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의 강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9. 생수의 강) / 본문 : 요 7:37-39

“37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본문 38절의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의 ‘강이’라고 번역된 단어 potamov”(포타모스)는 복수입니다. 그래서 원문에 제일 가까운 번역으로 알려진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생수의 강들이 흐르리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표현을 좀더 현대적인 방법으로 잘해보려고 현대어로 번역된 영어성경 가운데는 ‘계속적으로’라는 말을 첨가시켰습니다. 우리는 다 먹으면 더 이상 나오지않는 고인물을 퍼 먹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강으로 안되기 때문에 복수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충만한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차서 넘치는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배에서, 우리 가정 안에서, 우리 주앙교회 안에서 이와같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나 매력적인 제안입니까?
이 생명의 물을 먹는데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아닙니다. 특정한 사람만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에는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집에서 아기 기저귀를 갈고있는 엄마, 사무실에서 컴퓨터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는 아가씨, 병원복도를 오고가는 간호사 의사선생님, 병상에 있는 환자, 책상 앞에서 고심하는 학생들, 집에서 놀고있는 아이들, 연구소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학자, 건설현장에서 땀흘리는 분들, 모두가 대상입니다.
우리는 성경 66권에 하나를 더 만들어 놓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복음’입니다. 내가복음안에는 나에게 명령하시는 모든 말씀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대신에 축복의 말씀만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복음입니다. ‘무엇을 하라’는 명령형으로 기록된 말씀은 나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렵고 이해가 안되는 말씀은 “나를 위한 말씀이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말씀 또한 나를 위한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가감없이 그대로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모든 말씀을 받아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주님은 말씀하실 때 모든 사람을 위한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들을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아무 조건도 없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제외 시키고 있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주님이 제외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외 당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음 세가지 부류의 사람입니다.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첫째는 “목마르거든”인데, 목마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있다면 갈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갈증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가끔 우리는 물이 너무 많아 짜증을 부리기도 합니다. 비 또는 홍수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 갈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 아파트 고지서 7월 달 것을 보니까 수도세가 3,650원 이었습니다. 보통 커피한잔 값도 안됩니다. 우리나라 수도 물 값은 정말 쌉니다. 우리 주위에는 물통만 들고가면 먹을 물을 떠 올수 있는 곳이 주변에 많습니다. 우리는 절대 물이 부족한 나라와 지역의 사정을 잘 모릅니다. 여러분! 물이 생명입니다. 이스라엘은 1년 평균 강우량이 약 300m입니다. 우리나라 여름 장마철에 하룻밤에도 내릴수 있는 양입니다.
우리는 가끔 ‘아, 배고파 죽겠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실제로 죽어갈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목이 말라 죽어가는 나라가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욕구의 강도가 어느정도입니까?
목사가 제일 실망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느 성도분이 기도해 달라고 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나서 물어봅니다. “지난번 그 기도의 내용은 응답받으셨나요?” 그러면 그분이 하시는 말이 “어떤 기도요?”합니다. 참 맥이 다 풀립니다.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냥 한번 해 본 것입니다. “되면 다행이고 안되면 말고!”이런 식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면 정작 필요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 기도에도 외면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80년대 초반에 구로공단 지역에서 전도사 생활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용서하고 들으세요) 공순히, 공돌이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분들이 저희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이분들 중에 결혼해서 살고있는 분이 있었는데 결혼한지 7년이 지났는데 아이가 없는겁니다. 그 문제로 교회에 나오시는 겁니다. 자매가 먼저 나왔습니다. 전도사님 아이를 가지려고 교회 나옵니다. 노골적으로 밖히는 겁니다. 그러세요. 그랬습니다. 한 6개월 나왔나요 그런데 아이가 생기지 않는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식으로 교회 나오니까 안되는 겁니다. 예배시간에 다 참석하셔야죠. 그래서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까지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한참을 지났습니다. 안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새벽기도는 안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새벽기도에 나오셔야죠. 그랬습니다. 정말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입니다. 걸어서 2k는 되는데 겨울에 눈이 온 골목길에 혼자 오는 겁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났습니다. 또 안 생겼습니다. 더 이상 뭐라 핑계될것이 없더라구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남자가 안오는 겁니다. 그래서 아기는 혼자 갖습니까? 그랬습니다. 아저씨도 함께나오셔야 됩니다. 그랬더니 정말 아저씨까지 새벽에도 함께 니왔습니다. 그런 시간을 통해서 믿음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제 큰일났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그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습니다.
저는 아이가 없는데 지금도 이 부부를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부부만큼 간절한 적이 있었는가? 없었던것 같습니다. 여러분! 요즘 ‘주몽’연속극을 보십니까? 검이라고 다 같은 검이 아닙니다. 강철검이 따로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강도가 다릅니다.
주님은 기도를 우리의 욕구와 연결시키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주님은 기도를 강도와 연결시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처럼 강한 강도가 어디있겠습니까? 아직까지 주님앞에 나오지 않은분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주님 없이도 살만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필요가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없어도 살만한 사람입니다.

둘째 “내게로 와서 마시라”입니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사중고를 말했습니다. (1)사는 것이 고생이고 (2)늙는 것도 고생이고 (3)병든 것이 고생이고 (4)죽는 것도 고생이라고 했습니다.
알베르 카뮈는(시지프의 신화)에서 네 가지 인간의 짐을 말했습니다.
(1) 경제적인 짐 – 실직, 빈곤, 굶주림, 헐벗음 등을 말합니다.
(2) 정신적인 짐 – 불안, 초조, 고독, 절망 등입니다.
(3) 생 자체에 일어나는 짐 – 질병, 모순, 죄로 인한 죽음, 신음, 괴로움, 비명 등의 짐입니다.
(4) 종교적인 짐 – 율법적인 행위의 강요라고 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 Jaspers)의 철학적 명제 중에 한계상황이 있습니다. 죄와 허물, 고통, 병, 우연한 염려, 투쟁과 전쟁, 죽음 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성현이나 철학자들은 무거운 짐이 무엇인가는 밝히지만, 그들에게 어떻게 해주겠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하십니다. 무거운 짐이 무엇이든 쉼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거운 짐 진 자’입니다. 그러나 이 짐을 다른곳에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해결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 나올때만 이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행동이 필요합니다. 일어나세요. 주님 앞으로 나오세요. 주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나를 믿는 자는…”입니다.
주님앞에 나오는 것은 믿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나왔던 병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고쳐 주실것을 확신했습니다.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자락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눅 17:19절에는 열명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고 돌아갔으나 한 명만이 나와 감사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눅 18:42절에는 소경이 예수님께 보기를 청했습니다.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느니라 하시매”하니 그 즉시로 그는 보았습니다. 모두가 믿음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던 열두 명을 기억하십니까? 높은 산, 낮은은 골짜기, 그리고 거인과 같은 아낙자손들, 그들 앞에서 마치 자신들은 매뚜기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10명의 정탐군은 부정적은 보고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보래바람을 맞으며 온 광야길의 보람도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은 우리의 땅이 될 것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어떻게 이 두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을 보고서도 가능성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성격이 원래부터 낙천적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허풍쟁이며 책임질수도 없는 말을 떠들어 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이 처한 환경보다 더 크신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이 땅의 상황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조상때부터 약속하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세대의 사람은 이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물며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이 말씀이 나에게 임함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태국 북쪽에 트라이앵글로 알려진 미얀마, 라오스 국경지대인 치랑라이에 13년전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 산족의 한 원주민 마을에 간 일이 있습니다. 작은 초가집의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여자들은 밤낯으로 물을 기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기 때 웅덩이를 파서 물을 고여놓았다가 그것을 퍼다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기가 되면 그 물들이 다 말라버립니다. 그리고 모퉁이 구석진 곳에서 작은 샘 구멍이 하나 있는데 그것도 거의 말라 찔끔 찔끔 한방울씩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물을 여인들은 물 항아리를 가져다 밤낯으로 길어옵니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흘릴까봐 대기하고 있다 다른 항아리로 옮겨 담습니다. 이곳에 다녀온 이후에 함께간 목사님들과 이 마을에 우물파주기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땅을 파서 우물이 나오는 곳이 아니랍니다. 그래서 포크레인을 동원해서 물을 고이게 더 넓고 깊게 파 놓는 작업을 했습니다. 저는 그 이후에 이곳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일대가 우기때 물이 넘치고 고여서 넓은 호수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 주변으로 산족들이 물 때문에 모여들어 지금은 그곳지역을 중심으로 교회가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주시는 생명수는 이정도가 아닙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것은 성령을 부어주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성령은 찔끔 찔끔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넘치도록 부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는 물입니다. 생수입니다. 강이예요. 큰 바다와 같습니다. 바다의 풍요로움과 넓고 큰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는 거예요. 잠이 잘 오는 분은 강같은 은혜예요. 교회를 떠나면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생수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강림함이라 정경한 맘 영원하도록 주의 거쳐 되겠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나의 생명 소생케 됨은 성령 임하심이라 모든 의심 슬픔 사라져 주의 평강 넘치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하늘에서 단비 내리고 햇빛 찬란함 같이 우리 맘에 성령 임하니 주님 보내심이라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생수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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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59. 생수의 강) / 본문 : 요 7:37-39

“37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본문 38절의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의 ‘강이’라고 번역된 단어 potamov”(포타모스)는 복수입니다. 그래서 원문에 제일 가까운 번역으로 알려진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생수의 강들이 흐르리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표현을 좀더 현대적인 방법으로 잘해보려고 현대어로 번역된 영어성경 가운데는 ‘계속적으로’라는 말을 첨가시켰습니다. 우리는 다 먹으면 더 이상 나오지않는 고인물을 퍼 먹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강으로 안되기 때문에 복수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충만한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차서 넘치는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배에서, 우리 가정 안에서, 우리 주앙교회 안에서 이와같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나 매력적인 제안입니까?
이 생명의 물을 먹는데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아닙니다. 특정한 사람만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에는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집에서 아기 기저귀를 갈고있는 엄마, 사무실에서 컴퓨터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는 아가씨, 병원복도를 오고가는 간호사 의사선생님, 병상에 있는 환자, 책상 앞에서 고심하는 학생들, 집에서 놀고있는 아이들, 연구소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학자, 건설현장에서 땀흘리는 분들, 모두가 대상입니다.
우리는 성경 66권에 하나를 더 만들어 놓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복음’입니다. 내가복음안에는 나에게 명령하시는 모든 말씀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대신에 축복의 말씀만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복음입니다. ‘무엇을 하라’는 명령형으로 기록된 말씀은 나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렵고 이해가 안되는 말씀은 “나를 위한 말씀이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말씀 또한 나를 위한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가감없이 그대로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모든 말씀을 받아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주님은 말씀하실 때 모든 사람을 위한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들을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아무 조건도 없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제외 시키고 있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주님이 제외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외 당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음 세가지 부류의 사람입니다.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첫째는 “목마르거든”인데, 목마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있다면 갈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갈증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가끔 우리는 물이 너무 많아 짜증을 부리기도 합니다. 비 또는 홍수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 갈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 아파트 고지서 7월 달 것을 보니까 수도세가 3,650원 이었습니다. 보통 커피한잔 값도 안됩니다. 우리나라 수도 물 값은 정말 쌉니다. 우리 주위에는 물통만 들고가면 먹을 물을 떠 올수 있는 곳이 주변에 많습니다. 우리는 절대 물이 부족한 나라와 지역의 사정을 잘 모릅니다. 여러분! 물이 생명입니다. 이스라엘은 1년 평균 강우량이 약 300m입니다. 우리나라 여름 장마철에 하룻밤에도 내릴수 있는 양입니다.
우리는 가끔 ‘아, 배고파 죽겠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실제로 죽어갈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목이 말라 죽어가는 나라가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욕구의 강도가 어느정도입니까?
목사가 제일 실망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느 성도분이 기도해 달라고 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나서 물어봅니다. “지난번 그 기도의 내용은 응답받으셨나요?” 그러면 그분이 하시는 말이 “어떤 기도요?”합니다. 참 맥이 다 풀립니다.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냥 한번 해 본 것입니다. “되면 다행이고 안되면 말고!”이런 식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면 정작 필요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 기도에도 외면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80년대 초반에 구로공단 지역에서 전도사 생활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용서하고 들으세요) 공순히, 공돌이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분들이 저희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이분들 중에 결혼해서 살고있는 분이 있었는데 결혼한지 7년이 지났는데 아이가 없는겁니다. 그 문제로 교회에 나오시는 겁니다. 자매가 먼저 나왔습니다. 전도사님 아이를 가지려고 교회 나옵니다. 노골적으로 밖히는 겁니다. 그러세요. 그랬습니다. 한 6개월 나왔나요 그런데 아이가 생기지 않는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식으로 교회 나오니까 안되는 겁니다. 예배시간에 다 참석하셔야죠. 그래서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까지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한참을 지났습니다. 안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새벽기도는 안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새벽기도에 나오셔야죠. 그랬습니다. 정말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입니다. 걸어서 2k는 되는데 겨울에 눈이 온 골목길에 혼자 오는 겁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났습니다. 또 안 생겼습니다. 더 이상 뭐라 핑계될것이 없더라구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남자가 안오는 겁니다. 그래서 아기는 혼자 갖습니까? 그랬습니다. 아저씨도 함께나오셔야 됩니다. 그랬더니 정말 아저씨까지 새벽에도 함께 니왔습니다. 그런 시간을 통해서 믿음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제 큰일났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그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습니다.
저는 아이가 없는데 지금도 이 부부를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부부만큼 간절한 적이 있었는가? 없었던것 같습니다. 여러분! 요즘 ‘주몽’연속극을 보십니까? 검이라고 다 같은 검이 아닙니다. 강철검이 따로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강도가 다릅니다.
주님은 기도를 우리의 욕구와 연결시키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주님은 기도를 강도와 연결시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처럼 강한 강도가 어디있겠습니까? 아직까지 주님앞에 나오지 않은분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주님 없이도 살만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필요가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없어도 살만한 사람입니다.

둘째 “내게로 와서 마시라”입니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사중고를 말했습니다. (1)사는 것이 고생이고 (2)늙는 것도 고생이고 (3)병든 것이 고생이고 (4)죽는 것도 고생이라고 했습니다.
알베르 카뮈는(시지프의 신화)에서 네 가지 인간의 짐을 말했습니다.
(1) 경제적인 짐 – 실직, 빈곤, 굶주림, 헐벗음 등을 말합니다.
(2) 정신적인 짐 – 불안, 초조, 고독, 절망 등입니다.
(3) 생 자체에 일어나는 짐 – 질병, 모순, 죄로 인한 죽음, 신음, 괴로움, 비명 등의 짐입니다.
(4) 종교적인 짐 – 율법적인 행위의 강요라고 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 Jaspers)의 철학적 명제 중에 한계상황이 있습니다. 죄와 허물, 고통, 병, 우연한 염려, 투쟁과 전쟁, 죽음 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성현이나 철학자들은 무거운 짐이 무엇인가는 밝히지만, 그들에게 어떻게 해주겠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하십니다. 무거운 짐이 무엇이든 쉼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거운 짐 진 자’입니다. 그러나 이 짐을 다른곳에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해결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 나올때만 이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행동이 필요합니다. 일어나세요. 주님 앞으로 나오세요. 주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나를 믿는 자는…”입니다.
주님앞에 나오는 것은 믿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나왔던 병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고쳐 주실것을 확신했습니다.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자락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눅 17:19절에는 열명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고 돌아갔으나 한 명만이 나와 감사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눅 18:42절에는 소경이 예수님께 보기를 청했습니다.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느니라 하시매”하니 그 즉시로 그는 보았습니다. 모두가 믿음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던 열두 명을 기억하십니까? 높은 산, 낮은은 골짜기, 그리고 거인과 같은 아낙자손들, 그들 앞에서 마치 자신들은 매뚜기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10명의 정탐군은 부정적은 보고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보래바람을 맞으며 온 광야길의 보람도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은 우리의 땅이 될 것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어떻게 이 두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을 보고서도 가능성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성격이 원래부터 낙천적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허풍쟁이며 책임질수도 없는 말을 떠들어 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이 처한 환경보다 더 크신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이 땅의 상황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조상때부터 약속하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세대의 사람은 이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물며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이 말씀이 나에게 임함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태국 북쪽에 트라이앵글로 알려진 미얀마, 라오스 국경지대인 치랑라이에 13년전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 산족의 한 원주민 마을에 간 일이 있습니다. 작은 초가집의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여자들은 밤낯으로 물을 기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기 때 웅덩이를 파서 물을 고여놓았다가 그것을 퍼다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기가 되면 그 물들이 다 말라버립니다. 그리고 모퉁이 구석진 곳에서 작은 샘 구멍이 하나 있는데 그것도 거의 말라 찔끔 찔끔 한방울씩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물을 여인들은 물 항아리를 가져다 밤낯으로 길어옵니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흘릴까봐 대기하고 있다 다른 항아리로 옮겨 담습니다. 이곳에 다녀온 이후에 함께간 목사님들과 이 마을에 우물파주기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땅을 파서 우물이 나오는 곳이 아니랍니다. 그래서 포크레인을 동원해서 물을 고이게 더 넓고 깊게 파 놓는 작업을 했습니다. 저는 그 이후에 이곳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일대가 우기때 물이 넘치고 고여서 넓은 호수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 주변으로 산족들이 물 때문에 모여들어 지금은 그곳지역을 중심으로 교회가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주시는 생명수는 이정도가 아닙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것은 성령을 부어주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성령은 찔끔 찔끔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넘치도록 부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는 물입니다. 생수입니다. 강이예요. 큰 바다와 같습니다. 바다의 풍요로움과 넓고 큰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는 거예요. 잠이 잘 오는 분은 강같은 은혜예요. 교회를 떠나면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생수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강림함이라 정경한 맘 영원하도록 주의 거쳐 되겠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나의 생명 소생케 됨은 성령 임하심이라 모든 의심 슬픔 사라져 주의 평강 넘치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하늘에서 단비 내리고 햇빛 찬란함 같이 우리 맘에 성령 임하니 주님 보내심이라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열광하는 무리가 아닌 제자를 원하신 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8. 열광하는 무리가 아닌 제자를 원하신 주) / 본문 : 마 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인도북부에 라자스탄주(Rajputana)가 있습니다. 1965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복음의 황무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몇 백년 동안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서 교육과 의료사역을 했으나 진정한 교회 토착화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서양선교사들이 중심을 이룬 중부지방 뱅갈로르와 함께 인도가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열왕의 땅”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인도 시골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소박한 어머니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분의 이름은 ‘아치아마’입니다. 어느 날 아치아마는 부엌에서 일을 하다 눈물을 계속 흘렸습니다. 그 눈물은 화덕의 연기나 매운 양념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치아마는 인생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에게는 여섯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섯 아들 중에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될 기미가 보이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치아마는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 아들 중 하나를 당신의 일꾼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그리고 이 때부터 매주 금요일이 되면 비밀리에 금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한지 3년 반이 지났습니다. 기도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이 어리고 병약한 막내아들(K.P. 요하난)만 빼놓고 아들들은 남인도 케랄라 니라남 부근에서 평범하게 사는데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막내는 수줍음을 잘 타는 소심한 아이여서, 교실에서 책 읽을 순서가 되면 항상 떨었습니다. 그는 마을에서 혼자 놀았습니다. 구석진 곳이나 집안에 있는 곳이 더 편했습니다. 운동이나 학교활동은 회피하는 소심한 아이였습니다. 막내가 남들 앞에서 지도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그 때까지만 해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내아들 요하난이 16세가 되던 해에 아치아마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OM선교회 전도팀이 이 지역 교회를 방문해서 멀리 있는 인도 북부에 복음을 전해야할 사명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요하난은 40kg밖에 안 되는 작은 몸은 전도팀이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복음전도의 필요성을 말할 때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잔뜩 긴장하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인도 북부(라자스탄, 비하르)에서 복음을 전하다 구타당하고 돌에 맞았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인도에서 오래된 종교 중의 하나라는 것도 말해주었습니다. 인도는 페르시아만과의 해상무역 덕택에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주후 52년에 크라나고어(Cranagore) 근처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곳에는 도마보다 200년 먼저 살고있던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인도의 60만개 마을에 복음이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생생하게 들려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있던 요하난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좇으라”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해 여름 단기선교 여행팀에 자원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교통비를 넉넉히 주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해 수련회에는 참석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련회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집안에 홀로 있었지만 홀로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온 몸을 적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는 침대옆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제 일생을 바치겠나이다.”기도했습니다.
K.P. 요하난은 영국인 아내 기젤라(Gisela)라와 결혼하고, 현재 아시아복음선교회(Gospel for Asia) 설립하여 10,000명 이상의 인도내 자국인 선교사를 돕고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누군가 해야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 나의 자식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아치아마처럼 나의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앙교회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멀리서 온 분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던지 아니면 우리들의 자녀가 가야합니다. 바로 기도하지 않으면 선교는 못합니다.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지옥불의 경험을 단 1분만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열정적일 것입니다. 일단 멀리 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미 우리가 정해놓은 예배와 기도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김상호라고 하는 공군 중령의 자기간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부엌에서 일하시다가 실수로 인하여 하반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여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꼼짝 도 못한 채 누워있고 조금만 움직이면 상처가 침대 천에 닿아서 쓰리고 아팠습니다.
의사나 간호사의 말대로 제일 아픈 고통이 화상으로 인한 아픔이라고 합니다. 이 가죽이 다 벗겨지고 이 말초신경이 전부 드러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아픈 고통이 화상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이렇게 괴로워하는 어머니를 아들은 지켜보면서 귀에다 대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아프세요?” 어머니는 대답합니다. “천번 죽고 천번 사는 것 같다. 이 세상에 이렇게 아픔이 있다는 걸 몰랐다.”
아들은 이 말을 듣고 이 아픔을 같이 나누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괴로워했습니다. 하루는 이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말합니다. “얘야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 드리고 있다. 너희들의 아픔을 모두 내게 주십사고, 너희들의 고통을 다 내가 걸머지고 그리고 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너희들에게는 이런 고통이 없기를.” 이것이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그렇다면 지옥 불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자녀를 사랑하신다면 반드시 복음을 전하십시오.
바울은 로마서 10:9-15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전해야할 긴박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 영국의 작가이며 기독교 변증에 강했던 루이스(C.S. Lewi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 교리에서 제일 없애고 싶은 것은 지옥의 개념이다.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해도 거짓이 아니라면 나는 어떠한 대가라도 치르겠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것은 진리가 아니며 우리의 힘으로 변경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지옥의 개념을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아 영원토록 고통을 당한다는 말이 사실 쉽게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은연중에 사단의 소리를 듣게됩니다. “사실 예수 믿고 죽어도 지옥가지는 않아! 그리고 길이 있어…” 그러나 성경은 그런 생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는 현대교회를 향해서 토저(Tozer)라는 신학자는 예언자적인 말을 했습니다. “비참하게도 기독교는 신약성경이 요구하는 수준 이하에 머물고 있다. 우리 생활에서 세속화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오늘날 교회의 분위기는 영적이라기 보다는 사회적이다.”
교회의 지도력이 주 예수로부터 멀어질수록 이 세상 방법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는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구세군을 창설할 때 품었던 비전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는 잃은 영혼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 운동을 시작하며 가진 이상은 “한 영혼을 위해서라면 극한 상황까지라도 가자” 구호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날 우리 주앙교회에 “주앙교회 성도들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나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말씀해 주실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 진노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너희는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놓았다.”는 책망을 들으면 큰일입니다.
1983년 인도에서 그리스도인의 마을인줄 알았던 40개 마을이 힌두교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궁금하실 겁니다. 누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마을을 기독교로 이끌기 위해 물질을 사용했습니다. 표면상 그리스도인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거나 그 도움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돌아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선교용어로 “쌀 그리스도인”(rice Christian)이라고 말합니다. 먹고 살 수 있는 쌀 때문에 그들은 종교를 바꿉니다. 이런 일이 인도에서만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럽교회가 텅텅 비었다는 사실은 유럽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있습니다. 쌀 교인이 다 나간 것입니다. 그나마 명목상 그리스도인까지 합해서 유럽은 17.84%만이 개신교인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한 아프리카는 24.90%입니다. 이런 일은 인도나 유럽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도 1995년도에 19.6%이었는데 2005년에는 18.3%로 줄었습니다. 쌀 교인이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께 떡과 고기를 얻어먹은 사람들이 5000명이 넘게 있었습니다(요 6:1-13). 이들은 몇 날이 못되어 그 입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쳐대었습니다. 아무도 목숨을 내걸고 나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현장에 없었고 나중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빌라도에게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고 장사지낸 아리마대에 사는 요셉입니다. “이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임으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막 16: 42-43, 46).
그러나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한가지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끌기 위해서 먼저 먹이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먼저 전하고 나중에 먹이셨다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요 6:26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본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자신의 배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릇된 동기에서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무리들이 영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하자 예수께서는 그들로부터 멀리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광하는 무리가 아니라 진정한 제자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앙교회 성도는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모두는 하나님께 파송받은 선교사입니다. 자 옆 사람하고 인사합시다.
“선교사님 안녕하세요.”
“선교사님 지난주에 뭐하셨나요?” 선교사가 되어서 기도하지 않고 선교할 수 있나요?
요하난이 8살 된 북인도 소년에게 예수를 전할 때 했던 질문입니다.
“너 학교 다니니?”
“네 다니고 있어요.”
“학교에는 왜 다니지?”
“공부하러요.”
“공부는 왜 하니?”
“똑똑해지려고요.”
“똑똑해져서 뭐하려고?”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잖아요.”
“왜 좋은 직업을 얻으려고 하니?”
“그래야 돈을 잘 벌지요.”
“왜 돈을 많이 벌려고 하지?”
“먹을 것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지요.”
“왜 먹을 것을 사니?”
“살려고요.”
“너는 왜 사니?”
그 질문에 어린 소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머뭇거리더니, “아저씨, 내가 왜 살지요?”하고 되물었다. 그런 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기 위해서 사는 것 같아요!”
이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명예인가? 아니면 육체적, 정신적 욕구를 채우는 것인가? 아니면 그럭저럭 살다가 예수 믿고 천국에 가려고 하는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믿게 되었던지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나의 제자가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땅에 육체적으로 계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의 몸이 되어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그분의 입술이 되어야합니다. 우리의 눈은 그분의 눈이, 우리의 손은 그분의 손이, 우리의 소망은 그분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아내와 자녀들도 예수께서 주신 것입니다. 나의 돈과 재능, 교육 등 모두 그분께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우리가 과연 하나님께 받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오늘본문 19절부터 함께 읽습니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가와 누가도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끝이 납니다.
(막 16:15)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눅 24: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요한복음은 전체가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의 일체를 설명한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또한 제자를 삼을 수 있습니다. 제자를 삼았으면 해야될 일이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세례를 주고”입니다. “세례”란 이전 사람은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옛 사람은 벗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엔 나를 위해 살았으나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입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천국 복음)”입니다(막 1:15, 16:15, 마 4:23).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기록된 계시로 나타난 성경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영생)을 얻게 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5:39, 20:31).
이 두 가지 명령을 받들기 위해서 우리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20)

 

예수님의 중보 기도(1)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7. 예수님의 중보 기도(1)) / 본문 : 요한복음 17:1-3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1절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끝이 났습니다. 1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는 요한복음 16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한 것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고 나면 핍박이 온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위쪽을 바라보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러한 자세와 행동을 면밀히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눈을 돌리십니다. 우리가 마지막 바라볼 곳은 하늘입니다. 그 하늘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기도처럼 예수님 역시 “아버지여”하시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셨던 일은 바로 기도입니다.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하나님을 부르십니다. 잠시나마 함께 하셨던 이 세상의 추억을 안고 하나님께 가셔야 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에서는 예수님의 나이는 너무 젊습니다. 이제 한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런 나이에 죽음의 길을 가야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때를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이 생각하고 계셨던 때는 요 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 7: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였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예수님은 하실 일이 더 남아있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히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변화되었습니다. 때가 왔다는 것을 이미 세 번을 언급하셨습니다. 요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것이 처음으로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점점 강도가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아이가진 엄마가 아이를 낳기 전에는 해산을 인해서 근심을 하지만 아이를 낳게되면 기쁨이 있어 해산의 고통을 잊어버림과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부활을 통해서 그 고통스러운 날들이 기억되기보다는 부활을 인하여 더 큰 기쁨이 다가올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요 8: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임의로 행동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말씀을 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라고 하십니다. 이 기도를 가리켜 어떤 신학자는(L. Morris) “차라리 성부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볼 때 저주의 십자가였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죽여가면서 아버지인 자신이 영광을 바란다면 정말 그분이 아버지가 맞는지 의심을 하게됩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비판하시는 분들 중에는 이와 같이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나치게 이기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만을 아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이신 성부의 영광에 고정되어있습니다(요 12:28). 정말 철저하도록 자신의 삶 자체가 없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분이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 성자이셨던 것입니다. 크게 말하면 예수님 또한 하나님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우리와 같은 육체의 생명을 마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 한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 죽음은 육체를 입고 온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죽음이요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는 당시의 열 두 제자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요 6:39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창세 전부터 미리 예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생명의 떡에 초대된 자들입니다(요 6:35, 37, 44, 65). 우리도 “아들에게 주신 자”입니다. 우리가 정말 아들에게 주신 자가 뫘다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관계처럼 형성되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우리는 예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왜! 제가 이 어려운 설교를 여러분에게 합니까? 예수님에 대해서만 증거하기를 원합니까? 바로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의 관계처럼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원해서입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그냥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산타크로스의 선물 보따리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원문으로 직역하면 pavsh” sarkov”(파세스 사르코스) ‘모든 육체’를 말합니다. 모든 인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날에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요 5:27).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미 십자가의 죽음은 패한 것이 아니라 승리와 영광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 영광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십자가의 영광을 바라보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7. 십자가의 영광을 바라보며) / 본문 : 요한복음 17:1-3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1절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 이야기할 때 어떻게 합니까? 저는 오늘도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이야기 할 때는 마음이 떨립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가끔은 언 듯 이해가 안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설교에 논리를 지나치게 따지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에 논리가 있습니까? 머리로 다 이해가 됩니까? 사랑은 마음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마음에 새겨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끝이 났습니다. 1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는 요한복음 16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한 것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고 나면 핍박이 온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위쪽을 바라보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러한 자세와 행동을 면밀히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눈을 돌리십니다. 우리가 마지막 바라볼 곳은 하늘입니다. 그 하늘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기도처럼 예수님 역시 “아버지여”하시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셨던 일은 바로 기도입니다.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하나님을 부르십니다. 잠시나마 함께 하셨던 이 세상의 추억을 안고 하나님께 가셔야 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에서는 예수님의 나이는 너무 젊습니다. 이제 한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런 나이에 죽음의 길을 가야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때를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이 생각하고 계셨던 때는 요 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 7: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였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예수님은 하실 일이 더 남아있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히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변화되었습니다. 때가 왔다는 것을 이미 세 번을 언급하셨습니다. 요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것이 처음으로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점점 강도가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아이가진 엄마가 아이를 낳기 전에는 해산을 인해서 근심을 하지만 아이를 낳게되면 기쁨이 있어 해산의 고통을 잊어버림과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부활을 통해서 그 고통스러운 날들이 기억되기보다는 부활을 인하여 더 큰 기쁨이 다가올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요 8: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임의로 행동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말씀을 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라고 하십니다. 이 기도를 가리켜 어떤 신학자는(L. Morris) “차라리 성부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볼 때 저주의 십자가였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죽여가면서 아버지인 자신이 영광을 바란다면 정말 그분이 아버지가 맞는지 의심을 하게됩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비판하시는 분들 중에는 이와 같이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나치게 이기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만을 아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이신 성부의 영광에 고정되어있습니다(요 12:28). 정말 철저하도록 자신의 삶 자체가 없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분이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 성자이셨던 것입니다. 크게 말하면 예수님 또한 하나님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우리와 같은 육체의 생명을 마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 한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 죽음은 육체를 입고 온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죽음이요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훌륭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죠셉 하이든이 또다시 심혈을 기울여 그 유명한 ‘천지창조’를 완성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곡이 비엔나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이던 날, 그는 몸이 너무도 아파서 도저히 지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지휘를 하도록 하고 자신은 2층 발코니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연주는 그 자신도 놀랄 만큼 대 성공이었습니다. 이 곡은 구약성경 창세기와 존 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에 근거해서 만든 곡인데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청중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지휘자에게 대단한 환호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지휘자는 그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이 영광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바로 저 발코니에 앉아있는 분이 이 놀랍고 아름다운 곡을 작곡했답니다”라고 말하며 하이든을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몸을 돌려 하이든을 향해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이든은 이내 박수를 중단시키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이 영광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저도 아닙니다. 제가 이 곡을 작곡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오직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하이든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아름다운 곡에 대한 영감을 어디서 얻습니까?”
그러자 하이든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작곡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감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요. 나는 나의 모든 곡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 앞에 드릴 것입니다.”

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는 당시의 열 두 제자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요 6:39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창세 전부터 미리 예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생명의 떡에 초대된 자들입니다(요 6:35, 37, 44, 65). 우리도 “아들에게 주신 자”입니다. 우리가 정말 아들에게 주신 자가 뫘다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관계처럼 형성되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우리는 예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왜! 제가 이 어려운 설교를 여러분에게 합니까? 예수님에 대해서만 증거하기를 원합니까? 바로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의 관계처럼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원해서입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그냥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산타크로스의 선물 보따리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원문으로 직역하면 pavsh” sarkov”(파세스 사르코스) ‘모든 육체’를 말합니다. 모든 인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날에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요 5:27).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미 십자가의 죽음은 패한 것이 아니라 승리와 영광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 영광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호주 가까이 있는 뉴 헤불리지스 제도에 있는 30개 섬의 이야기입니다. 백인이 들어가 본 적이 한번도 없었던 이 지역에 영국선교사이며 학자인 죤 월리암즈가 1839년11월 20일에 처음으로 상륙했습니다. 그러나 상륙한 즉시 해변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두 번 째로 해리스 목사가 들어갔습니다. 그도 3일이 안되어 학살되었습니다.
셋째로 죤 골든 내외가 들어가 원주민과 사귀는데 겨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오래 견디지 못하고 백인을 증오하는 토인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후 맥네어 선교사가 도전했습니다. 그도 결국 1년도 못되어 암살되었습니다. 다섯 번째로 상륙한 사람은 수년 전에 순교한 죤 골든의 동생이었습니다. 골든 목사는 가까스로 받아들여져 현지의 언어를 연구하고 신약성경 번역을 착수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괴한이 그의 서재에 침입했습니다. 그는 도끼로 처참하게 타살되었습니다. 그의 피가 마침 번역하고있던 사도행전 7장, 즉 스데반이 순교한 장면의 원고를 적셨다고 합니다. 그후 일곱째 선교사인 로버트슨 목사가 상륙했습니다. 비로소 로버트슨 목사에 의해서 30개 섬에 있는 전 주민이 기독교인이 되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계속해서 실패하는 선교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리 그 결과를 내다보시고 계속해서 수확이 이루어지도록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놀랍습니다. 철저히 헌신된 사람들을 보내시고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수확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선교의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죽기를 작정한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요 12:25). 십자가의 죽음은 끝아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는 부활과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영생은 …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중보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부르짖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렘 9:24)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면, 예수님을 모르면 영생이 없습니다. “아는 것이니이다”의 ‘안다’는 ginwvskw(기노스코)라는 말로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다른 지식은 체험을 통해서 알게된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에 어떻게 체험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령을 받아 알게되는 것을 말합니다. 요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은 요 3:5절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성령으로 나자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본 절은 완벽한 삼위일체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동시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수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인격이 동일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두 분 중에 한 분만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전세계의 종교 중에 하나님만을 믿는 종교는 유대교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구약의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이슬람은 하나님을 믿지만 우리가 믿는 야훼 하나님과는 거리가 있음을 느낍니다. 또한 이들도 예수님은 믿지 않고 마호멧을 믿고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모릅니다.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고 영생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하나님께 기도한 예수님의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기도하라②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6. 이렇게 기도하라②) / 본문 : 마태복음 6:11-13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지난주에 주기도문의 전반부에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로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둘째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셋째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도를 마치고 나면 나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해야합니다. 오늘은 그 세 가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1절)
저는 40일 금식기도 하셨다는 분들 보면 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끼만 안 먹으면 현기증이 납니다. 요즘은 더워서 그런지 배가 더 자주 고파옵니다. 자다가도 배가고프면 일어나 무엇을 먹고 자야합니다. 저는 먹는 것만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한 때 서울에 올라와서 혼자 지낼 때 반찬이 없어서 소금물에 밥을 말아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소금이 맛을 내는 것이지만 제가 소금물에 밥을 말아 먹어보고는 정말 못 먹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행기타고 실수를 한 적이 있는데 커피에 소금을 설탕인줄 알고 탔습니다. 그냥 눈 딱 감고 먹어보려고 했는데 정말 못먹겠더라구요. 저는 어려서 감자, 옥수수를 얼마나 많이 먹고 자랐는지 지금도 몇 가지 이해를 못합니다. 돈주고 감자, 옥수수 사먹는 것하고 물 사먹는 것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만큼 이것만 질리도록 먹고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성장하면서 우리 집이 못살기 때문에 그렇게 먹고산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집 하얀 쌀밥만 먹는 것이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 못하는 우리 집사람은 쌀에다 영양 밥을 한다나요 하면서 잡곡을 섞습니다. 저는 이것을 먹기 싫은데 우리 집사람은 저에게 뭐라고 합니다. 신경 써서 잘해 주었더니 배부른 소리한다고만 합니다. 제가 성장해서 선교지 여행하면서 알게된 것인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사나 보았더니 별 것 안 먹더라고요. 서양사람들도 옥수수 감자 먹으며 살고 있더라구요.
주님은 우리를 위한 첫 번째 기도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오늘 먹을 하루 양식을 말합니다. 미리 싸둘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호주에 가면 집세를 보통 월세로 내지 않고 주세로 냅니다. 그러니까 한 주만 쉬고 일 안 하면 금방 집세가 밀리는 겁니다.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는 노동자에게 하루 양식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만큼 잘 살게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실 이 나라 백성들이 얼마나 못 먹고 못살았습니까? 우리말에 사람보고 하는 말이 “그놈 참 짜네”, “싱거운 놈 다 봤네” 그럽니다. 오죽하면 사람의 특징을 말할 때도 먹는 맛에 비유하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시계가 안가면 밥 줘야 한다고 그럽니다. 시계도 밥을 줘야 하는데 사람이 오죽하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고백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매월 책 사본다고 10만원씩 도서 비로 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 책 사는 것이 아니라 뼈다귀 많이 사먹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언젠가 한번 이동휘 목사님과 선교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님이 제일 먼저 선교지로 생각하시는 나라나 지역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라고 제가 여쭈었습니다.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래도 사람이 먹을 곳이 있는 곳은 괜찮은 곳이지요. 사람이 굶어죽어 가는 지역이 제일먼저 선교할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 선교회는 나른 지역도 많이 하지만 아프리카지역과 아시아에서도 아프가니스탄 같은 지역을 우선 선교지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겪은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10년 전 아프리카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선교사 집에 며칠간 머문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들은 한 현지인 가정부의 서글픈 이야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그 가정부는 점심밥을 선교사 집에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밥을 얼마나 많이 먹는지 배가 터질 정도였습니다. 선교사가 “왜 그렇게 많이 먹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동네와 집에서는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지낸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가정부는 선교사 집에서 점심과 배고픔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입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밤 10시에 밥을 먹는데, 그 이유는 잠자기 직전에 먹어야 밥이 쉽게 꺼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오래 전 우리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손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장난치고 뛰어 다니면, 할머니들이 “뛰어 다니지 마라. 밥 쉽게 꺼진다”며 뛰어 다니는 아이들을 나무랐습니다.

인도에 갔을 때 본 일입니다. 오토바이를 탄 아이가 음식 배달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다리에서는 피가 나오는데 다리가 얼마큼 다쳤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자기의 다리는 안중에 없고 깨뜨린 그릇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주어 모으고 있었습니다. 주인에게 쫓겨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장애인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를 선교사에게 듣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먹고살기가 하도 어려웠던 그는 캄캄한 밤에 철로에다 한쪽 발을 얹어 놓았습니다. 결국 지나가는 기차가 다리를 절단했고, 불구자가 된 그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구걸하게 되니 굶지 않고 살아갈 수는 있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하루에 6만 여명, 연간 2,000여만 명이 굶어 죽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전 세계 60억 인구 중 7명당 1명인 8억 4천만 명의 사람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남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남쪽에 살고 있습니다. 굶주림은 생명을 위협할 뿐 아니라 시력 약화, 무력증, 성장저해를 초래하며 질병에 대한 저항력 약화시킵니다. 전 세계 15세 미만 어린이는 인구의 1/4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매년 1억 4천만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고 있는데, 그 중 4/5 이상이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나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개발도상국의 어린이 가운데 약 10%는 만 5세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매일 24,000명의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고 있으며, 매년 1천여 만 명의 어린이들이 안타깝게도 영양실조와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고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는 하루 평균 1만 2천여 톤, 8톤 트럭 1,400여대 분이나 된다고 합니다. 1년에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는 약 410만여 톤으로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15조원에 달합니다. 이제 우리는 나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돕고 있는 남아공의 김형주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남아프리카의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돈 있는 백인들은 천국생활을 돈 없는 흑인들은 지옥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에 나온 흑인들이나 구걸해서라도 끼니를 채울 수 있지만 흑인 밀집지역 사는 노약자들은 이들이 구걸해온 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들의 거주지에서 실시하는 구제사역을 통한 복음전파는 많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포체스트룸은 아주 조용한 학교 도시입니다. 반면에 인근에 대단위 흑인 밀집지역들인 잉까겡 등 큰 시골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헌금을 보내지는 않지만 월 10만원씩 보내는 이곳 잉까겡 지역의 흑인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배고픈 사람 사정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배고픈 이들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12절)
두 번째 기도의 제목은 용서입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의 죄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 한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죄”로 번역된 이 단어는 ojfeilevta(오페이레마타)로 빚(debt) 또는 부채(loans)를 말합니다. 이 죄를 용서해 주는데는 십자가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면 그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용서를 못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자신이 범죄한 사실이 하나님께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남의 죄가 작게 나타나며 반면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끼친 죄가 크게 보이는 사람은 자신이 범한 잘못은 작게 보이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자세는 내 자신에 대해선 엄격하되 타인에 대해선 너그러워야 합니다. 이것이 반대로 되면 교만과 독선으로 치닫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다 옳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다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축복하신 것은 이 말씀을 잘 따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사람은 선천적으로 풀지 않으면 못삽니다. 얽어매어서 되는 민족이 아니라 풀어주어야 되는 민족입니다. 싸움을 하면 으레 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따지지 말고 풀어버려?”라고 말합니다. 화가 나면 ‘화풀이’를 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시름풀이’를 합니다. 원한도 풀고 회포도 풉니다. 심심한 것은 이미 풀어진 상태인데도 또 풉니다. 그것을 심심해서 푸는 것 ‘심심풀이’라고 합니다. 푸는 것이 심리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몸도 풉니다. 임산부가 아기를 낳으면 몸을 푼다고 합니다. 코가 답답하면 코도 풉니다. 다리가 아프면 다리도 풉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도 풀어야 합니다. 이런 민족성이 있는 우리민족이 원한을 가지고 살아가겠습니까? 다 푸시기를 바랍니다.
마 18:24-35에 보면 일만 달란트를 빚졌던 자가 가까스로 자기 빚을 탕감 받고 길을 나서던 중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받은 탕감의 은혜를 잊고 자기가 입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액수를 빚진 채무자를 자기 옥에 가두었다가 후일 이 일이 발각되어 자신도 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마태는 35절로 이 비유를 정리하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소개합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형제의 그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예수님은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물음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관념상 7은 완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는 것은 완전한 용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자기 이웃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용서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유럽 봉건시대 때 어느 성주가 다른 성주를 미워하여 기회만 있으면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데, 한번은 자기 적이 자기의 영토를 지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주는 사람을 숨겨놓고 적이 지나갈 대 죽여버리라고 하였으나, 그 곳 주교가 이 사실을 알고 간절히 “성도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니 용서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거절하자 주교는 예배는 드리고 가라고 하여 성주와 부하들을 모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의 마지막으로 주기도문을 드리는 것이었다. 주기도에는 “우리가 우리 죄를 용서하였사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하는 부분이 나온 것입니다. ”이제 주기도를 드릴 때에는 나를 따라서 한 마디씩 따라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희롱하거나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저편 성주의 죄를 용서하고 이 기도를 하겠습니까? 용서해 주지 않고 이 기도도 하지 않겠습니까?” 성주는 가만히 생각해 보더니 죄를 용서해 주고 기도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3. 우리를 시험(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13절)
한글 개혁성경에서 사용된 ‘시험’(peirasmon:페이라스몬)이라는 말은 ‘유혹’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시험(test)하시지만 결코 우리를 유혹(temptation)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유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뜨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악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도 않으십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유혹)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유혹)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유혹)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유혹’은 약 1:14-15절에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시험(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의 기도는 자신이 언제든지 유혹을 받을 수 있다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가롯유다가 이 유혹에 빠졌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가르쳐준 이 기도를 열심히 했더라면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의 “다만:ajlla;(알라)”은 “그러나, 도리어”라는 반의적인 접속사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두 가지의 경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만”이라는 단어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만 “굶어죽게 되더라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에 대해서 다 용서하지 못했을 지라도”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내 영혼을 사단으로부터 지키는 것입니다. “다만”이라는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앞의 기도에 비해서”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다른 모든 기도의 제목보다는” 늘 우선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에베소서 6장 11-17절에 보면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나를 위한 최종적인 기도는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간절히 구할 것입니다. 막 10: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아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마칩니다. 이 부분은 주기도문 초두에 나오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라는 기도와 짝을 이루며 주기도문 전체를 감싸는 송영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이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근원이요 역사의 주인이라는 확신에 찬 송영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것은 세속적인 복에 대한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인간을 위한 기도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기도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의 삶이 전제될 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눅12:31)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열려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역대상 29:10-11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이심이니이다.”
기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나의 아버지로 믿는 일입니다. 믿음이 없는 기도는 시끄러운 공허한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 : 주기도문의 ‘대개’

 

이렇게 기도하라①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5. 이렇게 기도하라①) / 본문 : 마태복음 6:9-10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캐나다에서 목회 하시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목사님이 서울에서 부 목사님으로 계실 때 겪었던 일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너무 길게 기도를 하시는 겁니다. 주일저녁에 집사님이 하도 길게 기도하시니까 나중에 성도님들이 주무시는 겁니다. 누가 좀 이제 말려 줬으면 하고 생각할 때 목사님이 다가가셔서 집사님에게 줄이시라는 신호로 가까이 가서 바지춤을 잡고 살짝 당겼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이 손으로 탁 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사단아 물러가라!” 그러시고 계속하십니다. 이쯤 되면 이제 말릴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아이스크림을 놓고 기도하는데 어찌 오래하는지 국내의 정치문제를 비롯해서 세계의 기아문제, 선교 등의 기도를 합니다. 이런 기도를 흔히 세계일주 기도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 15분하고 났더니 아이스크림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라면 놓고 이렇게 길게 기도하면 라면이 배가되는 축복을 보게됩니다.

제가 시골교회에 다닐 때 주일저녁 예배 때 있었던 일입니다. 작은 교회다 보니 봉사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한 분 한 분을 위해 기도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으로 시작해서 주일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성가대원들
그리고 피아노 치는 강…
또 다시 피아노 치는 강…
하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다시 피아노 치는 강…
하시면 기억하실 것 같아서 그렇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또 다시 피아노 치는 강…
하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떤 분이 킥킥 하시는 것입니다.
드디어 많은 성도들은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다행히 목사님께서 피아노 치는 강 자매로 마무리하시게 하였습니다.

기도를 단순히 좀 길게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또한 공중 기도에서는 좀더 잘 하려고 하다가 그만 이런 실수를 하게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단순 실수보다는 정말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기도할 때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3세 가지 주의를 주셨습니다. “첫째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둘째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셋째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앞의 세 가지 경우처럼 이방인과 같이 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누가복음 11:1절에 보면 “…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1장과 본문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제자들은 이제 새로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 역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줄 필요성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 답안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의 ‘이렇게’(Ou{tw”:후토스)는 단지 자구적(字句的)인 답습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앞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쓸모 없는, 아무 효과도 없는 즉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기도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공허한 기도가 되지 않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하려면” 지금부터 말씀하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즉 정신과 내용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그 순서상의 방법까지도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배운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자기생각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하면 되지 무슨 기도를 배울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배워야 합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하라”(proseuvcesqe:프로슈케데)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이러한 기도를 단 한번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때마다 이러함 모범을 따라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이렇게”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도는 먼저 대상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그래서 먼저 부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화를 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화를 걸어야 비로써 대화가 가능합니다. 내가 원하는 사람과 전화하기 위해서는 전화번호를 바르게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원하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미 기도의 대상이 정해졌다면 어느 정도는 할 말이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전화해 놓고 말 안 하면 전화한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또 어떤 분은 전혀 그 사람에게 필요 없는 말을 합니다. 마치 엄마 불러놓고 아빠한테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직 말을 못하는 아이가 전화통을 잡고 늘 “어버버…”그러면서 노는 겁니다. 그런데 하루는 길게 “어버버..”하면서 전화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엄마가 받아보니까 저 쪽에서도 똑 같이 어떤 아이가 “어버버…”하면서 둘이 통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끼리 전화를 해서 한번 만나자고 했습니다. 만나서 보니까 저쪽 아이가 엄청 덩치가 큰 것입니다. 그리고 놀다가 한방 맞고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전화벨만 울리면 피하는 겁니다. 전화에 해한 좋은 나쁜 추억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화한 상대가 말을 잘 받아주고 또 내가 기분 좋게 내 마음을 다 터놓고 이야기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자기 이야기만 하고 끊는 분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말만 먼저 잔뜩 늘어놓고 마치 예의 없이 전화를 뚝 끊는 분처럼 한다면 하나님도 기분 나쁘실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의 시작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해야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이란 이름은 ‘두려움’을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란 단어는 두려워서 입술에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이름을 발음하거나 쓰기 위해서는 ① 목욕을 하거나, ② 오랜 세월 기도한 후, ③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거룩한 옷을 입고 불렀습니다. ④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 이름이 나오면 묵음으로 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그저 ‘아도나이’ 즉, ‘주님’이라고만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구약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아버지와 같이 가까운 분으로 다가오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내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생각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 이름만으로도 존귀하신 분입니다. 영원토록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하셨던 분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핍박가운데서 인도해 주시며 홍해를 가르시며 마른 아론의 지팡에 움이 돋게 하시며, 바위에서 샘이 나게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이며 우리 죄를 속하려 당신의 독생자를 주신 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또 부르고 또 불러도 또 부르고 싶은 거룩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는 하나님을 위한 간구 3가지, 나 자신을 위한 간구 3가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 첫 번째 간구가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간구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요청입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 115:1)
캠블 몰간은 “기도의 첫째 목적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얻으려는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구하는 활동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순서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간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요 12:28)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이요, 구원하신 목적, 우리가 추구할 최고의 사항입니다. 아버지가 높아지면 아들도 높아집니다.

성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이름은 ‘여호와’로 7,040회이고, 다음은 ‘하나님’으로 4,000회, 사람으로는 ‘다윗’으로 1,000번 정도, ‘여호와 하나님’은 11,040회나 나옵니다. 가히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은 그 분의 품성을 의미합니다. 이름은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신 인격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나루에서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레 24:16) 한 것은 상대 장사의 성품을 물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속성, 규례, 말씀, 사역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이 뜻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며 그 분의 독특성과 하나님 됨과 성품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고 했습니다.
파스칼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케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고 말씀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 실현에 있습니다. “나라이 입하옵시며”는 주기도문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기원입니다. 여기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막 4:11, 막 30:9) 혹은 ‘천국’(마 3:2, 마 4:17, 마 5:3), ’왕국‘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제일 처음으로 전파하신 말씀이요, 주님의 전도의 목적이요, 주님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또 천국이 임하는 것은 성도들의 최종 목적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란 간구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서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 건설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기뻐하며 이것이 자신의 삶의 목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시작은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였습니다.
계속되는 사역 중간 역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였습니다.
끝도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세 가지 시간적인 영역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과거의 것으로써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고 말했습니다(마 8:11, 눅 13:28). 또 현재의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는 현재의 사실입니다. 또한 미래의 것으로 이해되는 천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끝 날에 비로소 완성되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일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구원받기 위함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뜻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6-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하신 말씀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요 6:38-39절에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속성이 있습니다. 첫째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 6:17) 사람의 뜻은 잘 변합니다. 아침에 목적한 것이 저녁에는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둘째 불가항력적이어서 누구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롬 9: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입니다. 셋째 결국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사람의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국 어찌하든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왜 이런 기도를 하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참여하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나를 포함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갑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에게는 다 광고하고 나만 빼고 가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함께 가시기 위함입니다. 이 거룩한 부름에 아멘으로 따라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사 때 개척한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매일 예배를 드린 후 축도 대신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항상 마쳤습니다. 세월이 흘러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이제 축도 할 수 있다는 기분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물론 목사 안수 받은 다음 주일날 성도들에게
첫 번째로 할 축도 연습을 무진장했습니다. 모든 분들이 다 웃으시겠지만요. 드디어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이제축도 할 시간이었습니다. 전 자신 있게 손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구주 예수그리스도은혜와… 축도 초반부를 시작하는데 어딘 선가 이제는 우리구주 예수그리스도 은혜와 라고 따라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기저기서 다 따라하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하늘아버지의 거룩하신 은혜와해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그만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로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기도문으로 갔다가 다시 축도 문으로 갔다가 왔다갔다 하다보니 그냥 아멘이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우리 사모가 축도를 모르고 즉 주기도문인지 잠시 착각하고 따라했고 초신자들이 성도들은 축도가 뭔지도 몰랐고 사모가 따라하니 따라했던 것입니다. 예배를 마친 다음에 성도들이 하는 말! “목사님 ! 주기도문을 잊어버리시면 어떻게 해요?”
“목사님 때문에 우리도 착각했잖아요.” 하는 것입니다. 사모가 따라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저만 완전히 망신당했습니다.
 

기도할 때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4. 기도할 때에) / 본문 : 마태복음 6:5-8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았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 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 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 내용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내한하여 얼마 안되어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드린 기도문입니다.

저는 이 기도문을 성경처럼 읽고 또 읽었습니다. 특별히 제가 힘들다고 느껴질 때 더 많이 읽었습니다. 어느 한 구석 외식적인 흔적이 보이질 않습니다. 솔직 담백하면서도 결코 구부러지지 않은 믿음을 가진 기도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했지만 결코 불만이 섞여있지 않았습니다. 이 기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2-3)라고 한 말처럼 불평의 내용도 없습니다. 반대로 언더우드는 눈물로 기뻐할 날이 올 것인데 그날을 위해 현재의 믿음을 붙잡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언더우드가 이 기도를 드린지 63년이 지난 1948년 5월 31일에 대한민국 첫 국회가 열렸습니다. 이날에 국회의원들 전원이 기립한 가운데 이윤영 목사님이 기도하고 대한민국 국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복을 내리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셔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셨으며 세계인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써 역사적인 환희의 날이 우리에게 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드러나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하나님. 아직까지 남북이 둘로 갈린 이 민족의 고통과 수치를 씻어 주시고 우리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민생의 도탄이 오래 갈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만 확대될 것이오니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속히 이 땅에 임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독립을 주신 하나님, 이제는 남북의 통일을 주시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어떤 자세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기도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기도는 그 어떤 행동보다 더 즉각적인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5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 7절 또 기도할 때에… 세 번 나옵니다. 이 말씀을 명심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때에”라고 번역된 호탄(o{tan)은 “언제든지”라는 뜻인데 가정법 현재시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규칙적인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 기도의 효능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잘못된 기도를 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인간세상에서 볼 수 있는 제일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 대표적인 기도가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는 기도입니다. 외식하는 자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① 악하면서도 선을 가장(pretence)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남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2:15-18).
② 자기 만족에 도취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속이는 유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경건한 체 하지만 금방 발각됩니다(9:1-5). 예수님 때 바리새인의 기도가 그랬습니다.
③ 외식을 하면서도 자신과 하나님을 위해 가장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유형입니다. 가장 완벽하게 외식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으면 그 행위를 보는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이런 외식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기도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미래형으로 이 말을 듣는 이후로는 허황된 위선적인 잘못된 기도를 하지 말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런 외식의 유형에 대해서 두 가지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이 사람들의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경건 생활을 알리려는 수단으로 하루 세 번씩 회당에 올라가 기도드렸습니다(눅 18:9-14, 행 3:1, 10:9). 또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자세는 엎드려서(민 16:22, 단 7:17, 계 11:16), 무릎을 꿇고(대하 6:13, 눅 22:41, 행 9:40), 또 앉아서(삼하 7:18), 또는 서서(삼상 1:26, 막 11:25)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신체적 자세를 지적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동기를 문제삼고 게신 것입니다.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들어주실 기도란 없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철이 없던 시절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도사 때 삼각산에 올라가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바위에 그럴듯한 모습으로 앉아 목소리는 오고가는 사람이 다 들을 정도로 목청을 높여 “주여~” 소리를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마치 경건한 척하는 유대인들처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드릴 때 얼마나 내 자신이 하나님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거짓말이 탈로 난 어린아이처럼 왜 창피한 것 있잖아요.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예수님이 공적 기도를 금하신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초대 교회의 공적 기도에 대해서 금하지도 않으셨으며 오해하지도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했으며 사도행전 1:24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가룟유다 대신에 제자를 뽑을 때 하신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어도 합심하는 기도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공중에 나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외식하는 자의 기도와는 반대의 개념으로 하나님과 자신과의 만남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런 장소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골방”(tamiei’ovn:타메이온)은 “창고, 밀실”을 말하는 용어인데 이 어원은 “자르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세상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밀실은 정치하는 곳이 아닙니다. 밀실은 하나님과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민족의 선지자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사 26: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언이 말씀으로 마지막 때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전에 문설주에 피를 발라 유대인의 표시를 함으로 하나님이 애굽의 장자는 모두 죽이고 이스라엘의 집은 유월하신 하나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골방”은 우리를 환난 날에서 피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 65:24) 하나님은 우리 한국사람보다 더 성격이 급하신 것 같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뜻대로 드려지는 기도는 부르기 전에, 말을 마치기 전에 들으십니다.
스펄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종종 예배 장소에 있으면서도 거룩하지 않은가?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기도 골방에 들어가는 것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밀은 좋아하지만 그 밀을 빻지는 않는다. 그들은 옥수수를 얻게 될 텐 데도 그것을 모으러 들판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은 기도의 골방을 떠나기보다는 사자 굴에서의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우리 주앙교회가 기도의 골방이 되기를 바랍니다.

7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산상수훈에서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세 번나옵니다(5:47, 6:32). 본문은 두 번째 나오는 것입니다. 갈릴리 지방은 이방 지역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의 출입이 잦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섞여 살고있어 이방인의 관습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5, 6절에서 잘못된 유대인의 기도의 문제를 지적하실 때는 기도의 동기적 측면으로 기도의 장소와 태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이방인들과 비교를 통해서는 내용적 측면을 강조하셨습니다. “중언 부언”(battologhvahte:밭타로게세테)은 이곳에 단 한번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 단어의 어원을 우리가 분명히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단순하게는 이 단어의 뜻은 “지루하게 재잘거리다”입니다. 별 의미 없는 말을 반복적으로 길게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일종의 이방인들이 행하는 주문(呪文)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주문을 하루종일 외운다거나 몇 번을 반복하면 효력이 강화되어 들어주실 것으로 생각하고 하는 어리석은 신앙관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기도에 있어서 전혀 반복적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중언부언이란 중요하지도 않으면서 형식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정말 간절히 기도할 것이 생기면 다른 것은 생각도 안 납니다. 오직 그 문제만 간절합니다. 밤새도록 그 기도만 하게 되지 다른 기도는 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밤새도록 같은 내용을 반복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잡히시기 전날 밤 온 밤을 새우며 기도 하셨습니다. 그 때 반복적으로 같은 내용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합당한 기도입니다. 마땅히 드려야할 기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8절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듯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하면 우리의 기도는 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일학교 유치부 교실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기도하려는데 계속해 우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다가가 물어보았습니다. “왜 울지?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거란다. 울지 말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애기해봐 착하지?”
“선생님 그게 아니에요. 지금 기도하려니까 생각났는데, 제가 어젯밤 아빠를 위해 기도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미키 마우스’를 보느라 잊어 버렸어요. 우리 아빠가 아프거든요. 하나님이 내가 기도를 안 해서 우리 아빠 병을 낫게 해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선생님.”
우리도 이 아이와 같이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신의 일이 잘 안되면 네가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서 그런가? 열심히 기도하지 않아서 그런가? 말씀을 읽지 않아서 그런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우리처럼 그렇게 옹졸하신 분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구하면 주고 그렇지 않으면 주시지 않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수동적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만큼 적극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우리는 은혜아래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감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축복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천합니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3. 추천합니다) / 본문 : 요한복음 6:27-29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이영제를 추천합니다.
왜냐하면 반장이기도 하지만 행동도 바르고 좋은 점이 나름대로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제를 추천합니다.
우리 반 좋은 아이들 추천 / 추천자:이영제 추천인:지강현
이 글은 상해한국학교 4학년 1반 네이버 카페에 올려진 내용입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은 이 아이들과 같이 서로 추천하고, 추천 받을 수 있도록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미국비자를 받으러 갔다가 4번을 떨어진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에 인터뷰하러 갔는데 영사관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직업이 목사라고 하니까 “당신 선배들이 약속을 안 지켰기 때문에 당신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목사님들이 돌아온다고 하고 미국 가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눌러앉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나는 다르다, 그분들하고 나는 다르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알겠다”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데이콤에서 무료 연수시켜 주겠다고 하고, 또 L.A. 한국인의 날에 초청을 받아 가야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또 비자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소득신고서류를 제출하라느니, 통장사본을 제출해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저는 소득이 옛날이나 지금이 없는 사람입니다. 통장 역시 지금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뭐하나 보여줄 것도 제출할 것도 마땅치 않은 것이지요. 가나 마나 였지만 혹시나 하고 갔었지요. 그러나 역시나 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0년에 미국비자 10년짜리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궁금하시지요? 제가 뭐 변한 게 없는데요. 그것은 바로 추천이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추천서류를 첨부 안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들 떠도 안보더라구요. 그런데 이번에는 추천인이 다 아는 분이었습니다. 미국 빌리그레함센터에서 빌리그레함 목사님의 사인이 있는 서류가 첨부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터뷰하러 갔는데 벌써 물어보는 것이 다르더라구요. “미국 가시려고요.” “예” 그리고 끝났습니다. 10년짜리 비자를 받았지만 10년이 넘게 걸린 비자였습니다. 너무 좋아서 그 비자 쓰다듬고, 쳐다보고 오다가 나무 들이받아 미국대사관 주변의 나무는 껍데기가 다 벗겨졌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서류 동봉해서 안됩니다. 도 닦아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추천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들이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추천만 가능하다고 말하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 추천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오늘 본문 27절 “…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 유일하게 추천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메시야’ 특별히 보내신 분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추천하셨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성경에서 인치심을 받았다는 말고 ‘증거’를 받았다는 말은 모두 하나님이 추천해 주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각 지파별로 인 맞은 자의 수가 나옵니다. 주님이 추천한 사람의 수라는 것입니다. “인치신”으로 번역된 원문 ‘에스프라기센(ejsfravgisen)’은 ‘인봉하다, 표시하다, 증명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들을 때 연상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구전 자료인 미쉬나(Mishan)에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흠 없는 것을 제사장들이 조사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물로 드려지는 양이나 염소가 흠이 없으면 승인하는 표시로 도장을 찍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흠 없는 제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본문 27절은 재미있게 구성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질문을 역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그런데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라는 것입니다. 세 구분으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부분에서 확인된 것입니다.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입니다. 하나님의 추천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뒤에 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요한복음 6장 1절에서부터 오병이어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그 느낌이 달랐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늘 궁금해하던 이 분이 누구의 능력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 12:49-50) 예수님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치신 자”라는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은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오병이어와 같은 일이 얼마든지 자주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또한 우리를 추천해 주시지 않습니까.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 피아니스트가 살았습니다. 그는 피아노 독주회를 준비하고 지방신문에 광고를 내는데, 당시의 유명한 음악가인 리스트의 제자라고 자기 소개를 합니다. 물론 거짓입니다. 리스트를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연주회가 있기 며칠 전 리스트가 이 마을에 오게 되었습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거짓이 탄로 나면 음악가로서의 자신의 일생은 끝장나고 마는 것이 됩니다. 전전긍긍합니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이제는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리스트가 마을에 왔을 때, 그는 백 배 용기를 내어 리스트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빕니다. “제가 선생님의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제가 아직 부족함이 많은 피아니스트인 주제에 감히 당신의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러자 리스트가 조용히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당신은 크게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앞에서 한번 연주해보시오.” 연주를 시킵니다. 그는 벌벌 떨면서 리스트 앞에서 피아노를 칩니다. 리스트는 연주를 들으면서 중간중간 멈추게 하고 고쳐줍니다. 연주를 마치자 리스트가 그에게 말합니다. “단 한번이라도 내가 당신을 가르쳤으니 이제 당신은 분명히 내 제자입니다. 그리고 연주회에서 당신 연주가 끝나면 제가 한 곡 연주를 하겠습니다. 관객들에게 그렇게 소개하십시오.” 그 연주회는 엄청난 기쁨과 영광의 연주회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인일 때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떨어진 명령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양식을 주님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사실상 할 일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썩지 않는 양식,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데 이 양식을 주님이 주시겠다고 하니 이해가 안됩니다. 그래서 다시 주님께 질문합니다.
28절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영생을 위한 양식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그 양식을 만든다면 불로초를 만드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을 위한 양식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먼저 추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영생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믿음 위에는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28절에서 질문할 때의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의 ‘하나님의 일’(e[rga:에르가)은 복수로 나와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답하실 때 ‘하나님의 일’은 (e[rgon:에르곤)으로 단수형으로 나옵니다. 사람들은 무슨 여러 가지 일을 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단 한번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인치심을 받아들일 차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추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직 나의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유일하게 구원해 주실 분임을 인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다시 주님이 우리를 하나님께 추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음악에 관계된 이야기 하나 더 하지요.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지휘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 1867-1957)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9살 때 첼로와 작곡 공부를 시작하였고 20세가 되던 해에 리오데자네이로의 이탈리아 오페라단에 입단하여 첼로 연주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페라단의 지휘자는 성격도 괴팍하고 실력도 부진했습니다. 단원과의 마찰이 심했는데 결국 솔로가수와 사소한 언쟁을 벌이다 짐을 꾸려 그곳을 떠났습니다.
‘이를 어쩐담…’
오페라가 무대에 올려져야 하는 날이 이틀밖에 남지 않은 것입니다. 느닷없이 지휘자가 없어지자 모두들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토스카니니를 지휘자로 임명하자고 추천했습니다. 하지만 지휘를 하려면 이 곡 전체를 외우고 있어야 했습니다. 토스카니니를 추천한 사람은 바로 솔로가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의 나이 겨우 20살이었습니다. 그 곡을 완전히 외우고 소화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 그 중에 제일 많은 단원이 말했습니다. “한번 시켜봐서 손해 날 것 없으니 이 자리에서 지휘를 시켜 보도록 합시다.”
이렇게 해서 토스카니니는 생전 처음 지휘대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가 곡 전부를 외우고 있는 것은 물론이요 그의 지휘는 완전히 사람들을 그 곡 속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 오페라의 상영은 대단한 찬사를 받았습니다.
토스카니니는 준비되었던 지휘자였습니다. 그가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그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강력하게 추천해 주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은 다시 올 때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당시의 죄악상을 보면서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박국 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이 하박국 2:14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오늘날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온 세상 가득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양을 돌보느라(삶의 우선 순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2. 양을 돌보느라(삶의 우선 순위)) / 본문 : 마태복음 5:22-24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A.D. 78년, 하얀 수염을 흘러내리며 베들레헴이라 불리는 마을 근교에 있는 오두막에 한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소년이 달려와 물었습니다.
“이스마엘 할아버지, 나는 오래 전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할아버지께서 언덕에서 양치는 목동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그 아기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얘기해 주세요. 할아버지께서는 그분의 부모님을 보셨나요? 정말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했나요?”
잠시 후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래. 나는 그때 그 목동들과 함께 있었단다. 그러나 나는 양을 돌보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에 굳이 가보려고 하지 않았단다. 결국 나는 그분을 볼 수 없었지.”
‘양을 돌보느라…’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목적과 우선 순위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리되지 않으면 뒤죽박죽이 됩니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에 주신 말씀 중에 ‘먼저’라는 말을 사용하시면서 세 번에 걸쳐 사람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분문 말씀은 그 중에 처음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아 이 당시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남의 문제, 죄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성품을 갖게 된 것은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죄를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죄를 범한 자를 돌로 치거나 문둥병 갖은 병이 생기면 진 밖으로 나가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와 전염병이 그 무리 안에 퍼질까 염려해서 내려진 조치입니다. 이런 배경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남의 죄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는 형제에 대해서 두 가지 욕을 하고 있습니다. 욕을 하기 전에 따라 다니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대상이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씨족 사회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한 형제입니다. 남에게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형제에게 그러면 되겠습니까? 제일 답답한 분들이 자기 가족에게 함부로 대하는 분들입니다. 아마도 너무 편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요?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너무나 쉽게 생각합니다. 아마 다른 분들이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데 유독 아내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사실 욕 안 합니다. 형제에게 제일 가까운 분에게 합니다.

두 가지 욕은 “라가”(@Rakav:흐라카)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텅빈, 무가치한, 우둔한, 멍청이”라는 말입니다. 또 한가지의 욕은 “미련한 놈”(Mwrev:모로스)으로 ‘라카’와 거의 같은 뜻이지만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히브리어 ’모레‘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 이 말은 도덕적인 배신, 반란, 악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라가‘라는 말은 ’어리석은 놈‘으로 지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저급하다는 말이며, ’미련한 놈‘(모레)는 ’추악한 녀석‘이라는 말로 인격적으로 천박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 두 가지 욕은 상대방에게 참혹한 상처를 남깁니다.
이런 욕을 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자신은 늘 선생의 위치에서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에서 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 1:7)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3:1에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중에 언제나 나는 가르치는 위에 있는 선생이고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배워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지간에도 부부사이에도 자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만 자녀에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그러면 아이들은 속으로 “아빠 머리에 피 마르면 죽어요.”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이가 제일 좋겠습니까? ‘친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부도, 자녀간에도 친구처럼 되면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고 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상대방에게 이런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 놓은 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막 7:11)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급한 것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형제와 화목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해결이 안되면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공회에 잡히게 된다는 것은 사법적으로도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줍니다.
구약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하나님이 찾으실 때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출 12:5, 민 28:11, 19, 겔 45:18) 하나님은 흠 없는 제물을 찾으십니다. 상처가 있는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도 육체적으로도 흠이 있으면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레위기 21:17-21 보십니다. “17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18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19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20 곱사등이나 난장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나 21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장애인은 차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흠 없기를 바라는 것인지 우리를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저도 팔이 부러졌습니다. 구약시대 같으면 레위지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이기적인 내 자신의 모습을 보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예물이 이러할 진데 예배 또한 그런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상대방에게 욕한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지옥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예물은 하나님이 받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것은 “양을 돌보느라”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은 위해 쫓아다니면서도 자신 때문에 상처받은 영혼들에게는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도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선악간에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빠르게는 이 땅에서 선악간에 그 축복과 저주가 임합니다. 그러나 이 생애에서만 다 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죽음 이후에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잘 이해가 안되지만 분명히 성경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광기에 휩싸여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목숨을 전쟁터로 내어 몰았던 나치 히틀러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또 한사람의 장군이 있습니다. 히틀러의 프랑스에 있는 애틀란틱 전선을 무너트리기 위해 공격 임무가 아이젠하워 장군 견장에 붙은 네 개의 별 위에 떨어졌습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101공수 비행단 병사들과 함께 작전 전야를 보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경이의 독수리”라고 불렀습니다. 병사들이 비행 준비를 완료하고 장비 점검을 끝냈을 때 아이젠하워는 일일이 병사들을 찾아다니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비행사 중 상당수는 그의 아들 또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들을 대하듯이 병사들을 대했습니다.
한 종군 기자는 호주머니에 두 손을 깊이 찔러 넣은 채 C-47기가 이륙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장군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했습니다.
이어 장군은 숙소로 돌아가 책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펜과 종이를 꺼내 메시지를 기록해 나갔습니다. 그것은 패배시 백악관에 전달될 메시지였습니다.
“우리의 상륙 작전은 …… 실패로 끝났습니다. …… 육해공군 모두가 최고의 용기와 헌신을 다해 작전에 임했습니다. 만약 이 작전에 어떤 과오나 실패가 있게 된다면 그 책임은 모두 내게로 돌려져야 할 것입니다.”
아이젠하워는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아니라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주님은 마태복음 7장에 가서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내게는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는 바로 자신이 스스로 선생이라는 착각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내 자신의 문제를 먼저 돌보고 나서 또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앞의 31절에 보면 “무엇을 먹을까 …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또 당시 상황으로 보아서는 먹고사는 문제도 큰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일상에 지나지 않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든지 하고 심지어는 동물들도 하늘에 나는 새도 그와 같이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더 다른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먼저 주일부터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예배하며 기도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일 입니다.
소련의 레닌 공산정권은 교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7일 동안 일하고 8일에 쉬게 하여 주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결과 국가적인 생산지수가 30%나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바꾸어 5일 일하고 6일째 쉬도록 했으나 마찬가지로 생산이 늘지를 않았습니다. 레닌은 할 수 없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7일에 쉬게 하였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도 기독교를 박해하기 위해 주일성수를 방해하였으나 레닌과 마찬가지 결과를 보았습니다. 주일성수를 방해하였던 레닌 공산주의나 히틀러 정권은 멸망하였습니다.
분단 다음 해인 1946년, 북한에서는 김일성 정권의 주도하에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11월3일에 실시하게 되었다. 이날은 주일이었습니다. 교회는 주일에 실시하는 선거를 반대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 지도자들이 투옥과 강제노동을 당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 들은 박해를 당하면서도 주일을 성수 했습니다.
오늘날, 별 큰 이유도 아닌데 주일을 지키지 않는 교인들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옛날에 우리 선조들은 주일을 지키려고 목숨을 내놓기까지 했었는데, 오늘날 우리는 별 이유도 아닌데 쉽게 주일을 범합니다.

6.25 전쟁 후 가난한 시절에 강원도 동해의 어느 마을 어느 권사님은 주일에 양식 배급을 준다고 하는데 양식 받으러 가지 않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양식 보다 주일성수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 권사님은 아들 형제를 데리고 서울 약수동에서 교회 개척을 했습니다. 교회 이름은 형제교회입니다. 늘 기도하며 살던 권사님은 교회에서 기도하는 중에 고요히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두 아들중 형은 지금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목사님이 되었고 둘째 아들은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여 집사님 한 분이 어느 날 목사님에게 찾아와서는 “목사님, 제가 하나님을 웃겼더니 하나님이 제 기도에 응답하셨어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물어보니까 이러한 내막을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오랜 시간동안 우리 남편을 위해 금식하고 통곡하며 기도도 해 봤지만 소용없었어요. 오히려 남편은 교회에 나올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요지부동이었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새벽예배 때 남편 구두를 교회 가지고 나와서 강대 상에 놓고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구두가 먼저 나왔사오니 주인도 이 구두 따라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요.
제가 기도하긴 했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우스워서 한참을 웃었지요. 그래서 그날 다른 기도는 하나도 못하고 실컷 웃다가 돌아갔는데 그 다음 주일날 남편이 갑자기 저를 따라 교회 간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더니 요즘 계속 교회에 나오고 있답니다. 제가 하나님 한 번 웃겼더니 제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