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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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08. 잃은 양) / 본문 : 눅 15:1-7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가까이 나아 오니”(엥기존테스) 접근하다는 뜻의 분사형입니다. 이는 이들이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원망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비유 또한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원망하여”(디아공귀조)는 와글와글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이들을 보고 그들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세리는 로마의 명령에 의해서 세금을 징수해야하고 거두어 들여야 하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는 반민족적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인물입니다. 또한 죄인이라고 한 사람들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정확히 본문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하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통칭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바리새인도 아니고 서기관들도 아닌 하층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시에 비유로 하신 말씀은 당시 적대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1. 잃은 것을 찾지 아니하느냐?

제가 서울에 올라와 잠시 옷 만드는 공장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열심히 밤낮으로 일해서 번 월급을 당시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마땅히 둘 곳이 없어서 가방 맨 밑바닥의 종이를 들추고 그곳에 숨겼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없어졌습니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속이 상하는지 몇 칠을 잠을 못 잘 정도였습니다. 무엇을 잃어버려본 사람만이 잃어버린 자의 마음을 압니다. 베트남에서 디카 날치기 당하고 몇 칠을 중고 카메라 상점에 나가 찾아보았습니다.

본문 4절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이니까 대답해 보세요. 여러분에게 양이 100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1마리가 길을 잃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99마리는 나와 함께 목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99마리와 함께 있겠습니까? 그래도 목자라면 찾아 나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은 누구입니까?
99마리의 양은 길 잃은 이 양에게 엄청난 비난을 쏟아 붇고있습니다. 한마디로 말썽 장이 양입니다. 고집이 쎈 양입니다. 99마리가 생각하기를 “그놈은 이 참에 아예 죽어야 돼? 우리 목자만 고생시키고 우리를 편안히 쉬지 못하게 하고 있어?”라고 생각한다면 99마리는 목자와 마음을 같이하지 않는 양입니다. 그리고 만일 목자가 지금 한 마리 양이 없어졌는데 99마리와 함께 편안히 먹고 쉬면서 세미나를 하면서 역시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은 효율적인 측면에서 할 일이 못된다고 하면서 있으면 여러분은 어느 목자를 따라가겠습니까? 그래 역시 우리 목자가 효율적이고 경비를 낭비하지 않고 우리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목자야 하고 즐거워 할 수 있겠습니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 앞에서 내가 곧 잃은 양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는 엄청난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사야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고 했습니다.

무엇을 잃어 버렸나?
잃어버린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잃어버린다는 것은 마음을 찢어내는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 민족은 잃어버린 아픔이 큰 민족 중에 하나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역사를 가졌고, 자기의 이름을 잃어버린 수치도 당하였었으며, 교회도 잃어버리는 아픔도 당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을 더 던져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잃어 버리셨나요?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도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7년 동안 공들여 완성하고 봉헌식 때 하나님께 하는 말입니다.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사람이 아무리 공들여 지은 건축물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기에 적합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헌금하고 봉사하고 헌신했다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은 온전히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에 남는 책 가운데 “안네의 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16살 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쓴 일기입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대받고 핍박받던 나치 정권 아래서 히틀러 군대에 의해 모진 시련과 고난을 받고 있던 때의 일기입니다. 친구들, 친척들, 부모 형제 모두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고 결국은 가스실에서 하나씩 죽어갑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나날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모든 가족들이 다 죽고 그의 아버지만이 살아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안네의 일기 마지막에는 이런 말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어…”

16살 난 어린 소녀의 가슴에는 펼쳐보지 못한 무지개 빛 꿈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나날이 공포와 두려움이고 절망과 좌절일지라도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세상을 보고 내일을 보았던 것입니다. 유태인의 역사는 고난으로 얼룩진 역사이며 핍박과 눈물의 세월로 쓰여진 역사입니다. 그들이 즐겨 쓰는 말이 있습니다.
“Say yes to life, in spite of everything(삶에 대하여 어떤 경우라도 “네”라고 말씀하십시오)”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고난의 폭풍이 밀려오고 환난의 바람이 불고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하여 어떤 경우라도 “네”하며 어둠의 터널을 통과했던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2장 4절로 5절에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주셨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뜨거운 열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2.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우리가 만일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아니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결핍이요, 열정이 식었거나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3: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며 그것을 찾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무슨 일이든 쉽게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서은이를 좋아합니다. 한번 붙인 것은 절대 안뗘냅니다. 서은이에게 쉽게 마음을 얻는 것도 쉽지 않지만, 또한 쉽게 버리는 그런 스타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좋아하는 스타일입니다.
오늘의 본문 이후에 두 개의 비유가 더 소개되어 있습니다. ‘잃은 은전’,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들의 특징은 모두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강조하는 것은 반드시 찾아야 될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역시 잃어버린 당신의 백성을 찾기 위해서 입니다(눅 19:10).

무엇을 찾았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 중에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 말미암아 견디다 못한 블레셋 사람들이 이를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때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궤를 다시 찾은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찾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서 “네”라는 말, “아멘”이라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네”하고 “아멘”해야 한다고 하는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3. 찾은 자의 즐거움

본문 5절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의 “즐거워”(카이로)는 단순한 만족의 기쁨을 넘어 넘쳐나는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많은 고생과 비용이 들어갔다고 해도 잃은 양의 가치는 그런 것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찾은 자의 기쁨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경제적 손익을 계산한다면 벗과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를 여는 것 보다 아예 잃은 양을 찾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가치를,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마 16:26).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제가 설교한다는 생각보다는 여러분 스스로가 찾고 생각하고 성령께서 여러분의 잃은 것, 잊은 것을 찾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아프간 피납 사태를 통해서 많은 것을 잃었고 또 찾았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유럽의 선교는 1000년을 넘게 한 것입니다. 미국도 1885년에 우리나라에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가 들어오고 적어도 미국 선교의 역사도 200여 년은 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근대선교는 20여 년 정도 되었습니다. 아직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 또한 예수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잃은 양을 찾으러 오셨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잃은 양은 남이 아닙니다. 우리 식구요 나 자신입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섰다고 불평하는 양이 아니라 목자를 돕고 기도하는 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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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07. 길) / 본문 : 눅 1:79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길’이라는 말은 ‘길다’에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길은 긴 것입니다. 싸움에 지친 모든 하나님의 군사들에게는 격려의 사역이 필요합니다. 때때로 우리 모두는 긴 여행길에 지쳐서 5분마다 한 번씩 “아빠, 아직 멀었어요?”라고 물어보는 어린 자녀들과 같습니다. 인생은 여행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기나긴 여행을 막 시작한 것 같은 때에도 삶을 힘들게 만드는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내가 필요한 싸움입니다.
중용은 “길은 잠깐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길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길로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내가 길이요.”(요 14:6)라고 말씀하심으로 인생의 주인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찬송가 중에도 ‘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가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갈길을 밝히 보이시니’(313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434장),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429장), ‘내 본향 가는 길’(292장), ‘나는 갈길 모르니’(421장), ‘주와 같이 길가는 것’(456장) 등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살펴보면 갈릴리로 가신 길은 책임(Responsibility)의 길이요, 여리고로 가신 길은 생명의 길이요, 갈보리로 가신 길은 희생(Sacrifice)의 길이요, 엠마오로 가신 길은 확신(certainly)의 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바다 위를 이동하는 거대한 화물선들은 그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진행합니다.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는 화물선들이 거대한 태평양도 건너고 대서양도 건너는 것입니다. 배가 가장 위험할 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방향을 잃고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입니다. 배가 바다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엔진이 고장났다든지 아니면 배 안에 있는 구성원들 사이에 큰 난리가 일어났다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이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표류하면 결국 큰 파도를 만나 침몰하거나 아니면 암초에 부딪쳐서 침몰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맨 남단에 희망 봉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언제나 파도가 심해서 배가 많이 침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이름을 희망 봉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곳만 통과하면 파도가 잠잠해져 다시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의 혼란과 어려움의 파도가 강하고 크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능히 이길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다를 갈라서 세웠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지금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신앙의 엔진을 꺼 버리면 안 됩니다. 여기서 신앙의 엔진을 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끝까지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나아갈 때 이 세상의 어떤 시험도 이기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1. 길을 찾으라
우리가 성경을 보는 이유와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길을 찾기 위함입니다. 인생은 길을 찾아야 행복합니다. 길이 보이지 않으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열심히 산 것은 같은데 마냥 그 자리입니다. 서 있는 차와 같고 고인 물과 같은 것입니다. 인생은 길이기 때문에 목적이 있어야 하고 그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거역했습니다. “대저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케 하여”(렘 18:15)
“도와 주고 싶어도 도울 길이 없지 않니?” 이 말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예전부터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어디에 함정이 있는지 알아서 자녀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자녀는 자기 고집만 부릴 때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탄식은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의사들이 환자에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Free-will)를 주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강요나 강제로 하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우리가 길을 찾는 것은 오직 예수께 순종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길이 찾아집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2. 우리가 가야할 길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1) 허리를 동이는 길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나 2:1)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엡 6:14)

2) 정직한 길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신 22:1, 4)
“19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나으니라 20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21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잠 8:19-21)

3) 용서의 길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마 5:25)

4) 전도의 길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마 22:9-10)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마 18:12-13)

3.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
미가서 2장 13절을 보십니다.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그러나 이 길로 갈 때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평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과 같은 본문을 시편 121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2절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산이 아니라 하나님(Not mountain’s but God)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힘과 능력은 마지막 때에 만국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2)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잘 생기고 똑똑한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대로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우등생이었고 명문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다 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뜻밖의 불행이 그 가족에게 찾아왔습니다. 첫 휴가를 나온 아들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앞날이 창창하던 아들이 허망하게 쓰러져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노라니 아버지도 그만 삶의 의욕을 잃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그 아버지에게 요한복음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아버지는 아들의 귓전에 매일매일 이 말씀을 큰 소리로 들려주었습니다. 그 날도 아들의 귀에다 대고 말씀을 외쳤는데 말씀이 끝났을 때 아들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습니다. “아-멘”이라고 아들이 누운 지 87일 만에 깨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 김상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아프간 인질 피납사태가 발생한지 오늘로 벌써 9일째가 됩니다. 현재까지의 상황은 1명이 사망하고 22명이 생존해 있는 상황입니다. 네티즌들의 반응을 보면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왜 갔냐”, “너희들 맘대로 갔으니 너희들이 스스로 책임져라”는 등의 정서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특히 다른 종교를 믿거나 기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합니다. 외국의 일부 언론들도 한국의 지나친 선교경쟁이 낳은 결과라는 비판의 소리도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위험한 지역과 무모한 시도를 하는 것은 잘못일 것입니다. 제가 왜 컴퓨터선교회를 하고있습니까? 바로 바른 선교를 하기 위해서 정보를 제공하고 갈길을 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건의 진실을 말해야합니다. 그들은 의료 봉사단원들이었고 무고하게 붙잡혀있는 것입니다. 탈레반은 하루속히 풀어주어야 합니다. 조건과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앞으로는 더 신중하게 여행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길이란 우리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다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목사를 보십시오. 그는 백령도 근처의 작은 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 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주 일 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대동강변에 좌초하게된 셔먼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되는데. 한편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 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그리고 붙잡혀 나와 곧바로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아마 당시의 영국 사람들이 “무엇 하러 그 위험한 곳에 갔냐?”라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위험을 무릎 쓰고 항해를 계속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영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울러 복음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혜롭게 선교 해야합니다. 그리고 선교의 항해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를 죽이는 자들을 무서워하지 말고 우리의 영을 심판하시는 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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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06.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 본문 : 요 15:18-20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따라합시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원래 “나는 무슬림으로 태어났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던 터키의 네자티 아이든(Nezati aydin, 35세)의 말입니다.
지난 2007년 4월 18일(수) 13시경 터키 중동부에 있는 말라트야 도시의 기독교출판사를 이슬람 무장세력 5명이 기습하여 독일 선교사 1명과 현지 기독교인 2명을 목잘라 죽인 끔찍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이 때 죽은 현지인 가운데 네자티 아이든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난 후에 그의 형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던 내용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난 환경은 어떠했든지 간에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교학에 ‘상황화’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어쩌면 선교는 이 용어와 같이 씨름하면서 들어가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집사람이 요리를 조금 하지 않습니까? 지난번 감자를 얇게 쓸어 빈대떡을 부쳤습니다. 어떤 요리 프로그램을 보니 나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리 연구하는 분들이 현대인의 욕구에 맞는 음식을 개발하려다보니 자꾸 새로운 방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감자 부침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지요. 외모의 모양과 방법은 변화되지만 원래의 재료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상황화라는 말도 그렇게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한국문화의 성격을 대표적으로 “비빔밥 문화”라고 했습니다. 한국인의 정서 속에는 비빔밥에 관하여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섞이든, 무엇이 들어가고 빠지든 비빔밥은 비빔밥입니다. 이런 한국인의 흡수력은 가히 세계를 놀라게 합니다. 일 년도 사용하지 않고 휴대폰을 신 모델로 바꾸는 한국인의 소비 형태가 관련 분야의 국가 경쟁력이라고 하는 분석기사를 내놓는 경제전문기관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과 교회를 들여다 볼 때 이러한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게 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자기는 별로 갈 생각이 없었는데 그냥 따라 간다는 것이지요. 좋게 보면 비빔밥 문화이지만 자기 주관이 없는 행동입니다. 남이 다 하니까 우리 아이도 해야되고 다른 교회가 하니까 우리도 해야하고 하는 식의 방법, 프로그램은 그다지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얼마 안되어 유명무실해 질 수 있습니다. 시작할 때 오랜 연구와 기도 끝에 마련한 것이 아니라 남이 하니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철학 없이 시작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이 다 가는 교회로, 남이 다 하는 방법대로가 아닙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남이 하는 것 따라하는 것 싫어합니다. 주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가 노력해서 우리의 맛을 내야합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고 남보다 더 노력을 해야할 것입니다. 그래도 해야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세상 사람 따라하는 것은 쉬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이 없습니다.

본문 18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이 핍박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 전적으로 주님 자신 때문에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사단은 주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 그것이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에 관심이 없는 한 사단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원문의 “미워한”(memivshken:메미세켄)은 완료형 능동태로 나옵니다. 이 뜻은 “이미 미워했고, 지금도 여전히 미워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미움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벧전 5:8).

본문 19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셨는데 본문에 “세상”이라는 단어가 무려 5번이나 나옵니다. 요한은 중요한 단어를 반복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멘”이라는 단어도 요한복음에서만 “아멘, 아멘”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바로 자신의 논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 것입니다. 처음 두 번은 ‘소속’, ‘근본’을 세 번째 것은 ‘분리’를 뜻합니다. 이 가정법은 “제자들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움을 받는 이유를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는 이유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하면 미움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비로소 한국인이 되었다고 느낄 때가 언젠가?’라는 질문에 대한 한 가지 재미있는 대답이 있습니다. ‘공연히 일본이 미워질 때’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본과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느끼고, 한국인으로서의 동질성과 소속감을 가지게 됩니다. ‘비로소 성도가 되었다고 느낄 때가 언젠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셔야합니다. 사단이 내게 도전해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진정한 성도가 아닌지 모릅니다.

욥은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욥 19:22) 고 했습니다.
사람은 목숨을 아무렇게나 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위해서 제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었을 때만 목숨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67년에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하고 150년에 저스틴이 156년에 폴리갑이 순교한 이후 203년에 북 아프리카의 퍼피튜아(Perpetua)라는 여인이 순교했습니다. 기독교 박해가 널리 퍼진 가운데 북아프리카에선 박해가 더욱 심한 상황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죽은 영혼을 섬기는 애굽의 세라피스교 신자였던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는 주후 202년에 유대교나 기독교로의 개종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로마령인 북 아프리카의 대도시 카르타고에서는 기독교의 큰 부흥이 일어나 관리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이들은 황제의 칙령을 개종자뿐 아니라 개종을 시키거나 가르치는 자에게까지 확대하여 시행하였습니다. 황제의 칙령이 시행되는 와중에 비비아 퍼피튜아와 그녀의 여종 펠리시타스는 새투러스라는 교사가 있는 카르타고의 교리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퍼피튜아는 어린 자녀가 있었고, 펠리시타스는 임신 8개월이었습니다. 그들은 곧 형사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존경받는 귀족이었던 퍼피튜아의 아버지는 그녀가 신앙을 부인하도록 여러 가지로 달랬습니다. 그녀는 결코 동요하지 않았지만 어린 자녀를 보고 근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그녀는 어린 자녀와 함께 있도록 허락을 받은 후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녀의 처형 날이 다가오면서 가족들이 다시 그녀를 회유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새투러스와 퍼피튜아, 펠리시타스와 세 명의 남자들은 관중들이 있는 투기장에서 곰, 표범, 멧돼지 등의 공격을 받아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퍼피튜아와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의 펠리시타스는 옷이 벗겨진 채 미친 암소가 있는 투기장에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 광경은 잔인한 관중들조차 “그만 멈춰!”라고 소리칠 정도로 참혹하였습니다.
그들이 투기장에서의 일차 놀림감이 된 후 사형집행인에게 끌려가는 가운데 퍼피튜아는 슬픔에 잠겨있는 기독교인들을 향해 “형제, 자매들에게 전해주세요. 믿음 안에 굳게 서고 서로 사랑하며 우리가 당한 환난이 믿음의 거침돌이 되지 않게 하라고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가 당시의 그리스도인에게만 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한 소리입니다. 순교자의 목소리를 들어야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 이기적이다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솔직히 별 어려움도 아닌데 목사가 그것을 잘 달래 주어야 좋은 목회이고, 설교 또한 적절하게 재미있게 웃기고 축복 받으라고 하면 좋아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나약한 교회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내 자신의 단순한 즐거움이나 편안한 안주만을 위해서 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인 한 분이 늘 수고하시는 담임 목사님께 식사 대접하겠다고 목사님을 근사한 횟집으로 초대했답니다. 교인이 목사님에게 말하기를 목사님 무얼 드시겠어요? 그 말을 들으신 목사님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즉석에서 하신 말씀 “당 회”만 빼고 아무거나 다 시키십시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는데 마가복음의 방문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가신 마지막 행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요 2:13-20)에 보면 예수님 사역 초기에 예루살렘에 방문하십니다. 이 때도 비둘기 팔고 환전해주고 성전 안에서 장사하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 이 성전은 허물어질 것이고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믿지 못하겠다며 자신들이 46년 동안 짓고있음을 말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에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처음에 방문하신 때보다 지금이 더 강경하신 행동을 보이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이러한 말씀을 주실 시간도 없기 때문입니다.

막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My house wi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NIV) 이 번역이 마음에 듭니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내 집은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라고 칭함을 받으리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내 자신만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민이 와서 기도하는 집이기도 하지만 만민을 위해서 기도해야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세속화 될 때 이 세상은 빛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스스로 멸망하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 결코 세상에 속한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의 사명이 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외쳤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디모데후서 1장 8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린 자들 아닙니까? 명예도 버리고 유익 된 물질도 다 버리고 오로지 주를 위해서 충성하겠다고 나섰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난들은 아름다운 고난이에요. 디모데후서 2장 3절을 한 번 보십시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합니다. 고난의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이기 때문입니다. 시시한 군사, 별 볼일 없는 군사는 사탄도 우습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 그래서 마귀가 다 겁내는 게 아니고 좋은 군사만을 겁내는 겁니다. 시시한 군사는요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방위 받을 때 제일 창피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하철 타고 가는데 옆에 해병대 군인이 서 있을 때 제일 창피합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가지요.
야고보서 5장 13절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 지니라” 그랬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훈련되어 주님과 함께 일하다 그리스도인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5. 예수님의 비유(23)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본문 : 마 25:14-30(23)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저는 어려서부터 이상한 아이였습니다. 어르신들이 볼 때 이상한 행동을 아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저희 집은 작은 오두막집이었는데 뒤에는 다른 집이 있고 깍아진 언덕이 있었습니다. 집 앞에도 내리막이 있고 구렁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것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하여 주변의 돌들을 모아 쌓았습니다. 그러니까 집에만 가면 돌을 모아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새벽에 나가 밤새 떨어진 밤을 주워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아무도 모르게 구덩이를 파 놓고 그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모으기를 잘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방법은 다르지만 컴퓨터에다 선교정보를 모으고, 말씀을 정리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저의 이런 면을 보면 부모님이 자녀를 잘 관찰하면 어려서부터 달란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이 묻어 두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 듯 오늘 본문이 이해가 안됩니다. 어쩌면 저에게 맡기셨다고 해도 묻어두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많은 내용을 공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 글이 조금 부족한 것이라고 해도 공유함으로 유익하다면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어 많은 글들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하신 이 비유가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혼자 가지고 있다가 하드디스크 깨지고, 분실하고 나면 나 자신도 자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주는 것이 남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달란트(talent)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지만 본문의 달란트는 신약시대의 화폐단위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나 미국의 ‘$’와 같은 말입니다.

주인이 집을 잠시 떠나 외국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종들에게는 단순히 집을 잘 지키라는 명령 외에 여덟 달란트를 세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주인을 종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에게 합당한 분량을 준 것입니다. 종들을 단순히 자신의 사업에 이용하려 한 것이 아니라, 사업의 동업자로 생각한 것입니다. 주인은 그만큼 종들을 믿고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두 번째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세 번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15절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따라”라는 말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적절한 이익배당을 약속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일종의 종들은 동업을 통한 이익배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얼마 후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은 장사하여 배로 남겼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배로 남겼는지 흔히 오늘날로 말하면 그 비법을 더 설명해 주셔야 하는데 그냥 배로 남겼다고 만 했으니 더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말씀을 해 주고 계십니다.

달란트를 활용한 두 사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모습을 다시 봅시다.
16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17절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바로 가서”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두 종들은 자신이 맡은 소유에 대해서 즉시 또는 재빨리 그 소유를 사용하기 위해서 어떤 일에 착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기에 맡겨진 사명과 일에 대해서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지체 없이 그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마 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중에 천천히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2:8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이 다음에 만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즉시, 지금, 빨리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다음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즉시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에게 주인은 26절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하셨는데 “게으른”(ojknhrev:오크네오)은 “지체하다, 머묻거리다, 망설이다”라는 뜻입니다. 주인에게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또 한가지는 “그것으로 … 남겼으되”입니다.
주인이 준 달란트로 남긴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나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주고 간 것입니다. 종은 남길 수는 있지만 그것을 창조적으로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잘못된 사람들의 착각은 그것이 자신의 것인 줄 안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왜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가 어렵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선 오늘 이익을 남긴 두 사람의 경우 부자의 경우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20절, 22절에 “주여 내게 … 주셨는데”라고 말합니다. 소유의 출처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겼지만 감긴 것까지도 주인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욥 1:21) 하면서 찬양했습니다.

우리는 달란트의 비유에 대해서 이윤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윤 그 자체에 있지 않음을 아셔야 합니다.
21절과 23절은 본문이 일치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의 관심사가 이윤을 많이 남기거나 적게 남기는데 있지 않고 주어진 여건 하에서 성실히 노력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는 주님의 이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eu’(유)는 “well, 좋은”을 말합니다. 헬라어의 이 부사는 종의 지난날에 대한 주인의 아낌없는 인정과 신뢰를 보내는 말입니다.
이어서 주인은 “착하고”(ajgaqov”:아가도스)라고 칭찬하십니다. 이 단어는 마가복음 10장 17-18절에서 예수께서 길 가 실 때에 한 사람이 달려와 예수님께 ‘선한 선생이여’라고 말합니다. 이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고 하셨습니다. 이런 단어가 두 종들에게 주인이 친히 사용하셨다는 것은 대단한 칭찬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충성된”(pistov”:피스티스)는 “충실한, 믿을만한, 의지가 되는, 확신하는”의 뜻입니다. 이들이 왜 충성된 자들인지는 “작은 일에”있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자에 비해서 배 이상을 받았습니다. 사실 엄청나게 많은 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작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에게 주신 것, 그 모든 것은 우리의 기준으로 크다, 작다 이지 주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충성한 종에가 두 가지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입니다. 이 부분은 현세적이라기 보다는 내세적인 것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회계 이후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것”은 단순히 물질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많은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주인과 종의 사이에 두터운 신뢰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의 “즐거움”(carav:카라)는 열처녀의 비유에서와 같이 신랑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이 단어는 ‘은은한 기쁨’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큰 기쁨으로 마 2:10에서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내면적인기쁨 샘솟는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달란트를 묻어둔 한 사람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장사하지 않고 그냥 땅속에 묻어두었습니다. 이 종이 이렇게 한 것은 단순히 장사하여 손해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 종이 주인에게 한 말은 표면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진짜 이 종이 장사를 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종들이 자신보다 많은 달란트를 받은 것에 대해서 기분이 상했을 수 있습니다. 주인에 대한 신뢰가 없거나 약한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입니다. 15절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나누어 주신 것인데 이것이 불만스러운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에게 맡겨진 한 달란트는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과 두 달란트를 맡은 종에 비해서 한 달란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장사를 포기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24절에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굳은”(sklhrov”:스클레로스)은 “마른, 사나운, 거친”이라는 뜻입니다. 박정할 뿐만 아니라 포악하고 거칠다라는 말입니다. 새번역성경에서는 “무서운 분”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또한 이 단어는 ‘므나의 비유’(눅 19:11-27)의 21절에서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의 “엄한 사람”(aujsthro;”:아우스테로스)보다 더 강경한 단어입니다. 종은 자신의 주인을 악한 인격자로 몰아 세우면서 자신의 불성실과 직무 유기에 대한 변명을 찾으려고 합니다. 죄인의 변명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돌아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라고 말함으로 주인을 아주 나쁜 사람으로 몰고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잘못을 주인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종의 변명에 대해서 주인은 27절에 “취리하는 자들”을 왜 활용하지 않았냐고 하십니다. 취리하는 자들이란 오늘날로 말하면 은행과도 같은 기능을 하는 사람입니다. 조금만 생각이 있었고, 열심히 있었다면 최소한 그렇게 무의미하게 달란트를 두고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이 종은 도망가거나 오지 않을 수는 없었나 생각하지만 주인이 돌아오면 모두가 회계하러 나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예외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

하나님의 일이란 작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 그 자체가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구약의 성전문지기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이 오벧에돔 집안 사람입니다. 이 집안 사람들이 처음에 다윗이 법궤를 옮겨가고자 했을 때 대충 마차에 싫고 가다가 떨어지는 것을 웃사가 만져서 죽었습니다(삼하 6:7). 그런데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러나 오벧에돔 집사람들은 이 법궤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습니다(삼하 6:10, 대상 13:13). 하나님을 무섭게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극진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윗 성에 문지기 역할을 합니다(대상 15:18, 24, 25). 이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기쁨이었는지 그들은 진심으로 성을, 법궤를 지켰던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에 나오는 사람은 세 사람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말고 다음에 나오는 사람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의 들러리 같아 보입니다. 그냥 한 사람 더 소개하나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이 사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보다는 배를 많이 받았지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자신보다 무려 배 이상의 다섯 달란트는 더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떠한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이 행동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 역시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달란트 비유는 전체적으로 예수님 자신의 재림에 관한 교훈의 구조 안에 있습니다. 열 처녀가 등불을 준비하며 주인을 기다려야 함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은사를 사용하며 주님을 기다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단 하나뿐인 추천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4. 단 하나뿐인 추천서) / 본문 : 요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 12:47)

지난주에는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교재로 만드는데 추천서가 필요하다고 하여 추천서를 받으려고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추천서는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마음 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짜 추천서를 예수님께 받았으면 하는 마음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추천서를 받았지만 예수님께 추천서를 받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지막에 예수님의 추천서가 필요합니다. 이 추천서는 어떤 글에 대한 추천서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총 결산의 추천서입니다. 이 추천서가 ‘양가집’이 되지 마시고 ‘우수수’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중국의 노자는 ‘道可道면 非常道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도’가 ‘도’로서 정의되면 더 이상 ‘도’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도’에 대해서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노자는 ‘물’로서 ‘도’를 설명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경은 단 한차례도 꾸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웅담이 아닙니다. 또한 한 개인의 우상화를 위해서 기록된 책도 아닙니다. 구약의 그 어떤 인물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를 말할 뿐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사람들로부터 모욕당한 것,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수치스러운 장면들이 다 공개되었습니다. 성경은 분명 예수를 영웅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우리에게 구원 주로 보내신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추천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천사들을 보낼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천사를 보내셨고, 롯을 구출할 때도, 욥에게 그의 위로하실 때에도, 여호수아에게 작전을 지시하실 때에도, 삼손을 보내실 때도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애굽에서 유대인을 이끌어 내시기 위해서는 모세를 불렀고, 미디안의 손으로부터 구원하고자 기드온 불렀으며, 블레셋을 쳐부수기 위해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제국를 건설하거나 막강한 왕위를 세우거나 무수한 군중의 경건한 예배를 받으시면서 어떤 광대한 영토의 국민을 통치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가난과 외로움, 잠 못 이루는 밤들과 괴로운 날들, 수난과 죽음으로 보내셨습니다.
어떤 분은 마치 유대인들처럼 자신만을 위한 강력한 왕의 메시야를 꿈꾸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치 강력한 독재자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 7:25)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추천서를 우리는 받았습니다. 본문의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 12:47)는 구원 주로서의 하나님의 추천자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가 러시아 소치로 결정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강원도 평창을 4펴차로 따돌렸습니다. 여러 가지 패인에 대한 분석이 있지만 진짜 패인이 어디 있었을 까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마지막 프리젠테이션에서 평창이 밀렸다는 생각입니다. 푸틴 대통령은 국제적으로 러시아는 공식 석상에서 영어나 다른 나라말을 사용하지 않고 러시아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어를 사용했고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스페인어도 함께 사용하여 각국의 IOC의원들을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의사 선생님, 제 남편이 다 죽어갑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영국의 한 시골 병원에 초라한 모습의 부인이 찾아와 애원했습니다. 의사는 얼른 왕진 가방을 챙겨 들었습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의사 선생님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는 돈이 한푼도 없습니다만…” “사람부터 살려야지요.” 의사는 더 이상 군말 없이 부인을 따라갔습니다. 초라하게 누워있는 남자가 보였습니다. 진찰을 다 마친 의사는 안심하라고 하면서 작은 가방하나를 두고 갔습니다. 이 가방을 열어 적힌 대로 처방하면 됩니다. 부인은 의사가 돌아간 뒤 가방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약대신 돈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쪽지에는 “처방전- 당신 남편은 극도의 영양실조 상태입니다. 이 돈으로 무엇이든 먹고 싶은 음식을 사 주십시오.” 이 일화는 영국의 골드 스미스라는 의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원의 인내와 희생

예수께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이런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제자들의 반응은 마가복음 10:26-27절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께 있음을 못박아 두신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이 구원에 대해서 이기적인 욕심에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희생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결코 희생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막 8:35)

켄터키의 두 광부가 암석을 폭파하기 위해 선발되었습니다. 그들은 도화선과 나무토막 모양의 다이나마이트를 갖고 우물 속과 같은 굴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도화선을 점화할 때, 콘베이어 두레박이 그 두 사람을 광산으로부터 운반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다이나마이트가 준비되고 도화선에 불이 붙여졌습니다. 두 사람은 준비된 콘베어에 올라탔습니다. 어떤 잘못으로 인해 꼭대기에는 단 한 사람만 남아있었습니다. 그 한 사람이 두 사람을 한꺼번에 들어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 광부 중 그리스도인인 한 사람이 재빨리 그 두레박의 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신호로 그 로프를 잡아 당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아닌 그 동료는 위로 올라갔습니다. 뒤에 남아 있는 그 사람은 “나는 그리스도인 일세, 만일 어떤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 해도 나는 괜찮네”라고 그에게 외쳤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레박이 밑으로 내려오기 전에 폭발했습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나 주께서 대답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굽어보시기만 하시나이다”(욥 30:20) 욥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오늘날에도 욥과 같이 하나님이 즉시 나타나셔서 도와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일으켜 주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충분히 손을 뻗어 그 아이를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도록 놔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아이가 죽을 만큼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생각하십시오.

K교회에 생긴 일입니다. 목사님이 갑자가 다른 교회로 떠나셨습니다. 이 교회는 500여명의 성도가 있는 교회인데 갑자기 목사가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민주적인 방법에 의하여 장로님들이 소집되고 일명 목사 청빙위원회가 생겼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목사를 모시고 올까를 고민하던 장로님들은 여러 가지 방안을 종합하여 일단 청빙 공고를 내고 목사 테스트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30분간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양력을 보고 투표하는 것입니다. 물론 문제도 많지만 장로님들의 생각은 대체로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 목사님을 모시기로 최종 결정이 났는데 미국에서 3000여명까지 부흥시켰던 경력이 있는 목사님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을 모시게 된 주된 결정도 아마 그것이었던 같습니다. 장로님들이나 성도들은 꿈에 부풀었습니다. 그 분을 초빙하면 교회가 3000여명 이상으로 부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습니다. 이런 기대와 교회의 부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새로 모시게 되는 목사님과 자신의 신앙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고민하는 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모습으로 목사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외적 성장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경영자를 모시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마 27:49),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막 15:30-31) 이 소리가 얼마나 가증한 소리입니까? 지금 자신을 생각할 때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추천합시다.

제가 살던 시골집 뒤에 침 잘 놓는 명의로 소문난 할아버지가 살고 계셨습니다. 환자들이 새벽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 소식을 모르는 분들이 한동안 계속해서 왔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약이나 자신의 경험으로 어떤 의원에게 고침을 받고 효과가 있었다면 같은 병을 앓는 사람에게 그 방법이나 의원을 추천합니다. 바울은 그의 인생을 치료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것을 전하는데 남은 인생을 사용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그분이 세상에 오신 목적 그리고 그가 받은 은혜를 전합니다. 바울이 전한 편지들은 위대한 추천서입니다. 저의 이 설교도 여러분에게 구원의 추천서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께 추천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오라’는 말이 무려 642회나 나옵니다. 하나님은 문을 열어 놓으시고 간절히 들어오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평양 부흥운동의 주역가운데 한 사람인 블레어(Blair)는 한국선교사역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으로 사경회를 꼽았습니다. 사경회는 성경공부와 기도를 집중적으로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1907년 1월 시작된 사경회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말씀과 기도로 이어져 성령의 도가니가 된 상태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요한복음 3장 34절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의 말씀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이 이 땅에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깨어나야 합니다. 못 살았을 그 때 그 시절에만 성령이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현재도 여전히 성령은 필요합니다. 우리가운데 역사 하셔야 합니다. 세상의 것으로만 살아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써 주신 추천서는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골고다 골짜기의 피로서 써 주신 것입니다. 이를 가볍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바쳐서 써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 더 확인해 봅시다. 민수기 23장 19절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아멘-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3.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 본문 : 마 11: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지난 25일 캄보디아 여객기(AN-24)가 추락해 한국인 탑승객 16명을 비롯해 모두 22명이 사망하는 가슴 아픈 일이 발생했습니다. 처음에는 해당여객기가 오래된 기종으로 러시아에서 생산되었었는데 지금은 단종 되어 정비불량이거나 기체 노후로 추락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관제탑과의 교신 내용을 분석한 결과 조종사의 과실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공항 관제탑은 사고 여객기가 실종되기 5분전에 “고도가 너무 낮다”고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도 조종사는 자기가 이 지역을 잘 안다며 비행을 계속하고 5분만에 레이더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착륙이 불과 5분 남았었습니다. 공항 진입항로 앞 50여 킬로미터 지점에 해발 천80미터의 보꼬산이 가로놓여 있었는데 당시 사고기의 고도는 600미터에 불과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조종사는 관제탑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안일하게 대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결과 자신뿐만 아니라 22명의 모두 사망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도가 너무 낮다고, 그런데 우리들은 그 짧은 경험과 지식으로 괜찮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젊은 날에 구약성경을 보면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피도 눈물도 없는 분이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 죽는 것이 너무나 많이 나올 뿐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나 생각하시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그 의문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생명을 아무렇게나 생각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하러 오셨고 천하보다도 우리를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만 아니라면 사단을 당장 그 앞에서 무릎 꿇게 하거나 죽여버릴 수도 있으셨을 텐데 우리 때문에 그 모진 고통과 조롱을 받으시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지난주에 사진정리 작업을 했습니다. 제가 찍은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기록사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진들은 선교사들이 찍어준 것이고 그 다음에 일제에 의해서 사진이 찍힙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6.25 한국전쟁사진이 찍힙니다. 그리고 이후 60-70년대 가난했던 시절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진의 역사입니다. 저는 이 사진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은 조상들에게 빚진 사람들이구나! 여러분! 아무리 힘들어도 6.25때는 아닙니다. 60-70년대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음 아픈 것을 장이 아픈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마음이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고 합니다. 이 말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우리말에 ‘목이 메다’는 말이 있습니다. 눈물 젖은 주먹밥을 먹을 때 ‘목이 메지요.’ 그러나 죽은 아내 남편, 아이들을 생각하니 목이 메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조상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아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구원해 주기 위해서 던져주는 줄을 잡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생명줄을 잡아라’고 하실 때 이 줄을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말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는 4복음서와 요한계시록에 각각 6번씩 나옵니다. 복음서에서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성령의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예상시험문제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의논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정보가 있는 것처럼 몇 명이 모여서 의논할 때 어쩐지 내가 빠지면 안될 것 같아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다 아주 파고들어서 고개를 맞댑니다.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소음과 각종 소리들 때문에 귀가 먹지는 않았나 의심스럽습니다. 먹이사슬이 형성되어 있는 동물과 같은 경우 소리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수단입니다. 이제 쓸데없는 소리 듣지 말고 생명의 말씀, 우리의 영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은 빈부 귀천을 가리지 않으며 누구나 들을 수 있습니다. 또 들어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 48:14) 하고 외칩니다. 그리고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지어다”(시 49:1-2) 라고 합니다.

말씀을 들어야 하는 대상은 하늘과 땅도 포함되며 모든 민족 땅의 모든 것입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신 32:1)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지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지어다”(사 34:1)
다른 천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만물의 영장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할머니가 속이 아파 병원에 가셨대요. 병명은 위(胃)가 안 좋은 것으로 나왔고 그래서 의사는 ‘잔탁’을 드시라는 처방을 내려 주었대요. 그런데 이 할머니, 속만 안 좋으신 게 아니라 귀까지 안 좋아 ‘잔탁’을 ‘장 닭’으로 잘못 알아들은 거예요. 그래서 이 할머니는 착실하게 의사선생님이 내려준 처방을 지키기 위해 시장에 가서 장 닭을 큼지막한 놈으로 사와서 이왕 먹을 것 인삼까지 넣어 푹 고아 먹었대요. 안 그래도 속이 안 좋은데 기름진 닭에 인삼까지 넣었으니 탈이 날 수 박예요. 병이 오히려 더 악화되자 이 할머니 화가 나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니 선상님이 하란 대로했는데 속이 더 아프니 어찌된 일이요?” 그러자 의사선생님, “드시란 약은 드셨습니까?” “하모!”. “어떻게 드셨는데요?”. “인삼을 넣어 푹 고아 먹었지!”
여러분! 나이 들어서 말씀보고 싶을 때 눈 어두워 못 보고, 귀어두워 말씀 못 듣고 한탄하지 말고 젊었을 때 성경 많이 읽고 주님 일 부지런히 하십시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라고 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모세가 레위 제사장들로 더불어 온 이스라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아 잠잠히 들으라 오늘날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신 27:9)
이어 여호수아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수 3:9) 고 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율법책에 귀울 기울였기”(느 8:3) 때문에 소망이 살아났습니다. 잠언 8:34절에서는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양을 말씀하실 때 양의 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 양들이 그의 음성을 나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3-5) 만일 양이 제아무리 깨끗하고 다른 모든 조건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도 양이 잘 듣지 못하는 짐승이라면 성경은 양을 택하여 비유 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양의 특징은 털이나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데 있습니다.

진리의 소리가 빌라도에게도 들렸습니다. 그는 아내로부터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마 27:19)라는 소리를 듣고도 무시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눅 23:23). 빌라도의 귀는 듣지 못한 귀의 전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 우리가 책임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 단 국물만 빼먹겠다는 사람은 분명히 말하지만 언젠가 하나님을 떠날 사람들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은 “번영은 구약성서의 축복이고, 역경은 신약성서의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은 많으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없으며, 십자가를 귀에 걸고는 있어도 머리에는 없으며, 십자가를 목에는 걸었어도 성도의 가슴에는 없으며, 종탑에는 매달려 있어도 교회 속에 없다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들어야 하는 소리는 달콤한 소리가 아닙니다. 쓴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목사님이 한마디 야단쳤다고 다른 교회로 옮기고 “여기 아니면 교회 없냐” 하는 식으로 살면 안됩니다.

어렸을 때 어머님이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서 부릅니다. 그런데 귀찮아서 못들은 체하고 뒷문으로 나가 놉니다. 그러면 누나가 그 심부름을 대신 합니다. 어머님은 심부름을 잘했다고 용돈을 주십니다. 그것을 보고 내가 달려갑니다. “누나는 내가 할 심부름을 대신한 것이야! 그러니까 그 돈 반은 내 꺼야” 하고 우깁니다. 착한 누나는 저에게도 나누어줍니다. 그 이후로는 심부름을 열심히 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님을 통해서 그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그분은 우리가 본 받아야할 첫 열매이시기 때문입니다(고전 15:20).

2004년 약30만 명이 희생당한 인도양 40여 개국을 덮친 쓰나미를 잘 아실 것입니다. ‘쓰나미(tsunami)’란 말은 일반적인 해일과는 달리, 지각균열이나 화산 폭발 등으로 발생하는 거대한 파도를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일본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글입니다.
어느 해변 언덕에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살폈습니다. 평소 같으면 새소리와 짐승들의 발자국 소리로 시끄러울 텐데 그날따라 풀숲에 이는 바람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주위엔 짐승들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어디론가 모두 이동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노인은 ‘설마’하며 수평선을 바라봤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멀리서 집채만한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육지를 향해 달려오는 게 아닌가. ‘큰일났다!’ 노인은 마을이 밀집해 있는 해안가를 내려다봤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줄도 모르고 평화롭게 일상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피하시오. 쓰나미가 오고 있소.” 그러나 마을까지 노인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었습니다. 해안가로 내려간다면 이미 파도가 마을을 집어삼킬 게 뻔했습니다. 조급해진 노인은 할 수 없이 자기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이다. 언덕 위에 불이 났다.” 노인의 집이 활활 타자, 그제 서야 주민들은 불을 끄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 허겁지겁 언덕 위로 올라왔습니다. 바다에서 놀던 아이들도 불 구경을 위해 노인의 집으로 달음박질쳤습니다.
그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칼날 같은 물보라를 동반한 파도가 마을을 덮쳤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파도가 마을을 삽시간에 쓸어버리는 장면을 목격하며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이 일화를 실은 일본 교과서는 그 파도를 ‘쓰나미(津波)’라고 했습니다.

‘쓰나미’에 대한 이야기를 영국에서도 가르쳤는데 ‘쓰나미’가 오기 전에 썰물이 빠져나갈 시간이 아닌데도 썰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2004년 쓰나미가 올 때 영국의 소녀 하나가 이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선생님이 쓰나미가 올 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을 설명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녀는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쓰나미’가 오려나 봐요? “물이 빠져났어요.” 그리고 엄마에게 선생님이 일러준 말을 했고 엄마는 딸의 말을 듣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피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약7만5천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시메울루에섬은 지난 연말 가공할 쓰나미를 일으킨 대지진의 진앙으로부터 불과 60㎞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높이 10m가 넘는 거대한 쓰나미에 휩쓸리고서도 사망자가 단 7명에 그쳤습니다. 주민들이 전 재산을 잃고도 인명 피해는 이처럼 경미한 수준에 그친 것은 100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세몽’(쓰나미) 이야기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첫 지진의 진동으로 땅이 흔들리다 멈췄을 때 다른 해안 지역 주민들은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최악의 순간이 지나갔다고 생각했지만 시메울루에 섬사람들은 조상들이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를 생각해내고 죽을힘을 다해 언덕 위로 올라가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사야가 들려주는 간곡한 소리를 못들은 채 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지막 날에 반드시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사1:10)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사 28:23) 아멘.

스스로 열매를 맺는 씨앗

예수님의 말씀(102. 스스로 열매를 맺는 씨앗) / 본문 : 막 4:26-29

“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영국의 코벤트리라는 도시에 큰 교회가 있었는데 2차 대전 때 다 타 버리고 교회 한쪽 벽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그 벽은 그대로 보존되면서 “하나님 아버지, 용서하십시오”라는 큰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많은 관광객들로 하여금 이 현장을 그대로 보게 하여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일본의 히로시마에는 원자탄이 떨어졌던 곳에 박물관을 짓고 전쟁의 흔적을 그대로 보관하여 후세인 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독일의 베를린에도 대단히 큰 카이제르 기념 교회가 있었다. 이 교회 역시 모두 불타서 종 탑만 우뚝 서 있습니다. 후에 교회를 다시 지을 때에도 그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바로 옆에다 교회를 지었다. 그런데, 우리들의 6.25 흔적은 어디로 갔습니까가 ? 유감스럽게도 아픔을 볼 수 있는 산 증거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경험과 아픔은 점점 잊혀지고 있습니다. 증거 없이 아무리 전한들 설득력이 없습니다. 아니, 시간이 점점 지남에 따라 마치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무감각해져 정신이 해이해져 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26-29절의 말씀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생략하고 있는 비유로,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와 가라지 비유, 겨자 씨 비유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씨앗에 대하여 좋다느니 나쁘다는 말이 없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열매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돌 짝 밭과 같은 마음,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이 있습니다.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받는 은혜도 다르고, 그 은혜의 결과 변화 받는 모습도 다 다른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은 오늘 이 곳에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태도를 가지고 듣는 사람이 변화를 받고 열매를 맺는 것을 봅니다.
가라지 비유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밭은 다 좋은 밭입니다. 그러나 좋은 씨앗이 뿌려진 밭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도 뿌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 밭이 아무리 좋아도 뿌려지는 씨앗 그 자체가 나쁜 씨앗이라고 하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복음의 수용성,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참으로 좋지만, 뿌려지는 씨앗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비유 중에 겨자씨의 비유는 또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여 아주 큰 역사를 이루는 뜻입니다. 적은 씨앗이 나중에는 그늘을 내고, 열매를 내고, 공중의 많은 새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그런 나무로 자란다는 뜻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아주 미약한 말씀이요, 인격이지만 점점 자라서 아주 큰 나무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씨앗에 대하여는 좋다느니 나쁘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 씨앗에 대한 좋고 나쁜 것은 가라지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4가지 내지 6가지의 반응이나 수용성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 비유의 특징은 생명의 신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씨가 자라는 과정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토질이나 풍성한 수확보다는 신비로운 능력, 생명의 신비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서서히 점진적으로 변화시키고 발전시키고, 성장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의 씨를 뿌려주시고 열매를 거두어들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자라고 열매를 맺고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가 복음을 뿌렸으니 내가 열매를 거둘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의 어떤 노력이나 창조적인 행위로 싹이 트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열심히 가꾸고, 돌아보아서 이삭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의 신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떤 식물이 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습니다. 씨를 뿌린 사람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라납니다. 씨 뿌린 사람이 밭에 나가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니요, 씨가 발아할 수 있도록 온도를 맞춰주려고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습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씨를 뿌리고 사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돌아와 그가 해야하는 다른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밭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어도 땅은 씨를 보관하고 있었고, 싹이 나게 하느라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하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행동,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한 것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보다는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 하시고, 우리는 그냥 기뻐서 따라다닌 것뿐입니다. 이것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믿음이 자라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전부요, 우리가 한 일이란 정말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따라다닌 것뿐입니다.

엘리코트(Elicort)라는 신학자가 말한 심리학적인 성장의 3단계를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사상, 곧 생각의 성장입니다. 생각의 성장이 곧 인격의 성장입니다. 생각이 깊어지고, 발전해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질이 결정입니다. 유명한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말하기를 “이 세상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세상에는 복이나 화가 따로 없다. 다만 생각 여하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말하기를 “생각하기를 가르쳐야지, 생각한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고귀한 생각과 함께 있는 사람은 고독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며, 자기 자신과 친해지는 것입니다.
엘리코트는 두 번째의 성장은 행위의 성장을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그가 사는 행위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소포클래스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신은 행동하지 않는 자를 결코 돕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생각에 머물고, 지식에 머물지 말고 행동으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 그의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행동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 목적이 성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목적이란 우리의 사는 의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여도 그 일에서 의미를 찾고 또 부여합니다. 의미가 큰 일이라고 하면 시간과 물질을 남김없이 투자하여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하면 어떠한 수고도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의미 없는 일에 왜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낭비할 것입니까? 사람은 삶의 목적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공부하는 목적, 직업을 가지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들 가정이 살아가는 목적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람은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하는 것까지 사실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때가 많습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나의 전부를 투자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사는 목적이 분명해지고, 그런 목적에 있어 성장해야 합니다. 목적을 가지는 일에도 성숙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사는 것도 감사하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참으로 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사32:8)고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눈여겨보아는 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라고 봅니다.
그 첫째는 생명의 씨, 살아있는 말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세계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어야지 무생물을 가지고 생명을 나오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밭이 있다 하여도 그 밭은 생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생명의 씨앗, 하나님의 말씀, 영원한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합니다. 아무리 고매한 인격을 가지고, 겸손하여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거기에 생명의 말씀이 떨어져야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씨를 만들고 그 씨에 생명을 심어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식물에 열매를 주시고 그 안에 생명의 씨앗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상한 학문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공학’입니다. 생명을 공학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공학은 길이 잘못된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공학은 사람에게 있는 것인데 이것을 붙여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공학’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줄기세포 연구하는데 아마 계속 할겁니다. 처음에 좋은 목적을 말하지만 결국은 상업적인 논리와 권력으로 가는 것입니다. 악용 당하게 되어있다 그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씨는 뿌려지면 저절로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여기서 최소한의 어떤 노력이 있어야 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혼자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고 중에서 우리보고 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0:14절에서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고 싶었어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어둡고 캄캄한 암흑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이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먼저 믿고 믿음의 좋은 말씀을 가르쳐주고, 지도해주는 선배들이 고마운 것입니다.
셋째로 땅이 있어야 합니다. 한 영혼이란 천하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교보문고의 표어가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입니다. 그런데 책을 만들기 전 이 사람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계신자”라고 했습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했습니다.
“스스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우트마태’라고 하는데 영어로 오토매틱이라는 말입니다. 자동, 자연적, 저절로 스스로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자들은 마치 처음에 작은 물체가 점점 진화해서 크게되고 척추동물이 된 것으로 설명하지만 생명 그 자체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 생명체가 어떻게 변화되었다고는 하는지 모르지만 생명 자체를 말하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스스로’란 진화를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를 말한 것입니다.
고전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 님 뿐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토마스 목사님이 대동강으로 들어오셔서 순교하셨을 때 복음은 죽고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지금도 살아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있습니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 병인 년 우리나라 교회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한해였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나라안의 천주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곧이어 병인양요까지 치뤘으니 외세에 대한 조선의 쇄국정책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 8월 평양의 대동강에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나타났는데 이 배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후원을 받은 로버트 토마스라는 선교사가 통역관으로 동승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의 피를 흘린 주인공입니다.
1840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어려서부터 선교사에 대한 소망이 남달랐던 그는 드디어, 1863년 24살의 나이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중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 이은 부인의 죽음과 선임 선교사와의 갈등으로 한때 선교사역을 포기하기도 했는데… 하지만 세관에서 통역을 하던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다시금 복음 사역의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같은 해 9월 백령도 근처의 작은 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 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주일 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대동강변에 좌초하게된 셔먼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되는데. 한편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단 한 권이라고 더 조선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남은 한 권의 성경책을 품안에 넣고 강물로 뛰어들었고 곧 조선군에게 생포되었습니다.

그의 처단은 즉시 집행되었고 그 임무를 맡은 조선 군사가 바로 박춘권 이라는 자였습니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는 급히 자기 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면서 그에게 내밀었고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오..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과연 토마스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에 유력한 신앙 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은데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석호정 만경대의 최취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준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 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습니다.

비록 정식으로 조선 땅을 밞아 보지도 못한 채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죽음을 당한 로버트 토마스선교사. 하지만 그의 죽음 뒤에야 비로소 조선 땅에도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데. 서툰 한국말 실력에 가진 것이라곤 한문으로 된 성경책 한 권뿐이었지만,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이 땅에 복음의 부흥을 위한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은 29절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입니다. 씨앗의 결국은 열매를 맺는 것이고 열매가 익었을 때 추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반드시 심판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일차적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라나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자라는 것입니다.
 

선지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1. 선지자이신 예수님) / 본문 : 마 13:57, 막6:4, 눅 4:24, 요4:44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영어에 “코벤트리로 보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코벤트리로 보낸다.”라고 하면 ‘한 집단에서 제외시킨다, 교제를 끊는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코벤트리는 영국 잉글랜드 중앙부 워릭셔에 있는 도시인데 그 곳 사람들은 군인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군인과 시민 사이에 교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파견되는 군인은 일체의 교제가 단절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7세기 청교도 혁명 때, 왕당파 포로가 코벤트리에서 연금 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이후로 사이가 더 나빠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코벤트리로 보내시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선지자라고 번역된 원문의 헬라어 단어는 profhvth”(프롭헤테스, prophetes)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미리 말하는 자, 영감으로 말하는 자”로 “선지자, 선견자, 예언자”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쉬운성경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모두 예언자로 번역했습니다. 영어성경(KJV, NIV, ASV)은 모두 prophet(퍼페츠)로 번역했습니다. 영문의 prophet는 헬라어의 문자를 영문으로 옮겨서 그대로 읽은 것입니다. 원문에서 profhvth”단어는 두 개의 단어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앞의 ‘pro’와 ‘fhvth”‘가 합성된 것입니다. ‘pro’는 전치사로 “앞에, 전에”의 뜻이 있는 단어입니다. 영어의 pro는 전치사로는 “… 찬성하여”와 명사로는 “숙련가, 전문가”를 뜻하는 말입니다. 뒤의 ‘fhvth”‘는 ‘fhmiv’(훼미)에서 왔는데 그 뜻은 “이야기하다, 증언하다, 알게 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자 적으로 선지자 또는 예언자는 앞서서 말하는 사람, 미리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라는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성경이나 기타 현대 성경들(영어 등)은 구약이 39권의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배열은 율법서, 역사서, 시서, 예언서 순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유대인들은 그것을 다르게 구분합니다. 오늘날까지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는 율법(토라), 예언서(네비임), 성문서(聖文書, 케투빔)의 세 가지로만 분류합니다. 유대인들은 첫 번째 성경(토라)를 율법이라고 부르며 사실상 다른 성경들과 차별을 두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만큼 모세 오경은 먼저 성경으로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서는 그 이후에 형성된 책인데 부분적으로는 문서로 또는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을 전기예언서, 후기예언서 부분으로 엮게된 것입니다. 이 성경들은 예언자들의 말이 구두로 또는 문서로써 오랫동안 전달되는 중 그 자체가 지닌 권위와 감화력은 그것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과 감화를 받게 했으며, 회개와 위로와 격려를 받게 했던 것입니다.
특히 자기 나라를 잃어버리고 고국산천을 멀리 떠나 먼 이방나라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을 때 경건한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예언자들의 말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수많은 경고와 예언을 등한히 하고 무시하던 민족이 이제 망국의 운명과 포로 생활의 쓰라린 고통을 직접 당하게 될 때 예언자들을 통해서 들려오던 그 하나님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기억되며 동시에 예언자들의 예고와 경고가 그 얼마나 진실성을 가졌었는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 회개의 제사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장소가 없다.” 그리고 이 때에 와서 비로소 예언자들의 말을 기억하며 그들의 글을 읽고 보존하여 마음으로 새로운 다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전기예언서와 후기예언서에 있는 글들을 읽으며 새 희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법도 안에만 있으면 반드시 영광의 날이 오고야 말리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언자(선지자)란 이스라엘의 제일 어려운 시기를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에게 예언자, 예언서란 희망의 메시지요,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의 운명을 놓고 예언한다든가 사업에 대한 예언을 한다든가 꿈꾼 것을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언이란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일전에 어떤 점쟁이가 낸 광고에서 ‘집사, 장로, 목사도 환영’이라는 카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광고를 보면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이 점을 보러 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점쟁이들이 대통령이 당선될 때마다 자기가 예언해서 맞혔다는 등 소문내기를 좋아합니까. 또 자기가 가르쳐줘서 로또복권에 당첨됐다고 자랑하는 점쟁이도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은 점쟁이들이 사주카페라는 것을 만들어 커피도 마셔가며 친근한 언어로 예언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예언들은 모두 거짓된 것입니다. 맞아도 거짓이요, 틀려도 거짓입니다. 점쟁이들은 모두 거짓 예언자입니다. 참된 예언자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그 분의 참된 예언의 말씀을 듣고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참된 예언자입니다.

예언자의 말을 존중히 여기기 시작한 다른 이유가 또 있는데 유대인들은 주전 5세기 중엽에 예언자 말라기에 이르러 예언의 소리가 끊어졌고 다시는 그것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하여 필요하시면 하나님이 언제든지 예언자를 보내주신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다른 예언자가 아니라 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다시 엘라야를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13:3절에는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고 하여 이제는 누구든지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면 죽음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편 74:9에서도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로서 예언자가 끊어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더 이상 예언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전 예언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 세례요한은 이사야 40:3의 예언대로 예수님 앞에 유대 광야에 나타났습니다. 요한은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말4:5)한 바로 그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을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 11:14)고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선을 그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 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도 수군덕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마 16:14-16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예언자)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선지자적 역할은 다른 것입니다. 구약 개념의 예언자 시대는 유대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끝난 것이고 예수님은 새로운 선지자로 오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와 글들을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읽으셨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눅 4:17) 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 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 성경으로서 당신을 증거 하셨습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사도들 역시 구약을 인용하고 가르쳤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행 13:15)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예언자) 보다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갈 때 예수께서 질문하셨을 때 들은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하는 말씀을 들었지만 실상은 그만한 존경을 못 받으신 것입니다. 본문에 말씀하신 것처럼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하심으로써 섭섭함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던 이 백성이 이번에는 하나님의 아들마저 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형장으로 가시던 중 너무나 힘드셨던 탓에 어느 구둣방 문전에 주저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아하수에로스라고 하는 그 구둣방 주인은 몰인정하고 무자비하게도 그리스도를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는 내침을 당하시면서 구둣방 주인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좋다. 나는 곧 간다. 그러나 너는 내가 돌아오기까지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주님은 떠나셨습니다. 그 뒤 아하수에로스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나라도 집도 없이 힘겨운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유럽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는 “방황하는 유대인(Wandering Jew)”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오늘날 대다수 유대인들이 조국에서 쫓겨 나와 세계를 전전하는 것을 해명하는 이야기인 듯 싶습니다.

여기는 디즈니랜드입니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아이들이 벌떼처럼 몰려갑니다. 신데렐라가 등장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신데렐라의 옷자락이라도 만져 보려고 그 주변에 둘러섰습니다. 그러나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몸이 심하게 뒤틀리는 장애를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형의 손을 잡고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눈빛으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신데렐라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치는 아이들 틈에 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감히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한 걸음, 한 걸음을 사뿐히 내딛으며 신데렐라가 소년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해 있는 소년의 얼굴에 살며시 입을 맞췄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분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 공주가 아닌, 평강의 왕을 기억해 보십시오. 장애 소년이 아닌 당신과 내 이야기입니다. 두 경우 다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두 경우 다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신데렐라는 단지 키스만 했을 뿐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뒤에 남겨진 소년의 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신데렐라였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뒤틀린 소년의 몸뚱이는 예수님이 가지시고, 자신의 아름다움은 장애 소년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짧은 감동보다 위대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 The Gift/ 맥스 루케이도 (두란노, 2002)

저는 본문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서 “예수님 정말로 이 말씀이 사실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꼭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고향인 갈릴리의 나사렛 지방에서만 영접을 받지 못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루살렘에서도 배척 당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또한 오늘날 많은 국가와 종족, 지역에서 배척 당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본문 말씀은 그만큼 예수님이 느끼시는 섭섭함이 크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이제 내 곁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더 이상 밀어내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밀어내었던 이스라엘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밀어내시면 더 이상 기회와 희망은 없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은 하나님의 마지막 카드입니다. 이제 때가 다 되어갑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성경도 요한 계시록의 끝 부분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그 때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주로 영원히 따라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요즘 존경하는 사람이 한명 생겼습니다. A(아로노). C(클레멘즈). 게벨라인(1861-1945)이라는 분입니다. 1861년 독일에서 태어나 12세에 그리스도인이 되어 18세에 성직에 헌신하기로 결정한 사람입니다. 그가 결심한 날이 10월 31일로 바로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기념일입니다. 그가 미국에 도착한 후 불과 몇 달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서전 ‘반세기’에서 “나는 신약성경을 읽고 있었다. 그때 갑자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탐구와 그를 위한 봉사에 나의 일생을 바쳐야 한다는 강렬한 충동이 나에게로 밀려왔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연구에 몰두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는 독일 교회에서 시무했으며, 히브리인에 대한 강한 사명을 받고 당시 뉴욕으로 흘러 들어온 수 천명의 유대인을 위한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Hope 선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의 희망’이라는 잡지를 1894년부터 1945년 그가 죽을 때까지 51년 동안 그 잡지를 편집했습니다. 1889년 종파 문제로 독일 감리교 연회와의 관계를 끊고 미국, 캐나다, 유럽 등에서 순회 설교를 했습니다. 게벨라인의 첫 저서는 “스가랴서의 연구”인데 여기에 순회 설교 때 흥미 있는 이야기가 담겨있었습니다. 그는 랍비들에게 자신의 연구한 책을 보냈습니다. 랍비들은 그의 책을 휴지통해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랍비의 비서였던 한 젊은 청년이 그것을 꺼내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집회에 참석한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1장에 관하여 “유대인의 문제”는 하나의 고전이 되었으며, “주석 성경”은 1912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0년후에 완성했습니다(이 책은 본래 9권으로 발간되었으나 무디 로이제우크에 의해 4권으로 합본되었다. 한글로는 ‘엑스포지터스.성경신약주석(전6권)’으로 옮긴이:강병도 800쪽, 기독지혜사에서 1982년 발행했는데 요즘은 구하기가 어렵네요).

사람들은 종종 게벨라인에게 그토록 수많은 순회 설교를 하고 잡지를 편집함과 동시에 많은 저서를 집필한 비결을 묻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의 대답은 항상 같았습니다. “나는 그저 시간을 낭비한 일이 없을 뿐입니다.” 또한 왜 골프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골프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좋은 방법으로 시간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대단히 열정적인 학생이었으며 학자였을 뿐 아니라 헌신적인 설교자였다.

이영제 목사 정리(참고: 개혁신학과 설교연구, 국제신학연구소, 1987. 9. 25)

감람산의 기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0. 감람산의 기도) / 본문 : 눅 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습관이 있습니까?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고 합니다. 습관은 한번 체질화되면 고치기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좋은 습관을 가지기 위해 노력해야 됩니다. 이 습관이 사람을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나타난 습관이 있습니다. “낮이면 성전에서 … 밤이면 감람원이라하는 산에서 쉬시니라”(눅 21:37)고 했습니다. 눅 1:9, 2:42에도 “습관을 좇아”라고 나옵니다. 47절에서 가롯유다가 체포조를 이끌고 이 장소를 어렵지 않게 찾아간 것도 습관적으로 가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0절에 “그곳에 이르러”라고 했는데 그곳은 습관적으로 가시는 그곳입니다. “그곳”이란 바로 감람산 서쪽 중턱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입니다(마 26:36, 막 14:32). 예수님에게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는 마지막 밤에 다신 곳도 바로 늘 가셔서 기도하시고 쉬신 곳이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마지막 밤이 다가온다면 늘 가던 교회로 나와 기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회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 제일 행복한 것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교회 가까운데 묻히면 부활 때 무덤에서 제일먼저 일어난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교회 가까운 곳에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점점 들어와 교회 앞마당과 심지어는 강대상 밑에도 무덤을 삼았습니다. 섹스피어의 무덤도 교회 강대상 밑에 있습니다. 자신들의 욕심에서 남보다 더 빨리 부활하려고 교회를 가깝게 생각한 것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녀야 합니다. 여러분 습관이라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닙니다. 예배드릴 때 습관적으로 조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장소로 가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주님을 부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습관은 인간 생활에 큰 지도자이자’(Heine)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어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너무 아멘을 습관적으로 크게 하시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부흥회 중에 예배 분위기가 방해될 까봐 이 집사님에게 유아실로 가서 아이들을 보고 계시라고 임무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부흥회 때 설교를 하고있는데 저 쪽에서 아멘~!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설교도 들리지 않을텐데 왜 아멘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이들 교과서인 세계지도를 보고있는데 파랗게 칠해진 바다를 보고 아멘 했습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아멘. 무엇을 보던지, 무엇을 생각하던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아멘 하는 삶, 이런 습관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40)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46)고 하셨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시험이 다가오는 때입니다. 바로 이 때가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나 잠시 뒤에 있을 일도 사람은 모릅니다. 주님만이 아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무지한지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가 만일 마지막 하루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예배라고 생각한다면 좀더 진실 되지 않겠습니까? 늘 그런 마음으로 예배하며 기도하고 하루 하루를 살아야 됩니다. 아이들하고도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떠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언제까지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 때를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영원한 기도의 제목은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목적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면 사람이 바보가 됩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사리분별를 잘하는 사람이 상식적으로도 통하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험에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단에게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면 사람과의 관계에만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될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을 합니다. 저기 멀리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연약한 사람입니다. 별것 아닌 것에도 시험이 듭니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 예수님에게 사단은 끈질기게 따라다닙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이 때 잠시 물러간 것 같으나 아주 떠나지 않고 늘 예수님의 주위에서 맴돌고 있음을 압니다. 사람들을 통해서 사단은 끊임없이 나타납니다(마16:1, 19:13, 22:35). 바로 예수님이 지금 기도하시는 것은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
우리의 최종적인 기도는 “아버지의 뜻대로”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보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식이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부모님의 뜻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우리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머리로 다 이해하면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머리로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 믿으려면 끝까지 못 믿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하는 신을 믿으려면 아마도 나보다 못한 것을 믿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창 25:5)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28:2에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라고 합니다. 이사야 1장 19절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의 표시입니다.

힘을 도와 주십니다.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43)
우리가 기도할 때도 천사가 도와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가 도왔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육신의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기도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집사람 동기모임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아마 동기인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사모님이 목사님이 40일 기도를 하러 가셨는데 그만 중간에 죽을 것 같아 사람들이 들것에 모시고 집으로 왔답니다. 그래서 이 사모님이 잘 왔다고 한 것이 아니라 다시 기도원으로 돌려보냈답니다. “죽어도 기도원에서 죽으셔야지 돌아오시면 안됩니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 목사님이 능력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모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섭습니다.

하나님은 보고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천사들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에게 이 천사는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도 나타나 도와 주셨습니다(마 4:11, 막 1:13).

누구나 힘을 좋아합니다. 힘이 있어야 삽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힘은 육체적 힘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일을 위해서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은 다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 힘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회개하기 이전 세상 힘을 가졌을 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저요,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한 후에는 겸손한 사람이요, 참가치를 아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적 힘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우리들에게는 세 가지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1) 나는 내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I can do nothing on own, because I am nothing) 빌 3:4-8
2) 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게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I con do all things through Christ becauce He stsengthes me) 벧전 5:10
3) 나는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때문에 나는 모든 일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I give God all the credit for my thing I am able to accomplish)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의식(seuse of God’s almighty power)하고 살아야 합니다.

로버트 모패트(1795∼1883년)는 남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입니다. 그는 선교 활동 중 고향인 영국에 잠시 들러 후원을 호소했는데 첫 번째 교회에 들어섰을 때 무표정한 서너 명의 여신도밖에 없어 크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잠언8장4절을 인용,「사명의 고귀함」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그가 설교하는 동안 남자라고는 오르간에 바람을 집어넣는 소년 조수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놀라웠습니다. 아무도 안 들었을 것 같은 그의 설교를 이 소년이 듣고 감화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후에 위대한 아프리카 선교사가 된 리빙스턴이었습니다.

우리 주앙교회를 다른 말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새 힘 교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주앙교회에 다니면서 어 깨 축 늘어뜨리면 안됩니다. 누가 툭 치면 살아서 팔딱 뛰어야 합니다.

정범진 씨의 《밥 잘 먹고 힘센 여자를 찾습니다》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무렵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침대 머리맡을 들어올려 내 발가락을 관찰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마비되었던 감각이 돌아오면 제일 먼저 움직일 수 있는 신체부위가 발가락이라는 이야기를 의사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몸의 마비를 경험해 본 사람은 발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를 절절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몸의 마비를 경험하지 않고도 이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한 자기 발가락을 바라볼 때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고,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강아지를 보면 가만히 주인 앞에 와서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왜 바라봅니까?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앙망 하는 것은 무엇을 주실 것을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세 가지 힘이 나옵니다. 그 모습은 바로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가는 모습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1) 날개 치며 올라가는 힘입니다(Soar).
2) 곤비치 않고 달려가는 힘입니다(run).
3) 피곤치 않고 걸아가는 힘입니다(walk).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역사상 기독교인을 꺾었던 왕이나 나라는 없습니다.
초대 교회 인들은 가이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로마제국을 밀어 제치면서 신앙의 길을 걸었습니다. 모든 일을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시기를 바랍니다(Start from Christ). 그리스도와 함께 행하시기를 바랍니다(walk with Christ).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며 행동하시기 바랍니다(walk learning on Christ).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동하시기를 바랍니다(walk to Christ).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이 여러분들에게 날마다 소생시키는 힘이(Renewing Strength)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얻습니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9. 온유한 자가 땅을 얻습니다.) / 본문 :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 37:11)

역사상 제일 큰 땅을 차지하게 된 인물은 아마도 미 대륙을 발견한 ‘컬럼버스’라는 데는 의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 온유한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온유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여러분! 바보스러운 것이 온유가 아닙니다. 또한 도전적인 사람이 온유하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 미저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산타마리아 호’는 많은 관광객들의 관람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산타마리아 호는 컬럼버스를 태워 가지고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너 미 대륙에 도착한 배의 이름입니다. 지금의 산타마리아 호는 그 때의 배를 원형대로 모조해서 바닷가에 메어 놓은 것인데, 보는 사람마다 그 배가 대서양을 건너기에는 형편없이 작다는 사실에 놀란다고 합니다.
길이가 30m도 되지 않는 이 배는 지금 미저리 강을 오가는 거대한 배들 틈에서 장난감같이 작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배와 두 척의 더 작은 배가 용감한 컬럼버스를 태우고 신대륙에 건너 왔으며 탐험의 신기원을 마련한 것입니다. 바로 신대륙의 발견 등이 민주주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컬럼버스는 부족한 장비와 가망성 없는 모험을 용기로 보충한 사람이었습니다. 용기란 두려움 없이 산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앙을 통하여 두려움을 극복해 가는 생활입니다.

본문에 ‘온유한’(praei’”:프라에이스)로 사용된 말은 시편 37: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말입니다. 헬라어의 이 어근은 “pavscw:파스코”라는 말인데 “고난을 체험하다”라는 동사입니다. 그리고 원래 히브리어의 뜻은 “겸손한, 온순한”이라는 말의 “wn:[;:아나브”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아나브의 어근은 “hn:[;:아나”입니다. 아나의 뜻은 “누르다, 괴롭히다, 고통”을 뜻합니다.
헬라어, 히브리어 모두 원문상의 이 뜻을 종합하면 “온유한”것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어려움 없이 자란 사람은 결코 온유하지 못하고 온유한 것을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은 사람 바로 이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칼빈은 온유함에 대해서 말하기를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실로 나폴레옹이나 진시황과 같은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무력의 힘과 권력으로 수많은 땅을 정복하였지만, 그들은 죽어서 몇 평 안 되는 묘지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유하심으로 세상만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고 천국의 영원한 기업을 상속하여 주실 것입니다.

미국은 정말 온유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그 땅들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알라스카는 미국 본토의 1/5에 해당하는 큰 땅덩어리입니다. 본래의 알라스카는 구 소련 땅이었습니다.
1867년 죤슨의 대통령으로 재임당시 720만 불을 주고 그 땅을 사들였습니다. 그 당시 얼음으로 되어있는 빙하의 땅으로만 알려졌던 문제의 땅 알라스카를 사들이자, 미국 국회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소환하여 질책을 가했습니다. 국회동의도 없이 쓸모 없는 땅을 사들였다고 온갖 비난과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중 한 의원은 “얼음이 필요하다면 미시시피강을 얼음으로 이용할 것이지 왜 하필이면 아이스박스에 불과한 알라스카를 샀는가?”라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 후 정부와 의회의 공동 조사단에 의하여 알라스카를 탐사해 보았더니 그 땅에는 상상외로 순금, 백금, 석유 풍부한 어장이 무진장으로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언론들은 미국은 얼음 땅을 사들인 것이 아니라, 황금의 땅을 거져 주었다고 대서특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하 양원 국회의원들이 백악관을 찾아가 정중히 사과를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알라스카의 축복이 주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땅이라고 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무리 쓸모 없는 땅이라도 귀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땅위에서 자연이 형성되고 인간의 문화가 이뤄지고 인류의 역사가 창달되고, 정치 경제 산업 등의 온갖 사회적인 발전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힘이 강한 자가 힘이 없는 자를 물리치고 땅을 빼앗기도 합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보면 서로 땅을 차지하려고 하는 욕망 때문에 개인과 개인사이에 싸우기도 하고 나라와 나라사이에 전쟁을 일으키고 무력으로 침범하는 일이 지구상에서 종식되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에 일본이 우리나라 전 국토를 침략하였고, 그 후 6.25의 한국전쟁이 발생된 이래 지금까지 남북으로 분단된 뼈아픈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유럽일대를 정복하고 지중해연안에 있는 주변국가들의 영토를 로마 지배령으로 삼았지만, 로마제국은 결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정당성을 벗어나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빼앗은 땅은 언젠가는 다시 빼앗기고 결국 패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평화와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결국 오랫동안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고 땅을 불법으로 빼앗은 자는 땅으로 망할 것입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은 이집트에서 많은 재산을 얻어 가지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네겝 땅으로 올라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서로 다투는 일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분가시켜서 서로 편리하게 떨어져 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말하기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 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먼저 선언했습니다. 롯은 요르단 분지를 가리키며 목자와 짐승들을 따로 데리고 분가하여 물이 넉넉하고 하나님의 동산같이 느껴졌던 소알 평지를 향했습니다. 롯이 떠나간 다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고개를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둘러보아라. 네 눈에 비치는 온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리라”(창 13:14-17)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선택한 이유를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고 합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를 오늘도 선택하십니다.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온유한 자들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고후 6:10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마지막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약 3:13에 보면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을 떠나 40년 동안 기나긴 세월을 견디면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1에 보면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땅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말한 것인데 이것은 천국을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땅을 얻어보아야 얼마나 가겠습니까?

어느 마을에 효자로 소문난 사람이 있어 원에서는 그 사람의 뒤를 밟도록 했습니다. 그가 과연 어떻게 부모 마음을 헤아리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나무를 캐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효자의 뒤를 밟던 관리는 그의 눈을 의심해야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효자는 집에 오자마자 난간에 앉아 어머니가 떠온 세숫대야에 발을 담그는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어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아들의 발을 씻기고 있었습니다. 관리는 화를 내며 효자에게 달려나갔습니다.
“이 파렴치한 놈 같으니라고.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라고 소문이 나서 찾아와 봤더니 천하에 불효 막심한 인간이었구만. 늙은 어머니에게 발을 씻기는 일을 시켜?”
그러자 이 효자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효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도록 해 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저희 어머님은 일하러 갔다 온 아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큰 낙으로 알고 사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내가 무슨 큰 일을 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 역사 하시고자 하나님의 뜻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앙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시고자 하는 뜻을 잘 따라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가는 것입니다.

유머작가인 루코크라는 사람은 현대판 성령강림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풍자해서 썼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림”이라는 광고가 났습니다. 적어도 120여명은 모였어야 할 예배에 출석한 사람은 겨우 40여명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최근 가족과 함께 구입한 갈릴리 호수의 별장으로 주말여행을 떠났고, 바돌로매는 집에 손님이 와있기 때문에 예배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빌립의 가족은 지난 밤 늦도록 계속된 파티의 후유증으로 자고 있으며, 안드레는 새 차를 구입하려고 모토쇼장에 갔습니다. 마태는 근무처인 세무서에 시간외 근무를 나갔고, 요한은 사업차 골프를 치러 떠났습니다. 도마는 취직시험이 주일과 겹쳤으니 당연히 나올 수 없었습니다. 불길 같은 성령도 망설이다가 다락방 앞에서 되돌아갔습니다.

불꺼진 등대는 위험만 가져다 줄뿐입니다. 주님의 온유하신 성품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불꺼진 등대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신 성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2:5에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천국의 영원한 땅을 기업으로 받기를 바랍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