). 몇 해전에 가톨릭에서 “네 탓입니다”라는 구호를 만들고 이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에다 붙이고 다니는 분들이 자동차 뒤편 유리에 붙이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봅니까? 뒤에 따라오는 차가 보지요. 그럼 누구 탓입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욕을 당하면 쉽게 알아차리고 깊게 생각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모욕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공정하고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말하고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1.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세상을 창조했을 때는 모는 것이 평화로웠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불평만 해대고 서로 미워하기 때문에 세상은 혼란스러워 졌습니다. 세상을 다시 아름답고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파멸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구태여 인간을 파멸시키려고 노력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들을 떠나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 것이 좋겠는가?”
“최고로 높은 산으로 가면 어떨까요?” 신은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그대는 아직도 모르고 있군.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인간들은 정복하고 말 것이네.”
그러자 다른 천사가 말했습니다. “달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인간들은 좋은 머리를 이용해 달까지 쫓아올 것이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한 천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들은 사람들 안에 숨어야 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밖에서 찾아 헤매지, 자신의 내면세계에는 무관심하여 결코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바라보는 일 따위는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를 찾아내는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하나님은 그저 머리만 끄덕였습니다. 하나님은 돌멩이에도 풀잎에도 작은 세 속에도 깃들여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속에도 계십니다.

스가랴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슥 12:1)라고 합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우리 안에 계십니다.

2. 율법으로 자신을 찾지 못한 종교지도자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만을 예수께 강조했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3-21절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구약성경에서 정한 것 외에도 더 강화시켜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먹는 음식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거룩하게 구별된 민족으로 삼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음식을 구별하여 먹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된 뜻을 찾지 못하고 그 율법에 얽매이게 되어 원래 하나님의 취지대로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옷을 빨도록 한 규정을 통해서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깨끗하게 되는가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옷만 빠는 것으로 다 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 율법의 취지를 벗어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오용되는 음식 율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15-16절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이스라엘 민족 이동으로 본 자기성찰

이스라엘 민족은 두 번에 걸친 민족의 대 이동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다 탈출해 나온 것입니다. 이 때의 인도자는 모세였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제정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대가 망하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잡혀가 70년 간 종살이하다가 고레스가 B.C. 539년 10월에 바벨론을 정복하고 이듬해인 B.C. 538년에 유대인의 귀환을 허락하는 조서를 내립니다. 그리고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귀환이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출애굽과정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불평을 계속해서 쏟아냅니다. 물이 없다고 해서 물을 주십니다(민 20:13, 24). 출애굽 내내 만나를 주셨습니다(출 16:33). 만나만 먹다가 고기가 먹고싶다고 해서 메추라기를 주십니다(출 16:13). 낮에는 뜨거운 태양 빛을 가리기 위해서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민 14:14) 인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민수기 14:1에 보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정탐군들이 보고했을 때 백성들은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실망시켜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 14:10)고 하십니다.

두 번째 민족적 대 이동은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사왕 고레스는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로 유대인의 귀환을 공포했을 뿐만 아니라 조서도 내리면서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스 1:2)라고 하면서 빨리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2차로 에스라와 함께 귀환하는 사람들은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스 7:27)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에스라 8:21에는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출애굽 때 불평만 하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오히려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이들에게는 출애굽 때처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렸을 뿐만 아니라 금식을 하면서 갔습니다. 출애굽때의 사람들은 먹을 것에 대한 많은 불만을 내었지만 에스라와 함께한 이들은 오히려 금식하며 갔습니다. 스 8:21에 “스스로 겸비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t/N['t]hil]:레히트아노트’인데 ‘괴로움을 당하다, 낮추다, 고통’의 뜻이 있는 ‘hn:[:아나’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자신을 스스로 쳐서 복종시킴같이 완전한 순종적 자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같은 길을 떠나는 사람들인데 처음 출애굽 때와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모습이 다릅니다.

이동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러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노랫말도 있습니다. “아침바람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우리 선생 계신 곳에 엽서 한 장 써 주세요” 겨울이 되면 기러기는 V자 대형으로 남쪽으로 날아가는데 V자 대형으로 날아가면 앞에서 나는 새들이 날개를 저으면 뒤에서 따라오는 새를 위한 상승기류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전체 기러기 때는 혼자 날아가는 것보다 71퍼센트를 너 멀리 날수 있답니다. 또한 맨 앞에서 날아가는 기러기가 지치면 뒤쪽으로 물러나고 금방 뒤에 따르던 기러기가 앞장을 섭니다. 그러므로 기러기 떼는 대열의 앞장에 서려고 싸우는 법도 없고 꼴찌라고 하여 열등감을 갖는 일도 없습니다. 또한 기러기가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대열에서 낙오되면 두 마리의 다른 기러기들이 그 기러기와 함께 대열에서 떨어져 그 기러기가 지상에 내려갈 때까지 도와주고 보호해 줍니다. 같이 간 기러기들은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함께 머문답니다. 또한 서로의 힘을 돕기 위해서 울음소리를 크게 냅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고서는 협력이 불가능합니다. 자신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21절에서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해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중앙아메리카 서쪽으로 카리브 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카리브 제도는 서인도 제도(West Indies)로 부르기도 합니다. ‘서인도 제도’라는 이름은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인도에 도착했다고 오해한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인도는 알고 있었는데 새 대륙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본 것만을 생각하게 되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노력이 계속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에 어느 곳에나 계시지만 동시에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손에 들고 무엇을 찾는 사람보다 더 한심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 안에 계신 성령의 존재를 모르는 것입니다.
좀더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오로지 하나님 한 분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위대하거나 고귀하거나 즐겁거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도록 하라.”고 토마스 아켐피스는 말합니다.

두 친구가 여행을 하던 도중에 커다란 곰을 만났습니다. 한 친구는 재빨리 옆에 있는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버렸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곰은 죽은 동물은 손을 안 댄다는 말이 생각나 얼은 엎드려 죽은 척 하였습니다. 곰이 다가와 엎으려 있는 사람의 귀를 핥으며 무슨 말인가 하고 가버렸습니다.
나무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까 곰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물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친구를 혼자 두고 도망치는 친구하고는 같이 다니지 말라 하더군”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라고 했습니다. 또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안 되 자신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비유(24) 끝자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3. 예수님의 비유(24) 끝자리) / 본문 : 눅 14:7-14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기독교의 가치관과 본질은 영성에 있습니다. 영성 그러니까 마치 환상이나 꿈을 꾸고 거품을 토하면서 방언기도를 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영성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이 기준이 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세상 적인 기준은 물질, 성공, 출세, 명예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부는 개신교 목회자와 비교해 볼 때 독신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 세상의 가치에 덜 얽매어 있습니다. 한 사회학자 연구에 따르면 직업인의 정직 윤리 수준 평가에서 신부가 1위, 승려가 3위, 목사는 5위로 나타났습니다. 목사가 도덕성에 있어서 신부나 승려보다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목사에 대한 평가는 교회에 대한 평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전국 감리교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영성, 도덕성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말로는 영성을 위치지만 실상은 영성을 잃어가고 세상 적인 가치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2005년 8월 25일에 인천 국제 공항에서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향하던 항공기가 이륙 한 지 10분만에 5살 난 ‘제시카’라는 여자 어린아이가 구토 증세를 보이다가 의식을 잃었습니다. 엄마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이를 살려달라고 외쳤고 승무원들이 달려왔습니다. 승무원들은 아이에게 산소 마스크를 씌우고 해열 좌약을 투여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있는지 확인을 했더니 의사 단체가 탑승 중이었습니다.
그렇게 10여분간의 소생술 끝에 아이가 깨어났습니다. 그동안 딸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인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한 재미교포 의사는 “기압 차이로 인해서 아이의 감기 증상이 갑자기 악화돼 고열과 경련이 발생했다”며 “아이가 LA까지 12시간의 비행을 견디기는 무리”라고 소견을 밝혔습니다. 이런 상황을 전해들은 기장은 곧 바로 회항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항공기는 승용차가 아니기 때문에 회항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항공기가 착륙할 때는 랜딩기어가 활주로에 닿으면서 100t에 가까운 충격이 더해진다고 합니다. 항공기 안전을 위해 중량을 최대한 줄여야 하고, 이에 따라 모든 항공기는 공항에 이착륙할 수 있는 무게 제한이 있습니다. 인천~로스앤젤레스 노선에 투입되는 기종인 보잉 747의 최대 이륙 중량은 388.7t이지만 최대 착륙 중량은 285.7t이어서, 착륙을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항공유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기장은 고심 끝에 항공유를 버리기로 하고 인천 앞 바다 부근에 있는 항공유 방출구역에 약 16만 8000파운드(약 72.6t)의 기름을 쏟아 부었습니다. 착륙무게를 맞춘 항공기는 인천 국제 공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아이는 대기 중이던 구급차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회복된 후 귀가했습니다. 그리고 항공기는 재급유 후에, 처음 출발 시간보다 3시간 늦게 다시 로스엔젤레스로 향했습니다. 이 날 항공회사는 기름 값으로 4,000만원, 이착륙료, 연결 승객 관련 경비로 1,000만원 등 모두 5,000만원의 손해를 보았습니다. 한 생명은 5,000만원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가던 비행기가 되돌아 온 것처럼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방향을 예수께로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마땅히 손실이 있어도 감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일러 주시는 참된 기독교의 가치관과 영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누가복음 14장 1절에서부터 보면 안식일에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지 바리새인들이 따라다니며 엿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고창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주 민감하게 생각하는 안식일 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사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바리새인)과는 달라야 된 다는 것을 비유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높은 자리

예수님을 식탁에 초대한 이 사람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초대했습니다. 무언중에 이들은 자기가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예수님은 저 아래 어느 한쪽에 앉아 계시게 되면 그것은 바로 예수를 모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라고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 까지는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유대인들의 잔치자리는 디귿 자 형태로 되어있데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가운데 자리에 앉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막 12:38, 39).
1950년대 미국의 지성을 대표하던 라인흘드 니버 교수는 인간의 타락은 교만 때문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권력의 교만이요, 그 다음은 지식의 교만이요, 그리고 덕망의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은 권력을 잡기까지는 가장 약한 위치에서 자신의 당선을 호소하며 매달리다가도 일단 권력의 정상을 정복하고 나면 자신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마침내 그것은 살아 있는 우상이 되어 자신을 그 자리에 치켜세운 사람 앞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는 “사다리 꼭대기에 다 올라간 사람은 아래만 내려다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내려다본다는 말입니다.
윗자리에서 보면 내려다 보게됩니다. 전체를 다 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저는 뉴스를 보다가 처음에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깜도 안 된다.” 자꾸만 그런 말을 하는데 대통령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국어 지식이 깊지는 못하지만 국어를 공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중의 한 사람인데 이 말이 어려웠습니다. 저는 대통령 때문에 이 말을 그렇게도 사용하는구나 알았습니다. 높은데 계시니까 “깜도 안되겠지요.”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멀리 주변에 있는 것들은 보일랑 말랑해서 자연스럽게 작은 것들을 무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높은 자리는 영적인 사람에게는 결코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낮은 자리

예수님이 우리에게 ‘맨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신 것은 그 자리가 겸손과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게 해 주며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과 지시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리, 끝자리에 앉으면 가난한 사람,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윗자리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윗자리에 앉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만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은 낮은 자리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성육신 하신 모습입니다.
집회서 10:12 “오만은 주님을 저버리는데서 시작되고 사람의 마음이 창조주에게서 멀어질 때 생긴다”고 했습니다. 15절에서는 “주님께서는 오만한 민족을 뿌리째 뽑아내시고 그 자리에 겸손한 자들을 심으신다”고 하셨으며 18절에서는 “오만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링컨의 일화 한 토막입니다. 옛날 백악관 곁에는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링컨 대통령은 가끔 울타리까지 나와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구경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몇 명의 아이들이 한 소년을 놀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몹시 허름한 차림이었는데 아빠는 전쟁에서 전사하고, 엄마는 청소부였습니다. 구두를 닦아 반질반질하게 해서 신고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으나 구두가 너무나 낡아 닦을 수도 없어 놀림감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겨우 아홉 살 난 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존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존의 새 옷과 새 구두, 여동생의 새 옷과 새 구두, 그리고 많은 식료품과 석탄을 링컨 대통령이 보냈던 것입니다. 존은 새 구두를 신고 자랑스럽게 등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학생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은 대통령이 존의 교실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성경 구절 하나를 소개하겠다면서 칠판에 다음의 글을 적어 놓았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진정한 높고 낮음

본문 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눅 18:14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와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가 나옵니다. “낮아지고”(will be humbled, NIV)와 “높아지리라”(will be exalted, NIV)의 문장은 ‘수동태’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높고 낮아짐이 인간의 편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높아진 것이 아니며 낮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낮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는데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삼상 24:4) 그리고 사울은 이 일 후에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7)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여인들의 말을 듣고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이후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이스라엘은 나누어 집니다.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유다에는 20명의 왕이 있었고 이스라엘은 19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한 왕이 하나도 없었고, 유다에만 8명의 선한 왕이 있었습니다. 선한 왕으로 보는 유다 8대왕 요아스는 말년에 우상을 섬겼으며(대하 24:1-27), 10대왕 웃시야는 자기가 제단에 분향하려다 문둥병이 걸렸습니다(대하 26:16-23). 왕의 타락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교만입니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고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은 우리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는 스스로 상좌에 앉아있는 자들입니다.

통전적 선교

통전적 선교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이에 응답하는 선교입니다. 통전적 선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 하신 것처럼 복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통전적 선교가 무엇인지 PMI(무슬림이 사는 지역에서 사회 봉사하는 미국의 선교단체. www.pmi-usa.org)의 사이트에 잘 명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통전적 선교란 “복음의 말씀과 행위로 선언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이 되려고 하는 사람만이 선교적 명령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가서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러한 모습을 예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아멘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선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복음의 축복과, 경제적 축복, 민주 자유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책임이 있습니다. 이 지구촌에는 지금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믿기 위해서 고통 당하는 크리스천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현재 에리트리아에는 목사와 성도들 포함하여 약 2천명이 불법 구금되어 있습니다. 이중에서 작년에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4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올해) 9월 5일 미그치 하일레(33, 여) 자매가 웨아 군사훈련기지에 수감되어 가혹행위를 장기간 당한 끝에 사망했습니다. 하일레는 예수를 부정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라는 서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여 장기간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죽었습니다.

우리가 끝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마치 모든 사람들을 다 구출하고 난 후에 마지막으로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남에게 다 양보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뿐인 생명도 양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믿음이 주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111. 믿음이 주제입니다.) / 본문 :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저의 어머니는 학교 교육을 전혀 받아보지 못하신 분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 집에 오셔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가셨습니다만 예수를 믿기 전에는 보통의 한국 여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 놀라운 기억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당에게 가서 들은 이야기는 하나도 안 잊어버리고 전부 기억하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무당의 이야기를 전하는 어머님이나 듣는 저의 아버지의 모습은 진지함 그 자체입니다. 점술가가 점괘를 말할 때 허튼 짓하고 한 눈을 파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집중을 해서 무슨 말일까 하고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지만 무당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무당이 하는 말을 듣는 그 이상의 진지한 예배태도가 아니면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도 아주 진지합니다. 어떻게 하면 굿을 잘할까? 그 굿을 하기 위한 각종 절차, 준비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듣고 준비를 합니다. 또 부적을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는지 모릅니다. 성경보다 훨씬 더 부적을 더 잘 간수하는 것 같습니다. 그 부적은 간수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끄집어내어 쓰다듬으면서 위로 받고 만지면서 위로 받습니다. 잘 때는 배게 밑에 넣고 잡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보다 그 사람들이 더 마음을 쏟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을 보고 신앙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미신을 좇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신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미신은 학문적으로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이나 재주나 돈으로 신의 마음을 달래고 얼러서 자기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변하지 않고 신을 달래고 얼러서 내게 좋도록 하는 게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미신이 좋아서 섬기는 게 아닙니다. 귀신이 좋아서 섬기는 게 아닙니다. 귀신을 달래서 내게 좋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런 미신적인 믿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국인의 무속적 믿음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때가 찼습니다.

물은 차면 넘치게 마련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 4:4)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이후 구원의 계획을 마련하고 계셨습니다.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가 마치기 전에 야곱을 통해서 예언하십니다. 창 49:8-10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10 홀이 유다를 떠나를 아니하며…”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의 조상을 삼으시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십니다. 그리고 십계명과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이제 길은 보여진 것입니다.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신 27:10)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 이후에 더욱 타락의 길로 빠집니다. 하나님은 여러 제사장들과 사사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사사들이 먼저 죄에 빠지는 참담한 모습을 보게됩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초대왕인 사울의 손을 피해 10년을 도피생활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유다지역에서 먼저 왕이 되어 7년 6개월을 지내다가 이스라엘과 통일되어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11장에서 밧세바를 범합니다. 그리고 그의 남편 우리아도 죽입니다. 간통죄에 살인죄까지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급기야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삼하 12). 다윗은 회개했지만 이 죄의 대가로 그의 아들들의 죽음과 반역이 일어나서 모두 죽고 솔로몬만 살아남았습니다.
왕위는 솔로몬에게 넘어갔고 솔로몬은 1천 번제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지혜를 구하여 그 어느 왕국보다 더 강력한 나라를 세웁니다. 그러나 그는 1000명의 이방 여인들 때문에 우상숭배로 죄에 빠집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남왕국(유다)과 북왕국(이스라엘)으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죄로 10지파를 이스라엘로(왕상 11:31, 35) 한 지파만을 유다로 남겨두십니다. 그 이유는 다윗의 등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왕상 11:36). 그리고 이후 이스라엘의 12왕과 20명의 유다왕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들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루는 왕은 없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다윗을 표준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왕상 11:4, 33, 15:3, 왕하 14:3)라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오랫동안 품으셨던 속내를 드러내십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보내실 메시야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사 42:1-3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이로서 오랜 바램이었던 유다지파의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마 1:1).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이 오셔서 믿음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당시 기존의 제사 입장을 뒤집는 일대 개혁이었다고 지난주 말씀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시대 하나님을 믿는 방법은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제사는 제물이 있어야 했는데 가난한 자들은 비둘기조차도 살 수 없어 제사를 드리기 곤란해 졌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런 제물이 필요 없는 세례를 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세례(침례:벱티스트)보다 더 강력한 세례를 주실 분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세례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베푸시는 것인데 아무나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단 한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믿음이 강조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구약 시대는 자신들이 제물을 바쳐서 제사를 드리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직접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우리는 구약과 같은 방법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히 7:18)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9)
하나님께 가는 방법이 구약은 제사였다면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지역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마 8:5-13). 로마 군인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뛰어나왔습니다. 순간 아마 제자들은 적지아니 놀랐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루살렘에서는 서기관과 율법사들을 통해서 감시하고 있는데 이제 로마군까지? 군장과 계급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로 로마군인으로 수하 100명을 거느리고 있는 백부장 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고쳐달라고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가서 고쳐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신의 수하도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데 직접 가시는 것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와는 비교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이 예수께 나아왔는데 이 여인은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기던 마리아입니다. 병이 들어 있는 오빠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사랑하고 있었으며 당연히 가셔서 고쳐주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현재 있는 곳 요한이 처음 세례 주던 곳인 요단강 저편(요 10:40)에서 이틀이나 더 계셨습니다. 아마도 강을 건너 유대(베다니)로 가시면 다시 이곳에 오시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곳의 병자들과 하실 일들을 정리하시는데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입장에서는 답답합니다. 길도 먼데 시간은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는 나사로는 이미 죽은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32)라고 했습니다.

이에 비해서 백부장은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기이히 여겨”의 원문 qaumavzw(다우마조)는 ‘놀라다, 감탄하다, 이상히 여기다’로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에 깜짝 놀라셨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서 쫓겨나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하신 것으로 보아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이나 헬라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미안하며 예수님께 수고를 끼쳐 드리는 것도 죄송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한 사건이 있습니다.
마 15:21-27절에 소개됩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일입니다. 두로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건축자제를 나르던 곳입니다(삼하 5:11, 왕상 5:7). 시돈은 여기서 북쭉으로 40Km위치에 있는 두 곳 모두 유명한 항구도시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마 15:22)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막 7:26에서 ‘수로보니게’(Syrian Phoenicia)라고 하여 이 여인의 혈통이 시리아에 거주하는 페니키아인 이었음을 말합니다. 당시 여자가 자기 딸이 미쳤다고 말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은 창피해서 숨겨놓고 지내는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인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시끄러워서 제자들이 듣다못해 예수님께 와서 말합니다.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그리고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마 15:24) 여자는 오자마자 예수께 넙죽절을 하며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는데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7-28)
이 여자도 이방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원문에는 ‘여자야’ 앞에 ‘오(!’W)’라는 호격의 감탄사가 있습니다. 그냥 ‘여자’라고 부른 것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놀라움과 감탄이 그대로 표현된 것입니다.

부모의 따뜻한 사랑만 받으며 자라나는 자녀는 부모님의 고마움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다고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결손 가정이라고 말하는 가정의 아이들이 더 잘 자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고마움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유대인이라도 무조건 구원받을 자로 여긴 것이 아니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했습니다.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 언급하는 로마서 12장에서 제일 먼저 주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겸손한 생각을 품으라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도 첫 부분은 교리편이고 다음 부분이 윤리편인데, 거기서도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라는 것입니다.

존 플레처(John Fletcher)란 사람은 그의 제자가 묻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도 응답으로 꼭 한가지만 주신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였는데 당신은 어찌하렵니까 하니 “겸손을 구하지.” 한가지 더 주시다면? “또 겸손이지.” 한가지를 더 주신다면? “또 겸손을 구할 것이라”고 하였다.
믿음은 겸손으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최대의 적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제가 설교할 때 우리집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저희 집사람이 뭐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많이 하냐고 그럽니다. 그런데 성경의 저자들은 그보다 더한 것도 솔직히 말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이 당연히 될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사람입니다.

당연히 예수 믿어야 될 집안에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목사가 될 자가 목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구원받아야 할 자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께 고개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과의 대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0. 주님과의 대화) / 본문 : 마 22:16, 요 1:14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어린 아들이 “엄마, 나 선생님 말씀을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다 빨아들이고 올께요.”하고 학교를 들어갔습니다. [이 아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다 빨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이란에서 무슬림 출신 개종자가 초등학교 때 경험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는 수업시간에 선생님에게 “알라(Allah)께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전능한 분이라는 것이 정말인가요?”라는 질문을 했답니다. 그 때 선생님은 눈을 휘둥그렇게 치켜 뜨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너 어쩌자고 감히 알라를 의심하는 거냐 큰일을 당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냐”하고 윽박지르면서 모두들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며칠 전에도 이웃 마을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알라를 의심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며칠 있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으며 옆 동네에 사는 어떤 여학생이 알라를 의심하다가 즉시 암에 걸려서 병원에 실려 가서 수술 받다가 죽었다. 그러므로 내일 아침에 성한 몸으로 일어나고 싶으면 절대로 알라를 의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알겠나” 하더랍니다. 그 이후에는 아무도 묻는 아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슬람이라는 말은 복종이라는 말입니다. 묻지 말고 계시가 내려왔다고 하면 그냥 믿으라는 것입니다. 질문이나 의심을 하면 이미 무슬림(복종하는 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집트의 독실한 무슬림 집안에서 태어나서 12살 때 이미 코란을 모두 암송했던 마크 가브리엘(가명)이라는 신동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슬람의 하버드 대학이라고 하는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 대학에서 이슬람의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그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면서 중동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이슬람을 강연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날 “이슬람의 알라가 과연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신인가?”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는데 이를 눈치 챈 대학에서는 그의 교직을 박탈하고 그 날 즉시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일주일간을 고문당하면서 취조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의심을 가진 대가였고 그는 그 때부터 이슬람을 떠나 성경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여러 차례 죽음의 위협을 받았고 결국은 외국으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슬람에서는 의심이 이렇게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코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여, 여러 가지의 일을 물어서는 안 된다. 너무 분명히 알고 보면 오히려 해가 될 것도 있다. …(중략)… 너희들 이전에도 어떤 백성이 이런 종류의 문제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믿음을 잃고 말았다.” “믿는 자들이여 분명한 것은 묻지 말라 했으니 그것이 오히려 해롭게 하느니라. 또한 꾸란이 계시되는 것을 묻는다면 이는 더욱 너희들에게 해악이라. 그러나 알라는 지나간 것을 용서하시니 알라는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심이라. 너희 이전의 한 무리가 그러한 질문을 하였으니 그들은 그로 인하여 불신자들이 되었노라.”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슬람의 무슬림들과 같이 믿음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무슨 일이 잘 안되면 “오늘 새벽기도 안나가서 이렇게 되었나” 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할 즈음이 되면 믿음이 싹트는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예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런 생각도 안 하지요. 하나님이 우리의 눈과 귀를 다 막아 놓으시고 아무 질문도 못하시게 하고 무조건 믿으라고 하실 까요?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일방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께 묻기도 하고 심지어는 토론도 하는 것입니다. 만일 부모가 자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내 말만 따르라고 한다면 처음에는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생각할 즈음에는 부모님의 말에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오늘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대화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아멘.

마가복음 11:22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아침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가셨는데 저녁때 보니 무화가 나무가 말라 죽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었다고 할 때 예수님이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실 때 원문으로 보면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믿음이 아닙니다. 왜 성령께서 도와 주시지 않으면 믿음이 안 생긴다고 합니까? 우리의 방법으로, 생각으로는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믿음”만이 우리를 살려내십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에 들었지만 나중에 사단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타락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노아의 음성을 듣고, 노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노아는 인류의 새로운 시조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아담은 폐하시고 노아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을 찾으시고 또 그를 통해서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아브라함이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간 모든 사람이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에서 마치신 것이 아니라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뽑으셨습니다(신 10:15).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으로 더불어 만민중에 하나님을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대상 16:8, 24).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고 만민중에 흩어졌습니다(신 28:64). 흩어지는 일이 두 가지인데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흩어지게 되었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흩어진 민족입니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대상 16:24, 시 96:3)하신 말씀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예수님을 예언하기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사 55:4)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두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 그동안 감당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 역할을 예수님에게 위임하여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줄곧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가 있고 자신은 그 아버지의 명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요 6:44, 요 10:18, 요 11:42).
둘째는 우리의 관점입니다. 본문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구약에서는 음성으로만 그들과 대화 하셨습니다. 그것도 잠깐씩 대화한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축복을 받았고 하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된 예수님은 그것으로만은 불충분했으며 우리와 대면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친히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한 질문은 모두 225번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한 질문은 모두 103번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배나 더 많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질문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신 것은 우리와 대화를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질문을 통해서 대화의 접촉점을 찾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께 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신 것입니다. “방귀뀐 놈이 성낸다”고 죄를 짓고 꽁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고백처럼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진지한 대화를 원하시는 예수님

대화를 위한 질문
전에 요한을 따랐던 두 명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요 1:38)고 물으셨으며, “물 좀 달라”(요 4:7)고 청하셔서 사마리아 여인과 멋진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낙심하여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에게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눅 24:17)고 질문하심으로 대화를 시작하셨고, 부활 후에 고기를 잡고 있던 열한 제자에게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 21:5)고 물으셨습니다.

동의를 구하는 질문
예수님은 질문을 통해서 듣는 자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런 동의를 얻음으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시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마 10:29). “너희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마 12:11).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눅 6:39).
[앞에서 이어짐]
그 뒤 아들은 어엿이 자라 의과대학생이 된 아들이 다음날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아들의 무슨 행동이 그리 못마땅했는지 훈계를 하고 있었고, 아들은 그저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멀리서 부자의 모습을 보며 초조해졌습니다. ‘내일이 시험인 아들을 붙들고 웬 말이 저리도 많으실까, 이제 그만 하시지… ‘
나는 이제나저제나 하며 남편의 얘기가 끝나기만 기다렸습니다. 5분, 15분, 20분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슬며시 남편 옆으로 다가갔습니다.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려면 역시 성적이 좋아야 인정받는다구, 학교성적은 어디나 따라다니거든, 그러니까…” 남편의 말이 영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나는 톡 쏘아 주고 싶었습니다.
“여보, 그 얘기 백 번도 더 들었어요. 그만 좀 하세요. 내일 시험 볼 아들 붙잡고 겨우 그런 말씀을 해야겠어요?” 하고.
그러나 섣불리 끼여들기가 뭐해서 할말을 궁리했습니다. ‘여보, 당신 그 말 열 번째 하고 있네요, 아니야, 두 번? 다섯 번? 나는 생각하고 생각해서 드디어 말문을 열었습니다.
“여보, 얘기 중에 죄송한데요. 당신 지금 하는 말 얘기 여섯 번째 듣는 것 같아요” 그때 아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님, 중요한 얘기는 반복해 들어도 됩니다” 나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통쾌했습니다. 남편도 통쾌한 듯 크게 웃었습니다.
아들도 시원한 듯 함박꽃처럼 웃었습니다. “그래, 그만 들어가 봐라” 남편이 아들을 놓아주었습니다.
나는 내 아들이지만 존경스러웠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 안되어 기회를 보아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지만 이 엄마는 너를 한없이 존경한단다. 어쩌면 그 순간에 그렇게 적절한 말을 할 수 있었니?”
아들은 나를 꼬옥 껴안으며 말했다. “어머님, 저는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아, 아들의 말 한마디가 이렇게 나를 행복하게 하다니… ‘ 마크 트웨인은 ‘멋진 칭찬을 들으면 그것만 먹고도 두 달은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표현을 하도록
주님은 다섯 차례에 걸려 믿음의 표현을 하도록 질문을 사용하셨습니다.
두 명의 소경에게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 믿느냐?”(마 9:28).
열 두 제자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막8:29, 눅9:20).
고쳐 주신 두 명의 소경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요 9:35)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빌립에게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10)

사람들의 질문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이셨는데 가야바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마 26:62), 유대인 인들로부터 질문을 받았을 때(마 26:68), 빌라도의 질문들 중에(마 27:13, 요 18:38, 19:9) 대답하지 않은 것이 있을 뿐이었습니다(눅 23:9). 이 질문들은 예수님의 굳이 필요치 않은 질문을 한 사람들의 진실성이 없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를 작정하신 터라 굳이 대답이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진지하고 거리낌없이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찾아주시기 위해서 질문을 하신 반면 사람들은 예수님께 곱지 않은 질문들을 했습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 4:12). “너는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크냐?”(요 8:53). “왜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하고 손을 씻지 않고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느냐”(눅 6:2, 막 2:24, 마 15:2).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요 8:19). “네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느냐?”(마 21:23, 막 11:28, 눅 20:2).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이 옳으니이까?”(마 12:10)라는 식의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시지 않았다면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 영생에 관하여, 사랑에 관하여, 아버지 하나님에 관하여 오늘도 주님은 우리와 대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마 15:16)
 

경계선에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9. 경계선에서) / 본문 : 눅 22: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오늘은 본문 읽어놓고 다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제목설교 잘 안 하는데 오늘은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말씀 내내 오늘 본문이 그 어디에도 따라다닌다는 것을!
오늘 설교의 제목 ‘경계선에서(On the boundary)’는 폴 틸리히(Paul Tillich:1886-1965)의 자서전의 제목과 일치합니다. 폴 틸리히는 20세기 개신교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교수자리까지 얻었지만 1차 세계대전에 군목으로 참전하여 사병들이 죽어 가는 참호 속에서 니체의 책들을 읽으면서 전통적 유럽 기독교 문명의 붕괴를 몸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됩니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그는 히틀러에 의해서 자국인 독일에서 추방됩니다. 여행금지국가로 정해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해야 하는 에스라, 에스더 부부가 아쉬움을 진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이 추방당하는 틸리히는 어떻겠습니까?
제가 95년도에 인도를 갔을 때 우리나라에서 6.25가 끝나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유엔군 포로중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일제시대 때 일제에 의해 일본군이 됩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가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후에 중국 군에 잡혀서 중국 군이 되어 6.25때 북한을 지원하러 내려오는 병사들 틈에 끼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북한군에 잡혀서 북한군인이 됩니다. 그리고 또다시 유엔군에 포로가 됩니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고향은 남쪽이지만 남한도 북한도 그렇다고 중국을 일본을 택할 수도 없는 이 사람은 제 3국인 인도를 택하여 그곳에서 살고있었습니다. 이 민족의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폴 틸리히도 이러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자서전 ‘경계선에서’ 그는 두 기질 사이에서 자신을 보여줍니다. 도시와 시골 사이에서, 사회계급들 사이에서,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타율과 자율 사이에서, 신학과 철학 사이에서, 교회와 사회 사이에서, 종교와 문화 사이에서, 루터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관념론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고국과 타국 사이에서 그는 갈등하며 자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종교의 실현(Religiose Verwirklichung)”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경계선은 앎을 얻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다.”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친구를 삼는 데 자격기준이 없습니다. 나이 성별 피부색 사람인지 동물인지 식물인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 조차도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어른들의 기준일 뿐입니다. 작은 나무토막으로 우주선을 꿈꾸고 조그만 인형들을 친구로 사귀어 멋진 우정을 나누는 어린 아이들의 세계가 부럽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과 예수

유대교 율법에 따르면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흠 없는’ 양이나 염소 등을 바쳐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양이나 염소가 없는 사람들은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로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일반 농민의 집에서 사육한 짐승이나 집 주변 혹은 산에서 잡은 비둘기는 ‘흠 없는’ 제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제사용 짐승을 전문적으로 키우는 업체들이 있었고, 이 업체들은 성전 관료들인 제사장의 공인 하에 한정된 일부 가문에 의해 독점되었습니다. 이 독점업체들은 성전귀족에게 많은 뇌물을 바칠 수 있는 가진 가문 중에서 선별되었습니다. 가난한 탓에 죄 사함의 제사를 드릴 수 없었던 대중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부족한 자, 심지어는 민족적 불행을 초래한, 저주받아 마땅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런 종교적 체제로 인해 사회의 모순에 저항할 수도 없는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 이들을 죄의식에서 해방시켜 준 것이 요한의 세례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에게 보다 유리한 죄 사함의 매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은 결국 요한을 좋아하게 되었고,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습니다. 예수도 갈릴리에서 요한에 대한 소문을 들고 세례자 요한을 찾기 위해 요단강가로 갔습니다. 예수님도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활동했던 베레아 지방은 아바태아라는 유목족속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입니다. 때문에 베레아 지방에는 많은 군사요새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과 함께 반정부적 선동을 하고 있었던 요한의 행동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추종자의 일부는 요한과 함께 붙잡혔고 또 다른 일부 사람들은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보다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 예수는 다시 갈릴리로 돌아와 요한의 세례운동에 참여했던 옛 동지들을 포함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의 명성은 널리 퍼졌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 주변에 몰려들었습니다.

요한은 대중을 불러냈으나 예수는 대중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중을 모든 정치적, 사회적 압박에서 해방하시기 위해 병고침과 말씀선포로 영적 활동을 펼쳤나갔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정치적, 사회적 압박에서 대중들을 해방케 하시고자 적극적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경계선에 계셨습니다. 당시 정치적인 로마와 유대와 헬라의 경계에 계셨습니다. 또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계셨으며, 율법과 복음의 경계선에 서게 되셨습니다. 제자들로부터는 세상 권력의 자리(왕)와 섬김의 자리사이에 계셨습니다.
컴퓨터의 내부적인 회로는 2진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0과 1사이에서만 선택이 가능하고 중간은 없습니다. 흑과 백 사이에 어떤 것이든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틸리히는 이 선택을 미루다가 추방을 당한 것이고, 세례요한은 이 덫에 걸려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선택에서 빠져 나오셨습니다. 몇 번에 걸쳐서 이러한 선택을 강요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그 덫에 걸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중의 한가지 사건이 세금문제였습니다. 막 12: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설교자에게도 이러한 경계선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을 강조하였고 요한은 사랑을 강조했으며 베드로는 소망을 특히 강조하여 설교했습니다. 믿음을 강조한 바울의 경우에는 데살로니가서에서는 예수의 재림을, 로마서에서는 믿음을, 고린도서에서는 사랑을 말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일제시대 때의 설교는 일본 침략자에 의해 고통 당하는 백성을 위로하고 삶의 의미를 북돋아 주는 설교가 많았습니다. 당시에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는 찬송이었습니다.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내 어이 여기 살리까
빛나고 높은 저 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전도의 내용도 예수천당이면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 때와 같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국가는 독립하고 세계무역의 10대국에 들어있습니다. 그만큼 국가의 위상과 위치가 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했고 올림픽과 월드컵도 치러냈습니다. IT분야는 세계3위에 올랐고 통신 속도는 세계1위입니다. 눈부신 발전으로 세계가 놀랐습니다. 이런 국력을 바탕으로 우리가 선교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으로 안티 크리스찬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도 분당샘물교회와 박은조 목사님을 비방하는 일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제가 알기로는 그 어떤 목사님보다도 본받을 만한 분입니다. 어떤 분은 교인이 3,000명이라니까 목사가 얼마나 많은 돈을 받겠냐고 합니다. 박 목사님은 서울 영동교회에서 오래 동안 목회 한 분입니다. 이 교회는 손봉호 장로님이 계신 곳이기도 합니다. 강남에 있는 교회가 철 대문입니다. 이 대문을 보고 사람들은 서대문 교도소냐고 그럽니다. 그만큼 절약하는 교회입니다. 그곳에 계시다 분당샘물교회를 개척했는데 분당샘물교회는 성도가 3,000명 정도 된답니다. 다른 교회 같으면 벌써 교회를 건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가를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담임목사를 비롯한 전 교역자 사례비를 100만원으로 정하고 가족 1인당 19만원만 추가하여 받고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한 가정을 파송하고 있는 우리교회 역시 남의 일로 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국가 권유로 철수 준비를 하고 있지만 현지의 같은 팀 내에서 건축한 병원은 경기도 만한 크기의 땅에 이 병원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다 버리고 와야합니다. 단순히 병원을 그동안 애써 세운 건물을 두고 온다는 것만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니라 그곳에 여전히 남아있게 되는 그 땅의 백성입니다. 누가 치료해 줍니까? 누가 아픈 곳을 감싸줍니까?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아닙니다만 현실적으로 너무나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탈레반이 두 여성을 풀어주면서 한 여성이 양보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탈레반은 그 여성은 정말 위대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분은 아프간에 간 것이 ‘선교냐 봉사냐’ 하면서 따집니다. 여러분! 봉사면 어떻고 선교면 어떻습니까? 또 여행이면 어떻습니까?

박은조 목사님은 지난 8일(수) 무겁게 가라앉은 교단에 올라섰습니다. 이날 제시한 성경구절은 열왕기 39장. 동료들을 모두 잃은 ‘엘리야’가 로뎀나무 밑에서 하나님에게 “자기의 생명을 거둬달라”고 애원하며 기도하는 대목입니다. 박은조 목사님은 말하기를 “이제 3주가 지나 4주 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웅적 죽음을 위해 아프간 땅을 밟은 게 아니었습니다. 현지 사역자를 뒷바라지하고 격려하기 위해 간 사람들인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저희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아프간 피랍사태로 또 하나의 경계선에 섰습니다. 폴 틸리히가 말했던 것처럼 경계선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교회를 돌아보고 선교를 점검해야합니다. 이번 일로 아프간이 아주 문이 닫히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또한 우리가 더욱 열심히 기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1889년 10월에는 호주 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Austualia) 소속의 선교사 데이비스(J.Henry Davis)가 조선에 입국하게됩니다. 그를 파송한 호주 장로회는 당시 교세가 3만 5천명 밖에 안 되는 작은 교파였습니다. 1885년과 1887년에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한 바 있는 중국 주재 영국국교회 선교사인 월프(J.R.Wolf)부주교가 한국 선교의 꿈이 영국국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호주에 있는 친구들에게 한국을 위하여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호소문을 보냅니다. 이것을 받은 매카트니(H.B.Maca-rtuey) 목사가 빅토리아 선교신문에 이 내용을 싫고, 이 글을 데이비스가 읽고 한국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당시 호주 장로교회에서는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조차 갖지 않고 있었습니다. 교단에서 파송하지 않자 청년들의 모임인 성서연구 연합 친우회(The Presbyterian Fellowship Union for Bible Study)에서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데이비스 목사의 본 교회인 멜보른 투락(Too-rack) 교회와 협력하여 초대 선교사로 데이비스 목사를 선정하여 한국에 파송 하게 됩니다.

서울에 도착한 데이비스는 부산 지역을 선교하기 위해서 1890년 2월 28일 구한국 정부로부터 전라, 경상 지방 여행허가를 받아 서울-부산 간 장거리 여행을 도보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당시에도 부자 선교사는 말을 타고 다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과천을 지나 수원(3월 15일), 천안(3월 18일), 공주(3월 20일), 경천(3월 21일) 등을 지나며 복음을 전하며 갔습니다. 공주를 지나 논산(3월 22일)을 지나 만경강을 건너 전주(3월 24일), 오수(3월 25일)를 지나 남원(3월 27일)과 하동(3월 29일)사이의 지리산 기슭 산악 지역을 통과했습니다. 전주를 향해 걸어 갈 때에는 많은 비로 인하여 길이 물에 잠겨 장화를 벗고 걸어야 했습니다. 지리산 지역에서는 호랑이 울음소리도 전해 들었습니다. 1890년 3월 27일 드디어 서울에서 부산을 향하여 670리를 걸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힘든 여행 중에도 그는 매일 5-6시간 씩 공부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조금씩 말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마지막 부산 행로는 진주(3월 31일) 부근을 경유한 것으로 추정되나 그 후의 경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약 20일간의 무리한 도보 여행을 하는 가운데 추운 날씨와 불편한 잠자리, 맞지 않는 음식으로 허약해진 체질에 폐렴과 천연두에 감염되어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게일(Gale, J. S.)의 도움으로 4월 4일 비 오는 금요일 부산으로 이동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일본인 병원(北村)에 입원하여 하룻밤을 병상에서 지내다가 치료도 제대로 받기 전에 1890년 4월 5일 순직하였습니다. 임종을 지켜본 게일은 “그는 병원에서 죽어가면서 내게 뭔가를 말하려 했다. 오후 1시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메리(Mary)에게 편지했습니다.
호주장로교회도 경계선에 섰습니다. 교단이 파송한 것은 아니었지만 호주 장로교회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기도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데이비스의 헌신적인 활동과 순직은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를 가능하게 만든 값진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호주 장로교회는 후속 사업으로 멕케이(Mackay)선교사 등이 내한합니다. 또한 호주에서는 여전도회연합회(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가 만들어져 선교를 헌신적으로 돕도록 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한 남자가 남과 북의 경계선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군, 북군 모두를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아래에는 남부 연합군의 회색 바지를 입고 위에는 북군의 푸른색 윗도리를 입고 다녔습니다. 얼마 후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남군과 북군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전쟁 소식을 듣고 모두들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는 남군의 회색 바지와 북군의 푸른 윗도리만 입고 있으면 어딜 가든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남군 바지와 북군 윗도리를 입고 자기 밭에서 일을 했습니다. 드디어 근처에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북군과 남군이 대치하고 곧 총 소리가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북군의 병사들은 회색만 보이면 무조건 총을 쏘았습니다. 남군은 푸른색만 보이면 무조건 총을 쏘았습니다. 그 남자는 온몸에 총을 맞고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젖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구별된 존재입니다. 성도는 세상과 하나님의 사에서의 입장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는 경계선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웬 떡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2. 웬 떡) / 본문 : 요 6:53-58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여기는 롯데월드입니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아이들이 벌떼처럼 몰려갑니다. 신데렐라가 등장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신데렐라의 옷자락이라도 만져 보려고 그 주변에 둘러섰습니다. 그러나 6-7세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몸이 심하게 뒤틀리는 장애를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형의 손을 잡고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눈빛으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신데렐라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치는 아이들 틈에 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감히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한 걸음, 한 걸음을 사뿐히 내딛으며 신데렐라가 소년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해 있는 소년의 얼굴에 살며시 입을 맞췄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분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롯데월드의 신데렐라 공주가 아닌, 평강의 왕을 기억해 보십시오. 장애 소년이 아닌 당신과 내 이야기입니다. 두 경우 다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두 경우 다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신데렐라는 단지 뽀뽀만 했을 뿐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뒤에 남겨진 소년의 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신데렐라였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뒤틀린 소년의 몸뚱이는 예수님이 가지시고, 자신의 아름다움은 장애 소년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짧은 감동보다 위대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엘림을 떠나 시내산이 보이는 광야에 도착했습니다. 앞뒤를 살펴보고 좌우를 보아도 먼지 날리는 모래뿐입니다. 애굽에서 싸들고 온 양식도 바닥이 들어 나고 가축들도 더 이상 잡아먹을 것이 없어졌습니다.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꼼짝없이 굶어죽게 생긴 것입니다. 사람들은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로 응답하십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 16: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양식을 주시는 대신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보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m)를 광야생활 40년 동안이나 먹었습니다(출 16:45). ‘만나’라는 말은 ‘마’(hm) ‘무엇? 웬?’이라는 뜻입니다. 만나는 ‘웬 떡’ 우리 식으로 말하면 ‘웬 밥’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빵은 주식이며 우리가 먹는 밥과 같은 것입니다. 빵이라고만 말씀드리면 주식이라는 개념이 약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저는 밥으로 고쳐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요한복음 6장 1-4절에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많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개인적인 기적일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병을 고치시는 기적을 많이 행하셨지만, 그것은 집단적인 치유가 아닌 개인적 치유였습니다. 그런데 반해 오병이어 기적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인 오천 명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함께 체험한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것이 특히 일상적으로 늘 필요한 빵을 나누어 받았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을 더욱 들뜨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튿날 예수님이 가신 곳에 좇아갔습니다. 다른 기적과 달리 오병이어 기적은 사람들을 대단히 흥분케 한 기적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찾아온 저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썩을 밥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밥을 위해 일하여라. 그 밥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의도하신 뜻이 여기에 분명하게 들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썩을 밥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만,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밥은 그보다 더 우선적이고 중요함을 일깨우시기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그런 의도로 해석하여 오병이어의 기적과 더불어 영생하는 밥에 관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함께 묶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곧 이어진 대화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먼저 그들의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온 밥인 만나를 먹었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그 밥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밥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그 밥을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밥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어서 51절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밥이니 사람이 이 밥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밥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은 많이 헷갈렸습니다. 떡과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내가 곧 생명의 밥’이라고 하시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하시니 유대인들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밥과 만나라는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영적인 차원으로 이야기가 비약되므로 유대인들은 얼른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들 뿐 아니라 오늘 우리도 얼른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니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먹는다’는 비유적인 표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33절에 “하나님의 밥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만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시내산에 받은 율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진정한 양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리는 것을 양식(糧食)을 먹는 것으로 표현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편 19편에 보면 여호와의 율법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는데, 만나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55장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을 포도주와 젖으로 비유하면서 값없이 와서 사먹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에스겔서에 보면 예언자가 두루마리 책을 받아서 먹었는데 입에서 달기가 꿀 같다고 하였습니다(겔 3:1-3).

이런 전제를 가지고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곧 생명의 밥”이라는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로고스(Logos) 즉 말씀이라고 하였으며, 이 말씀이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바로 그의 삶과 교훈을 듣고 그대로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의 밥
‘나는 생명의 밥이다’ 세 끼 밥 같은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밥은 필수음식입니다. 밥 먹는 것을 보고 누가 사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됩니다. 그런가 하면 밥은 모든 사람이 먹는 음식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기를 잘 못 먹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입맛과 식성이 다 다르지만 밥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고 식성에 장애가 없이 다 먹는 양식이 밥입니다.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밥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밥입니다. 예수님은 밥을 먹는 사람을 가려서 ‘너는 내 밥을 못 먹는다’ 그렇게 하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누구든지’라는 말씀을 주님은 자주 사용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고 하셨습니다.

살아있는 밥
지난번 캄보디아에 갔을 때 배가 아파서 고생하고 돌아왔습니다. 아마 상한 음식이나 물을 잘 못 먹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상한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즉시 탈이 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살아 있는 밥이 아닙니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까지 하는 약입니다. 인간의 고통과 인간의 역경과 좌절을 극복하게 하는 능력의 밥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어야 되는 것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하는 것도 살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58절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것이 웬 밥입니까?

우리 어머니들은 우리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식새끼들 입에 따끈따끈한 밥 들어가는 게 제일 행복이야!”하십니다. 우리 주님의 기쁨은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밥을 먹을 때 일 것입니다.

요 6:51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의 두 단어의 문법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먹으면”(favgh/:화게)은 ‘과거형 능통태 가정법 단수’로 일회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먹으면’을 문법을 포함하여 번역한다면 “만일 단 한번이라도 먹는다면”이 됩니다. 우리가 세례를 한번만 받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는 성찬 예식은 이것을 기억하기 위한 예식입니다.
그리고 또 한 단어가 있습니다. “나의 줄 떡”(ejgw; dwvsw hJ savrx)의 “나”(ejgw:에고)는 ‘미래 능동태 직설법 1인칭 단수’입니다. 이것을 문법을 포함하여 번역한다면 “나는 앞으로 단 한번에”가 됩니다. 미래형을 사용하셨고 또 ‘혼자서 단 한번에’ 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염두 해 두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들은 너무 많이 밥을 퍼 주셔서 어떤 때는 먹기 싫어서 “내가 풀게!” 하면서 밥통으로 가면 어머니는 쏜살같이 오셔서 “엄마가 풀게 기다려라!” 하며 주걱을 빼앗아 가십니다. “또 많이 줄 거면서”하고 투덜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우연히 밥솥을 열었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밥솥 한쪽에 어머니가 드실 찬밥 덩어리가 동그마니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혹시 우리가 보거나 먹을까 염려하셨던 어머님입니다.

우리말에 속썩이는 자식에게 부모가 하는 말이 “날 잡아 먹어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만 하는 죄인입니다. 주님은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