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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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4.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 본문 : 마태복음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미국교회에 ‘거북이 교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행동이 느린 것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거북이는 500일 동안 음식을 안 먹어도 죽지 않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보통 새는 열흘정도 굶으면 죽고, 개는 20일정도 굶으면 죽는답니다. 사람도 보름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면 죽습니다. 금식할 때 물먹으면서 하면 40일 정도는 견디지만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거북이처럼 500일을 아무 것도 안 먹었는데 살아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거북이 교인’이라고 한 것이지 이런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3:1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말한 사데교회 교인들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암 8:11)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는 시점에 사단에게 시험받으실 때, 사단을 물리치신 말씀입니다. 사단은 ‘떡’만을 강조하며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예수님도 인간이 육체에 메여있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떡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떡으로만”이라고 하십니다. 육체에 갇혀있는 사람은 떡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영혼’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육체에 갇혀있는 인간은 영혼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가 죽을 때까지도 모릅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떡으로만”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무엇을 삽니까? 기록된 말씀으로 삽니다.

1. 기록된 말씀

예수님은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냥 서술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사단의 시험에 대해서도 7절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셨고, 세 번째 천하만국을 준다고 시험할 때도 10절에서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기록되었으되(Gevgraptai:게그라프타이)는 ‘새기다’로 기록하여 보존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경험이나 힘으로, 지혜로 사단을 물리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십니다. 왜 기록된 말씀에 의지하십니까? 이 말씀은 지금도 생명력이 있고 사단을 능히 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시험을 늘 당하며 살아갑니다. 이 때마다 우리는 세상의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지식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보다 먼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십니다. 시험에서 이기게 하십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세계최대의 백화점을 운영하고 나중에 체신부 장관까지 역임한 존 워너메이커(1838-1922)는 말년에 사업가로서 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장에서 한 낡은 성경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저의 출생일인 1838년 7월 11일부터 오늘까지 무려 30,026일을 살아왔습니다. 저는 인생에서 투자한 것마다 많은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저의 투자 중 가장 성공한 것은 열두 살 때 2달러 50센트를 주고 빨간 가죽 성경을 산 것입니다. 바로 이 낡은 성경이 제가 한 가장 위대한 투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존 워너메이커는 벤자민 헤리슨 대통령이 그에게 장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워너메이커는 지금 교회에서 주일학교 봉사를 하고 있는데 주일날 교회에 가야하기 때문에 이것을 허락해 주면 장관직을 수락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장관직을 사양하겠다고 했습니다.

2. 모든 말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말씀도 생명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한 말씀도 능력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아직 이루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마지막 때의 심판뿐입니다. 이것 또한 이루어질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음을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리는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역사가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중시하고 계십니다. 하찮은 하나님의 말씀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말씀이라도 능력이 있습니다. 그대로 됩니다. 저주의 말씀도 축복의 말씀도 모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1732-1799)은 ‘하나님과 성경을 모르고 바른 정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 취임식 때 자신의 성경을 가지고 올라가 그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했습니다. 이것이 미국 대통령 취임식 때 공식 순서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영국과 싸워 미국을 독립시키고 국민들의 전적인 지지로 연임했습니다. 그리고 3선을 사양하고 고향 버넌 농장으로 돌아감으로써 대통령제의 소중한 모델을 만들어 주고 민주주의 밑바탕을 만들었습니다.
워싱턴은 전쟁에서 미국은 구한 건국의 아버지이지만 사실 그도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17세, 22세, 29세 때 말라리아에 걸려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19세 때는 천연두에 걸렸고 20세 때 늑막염에 걸려 청년 때에 병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급성 이질과 치아가 빠지는 고생을 했습니다. 그가 이런 고통을 이겨낸 것은 어머니의 성경교육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도 어머님이 가르쳐 준대로 늘 성경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고별연설에서 “국가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없이는 지탱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위에서만 이 나라는 든든한 나라로 세워져 갈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워싱턴을 기념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수도를 워싱턴으로 지었습니다.

3.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말씀은 그냥 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고 하셨습니다. 말씀은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주님도 우리를 지키십니다.
“말씀으로 살 것이라”의 본문은 신명기 8:3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생활 가운데서 만나를 먹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은 것입니다.
이 말씀을 먼저 예수님이 지키셨습니다.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39)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뜻대로 사신 분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사시고 그 말씀에 순종한 분입니다.
“말씀으로 살 것이라”에는 먼저 주님이 말씀대로 사시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말씀으로 살아야 된다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과학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의 상식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너무나 초보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재 과학자 뉴튼과 아인슈타인 박사는 “인체의 신비, 자연의 신비, 우주의 신비를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미친 사람이거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고 했습니다. 전세계 과학자 중에 90%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4. 과학으로 증명되는 말씀

마취제를 발견한 심프슨은 성경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늘 ‘수술 환자들이 수술을 받을 때 고통 없이 받을 수는 없을까?’를 늘 고민했습니다. 이 당시에는 아직 마취제가 개발되지 않아 수술환자들이 큰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심프슨은 성경 말씀을 묵상하다가 놀라운 말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 2:22) 그는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무릎을 치며 환호했습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고통 없이 환자를 수술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고 그의 몸 속에서 갈빗대를 빼내는 수술을 하셨는데도 아담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고 마친 것을 보면 분명히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는 그는 ‘무엇인가 예비 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연구에 몰두했고 드디어 1847년 마취제인 클로로포름(Chloroform)을 처음으로 발견했습니다.

해양학의 선조로 불리는 매슈 폰테인 모리(1800년대 후반)는 몸이 불편하여 큰아들에게 성경을 읽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큰아들은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시편 8:8)를 읽었습니다. 이 때 모리는 그 구절을 다시 읽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는 ‘바다의 길’이라는 구절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지상 도로에 대한 지도는 있었지만 ‘바닷길’에 대한 지도는 없을 때였습니다. 그는 흥분해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다에 길이 있다고 하셨으니 틀림없이 깊은 바다에도 길이 있을 것이다. 자, 나하고 찾으러 가자!”
그가 바다의 길을 찾아 떠난다고 할 때 주위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느냐며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으니 분명히 있다고 확신하고 바닷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결국 그는 바닷길을 발견했고 인류 최초로 ‘해양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세계최초로 1837년 전신기를 발명한 모스는 워싱턴에서 볼티모어까지 시험 전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전신기를 타고 간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입니다.
모스가 전신기를 발명한 후에 급속도로 라디오, 전화, TV등 전자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스가 전신기를 발명할 수 있었던 것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랭클린은 연을 이용해서 번개의 비밀을 알게되면서 전파를 통해서 의사 교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된 것입니다. 그는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그것으로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욥기 38:35)말씀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욥기 26:7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구가 공중에 떠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었습니다.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바다 끝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낭떨어지가 있어서 떨어질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욥기 38:16 “네가 바다에 들어갔었느냐”, 잠언 8:28 “바다의 샘들을 힘있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바닷물 깊은 곳에 샘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사실을 발견한 것은 1960년대에 해저 탐사 기관(S.N.R)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확인되었고 1973년 연구용 잠수함에 의해서 깊은 바다 물 속에 샘물이 있다는 것을 사진으로 촬영하게 되었습니다.
대기에 압력이 있다는 사실은 17세기 이탈리아 과학자 토리첼리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오래 전에 욥기 28:25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이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과학적 접근으로 깨달은 말씀은 없지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습니다. 제가 하는 일과 관련되어서 힘을 주었던 말씀은 에베소서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입니다. 저는 “오는 여러 세대”라는 말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초대교회 때 로마황제의 핍박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종말적인 상황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오는 여러 세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준비했습니다. 그는 13권의 성경과 87장의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저는 미래를 보고 일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사람들에게 칭찬 듣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바램은 하늘나라에 가 있을 때, 그 때 그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선교할 수 있고 잘 믿을 수 있다는 고백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다음세대를 위해서 준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조금 고생해도 우리 다음세대에게 복음을 전 할 수만 있다면 그 길을 택하십시다. 그것이 최선의 삶인 줄 믿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성경을 꾸준히 읽으십시다. 그 속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도우시는 손길이 있습니다.

주 음성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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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3. 주 음성 외에는) / 본문 : 요한복음 5:25-29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지난 2005년 7월 7일 영국런던에서 테러가 발생하여 5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영국수사당국은 처음에 범인을 잡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범인의 신원이 밝혀진 것은 정보당국의 수사 때문이 아닙니다. 테러가 발생했는데 가족이 돌아오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신고를 했습니다. 이중에서 파키스탄계 영국인인 ‘모하메드 사디크 칸’과 ‘저메인 린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추적하던 중에 그들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라낸 것입니다. 미국 NBC뉴스는 칸이 지난해 11월 파키스탄을 방문해 알 카에다 캠프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보도했습니다.
영국국민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요즘 영국 사람들은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집안에 슬픔이 생겼고 그 슬픔이 완전히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집안의 문제로 터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인인데 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민족이 국제사회로부터 부당하게 대접받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알 카에다가 훈련을 할 때 먼저 사상적으로 무장을 시킵니다. 미국과 연합군의 폭격으로 자신들이 당한 처절했던 사진을 펴놓습니다. 다리가 잘라지고 얼굴에 흉터가 생기고 어린아이가 죽어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자살폭탄이 아니라 더한 것이라도 할만큼 이들은 가슴이 뜨거워 옵니다. 민족을 위해서 항전할 것을 다짐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들어야 할 말을 바로 듣지 못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편향된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영국에서 태어나고 그 많은 교육과 시간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알 카에다 교육에 넘어갔습니다.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은 것입니다. 이들의 말은 죽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죽이고 자신도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은 다릅니다. 주님의 음성은 사람을 살립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음성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죽은 자들 과 생명

성경은 죽음의 종류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① 육체적 죽음(창 3:19, 히 9:27) ② 영적 죽음(엡 2:1) ③ 영원한 죽음(요한은 둘째 사망이라고 함, 영원한 지옥형벌)(계 2:11, 20:6, 14) 본문의 25절에 나오는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육체적으로 숨은 쉬지만 이미 죽어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28-29절에 나오는 “무덤 속에 있는 자”와 “생명 또는 죽음의 부활”은 영적 죽음뿐 아니라 영원한 죽음 심판을 의미합니다.
나사로는 죽은지 4일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 나사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에서 붕대가 감긴 체로 걸어나왔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 우리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신 예 표입니다.
본문 26절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창 2:7에서 인간에게 생기를 넣어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생명의 능력을 “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이 생명의 주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28절에서 이것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덤속에 있는 자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이 곧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

성경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기 대표적인 몇 사람만 소개하겠습니다.

노아
노아는 홍수심판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브라함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1)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
출애굽 하던 모세를 시내산으로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십니다. 이때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하셨습니다.

사무엘
사무엘상 3장에 보면 하나님은 성전에서 잠든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사무엘은 처음에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줄 알고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가 물었습니다.
“9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10)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순종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었으며,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으며, 모세는 출애굽 했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했습니다.

바울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던 사울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회개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누구든지 살아납니다. 주님의 음성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창조자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대항하거나 막을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늘 주님과 대화하세요. 그도 그러면 지나치게 우리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고하는 것이잖아요. 그런 대화만 하지 마시고 일상에서 늘 주님과 대화해 보세요. 기쁨이 일어날 겁니다. 살아나는 축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냥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입니다만 아담과 하나님이 대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담이 에덴동산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이브는 정말 예뻐요. 그런데 왜 그렇게 예쁘게 만드셨어요?”
“그래야 네가 늘 그 애만 바라보지 않겠니”
그러자 아담이 다시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이브의 피부는 정말로 부드러워요. 왜 그렇게 만드신 거죠?”
“그래야 네가 늘 그 애를 쓰다듬어주지 않겠니”
“그런데 하나님 이브는 좀 멍청한 것 같아요. 왜 그렇게 만드신 거죠?”
“그래야 그 애가 널 좋아할 거 아니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며 생각하십니다.

주 음성 외에는

요한계시록 3: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그랬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먹을 수 있습니다.

영국의 해외정보국(MI6)이 있는데 7.7 테러사건도 이 기관에게 많은 화살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런던 나이트클럽 테러 미수 사건 시 모하메드 사디크 칸을 비롯한 8명의 용의자를 체포해 폭탄테러에 많이 사용되는 질산암모늄 0.5t을 찾아냈음에도 칸이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감시 대상 인물에 올려놓지 않고 미국에서 받은 첩보도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관의 이름이 요즘 또 다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있습니다.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의 사망으로 이어졌던 프랑스 파리 교통사고 당시 사고차량을 몰았던 운전자가 영국의 해외정보국(MI16)의 첩보원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석간신문 이브닝 스탠더드는 2일 다이애나의 사망원인을 재조사하고 있는 런던 경찰청이 이 같은 의혹을 파헤치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운전사였던 폴이 영국 정보기관 요원이 확실하다면 ‘왕실을 배신한 다이애나가 피살됐다’는 음모론이 사실로 확인될 수 있습니다. 폴은 7년 전 다이애나와 연인 도디 파예드를 실은 채 파리 알마교 지하도를 과속으로 달리다 마주 오는 차량과 정면 충돌하는 교통사고를 일으켜 세 사람 모두 죽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영국사람들은 이신 전심으로 다 알고 있습니다. 다이애나가 사귀고있는 남자가 이슬람인 인데 이슬람인과 결혼하게되면 여자는 주권을 모두 포기해야 합니다. 영국 왕실은 이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일입니다.

이슬람은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종교입니다. 영국전체인구 6천만 명중 무슬림은 약 2백만 명 정도이며 이중 60만 명 이상이 적극적으로 이슬람 활동에 가담하는 무슬림으로, 이는 기독교보다 높은 비율입니다. 현재 영국 전역에는 약 600여 개의 모스크가 있으며 60여 개의 이슬람 학교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슬람공동체는 영국의 모든 영역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경제, 금융, 교수, 법률, 건강, 교육, 사회 봉사, 예술, 문화 등 영국사회의 모든 분양에 진출해 있습니다. 약2백만 명의 무슬림 중 55%가 영국에서 출생한 무슬림으로, 영국에서 기독교 다음으로 가장 큰 규모를 갖은 종교입니다.
이들은 중동, 북 아프리카, 서부 아프리카, 동부 아프리카, 서남 아시아, 동부 유럽, 카라비안(쿠바 아래의 카리브해 지역) 에서 이주한 이민자 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Urdu (파키스탄), Bengali (방글라데시), Arabic (중동), Turkish (터키), Persian (이란), Malay (말레이시아) 이외의 아시안 언어와 아프리카 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약 3,000여 개의 이슬람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런던을 ‘아프가니스탄의 대기실’이라고 부를 정도로 극단주의 단체도 자유롭게 활동하는 곳이 영국입니다.

그러면 영국 국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영국 국교회 자체 내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앞으로 영국의 국교회가 60년 있으면 사멸한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어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영국의 국교회는 파멸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살리려는 노력은 했지만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국의 국교회사입니다.
그 동안 영국 교회가 얼마나 많이 부흥되었고, 얼마나 많은 행정 조직과 교육이 있었습니까? 그렇게 많이 부흥과 수많은 조직과 교육을 위해서 많은 투자를 했지만 지금 대영 제국의 교회는 사멸해 가고 있습니다. 반면 이슬람은 영국 땅에서 더 강해지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 안타까운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제가 오늘 왜 이렇게 영국문제에 매달립니까? 우리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한국의 선교사 통계를 말할 때 사람들은 우리가 미국 다음으로 많이 파송한 나라가 되었다고 좋아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선교사 많이 파송하게 된 것은 저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어떻게 영국이 그렇게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 개신교의 복음은 로마가, 프랑스가 전해준 것 아닙니다. 영국이 전했습니다. 영국이 민주주의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은 다시 한번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스펄전이 들었던, 웨슬리가 들었던,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들었던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삽니다.
부흥과 교회교육이 다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다른 것을 다 하고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안됩니다. 주님의 음성 외에는 우리를 살리는 것이 없습니다.

생명과 심판의 부활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지금 주님의 말씀을 들은 우리들은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는 지금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또한 마지막 때, 주님 재림하실 때 듣기 싫어도 모두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악간에 모두가 부활합니다. 주님의 음성은 이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살기 싫어도 살아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영생과 심판의 부활로 구분됩니다. 다시 부활했지만 결과가 심판과 지옥이라면 이것은 축복의 부활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님이 마지막 때 오실 때 그때 주님의 음성을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안됩니다. 주님의 음성을 지금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살아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 죽었다면 육체만 부활되면 되는 것입니다. 영은 이미 하나님께 가있는 것입니다. 오늘 부족한 종이 대언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요 10:3)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은혜입니까? 바로 내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교회에 오셨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있어서 마지막 때 모두가 생명의 부활로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구원의 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 구원의 주) / 본문 : 요한복음 3:16-21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1855년 한 아일랜드 청년이 결혼식 전날 익사사고로 신부를 잃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중 기도하다
가 『그래,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잃고 구원을 이루셨으니 나도 상실을 믿음으로 이기자』라고 말하며 재기했습니다.
청년은 즉시 이 ‘믿음의 고백’을 시로 썼습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이 시가 오늘날 세계 크리스천들이 가장 애송하는 찬송가 487장이며 청년의 이름은 조셉 스크리븐입니다.

꿈 많고 신사적이며 존경받던 그리스도인 가운데 토마스 무어 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고하게 잡혀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있는 재판관을 향해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재판관님, 내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친구여, 나는 당신과 나의 관계가 바울과 스데반의 관계가 되기를 원하오. 바울이 스데반을 죽였지만,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이 두 사람은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있을 것이요. 그대가 나에게 죽음을 선고하지만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구원을 함께 누리는 친구가 되기를 바라오.“
재판관은 이 토마스 무어경의 감격스런 선언을 듣고서 이렇게 되묻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사형을 언도했는데 그대가 나를 선대하는 이유는 무엇이요?” 토마스 무어경이 대답하기를 “주께서 나에게 먼저 긍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원의 종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구원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랑하고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화를 통해서 진리를 자연스럽게 소개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이 11개가 나오는데 오늘 본문이 그 첫 번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요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에서 시작합니다. 유대 고위관리중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는 정말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남들의 눈을 피해 어두워진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그가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을 직설적으로 묻습니다. 유대인이 얼마나 토론 문화가 발전해 있었는지 제가 늘 말씀드려서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유대인은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사람들입니다. 부모님이 학교를 보낼 때 아이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해 안 되는 것이 선생님께 꼭 질문하라”는 것입니다.
요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1. 멸망치 않고 영생을

멸망과 영생사이에 다른 것은 선택할 것이 없습니다. 멸망 아니면 영생 양자 택일 뿐입니다. 중립적인 것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 안 믿어도 선한 일 하고 살면 제일 좋은 천국에는 못 가도 극락에는 가겠지 하는 분이 있습니다. 본문을 잘 보세요 “저를 믿는 자마다”입니다. 반대로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멸망하다’의 아폴뤼미(ajpovlhtai)는 ‘잃다, 없어지다, 상실하다, 파괴시키다’의 뜻으로 사람이 병에서 나아갈 때 ‘회복하다’는 말과 반대의 의미가 있습니다. 독생자의 이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이라고 하심으로 긍정적 표현으로 사용하십니다.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영생) 아니면 멸망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2.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16절에서 멸망과 영생이 대조되었고, 17절에서는 심판과 구원이 대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그 권한을 위임받으셨습니다.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디모데는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심판하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의 시대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지나고 언제일지 모르지만 심판이 시작되는 날에는 무섭습니다. 그 때는 이미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을 뜻하는 소조(awvzw)란 죽어가는 자를 구원해 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물에 빠진 자를 구해주거나 철길에 있는 사람을 구하고자 열차에 뛰어들어 다른 사람을 구해내는 목숨을 건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3.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지 마세요.

어느 민족이든 불행한 역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민족적으로 참 안타까운 한 민족이 있습니다. 바로 베트남입니다. 호치민은 30명밖에 안 되는 민병대를 만들어 200년 넘게 지배해온 프랑스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미군과 싸워 물리쳤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의 목숨을 건 싸움이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싸우다 사상적으로 공산국가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리고 지금 상당한 자유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지 못합니다. 공산당의 법은 하지 말라는 쪽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도 금지되어있습니다. 특히 외국인이 현지인에게 전하다 들키면 큰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을 감시하고 똑같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던 공상주의는 실패했습니다. 공산주의 역시 특권층이 있습니다. 사상적으로 계급적으로 있어서 처음부터 출신 성분이 좋지 못하면 절대로 그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도 물론 특권층이 있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분명히 빛보다 어두움을 택한 것입니다. 빛은 밝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은 숨기려고 합니다. 죄는 드러나기를 싫어합니다. 여러분! 어디서 좋은 일 한 것 있으면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제가 몇 일 전에 운동장 뒤편 야산에 올라갔습니다. 정상에 가면 뒤쪽으로 아마 사유지 재산인가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 못 들어오라고 철조망을 쳐 놓았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나무 중간으로 철조망이 덮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철조망 좀 풀어주라고 군포시청에 사진 찍어다 제보했습니다.
선과 악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압니다. 악은 감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선은 드러납니다. 알리고 싶습니다. 나누고 싶습니다. 그것은 선이며 좋은 일입니다. 자 용기를 내세요. 빛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 때문에 천국에서도 도저히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없었던 천사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천사는 여러 차례 지옥에 있는 사람에게 내려가서 그들을 지옥에서 놓아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갖다 놓을 만한 선행을 하나라도 기억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선한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부인이 “거지에게 양파를 하나 준 적이 있어요.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요?”라고 말했습니다. “선한 일이고 말고요.” 천사가 하늘나라의 문서 보관소에 올라가서 부인에 관한 서류를 찾아보니 과연 양파에 관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는 양파 하나를 갖고 지옥에 있는 부인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이걸 손으로 붙잡으세요. 그러면 나는 이쪽 끝을 붙잡을 테니, 같이 천국으로 날아 올라갑시다.” 양파가 두 사람의 몸무게를 잘 지탱해 주어 그 부인은 천사와 함께 날아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지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보자, 부인의 옷과 팔과 다리를 붙잡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인에게 매달린 사람들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인 아래 달라붙어 하늘나라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 본 부인은 많은 사람들 때문에 양파의 껍질이 벗겨져 자기가 떨어질 까봐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팔 굽으로 다른 사람들을 밀면서 말했습니다. “당신들 같이 선한 일을 하나도 한 적이 없는 죄인들은 지옥에 남아 있어야 해요.” 그 순간 양파 껍질이 벗겨져 떨어졌습니다. 이것으로 그녀의 희망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4.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진리를 쫓는 자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마 3:8) “빛으로 오나니”는 ‘에르케타이프로스 토 포스’(e[rcetai pro;” to; fw’”)입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아담과 하와가 숨었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와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게되는 것을 “빛으로 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두 나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향해 중인 배가 태풍을 만났습니다. 파도가 두 시간정도 계속되어 배를 휘감아 버렸습니다. 기관실의 모든 기능은 마비되었고 무전기도 불통되었습니다. 그래서 배는 정처 없이 바다에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금방 구조되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날이 계속 가자 불안해 졌습니다. 먹을 것도 점점 떨어져 갔습니다. 그러자 부상당한 한 선원이 죽자 슬픈 척 했지만 속으로는 입이 하나 줄어든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이 사는 것과 먹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승객들 가운데 임신부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임산부가 아이를 낳게 된 것입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말하기를
‘우리는 죽더라도 저 아이만은 살리자.’
‘저 아이에게 육지의 꽃과 평화를 맛보게 하자.’
사람들은 저마다 감추어 놓았던 것을 내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또 한 사람이 임종을 맞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죽음이 저 아기를 위한 죽음이 되게 하소서’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아기를 통해서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변한 것입니다. 나 혼자만 살겠다고 하면 조금 더 살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립니다.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요즘 건강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TV에서도 건강하게 사는 방법에 대해서 많이 나옵니다. 건강에 대해서 그만큼 많은 관심이 있으면서 왜 영생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심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건강하게 사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100살 살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영생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현대교회들은 이 땅에서의 축복 논리에 빠져있는데 예수님은 사실 이 땅에서의 축복을 그다지 많이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잠깐의 고통과 어려움은 견디라는 것입니다.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얼마 길지 않은 인생을 잘 살아야 됩니다. 하지만 너무 이 땅에서의 축복 논리에 빠져서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 소망이 없어지면 안됩니다. 또 이 땅에 안주하려고 하여 영생을 위해서 아무 일도 안 하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미 자기 심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무디는 이 말을 자주 했습니다. “회심하기 전 나는 십자가를 향해 일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십자가로부터 일해 왔다. 전에는 구원받기 위해 일했다. 그러나 지금은 구원받았음으로 일한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며 열매 맺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아버지 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 내 아버지 집) / 본문 : 누가복음 2: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오늘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 친히 하신 것 중에는 제일 처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요즘 성경책은 예수님의 말씀을 빨간색으로 구분한 것도 있습니다. 바로 그 첫 번째가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42절에 보면 부모님들이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갔는데 예수님이 12살 때 예루살렘에 가서 있었던 일입니다. 유월절이 끝나고 부모님은 고향인 갈릴리 나사렛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예수님을 찾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이 부모님과 헤어진지 사흘이 된 것입니다. 부모님은 성전에서 선생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부모님은 예수님을 찾으려고 얼마나 근심하며 다녔는지 설명했습니다. 바로 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12살이면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기 때문에 부모님을 잊어버렸다고 그렇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도 초등학교 5학년 때 경기도 마석인 우리 집에서 강원도 양구에 큰집이 있었는데 혼자 버스를 서너 번 갈아타고 갔었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이 어려서 부모님을 잊어버렸는데도 침착하고 총명하게 행동했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모님이 알아 듣지 못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입니다. 지금 육신의 아버지는 요셉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아버지 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육신의 부모는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단어는 네 가지 경우입니다.
첫째, 엘(EL) “신”신적 권능과 신 본질의 특성을 가지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둘째, 엘로힘(ELOHIM)으로 형태상 복수이나 “신들”을 뜻하지 않고 신의 모든 속성을 완전히 갖추신 분을 뜻합니다.
셋째, 아돈(ADON)으로 하나님을 “절대주권자”혹은 “주님”으로 묘사하여 그의 신적 권위와 실제적인 통치를 지적하는 낱말입니다.
넷째, 이 명사들과는 별도로 또한 하나님의 고유명칭 여호와(야웨)가 있습니다. 그 고유명칭을 직접 사용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공석에서 읽을 때에는 “주님”을 뜻하는 낱말로 대신했습니다. 영어 성경들은 공교롭게도 그 관습을 이어받아 여호와를 “주”로 그리고 그 고유명칭이 아도나이(아돈의 한 형태)와 연결되어 있을 때에는 “주 하나님”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 대치된 낱말 이면에 숨어 있는 하나님 자신의 치밀한 고유명칭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성경을 읽을 때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리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성품을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하나의 낱말로서 여호와는 히브리어 동사 “있다”(존재)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 동사는 “존재하다”의 뜻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임재하다”를 의미합니다. 여호와(출3:13-16)는 능동적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이 고유명칭을 알리고자 하신 것은 그의 종 된 백성이 구속을 필요로 할 때였습니다. 달리 말해서 ‘능동적인 임재’의 개념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의 이름의 뜻을 계시하실 시기를 출애굽 때로 정하심으로써 그는 자기를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의 원수들을 정복하시는 자로 나타내십니다. 당신을 여호와로 알리신 그의 자기계시(출3:5)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이 성품은 유월절의 거룩한 구속과 거룩한 진노에서 구체화됩니다(출12장).
여호와는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와 연결되어 다양한 표현이 나타납니다.
여호와 삼마(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
여호와 라페(하나님이 치료하신다)
여호와 이레(하나님이 준비하신다)
여호와 닛시(하나님이 승리하신다)
여호와 살롬 (하나님은 평강 이시다)
여호와 로이 (하나님은 목자 되신다) 등으로 사용됩니다.

어떤 사람이 오막살이 앞을 지나가는데 거기에 소녀 하나가 추운 겨울날에 문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서 있더랍니다. “왜 그렇게 서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가 나를 때리며 나가라고 내쫓아서 지금 문 밖에 서 있습니다” 하더랍니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 “아버지께서 잠든 다음에 들어가려고요”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잠든 다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고 새벽 일찍이 아침상을 준비해 가지고 아버지 방에 들어갔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때려서 내쫓았는데 너는 왜 오늘 집에 들어 왔으며 또 아침상을 차려서 가지고 오는 거야 ? 이 못난 아버지가 밉지도 않으냐 ?”고 물었습니다. 그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하더랍니다.
어째서일까요 ? 이 소녀의 말을 들어봅시다. “어머니가 세상 떠날 때에 내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기만 하면 저 모양이 된다마는 본심은 착한 사람이다. 언젠가는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나는 너의 아버지를 사랑한다. 그런고로 너도 너의 아버지를 사랑해라’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그 어머니의 말씀이 참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그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아버지가 회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아버지도 사랑해야 되는 것인데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왜 사랑하지 못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2. 내 아버지

이 말씀은 놀라운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경우가 없습니다. 아들인 예수님만이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말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랄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이 태어날 때 베들레헴에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메시야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있던 것입니다. 물론 헤롯왕가가 예수님을 잡으려고 탄생 직후 노력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조용히 지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12살인 예수님은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위해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나옵니다.
시편 68:5절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와 시편 89:26절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고 다윗에게 주셨던 언약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은 예언적 성격이 있어 장차 올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이사야 63:16절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과 이사야 64:8절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라고 이사야의 구원을 위한 기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본문 또한 장차 올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이해해도 그것은 시적 표현이거나 아버지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른 것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진짜 아버지가 되시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친히 말씀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마 5: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마 5: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6: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등 ‘아버지’라는 단어는 복음서에서만 445번나옵니다. 이중에 400번 이상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제자들이나 서기관, 율법사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모두 예수님이 부른 것입니다.

3. 아버지 집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임재하시기 위한 이름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이름이 구약적 표현으로는 여호와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임재하신 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바로 성막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성막에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만유의 주되십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계시는 곳을 말할 때 성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출애굽 때 이 땅에 임재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 솔로몬 시대가 되어서 법궤와 더불어서 성전으로 옮겨졌습니다.
바로 이곳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버지 집입니다. 분명히 여호와(야훼) 하나님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호와가 예수님의 아버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루살렘 성전은 바로 아버지 집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대제사장이 아닌 아들인 예수님 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종이 너무 오랫동안 주인 행세를 하다보면 자기가 정말 주인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바로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우리교회의 주인은 영원토록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저 또한 잠시 잠깐 저에게 주님이 여러분을 맡기신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몇 년 동안 막대한 돈을 들여 교회를 증축했습니다. 교인들은 새로 지은 예배당에서 첫 번째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새로 지은 교회의 장엄함과 색다른 건축양식에 경외감을 느끼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옛날 건물처럼 따뜻함과 사랑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서먹서먹한 가운데 드려진 예배조차도 아주 낯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어느 꼬마가 외친 소리로 인해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빠, 하나님이 여기 사세요?” 그러자 꼬마의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얘야, 하나님이 여기 사시지.”

일본에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몇몇 달을 두고 비가 오지 않자 이대로 가다가는 농사를 다 망치겠다고 사람들은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기우제를 지낸다 굿을 한다 하고 난리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우찌무라 간조는 아이들과 함께 식사 기도를 올리는데 “하나님, 비를 주십시오. 오늘 꼭 비를 주실 줄로 굳게 믿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이 학교 갈 채비를 합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인 큰 아이는 아무 소리 없는데 3학년인 작은아이가 난데없이 우산을 찾습니다. “아버지, 우산 !” “맑은 하늘에 우산은 왜 찾느냐 ?” 우찌무라 간조가 어리둥절해집니다. 그런데 이 작은아이 하는 소리 좀 보십시오. “아버지, 아까 기도하실 때에 오늘 비 주실 것으로 믿는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 그러니까 우산을 가지고 가야지요 !” 우찌무라 간조는 속으로 아차 하고 크게 회개했다고 합니다. ‘나의 믿음은 전부 거짓이다. 저 아이의 믿음이야말로 참 믿음이다’ 그 아이 보기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님의 양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은 주님의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한자에 평안할 안(安)자는 집우자에 아래 계집녀자가 있습니다. “집안에 여자가 있어야 평안하다”는 뜻입니다. 성전에는 누가 있어야 합니까?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 좋아하겠습니까? 시간만 있으면 성전에 있는 사람, 하나님 집에 있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우리의 집은 여러분들의 개인 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 내 집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 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부모님의 집에서 없어지면 부모님이 교회로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없어지면 첫 번째로 갈곳이 교회구나 생각되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식구가 없어지면 “야 거기 술집에 전화해봐!, 아니면 친구 집에 전화해봐!”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지 말고 주님처럼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이런 말을 하실 수 있는 우리 주앙교회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갈릴리에서의 마지막 당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53. 갈릴리에서의 마지막 당부) / 마 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모든 날)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을 시키는 엄마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아이가 처음으로 초등학교에 갈 때 무어라고 말해서 보냈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엄마들은 망설일 것도 없이 한 마디로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전에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두고 ‘지상 대 명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 어떤 본문 보다 더 자세히 살피고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신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눈에 띄게 나타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모든’입니다. 모든 이라는 단어가 문단을 단단히 묶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모든 이라는 단어가 모두 4번나옵니다. 1) 모든 권세 2) 모든 족속 3) 모든 것 4) 항상(모든 날)입니다.
저는 목사가 될 때 문제가 걸렸던 것이 하나있습니다. 바로 이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였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모든 것을 가리 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모든’이라는 문제가 해결되시기를 바랍니다.

1.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자기가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속이려고 했습니다.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눅 4:6)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단에게 속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꿈적도 않으십니다.
여러분!
사단은 지금도 속삭입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사람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며 죽음만 기다릴 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모든 것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모든 권세는 사단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권세를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에게 전권을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했습니다. 못 고치시는 병이 없었습니다. 모든 병이 다 나았습니다. 회복되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 행 14: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했습니다. 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첫 번째 선교여행입니다. 선교라는 말은 처음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말로 사용된 것입니다. 같은 민족에게는 선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이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선교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믿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입니다. 여기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족별 차별을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못하며 예수님의 믿음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3. 모든 것을 가르쳐라

1) 가감 없이 가르쳐라
어떻게 우리가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을 수 있습니다. 설교도 갈수록 어려워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왜 설교가 어려워집니까?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유명한 목사님들이 명 설교를 하시기 때문에, 그와 같이 못하기 때문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이유는 자신에게 불리한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쓴 소리가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지 않으면 바른 사람이 안됩니다. 여러분! 자식들에게 만날 좋은 소리만 합니까? 진짜 필요한 말은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모님의 교육을 받지 않은 자식들은 잘 되기가 어렵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8-19)

2) 성령으로 가르쳐라
사람이 모든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똑같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다고 말할 사람은 예수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습니다(롬 3:23).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온전히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동양에서는 도를 닦으면 온전해지고 무에 이르면 도를 깨우쳐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은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죄의 문제가 깨끗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 중국에 요임금이라는 아주 어진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그 임금님 밑에 소부와 허유라는 두 선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도 역시 덕이 있고 욕심이 없는 깨끗한 선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주변에는 벼슬을 탐내고 욕심이 많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임금님에게 아부하고 남을 중상하고 하여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소부와 허유는 그 모습들이 아니꼽고 더럽게 보여 임금님 곁을 떠나 먼 곳으로 갔습니다. 영천수란 냇물이 흐르는 깊은 계곡에 움막을 짓고 소를 기르며 땅을 갈고 농사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요 임금님이 허유를 찾아 이 계곡에 왔습니다. 임금님은 허유에게, “한 마을의 통치자가 되어 주시오.”하고 나라 중 한 고을을 부탁하였다. 허유는 대답도 않고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는 못들을 소리를 들었다고 영천 수 흐르는 냇물에 귀를 씻고 있었습니다. 마침 이 때 소부가 밑에서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다가 허유의 행동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여보게, 왜 귀는 씻고 있어?”하고 물었습니다. “요 임금님이 찾아와서 나에게 벼슬을 하라 하지 않나? 더러운 소리를 들었기에 귀를 씻는 거야.” “그래? 그럼, 그 더러운 말을 들은귀를 씻은 물을 송아지에게 먹여서야 되겠나?” 하면서 송아지를 끌고 위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런다고 이 사람들이 깨끗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가르칠 때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전하지만 이 때 우리가운데 성령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가 왜 다른 연설하고 다릅니까? 오직 성령에 의지해서 전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의해서만 우리가 깨끗해 질 수 있습니다.

3) 사랑으로 가르쳐라
사람에게 모든 것 또는 온전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람은 똑같이 부족하지만 사랑은 그 부족한 것을 뛰어 넘게 합니다. 강아지도 저 좋아하는 사람을 압니다. 하물며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모르겠습니까? 어떤 선교사가 언어를 아주 뛰어나게 잘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원주민 말을 해야합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이 말로만은 안됩니다.
바울이 말한 사랑의 정의에 보면 고전 13:7절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모든’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하기 싫은 어떤 것을 빼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개와 돼지 동물들도 제 새끼는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만이 제자를 삼을 수 있습니다.

한 어린 소년이 아버지께 질문을 했습니다. “아빠, 전쟁은 무서운데 어른들은 왜 전쟁을 시작하나요?” 아버지는 현명한 대답을 하고 싶어 잠시 생각하다가 “얘야, 네가 알아듣기는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다. 그러나, 한가지 예를 들면, 1914년에 일어났던 세계전쟁은 독일이 벨지움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단다”라고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는 “여보, 아이에게 가르치려면 진실 되게 바로 알려 야죠. 그 전쟁은 처음에 누군가가 살해되어 복수하고 또 복수하다가 시작된 거죠”하며 남편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화가 난 남편은 아이에게 적절하게 전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내는 반대하여, 서로 언성을 높이다가 아내가 먼저 문을 꽝 닫고 나가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본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전쟁이 왜 시작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4. 항상(모든 날)과 함께 하신다.
본문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명령하다, 위임하다)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굳게 붙잡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모든 날)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의 이 마지막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분부한” 것은 명령한 것입니다. 단순히 명령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단어 속에는 복음전하는 일을 제자들에게 위임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선생님으로 이 땅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을 제자들은 보고 배웠습니다. 이제 배운 대로 예수님처럼 가르치면 됩니다. 이런 자에게는 항상(모든 날) 함께하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70년대 판자촌이었던 청개천에서 활빈교회(지금은 두레교회)를 개척하신 김진홍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판자촌 빈민 목회를 하실 때 동네에 사는 한 아주머니가 밤중에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아주머니를 등에 업고 동네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의사는 “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어서 큰 병원으로 가셔야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아주머니를 등에 업고 서울시내 굵직한 병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모두가 한결 같이 수술비가 없어서 받아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은 깊은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도무지 의욕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를 등에 업은 채로 터덜터덜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주머니가 자꾸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이미 아주머니는 목사님 등에서 죽은 것입니다. 목사님은 너무나 깊은 회의와 갈등에 사로 잡혔습니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이미 죽어버린 아주머니를 붙잡고 통곡했습니다.
“예수님 이 광경을 보고 계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합니까? 주님! 이 괴로움을 아십니까?”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다 알고 있다. 네가 나보다 더 괴롭겠니? 너의 모든 고통을 내가 같이 받고 있단다. 힘을 내라 힘을!” 주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모든 고통과 회의까지도.
 

갈릴리에서 만나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52. 갈릴리에서 만나자) / 막 14:28, 16:7

막 14: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막 16: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사람은 누구나 고향이 있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을 보낸 땅은 그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중국 한 나라의 유방과 초 나라의 항우가 전쟁을 할 때였습니다. 유방이 항우의 10만 군사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유방은 가을 달밤에 자기 군사들로 하여금 퉁소로 구슬픈 초 나라의 가락을 불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초 나라 군사들은 고향의 구슬픈 가락을 듣고 향수병에 걸려 뿔뿔이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퉁소 가락으로 유방은 대승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고향이란 인간에게 이렇게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고향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은 지리적으로 이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에게는 갈릴리가 센터입니다.
갈릴리는 가나안 땅 분배 때 납달리 지파에게 제공된 땅입니다(수 21:32, 대상 6:76). 갈릴리는 동쪽으로 바다와 같은 호수가 있어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고기잡이를 하며 살았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두로 왕 히람(Hiram)차지하고 있었는데, 다윗이 궁전을 지을 때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목재와 석재와 기술자를 제공해서 솔로몬은 사례로 갈릴리 땅 20을 떼어주고 또 다시스에서 선박을 만드는 일에도 많이 협찬하고 해외 통상도 같이 하여 번창했습니다(왕상 9:10, 11, 10:22).

패망하는 갈릴리 땅

그리고 역사가 흐른 후 가나안땅은 유다와 이스라엘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런데 분리된 나라의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악한 왕이 나왔습니다. 열왕기하 15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나마 제일 나았던 왕이 아사랴인데 이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왕이었으나 결정적으로 산당을 없애지 않고 제사드렸습니다(왕하 15:4-5). 그후 스가랴(9절), 살룸, 므나헴(18절), 브가히야(24절), 베가(28절)까지 이어집니다. 이 왕들은 하나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들입니다. 보다 못한 하나님은 베가 왕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쳐들어가게 하여 전쟁이 일어납니다(B.C. 739-732). 전쟁의 직접적인 이유는 유다왕이 이스라엘과 시라아 사이에 맺은 동맹 관계를 시기하여 앗시리아의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왕하 16:7). 이것이 외형적인 전쟁의 발단입니다. 하지만 이미 이스라엘은 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지속적인 내분과 악한 왕들이 계속해서 통치하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정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지역에 갈릴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왕하 15:29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고 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땅이 적군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이 땅을 하나님이 어떻게 분배해 주신 땅입니까? 아브라함 때 약속하고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하게 하고 여호수아를 통해서 점령하고 나누어준 땅 아닙니까? 그런데 그 땅을 다시 원수들의 손에 넘겨준 것입니다. 자신들의 내분의 싸움으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계속해서 악을 행하다 하나님은 이 전쟁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회복되는 갈릴리 땅

이렇게 패망한 땅에 하나님은 한줄기 빛을 내리십니다. 그 예언의 말씀이 이사야 9:1절에 나옵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람들의 죄악으로 그 땅을 짓밟게 하셨으나 하나님은 영원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땅을 영화롭게 해 주셨습니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는 벽이 수정처럼 아름다운 왕궁이 있는데 그 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깨진 유리를 모아 붙여 놓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원래는 판유리로 사용할 계획이었는데 유리를 운송하던 기술자가 실수하여 유리를 깨뜨렸답니다. 그래서 공사 책임자는 고민하던 중에 그 깨진 유리로 모자이크하여 건물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완성 후에 보니 원래의 설계보다 더 아름다운 오색찬란한 예술품이 되었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죄악으로 깨어진 갈릴리를, 우리들을 이전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1) 갈릴리 나사렛(거룩하다) 사람
갈릴리 나사렛은 천사 가브리엘이 다윗의 자손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을 계시해 준(눅1:26-38) 곳입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베들레헴으로 호적 하러 갈 때 바로 이곳을 출발했던 것입니다(눅 2:4).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이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 21: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 뜰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군중들은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눅 23:5)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님께 묻기를 “빌라도가 듣고 묻되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눅 23:6)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잡히신 밤에 예수님을 심문하는 성전의 바깥 뜰에서 예수님을 엿보다가 그만 계집아이에게 눈에 띠었습니다. 그가 계속해서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마 27:55, 눅 22:59)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역시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2)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심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바로 이 갈릴리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마 3:13, 막 1:9). 그리고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도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습니다(요 2:1, 11). 또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부르셨습니다(막 1:16).

3)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심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시기 시작하신 곳도 갈릴리입니다.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이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습니다(막 1:28). 이 지역에서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습니다(마 4:25, 막 3:7). 예수님의 12제자뿐만 아니라 70인 제자와 많은 무리들 역시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미래의 일을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 17:22-23)고 말씀하셨습니다.

4) 갈릴리에서 만나자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은 좋지 않은 기억들뿐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자신의 사역을 방해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예수님께 붙여서 늘 예수님의 행동을 감시하고 예루살렘에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심문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가고 싶으신 곳이 있다면 그곳은 세례를 받으시고 제자를 부르시고, 복음을 전하시던 갈릴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 후에 제자들보다 앞서 갈릴리로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마 26:32). 이 말씀은 여자들이 예수님 무덤에 갔을 때 천사가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마 28:7)이라고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 일을 고하려고 달려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 28:10)고 했습니다.

5) 부활의 증인들
갈릴리 사람들은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여자들이 좇아와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뿐만이 아니라 무덤에도 그 시체를 보려고 갔다가 천사를 만난 것입니다(눅 23:55).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본 것도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1)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3:31절에 보면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설교할 때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의 증인들입니다.

갈릴리는 이사야의 예언대로(사 9:1)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요 7:41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고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요 7:52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말은 하찮은 지역에서 메시야가 나오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큰 도시에서 예루살렘 같은 곳에서 나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세상에서 힘있는 자의 품에서 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같은 수도에서 자라신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변방인 북쪽 갈릴리 지방에서 자라시고 사역을 시작하셨으며 그곳에서 부활 후에 제자들과 다시 만났습니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셀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존경받는 지성인이 폐수종으로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조차 묻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고통 속에서 소리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죽음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예리하게 파헤쳤던 20세기 최고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였습니다. 그는 입원한지 한 달만에 육신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다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고 난 후,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그 때 한 독자가 신문사에 이런 기사를 투고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마도 비 그리스도인이었는지 모릅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동물이나 어류 가운데도 귀소본능(歸巢本能)을 가진 것들이 있습니다. 코끼리는 죽을 때를 알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도시화되면서 정작 고향에 가면 아무 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살던 터는 만남의 광장으로 변했습니다.
마음의 고향은 어머니입니다. 신앙인의 고향은 교회입니다. 갈릴리는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영적 고향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주님을 갈릴리에서 만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갈릴리에서 만나려면 특권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소박한 시골사람처럼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약속을 믿고 갈릴리로 가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51.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6.25 동란 때 있었던 일입니다. 황해도 봉산군에 계동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에 장로님 일곱 분 중에 네 분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강덕기 장로님이라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의 순교 일화입니다. 공산당원들이 그 분을 죽일 때 아주 비참하고 잔인하게 죽였다고 합니다. 그 분을 나무에 묶고 두 눈을 뽑아버렸습니다.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분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두 눈이 빠지고 나니까 오히려 하늘 나라가 밝히 보이는구나!” 그리고 평안한 목소리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찬 431장>이었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찬송소리가 울려 퍼지자 공산당원들은 치를 떨면서 따발총의 개머리판으로 내리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분은 순교의 최후를 장식했던 것입니다. 그 후 전세가 역전이 되어 국군이 북으로 진격하여 그 마을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공산당원들이 다 도망가버리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 지역에서 온갖 만행을 다 저질렀던 공산당 두목이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동네 청년들에게 붙들렸습니다. 청년들은 밧줄로 그 공산당 두목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순교 당했던 강장로님의 아들에게 마음대로 죽여서 원수를 갚으라고 했습니다. 원수의 모습을 보면서 강장로님의 아들은 두 눈에 눈물을 죽 흘렸습니다. 이윽고 입을 열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거룩한 순교를 헛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나의 원수이지만 나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 말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갔다고 합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즉 모세의 율법시대와 예수님의 은혜 시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용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는 죄대로 상은 상대로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대에는 다릅니다. 용서를 전제로 모든 것이 진행됩니다. 용서가 없다면 신약도 구약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구약이 잘못된 성경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두꺼운 구약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원래 하나님의 법이 이렇게 무섭구나!’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대로 우리를 다루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갈 수 없는 중죄인들입니다. 오늘 이러한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우리모두 죄 용서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
구약시대의 사람들도 용서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간구는 자신의 죄만을 위한 간구였습니다. 저는 구약의 시편을 좋아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시가 많습니다. 시편을 읽어가노라면 하나님이 지으신 오묘하신 세상에 대해서 눈이 열립니다. 그리고 감사의 무궁한 찬양이 흘러나오게 만듭니다. 하지만 신약과 다른 한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편은 최소한 73편 이상이 다윗이 쓴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다윗 사상이 배어있다고 보면 됩니다.
시편의 전체 주제는 하나님의 높으심과 찬양, 지으신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의 표현, 광야에서 이끌어내신 이스라엘 백성의 감사, 그리고 정직한 자에 대한 축복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상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 28:4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시 58:10 “의인은 악인의 보복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위의 두 구절만 보아도 구약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용서가 없습니다.

용서하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용서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심판 주로 오셨다면 우리는 끝입니다. 우리가 감사한 것은 용서의 주님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요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용서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어느 마을에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서로 원수로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만나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싸우고, 헤어지면 서로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중에 A라는 청년이 마음을 고쳐먹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그 동안 B라는 청년과 항상 다투었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B라는 청년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만나면 싸우게 되고 그러면 또 후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A라는 청년이 피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때 B라는 청년이 먼저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어쭈, 야 임마. 너 교회에 다닌다며. 웃기고 있네” 그리고는 순식간에 A의 뺨을 한 대 후려갈겼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인해 A는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습니다. 주먹을 불끈 쥔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도 돌려대라.’ 화는 났지만 꾹 참고 이를 악물고 왼편 뺨을 돌려댔습니다. 그랬더니 B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빈정댔습니다. ‘이 녀석이 누구를 놀리는 거야 뭐야?’ 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왼편 뺨도 후려갈겼습니다. A는 오른편 뺨과 왼편 뺨을 연속적으로 얻어맞고 정신이 아찔해졌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더니 갑자기 양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내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기 때문에 내 책임은 다 했어. 이제는 네가 맛 좀 봐야겠다. 너 어디 한번 죽어봐라!” 그래서 싸움이 평소보다 더 커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죄인을 통해서도 배우라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식으로 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비난과 저주만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말속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즉 남의 눈의 들보를 보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은 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좋은 구석이 있기 마련입니다. 바로 좋은 점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가르침은 “뱀”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뱀이 원수이지만 뱀도 좋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로 그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상대편의 약점만을 늘어놓으며 그 사람을 죽일 사람으로 몰아붙이기 전에 배울 것을 먼저 배우라는 것입니다.
망해 가는 기업을 통해서도 길거리의 노숙자를 통해서도, 지하철에 강아지 태우고 탔다가 오물을 치우지 않고 내린 사람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는 것입니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문의 핵심입니다. 죄의 용서가 없이는 주님께 용서를 바랄 수 없습니다.
막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고 하십니다.

독일 나치 시대 때 라벤스부르크 수용소에서 온갖 고문과 학대를 받았던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여사가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그녀는 독일 사람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간증과 설교에 많은 감명을 받곤 했습니다. 한번은 설교를 마친 후 입구에서 청중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와 인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서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앞이 캄캄해지고 말았습니다. 온 몸이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손이 서서히 떨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본 사람은 다름 아닌 포로수용소에서 자기의 옷을 벗기고 채찍질과 고문을 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언니도 그 사람의 손에 죽었던 것입니다. 상대방은 알아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어찌 그 사람의 얼굴을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동안 그 사람을 기억하며 얼마나 치를 떨었겠습니까? 마음속으로 그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 사람만큼은 제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 동안 그녀는 용서를 수없이 외쳐왔지만 막상 자기 앞에 용서해야 할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녀는 몸이 굳어버린 것입니다.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먼저 그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어라” 그녀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 사람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말할 수 없이 엄청난 주님의 사랑은 느끼고 마음속에 한없는 기쁨과 평안이 넘쳤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23:34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오늘 본문은 가상칠언 중에 제일 첫 번째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 자체가 우리의 죄 용서함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로 하나님께 제일먼저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의 죄는 속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다시 한번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죄 용서함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일고 또 읽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님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서 이와 같은 기도를 해 주시다니요.

두 사람의 일본 농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한 농부가 가파른 비탈길에 계단식 논을 만들고는 그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물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물길이 완성되자 지켜보고 있던 다른 농부가 바로 아래 자기 논을 만들고 논에 구멍을 내서 물을 자기 논으로 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처음 논을 만들었던 농부가 화가 났습니다.
‘얌체같이… 물길을 만드는 수고도 않고 남의 논물을 받아가다니…’
화가난 농부는 목사님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그를 용서하게. 그리고 계속해서 물을 대시오’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다시 목사님을 찾아와 또다시 찾아와 아래논의 농부는 마음의 가책도 없이 계속 물을 빼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하나요? 라고 또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또 다시 ‘그가 스스로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계속해서 물을 대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자네가 먼저 그 논까지 물을 대주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농부는 그 다음 논까지 물을 대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래 논을 만든 농부가 첫번 농부를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남을 용서하면 에수님과 같이 구원받는 성도를 얻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도대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마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70×7=490 번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숫자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7의 숫자는 거룩한 하나님의 수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하게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진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50. 진리) / 요 18:37-38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어느 날 해가 말했습니다. “나뭇잎은 초록색이다.” 그런데 달이 “나뭇잎은 은색이다.”라며 우겼습니다. 다시 달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늘 잠만 잔다.”그러자 해가 “아니야 그들은 언제나 움직인다.”라며 우겼습니다. 달이 “그러면 왜 땅이 조용하냐!”고 물었고 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누가 그러더냐! 땅은 언제나 시끄러운데.” 이렇게 해서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바람이 나타났습니다. “쓸데없는 논쟁을 하고 있구나.”며 그들이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나는 하늘에 해가 떠있을 때도 불고 달이 떠 있을 때도 분다. 해가 빛을 비추는 동안에는 나뭇잎은 초록색이며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달이 비추는 밤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져 사람들은 잠을 자고 고요하며 나뭇잎은 은빛이 된다. 구름이 달빛을 가리우면 나뭇잎은 검은 색이 되기도 한다. 너희들은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쪽의 관점만으로 내 것이 뫘다고 고집들을 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다른 하나의 진실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마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한가지의 단면만을 보면서 사물과 사람을 판단하려 한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하나의 사실은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빛이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우리의 육신의 오감으로 확인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궁극적인 실제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분적으로 보고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시고 심령의 보이지 않는 진실을 꿰뚫어 보시는 온전한 진리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서 증거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이 진리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진리를 동양에서는 도(道)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가야할 참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말라기 선지자는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 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 2:6)고 예언했습니다. 세례요한은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요 5:33)고 했습니다. 우리의 관점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중심은 모든 것이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해와 달이 아닙니다. 나의 철학이나 내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과 예수님의 생각과 다르면 모든 것을 수정하고 고쳐야 합니다. 이것을 거부한 나라를 저는 보았습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분명하게 다른 환경을 보고 왔습니다.
러시아 모스크바와 상뜨빼쩨르부르크, 핀란드 헬싱키, 스웨덴 스톡홀럼, 그리고 에스토니아 탈린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사진을 마음대로 찍기가 어려웠습니다. 사람들도 밝은 표정이 아니었지만 아무 데나 잘못 카메라를 드리대다가는 큰일 나는 수가 있습니다. 사진 금지구역이 많기 때문입니다. 경찰이나 군인을 찍는 것은 불법이며 잘못하면 다 압수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외국 회사가 세워놓은 큰 마켓 같은 곳에서도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럽 핀란드로 넘어 오면 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 나라들은 얼마나 자유가 있는지 지나칠 정도입니다. 얼마 전까지 국경 수비대가 파업을 해서 입국 심사도 하지 않고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비대 경찰을 사진 찍으려고 하면 포즈를 취해줍니다. 아예 사진을 찍으라고 관광객을 위해서 근위대 교대 장면을 연출해 주지 않습니까. 얼마나 자유가 있는지 모릅니다.
중세에 건축된 교회를 방문했는데 이 교회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려면 달팽이 굴처럼 되어 있습니다. 올라갈 때 유럽사람들은 벽 쪽으로 바싹 붙어있으면서 우리가 올라가는 길을 비켜 주었습니다. 저는 올라가는 사람을 위해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는 것이구나 하고 내려올 때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이 또 벽 쪽으로 먼저 붙어 서 있는 것입니다.
선진국 국민이 된다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잘 산다는 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나라를 누가 만들어 갑니까? 어디 외국에서 온 사람이 만들어 줍니까?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황무케 됩니다.
저는 땅을 보면서 축복 받은 땅과 저주받는 땅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나라는 망합니다. 그 방법은 땅을 황무케 하는 것입니다.
“(레 26:32)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
(사 42:15)내가 큰 산과 작은 산을 황무케 하며 그 초목을 마르게 하며 강들로 섬이 되게 하며 못들을 마르게 할 것이며“ 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땅이 황무하게 된 곳이 어디입니까? 아랍국가들입니다. 석유가 나와서 축복 받은 것으로 생각하여 마호멧이 예언한 곳에서 석유가 나왔다고 하면서 그를 섬깁니다. 하지만 분명 그 땅은 황무케 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성지 순례 가셔서 이런 땅이 무슨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냐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은 분명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땅이 황무하게 되는데는 비가 오지 않으면 됩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황무하게 됩니다. 사막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절에 “그러므로 단 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비가 꼭 필요할 때 와야 하는 단비가 오지 않으면 곡식이 안됩니다. 늦은 비가 안 오면 한해 농사 중에 하반기 농사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반기 때 우리는 배추와 무 등을 심습니다. 겨울을 대비하는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농사중에 반이 망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이스라엘 땅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중국이 사막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베트남도 약간의 사막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보았는데 사막이 되는 것이 순식간입니다. 바람이 바닷가에서 불어오기 시작하면 사막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모래바람이 내륙으로 불면서 큰산을 덮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 하나가 하루사이에 사막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안에 있으면 샘이 넘칩니다.
신 8:6-7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라고 했습니다.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의 국기는 모두 십자가입니다. 색깔만 다릅니다. 이 나라들은 세계최고의 선진국들입니다. 국민소득 4만 달러에 이릅니다. 모두가 잘 사는 나라들입니다. 사실 이곳이 기후적으로는 그렇게 살기 좋은 땅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척박한 땅을 잘 가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서로 양보하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세계 1등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교만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만을 부르며 살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이상주의 철학이 사람들을 망가트렸습니다. 중국이 이 모델을 따라갔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며 감시하는 나라는 안됩니다.

구 소련이 멸망당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소련이 붕괴될 때 제일 먼저 독립한 나라가 제가 방문했던 ‘에스토니아’입니다. 70년을 구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것입니다. 가서 얼른 느끼는 것이 이렇게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그 동안 억눌리며 살았을까? 독립하기를 정말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구 소련이 단순히 경제력이 무너지고 다른 나라들을 관리를 못하기 때문에만 독립시킨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기자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고르바초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왜 다른 나라로 독립시켜 주었습니까? 고르바초프가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것만큼 잘못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롭게 살 권리를 우리가 제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시 119:151)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
(시 119:160)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하리이다

주님이 진리이십니다.
(요 14: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이 진리입니다.
(요 16:13)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여러분!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다른 나라들도 저절로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철학을 가지고 인간의 제일 좋은 길을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 논리들은 모두가 패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진리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진리이십니다. 성령님이 진리이십니다.
자유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지금도 상식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러시아 경찰이 이유 없이 자동차를 잘 잡고 시비를 걸기 때문에 경찰청에서 전 경찰에게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확실한 위반이 확인되지 않은 차는 잡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아무 차나 잡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설명해 주면서 왜 잡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그런 명령받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신문을 보여주면서 여기 있지 않냐고 했더니 ‘나는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사람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러시아에 있다가 스웨덴으로 가는 순간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유 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면 더 진정한 자유를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우리모두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9.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 마 26:36-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존 낙스(John Knox)는 “기도하는 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부르짖으면 기도하지 않는 한 나라보다도, 한 민족보다도 훨씬 큰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도하시러 간 곳이 ‘겟세마네’라는 작은 동산입니다. 예루살렘 동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곳인데 감람산 기슭에 있습니다. 아람어 명칭은 ‘기름 짜는 틀’(oil press)입니다. 이곳에서 감람산의 기름을 짰기 때문에 생긴 이름입니다. 이곳에 예수님이 기도하던 장소가 있었습니다(눅 21:37, 22:39). 기름을 짜는 곳에서 예수님은 피와 같은 땀을 짜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지금은 이곳에 ‘땀흘린 교회’(The Chaple of the Sweat)가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땀을 흘려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도합니다. 기도제목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릅니다.

예수님의 기도제목은
39절 하반 절에 나오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입니다.
기도는 나의 소원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의 필요를 말하는 것과 같다.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는 아버지의 판단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나의 소원을 아뢰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라야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는 기도는 아무리 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 기도는 응답이 없다고 했습니다(약 4:3).

① 나의 원대로
예수님의 원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죽지 않고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면케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참 사람이십니다. 38절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라는 표현에서 인간적 고뇌가 깊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지금 나이가 33세입니다. 인간적인 나이로는 아직 한참 때입니다. 지금 죽기에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기도 속에는 십자가를 영원히 지시지 안겠다는 것이 아니라 미루어 달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십자가상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육체적으로도 어머니를 더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더 가르쳐야 하는데… 하시는 아쉬움도 있으실 것이고 아직도 병들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사람들과 좀더 함께 하셔야 하는 아쉬움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도 너무 빨리 해어지게 되는 섭섭함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물론 육체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도 피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창으로 찌르면 아픕니다. 예수님도 목이 마르십니다. 예수님도 고통이 있습니다. 이런 육체적 아픔 위에도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런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이 예수님의 고뇌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예수님은 혼자 고민만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② 아버지의 원대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예수님 기도의 결론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까지 아들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에 거스리는 기도를 하지도 않으셨지만 하나님도 기뻐하심으로 모든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오천명이 넘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의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모든 기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기도하시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신 것 외에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이 중요한 기도를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최고의 기도는 순종입니다. 순종 없는 기도는 자기 고집, 아집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순종할 줄 아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기도 제목은
41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기도제목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지만 제자들의 기도제목은 다릅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데 따라오는 여자들을 보고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이 돌아 가시면서도 누구 걱정합니까? 자식걱정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지만 고통이 있으시지만 제자들에게, 자신을 행하여 우는 여인들에게 자기 자신의 믿음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주기도문(마 6:9)에서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의 모든 내용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마 6:13절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이 기도를 할 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험은 두 가지로 다가옵니다.
첫째는 영적 곤경에 처하는 것이고, 둘째는 육체적 곤경에 처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올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영적 곤경에 처하는 시험이 훨씬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영적 곤경에 처하는 것보다 육적 곤경에 처하는 것을 더 두렵게 생각합니다.
잠 18:14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했습니다. 사람의 심령은 육체적 곤경과 시험을 능히 이기게 합니다. 그러나 심령이 상하면 육체적 곤경도 이길 수 없을 뿐더러 육체의 능력으로는 심령의 곤경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오늘 기도는 한마디로 말하면 실패입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당부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함께 기도한 제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왕의 나라에서 좌우편의 보좌는 탐이 났어도 정작 예수님의 간곡한 기도의 장소에서 그들은 모두 졸았습니다. 예수님은 마 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상황과 십자가를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깨어있기를 당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혼자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수시로 체크하셨습니다. 눅 22:41에 보면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수시로 돌아보시려고 이 정도 거리를 두셨던 것입니다.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①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②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③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④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⑤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⑥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중에 모두 6번이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하지 못한 이유는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배 때, 기도할 때 조는 분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안타깝습니다. 깨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얼마나 피곤하면 지금 졸까”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하루종일 예수님 따라서 다녔을 것입니다. 정말 피곤한 사람들하고 하루종일 있었습니다. 병 고쳐 주어야지요,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입씨름해야지요. 정말 지금 조는 것이 어떤 면으로는 이해됩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곳은 안락한 침대가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야산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잠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다 이해한다해도 지금 상황은 그래도 그렇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제일 간곡한 기도를 하는 마지막 밤인데… 본문의 제일 가슴 저려오는 구절이 어디입니까? 46 ⑥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칫 예수님의 이 기도는 무의미한 기도가 아니었는가 생각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잔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열어주시지 않았지만 잔을 마실 수 있는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심령을 강화하는 기도였습니다. 심령이 강건해 져야 육체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였고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에 매어 죽게 되는 것이라면 이를 감당 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달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는 기도를 하셨을 때, 하늘의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눅 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린다면 세상에 필요 없는 기도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힘을 얻도록 도우십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를 통하여 힘을 얻게 되자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눅 22:44). 땀방울 속에 피가 맺혀 있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 장면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의 기도는 십자가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는 처음 기도와는 달리 천사로부터 힘을 얻어 간절히 기도할 때에는 “죽음을 이길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실 때에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아뢰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후 죽음을 이겨야 만이 모든 택한 백성들을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필사적인 기도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육체의 연약함으로 깨어있지 못하고 시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졸아도 성전 안에서 조는 것은 다릅니다. 교회에 오면 조니까 오지 말라고 하시면 안됩니다. 졸아도 교회에가서 좁시다. 하고 일으켜 세워서 모시고 와야 합니다. 조는 사람은 예수님도 못 말렸습니다. 본문 45절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바로 이렇게 무능력한 우리를 돕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또 다른 이유는 시험 당한 성도들을 효과적으로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험 당하여 고민하는 성도들을 도우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
빌리 썬데이(Billy Sunday)는 “어떤 마귀도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녀를 빼앗아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나라의 운명이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선교사를 깨우며 그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루즈벨트(Roosevelt)대통령은 “기도하는 어머니들은 미국의 가장 귀한 자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자산은 바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은 “비상기도는 하늘나라의 싸이렌을 울리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합심해서 비상기도를 올리면 하늘나라에 싸이렌이 울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마치 119로 신고하면 소방차가 와서 불을 꺼주듯이 우리가 비상기도를 올리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는 간절히 해야합니다.
한 청년이 교회의 목사님의 찾아가, “목사님, 기도는 어떻게드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 청년을 데리고 강가로 갔습니다. 목사님은 청년의 옷을 벗게 하고는 무턱대고 손을 끌고 강으로 들어갔습니다. 깜짝 놀란 청년은 “아니, 목사님. +
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려는 것일세”라고 말한 다음, 갑자기 청년의 머리를 잡아서는 물 속으로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물 속에서 발버둥을 치며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제 서야 그 목사님은 청년을 건져내 주었습니다. 겨우 살아난 청년은 숨을 몰아 쉬며 ”아니, 목사님. 제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 물 속에서 죽여 달라고 했습니까?” 라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그래, 물 속에 있으니까 어떻던가? 숨을 쉬고 싶지? 살고 싶다는 생각 밖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을 거야! 이것이 바로 내가 자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일세. 기도는 바로 그렇게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의 마음도 바로 이와 같아야 합니다. 익사직전에 우리가 살기 위해 결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것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게 할 수 있으며, 우리의 믿음도 보다 더 성장할 것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8. 만민이 기도하는 집) / 막 11:15-18

“15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여러 해 전, 미국의 아폴로 13호가 달나라를 향해 발사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지구로부터 20,000마일 떨어진 곳에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산소 통이 깨져 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비행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본부인 휴스톤을 향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연락을 했습니다. 그 때에 지휘 본부에서는 북극성을 바라보면서 방향을 잡아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전 미국 국민이 고장난 캡슐을 몰고 오는 우주인들을 위해서 오전 9시를 기해 함께 기도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도 우주선 안에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과학적 산물이 고장났을 때 전 미국 국민이 기도한 것입니다.
얼마 후에 고장난 아폴로 13호는 태평양에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미 해군 군함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해군 군목의 손을 잡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Thanks God. Praise the Lord!)”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 주간의 타임지 표지에 그들의 기도하는 사진이 살린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첨단 과학만능의 시대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도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배경설명
요 2:13-22절에 보면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과 돈 바꾸어주는 사람들의 상을 업으셨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같은 사건이 아니라 비슷한 사건이 두 번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역 초기에 약 3년 전에 성전에 들리셨을 때와 같이 똑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고쳐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스스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사람들은 장사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깡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이 분개하시는 이유는?
1) 3년 전과 똑같이 잘못을 시정하지 않고 성전경비의 비호아래 계속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2) 대제사장(가야바, 안나스)을 비롯한 제사장들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상인들이 장사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3) 사람이 많이 모이는 명절(유월절) 때 폭리를 취하는 상업적 행위입니다.
4) 제물은 흠이 없는 것으로 집에서 조사해보고 가지고 와야 하는데 갑자기 돈을 주고 사는 행위입니다.
5) 흠이 있는 제물이라도 성전에서 산 것이면 무조건 제물로 드릴 수 있게 한 것입니다.
6) 로마와 헬라의 화폐를 성전화폐로 바꾸어 주는데 강제적으로 반 세겔의 성전세를 바쳐야 했습니다(17:24-27).

종교지도자들이 이권에 개입되면 그 때부터 타락의 길로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8:18-19절에 보면 시몬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사도들이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돈을 줄 테니 자기에게도 안수해서 성령을 받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행 8: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돈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돈을 사랑하게 될 때는 무엇이든지 돈으로 하려고 합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아니라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에 대해서는 히 13: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한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세속화되면 안됩니다.
1900년 대 영국교회가 침체기에 접어들 때 교회들은 나름대로 교회의 부흥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달려오다 보니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연의 임무는 망각한 채 세상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따라하거나 그런 시설로 변모해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단순하게 장터가 필요해서 교회가 그것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스포츠 센터시설을 갖추고 운동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전도 목적으로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처음에는 교회들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시설을 만들고 좀더 가까이 다가가 전도한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 교회들은 교회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의 심각성을 깨닫고 1930년 12월 30일(화요일) 아베라본 샌드필드에서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를 비롯한 11분의 목사, 장로가 모여 이런 것을 교회에서 금지할 것을 선언했습니다(로이드존스의생애, p77).
1.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체험을 솔직하게 교환하며, 우리의 실패와 고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을 스스로 선언한다.
2. 신앙적이 아닌 것은 무엇을 막론하고 그것은 죄이기 때문에, 신앙적이 아닌 활동은 각자 스스로 절제할 것을 선언한다.
3. 아래의 특별한 기도제목을 위하여 날마다 30분씩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선언한다.
a) 신앙부흥 운동을 위하여
b) 서로를 위하여
4. 우리는 웨일즈 장로교회의 선언을 받아들이지만 특별히 우리의 목회에 아래사항을 추가한다.
a) 우리의 성도들에게 회심과 중생을 강조할 것이다.
b) 모든 성도들은 죄사함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c) 모든 성도들은 성화되어가고, 성령을 받아들이고, 갈라디아서 5장 22절의 성령의 열매가 성도들의 생활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교육받고 지도받을 것이다.
5. 교회는 바자회나 음악회 등과 같은 세상의 수단과 방법에서 손을 씻을 것을 선언한다.

2. 기도는 만민이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사야 56:7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 56: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8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만민은 다른 말로 하면 모든 민족입니다. 유대인만의 구원이 아닌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은 모든 민족에게 개방된 것이며 누구든지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를 대제사장과 성전 치리자들은 장사판을 벌여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모시고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슬프신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 인색합니다. 그들의 속마음은 이방인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돈 바꾸어주는 사람들은 로마와 헬라에서 온 것입니다. 유대인만 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기도를 위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장사로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희생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이것으로 자신의 죄가 깨끗해지며 천국에 간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즉 이 제사 행위로서 천국에 간다는 것을 믿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속죄의 형식으론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KCM에서 베다니 미전도종족 번역을 마쳐가고 있고, 그 중에 주요종족을 뽑아서 책으로만 만드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업이 약 5년간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인터넷에 있던 영문 자료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좋은 자료가 영문으로 제공되지 않아 아쉬움을 달래면서 우리가 다운받아 논 것을 KCM에서 제공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찾던 자료를 정신호 집사님이 우연히 검색하다 다시 찾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홈페이지를 다시 디자인했을 뿐만 아니라 미전도 종족 개념을 다시 정리하고 각 나라의 미전도 종족도 다시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에 미전도 종족이 얼마나 있을 것 같습니까? 북한사람하고 또 중국의 한족, 몽골, 러시아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북한에 거주하는 미전도 종족입니다. 저희가 베다니 책을 만드는 이유는 책 제목에서 알 수 있습니다. “베다니 미전도 종족 기도정보(땅 끝을 향한 기도지침서)”입니다. 이 책을 보고 기도하라고 펴내는 것입니다.

3. 성전(교회)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거룩한 장소라는 뜻입니다. 사람만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 아닙니다. 아무리 높은 세상의 최고 권력을 가진 미국의 백악관이나 청와대도 거룩한 곳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계신 곳을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단이 있는 곳을 우리는 반대로 사악한 곳이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거룩한 곳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곳에 와서 할 일은 기도입니다. 교회에는 교재가 있지만 사교장은 아닙니다.
기도는 어디서나 해야합니다. 한마디로 때와 장소의 구분이 없습니다.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이지만 더 전적으로 기도만을 위해서 구분된 장소가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조차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의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전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화할 때 자기혼자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내 말만 하고 일어나서 갑니다. 이것은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필요한 것만 열거하고 갑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는 것만이 기도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크게 보면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 또한 기도입니다. 우리의 필요한 것을 아뢰는 기도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니까요.

지금 개축하고 있는 예루살렘성전은 처음부터 잘못되었습니다. 해롯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스룹바벨의 제2성전을 개축한 것으로 주전 19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8년 후에 헌당되었고 주후 64년에 이르러서 완전히 새 성전으로 완성되었으나 6년이 지난 주후 70년 디도(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서 완전히 파멸되었습니다. 이 성전은 성도들의 믿음으로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로마가 선심을 쓴 성전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제사장들은 뇌물과 같이 지어주는 건물만을 좋아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건물이 어떻게 성전이 될 수 있습니까? 성전은 믿음으로 지어진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그곳을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죠지 뮬러는 역사상 기도응답을 가장 많이 받은 분으로 알려졌습니다. 5만 번 이상의 기도응답을 받은 죠지뮬러(1805_1898년)는 프러시아인으로 크로펜스타트에서 출생했습니다.
아버지의 주머니를 상습적으로 뒤져 돈을 훔칠 정도로 문제아였던 그는 1825년 11월, 어느 토요일 저녁기도모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회심하게 됩니다.
1835년 할레대학을 졸업한 그는 선교사로 영국으로 건너가 브리스톨 애슐리 다운에 고아원을 세워 2천명이 넘는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했습니다. 1898년 3월10일 93세의 일기로 소천하기까지 그는 15만 명의 고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 주었고 오늘날까지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죠지 뮬러가 가장 시간을 많이 들여 한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삶을 나누었던 5명의 친구들의 구원 문제를 위해서 기도한 일입니다. 뮬러는 다섯 명의 친구를 위해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안 믿는 친구가 두 사람입니다. 뮬러는 이 두 친구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무려 52년간 두 친구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안 믿습니다. 뮬러는 이제 노년이 되어서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이 가까와 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있는 힘을 다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