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라오려거든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3. 나를 따라오려거든) / 눅 14:25-33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를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사면장 마저 거부해버렸다
미국 서부개척 당시 텍사스 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무법천지인 그 때에는 총을 난사하는 등 많은 살인이 저질러져서,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는 법이 제정,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소에 덕망 있고, 선량하고, 이웃으로부터 존경받는 아주 온순한 한 청년이 술집에서 실수로 살인을 했습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제 집행날짜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온 동리 사람들은 그의 사람됨됨이를 익히 아는지라,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 해서 구명 운동에 나섰습니다. 모두가 서명을 하고 탄원한 끝에, 드디어 특별사면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지사는 사면장을 들고 감방에 있는 청년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이미 그 전의 온순한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못되고 포악해졌는지, 주지사를 향해서 폭언을 하고 거칠고 난폭한 행복을 했습니다. 뉘우치는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주지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게다가 청년은 사면장 마저 거부해버렸습니다. 자기를 구하려는 동리사람들의 은혜를 저버린 채, 그는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끝까지 가보아야 합니다. 끝이 좋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예수님을 따르는 허다한 무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현세적 축복을 갈망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하신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러한 기적을 또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사이에는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위에 등극하실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현세적 축복을 갈구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무리들과 같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의 본문을 선택하면서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것인데, ‘복음’이라는 것은 기쁜 것인데 제 설교가 지나치게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는 무거운 설교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기억합시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결코 무거운 멍에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살아갈 때 신앙생활은 더 힘든 것입니다. 주님은 현세적 문제만을 보고 따라오는 무리들에게 “돌이키사 이르시되”(25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잘 따라가고 있는 중인데 예수님은 “돌이키사”라고 했습니다. 진행을 정지시키시고 제동을 건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왜 따라오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따라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따라오기를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심정을 두 비유로서 표현하셨습니다.

1.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를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집을 짓는데 집을 다 짓도록 그 비용을 계산을 하지 않고 짓다가 기초만 짓고 집을 완성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비웃음거리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에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뜻은 시작은 용처럼 거창하지만 나중은 뱀처럼 별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비슷한 것입니다.
요즘 사이버 세상에서는 더 이런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제가 잘 사용하는 표현 중에 집은 짓다말면 보이는 것이라도 있는데 소프트웨어(프로그램)는 하다말면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지식 정보사회로 불리는 요즈음은 보이는 사회(하드웨어)보다 그런 일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있는데 엄청난 프로젝트입니다. 문제는 이 일을 하다말면 그야말로 안한 것 보다 못합니다. 그래서 잘 할 수 있는지, 끝까지 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느라고 요즘 잠을 못 잡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잘 판단해야 합니다. 끝까지 잘 할 수 있는 일만 시작하려고 기도합니다.

2.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위의 집을 짓는 비유보다 더 강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에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판단을 잘못하면 다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더 심각한 것입니다. 나는 1만 명의 군사이고, 적군은 2만 명의 군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빨리 화친을 청해서 무고한 군사를 죽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승산이 없는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비유의 목적은 ‘바른 판단’에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단순히 적이 많기 때문에 항복하라든가 아니면 적과의 싸움이 선과 악의 타협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요지는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바른 판단을 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라”(되지도 않을 일은 처음부터 뜻하지도 말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따라오다가 그만두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끝까지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을 끝까지 보고 잘 판단해서 마라톤과 같이 골인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따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1. 자기 생명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합니다.
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미워하지” misei’(미세이)는 문자적인 의미에서 심리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잘못이해하면 큰일납니다. 만일 그렇게 잘못이해하면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나?’하면서 비관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내 생명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럼 “미워하지”(미세이)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부모를 제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좀 성장하면 친구를 제일 사랑합니다. 그러다가 애인이 생기면 애인을 제일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면 남편을 아내를 자식들을 제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자신의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무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려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뜻을 따르려 하는 것인지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따르는 것은 예수님의 뜻과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도 우리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주님 앞에 나왔다면 똑같은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사랑을 정의할 때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합니다. 바로 바울 자신이 그렇게 살아간 사람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인이면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내가 져야할 것이라면 져야합니다. 우리사회가 일을 잘못 처리하여 막대한 손해를 입히면서도 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피하면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지고”에 해당하는 ‘bastavzw(바스타조)는 요 19:17에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주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참다, 운반하다”라는 뜻과 함께 동시에 “영접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지난번 우연히 TV을 보다가 좋은 영화하나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중간에 보아서 정확한 뜻은 잘 파악을 못했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은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바다가운데 있는 작은 원주민 마을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때로는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우를 만나 죽을뻔 한일도 있었고, 처음에는 부족 사람들이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를 감동시킨 것은 나중에 선교본부에 사람이 나와서 이 사람이 한일을 평가합니다. 그리고 본부에서 이 사람을 부릅니다. 순종하고 돌아가는 데 잘 아는 다른 가까운 책임 있는 원주민에게 본부에서 ‘유골함’을 준비해서 주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 선교사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그 뼈를 이곳에 담아서 본부에 보내달라고 부탁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3. 자기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합니다.
33절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시점에서 듣는 무리들은 ‘잘못 따라 왔나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무 곳에서나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제자가 되려면…”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제자 되려면 들어야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2제자를 놓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무리들 앞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은 특별히 제자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전할 수 있지만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지 않는 분들이 제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바로 ‘헌금’입니다. ‘헌금’ 때문에 못나오는 분들 많습니다. 물론 교회가 ‘헌금’을 강조해서 믿음이 없는 분들을 좇아내는 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은 단순히 ‘헌금’을 강조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다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소유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남용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임한 것이라고 믿고 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와 같이”는 두 비유에 대한 결론입니다. 두 비유는 바른 판단을 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기를 바라는 비유입니다. 비유에 대한 결론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바르위크 마을에 사는 한 씩씩한 소년이 은행 창구에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 은행에 돈을 저축했으면 하는데요.”
그 말을 들은 은행 직원은 소년이 마을의 감리교 교회에 나가는 신앙 좋은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 좋은 일이구나. 존, 얼마나 저축하려고 하지?” “4달러예요.”
“그럼 통장은 네 이름으로 만들어 줄까?”
“아니 예요, 아저씨, ‘존 예이츠와 그의 친구’라고 해주세요. “소년의 말에 은행 직원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존의 친구가 누구지?” 소년이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에요, 저는 오늘 아침 첫 월급을 탔어요. 그래서 십일조를 시작하려고 마음먹었어요. 이제 이 4달러는 하나님의 것이에요.
저는 단지 이 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뿐이에요.”

결론적으로 위의 세 가지는 모두 같은 뜻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나누어야 합니다.

▣ 소 대신 내가 밭을 갑니다
평안도에 가서 선교하던 미국 선교사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어떤 시골에 갔더니 웬 사람이 밭을 가는데, 소 멍에를 아버지가 메고 앞에서 끌면 아들이 뒤에서 그것을 잡고 밭을 갑니다. 하도 이상해서 가까이 가보니까 마침 아는 장로님입니다. “장로님, 어찌해서 이렇게 소가 메는 멍에를 메고 밭을 갑니까?” “예, 예배당 짓는데 소를 팔아 바쳤거든요. 그래서 소 대신 내가 밭을 갑니다.” 장로님의 그 얼굴빛은 여전히 밝고 감사와 찬송이 넘치더랍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것 같아도 그분만이 가지는 기쁨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제 목회 철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큰 사람 만드는 것입니다. 세계를 품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
자신의 소유욕이 지나쳐 사적으로 남용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큰 사람 될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따라가는 사람 이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장애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2. 예수님과 장애인) / 요 9:1-7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미국의 한 보험회사가 100명의 젊은이가 65세에 이르렀을 때 어떤 형편에 놓이게 되는지에 대해 조사하였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1. 이미 죽은 사람(36명)
2. 가난하게 살며 가족, 친구 또는 정부의 원조를 받고 사는 사람(54명)
3. 일을 그대로 하고 있는 사람(5명)
4. 남부럽지 않게 사는 사람(4명)
5. 성공적 삶을 살고 있는 사람(1명)
모두 성공지향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성공의 문은 100대 1의 좁은 문이었습니다.
이 통계는 성공으로만 보자면 100:1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미국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 54명의 절반이 넘는 사람이 정부의 원조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애인 그러면 선천적 장애인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장애인 가운데 선천적 장애인으로 진단되는 사람은 장애인 전부 가운데 6%-10%에 불과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6%-10% 범주 안에 장애인들이 있어요. 이게 선천적 장애인지 후천적 장애인지 그 진단이 불가능한 확률이 10%정도라고 합니다. 나머지 80%는 다 후천적 장애인들입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는 인구의 10%이상은 장애인이란 것을 아십니까? 우리나라 인구가 5000만이라면 우리 나라에 장애인이 얼마나 될까요? 500만이 장애인이라는 통계입니다.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장애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저는 장애인 문제를 함께 나누기 앞서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고 장애인 후보라는 사실입니다. 장애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은 피할 수 없이 장애인의 운명을 살아가고 나하고는 상관없다는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예비 장애인이고 장애인 후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교통사고로 인해 해마다 4만여 명이 넘는 사람이 장애를 입고, 산업재해로 3만 여명, 각종 질병 및 의료사고로 인해 3만 여명, 그리고 기능 장애를 수반한 기형아 출산율이 2.7%로 매년 2만여 명이 넘는 기형아가 출산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각종 대형 참사로 인한 장애발생이 더해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렇게 더해지는 장애인은 매년 10만 여명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군대의 1개 사단병력이 1-2만 명으로 이루어집니다. 적어도 1년에 5개 사단에 해당하는 인원이 정상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장애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체적 장애인만을 장애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정신적 장애가 더 문제입니다. UN장애인 권리 선언에 보니까 장애인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장애인이란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신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원인으로 자기 자신의 힘으로 홀로 서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선천적 원인이든 후천적 원인이든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삶을 유지하기 어려운 장애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이미 우리 가족 중에 장애가 있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애인은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곧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장애를 함께 극복해 가지 않으면 우리의 삶을 올바로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장애를 극복하려면

1. 장애는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본문 2절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이면 누구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이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죄가 없이는 장애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출 20:5, 민 14:18, 례 16:15). 바로 이 죄의 결과로 장애가 생겼다는 편견 때문에 장애인을 소홀히 대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욥의 경우를 보면 자신의 죄 때문에 병이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세 친구들은 죄에 대한 보응이라고 강변했습니다.
신약에 바울의 경우는 하나님이 자고 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눈에 질병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세 번 기도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응답은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장애가 죄의 결과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본문 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중에 장애인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더 교만해 질 것입니다. 장애인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아울러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분들에게 빗진 자라는 것입니다.

2.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제자들을 가르치신 시간들을 뺀다면 거의 모든 시간이 어떻게 활용하셨는지 아십니까? 한마디로 장애인과 함께 보내신 것입니다. 장애인을 위해서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태 세리의 집에서 식사할 때, 바리새인들이 보고 너희 선생이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이 소리를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막 2:17, 눅 5:31)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병든자와 함께 지내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장애인들을 위해서 오셨다면 우리 역시 그분들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먼저 장애인에게 붙여진 그 타이틀, 그 편견의 타이틀을 우리가 먼저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깊은 편견은 먼저 언어 자체에 대한 여과 없는 전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빨리 버려야 할 언어들 가운데 병신 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저도 팔이 부러져 초등학교 때는 한 팔을 기부스하고 다시 내리면 다른 팔이 또 부러져 기부스하고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기부스를 너무 많이 하다보니 늘 친구들로부터 ‘팔 병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지냈습니다. 심지어 한국 문화재 가운데는 병신춤이라는 문화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뿌리깊은 문화적 편견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번역학자들은 우리가 새로운 시대에 이 성경을 다시 번역한다면 성경의 언어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소경이란 말 대신에 어떤 말을 써야 합니까? 시각장애인입니다. 시각 장애인이 어색하기 때문에 새 번역 성경에는 ‘눈먼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성경이 바로 번역되어 새롭게 나왔는데 우리가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보는 성경은 ‘개역한글성경’으로 1962년 판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와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대답한 본문이 마태복음 11:5절입니다. 이 본문을 ‘개역한글성경(1962)’과 ‘표준새벅역’(1993)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개역한글성경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표준새번역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저 또한 병신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저도 회개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남을 향해 돌 던진 한번 있습니다. 제가 살던 마석에, 지금은 성생농장에서 성생가구단지로 바뀌었는데 예전에 이곳에 나환자촌입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하고 이 곳을 지나다가 나환자촌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문둥병자라며 돌을 집어던지고 도망간 일이 있습니다. 그 때는 그분들이 무서웠습니다. 또 시골에서 소문이 어린아이 간을 빼먹으면 그 환자들이 낫기 때문에 어린이간을 빼먹는다는 헛소문까지 들었던 터라 필사적으로 돌을 던지며 도망간 일이 있습니다.

3. 장애에 대한 모세 오경의 오해
우리는 모세 오경의 창세기를 제외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보면 상처가 난 환자, 나환자 등을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구약의 사상에서 유대인은 장애에 대한 편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기록할 때 왜 그러한 기록이 필요했는가 라는 상황을 철저하게 면밀하게 연구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 당시의 이런 상황이 특별히 200만 명에 가까운 수많은 집단이 집단으로 광야에서 이동하고 있었던 상황 속에서 이 교훈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먼저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환자를 지속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거할 목적이지 사실은 그 사람 자신을 제거할 목적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군집된 공동생활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 그것이 어떤 전염병으로 발전할 우려 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일시적으로 격리하는 어떤 제도를 만든 것이지 사람 자체를 제거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에 보호가 필요한 분들을 위해서 이런 명령들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레위기 19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19:9절부터 읽겠습니다. 레위기 19장9절 이하의 말씀은 광야 생활과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종의 사회정의의 규례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가나한 자들에 관해서 연약한 자들에 관해서 장애인들에 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접근해야 하겠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주목할 만한 말씀들입니다. 9절 이하를 보시면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추수를 할 때 반드시 넉넉하도록 추수의 이삭들을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기 위해서 항상 그것을 남겨두라고 말씀하십니다. 10절에도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 하나님이 얼마나 가난한 사람, 또 나그네, 외국인은 자연히 편견 속에서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애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나그네, 장애인 이런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매우 균형 있게 연구하던 성경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의 이런 사람들에 관해 편애를 갖고 있는 듯이 보여진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슴이고 심정이예요. 11절 이하에서는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 다음에 정말 함께 주목하고 싶은 말씀은 사실은 14절입니다. 레위기 19:14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우리가 장애인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구약성경 안에서도 이미 밝혀놓았다는 말씀을 우리는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였던 격리의 일시적인 현상은 그 죄를 초래하는 원인을 격리시키려는 하나님의 마음이지 사람 그 자체를 격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장애인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을 넘어서야 됩니다.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편견을 넘어설 때 우리는 좀 더 자유롭게 당당하게 장애인 이웃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줄을 믿습니다.

4. 예수님처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가끔 안타까운 뉴스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려고 할 때 그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 학생이 한 학교나 반에서 공부하려고 할 때 부모님들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자기 집 값 떨어진다고 반대하고 아이들 교육에 방해받는다고 생각해서 대모 하는 분들 정말 사람도 아닙니다.
제가 한번은 약간 말이 불편한 자매와 지하철을 타고 갔는데 서로 말을 하는데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예요. 그 자매는 말을 하려면 몸을 약간 비틀면서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말을 했거든요. 그 사람들이 왜 쳐다보는지 아십니까? 이런 장면을 많이 보지 않아서 그럽니다. 처음에 외국인들이 거리를 지나다니면 사람들이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쳐다보지 않습니다.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주 대하고 함께하다보면 익숙해집니다.
어떤 장애인 문제 연구소를 보니까 장애인들이 제일 크게 느끼는 불편이 뭐냐 하면 세 가지 제일 큰 불편 가운데 육체적인 불편은 맨 마지막이었습니다.
첫째 불편이 경제적 빈곤입니다. 장애인이 되면 동시에 경제적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돼요. 저는 정의로운 사회는 약자가 보호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의 발생은 개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상당히 사회적 책임이 큽니다. 우리 사회가 이런 산업재해를 발생시키고 그리고 교통 시설도 그렇고 그렇다면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교회도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두 번째가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소외감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된다는 소외감.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 그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중의 한 사람, 식구 중의 한 사람, 우리 지체 중의 한 사람이 되는 것. 주님은 교회를 설명할 때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 부분의 지체라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 눈먼 장애가 있는 한 분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물론 이분 입장에서 보면 더 큰 선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렇게 장애가 있는 분들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장애가 있는 분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건강을 주신 것은 장애인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필요한 분들과 나누어 쓰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1.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 요 16:13-15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저는 제 발음이 정상인줄 알았는데 언젠가 부터 제 혀가 좀 짧은 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 소리는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짧은 혀도 믿지 않으시겠지만 가끔가다 잘 씹습니다. 입안의 혀도 내 마음대로 안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 주님이 아십니다. 그래서 돕는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도움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말을 배우면서 그 혀가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혀가 처음부터 짧고, 굳어진 것은 아닙니다. 습관이 굳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굳어진 혀는 펴지기가 어렵습니다. 보통 언어학자들은 7-8세가 되면 혀가 굳어지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 이민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엄마 배속에서 온 아이하고 한국에서 태어나서 들어온 아이하고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 만큼 언어라는 것은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처럼 발음이 잘 안 되는 목사님 한 분이 6.25때 공산당에게 잡혔습니다. 공산당들은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그 자리에서 사형을 결정했습니다. 목사님의 차례가 되어서 공산당이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장로교 목사요”그랬습니다. 그랬는데 이 공산당은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장롱을 고치라고 했다는 겁니다. 부인이 아침에 나갈 때 혹시 장롱 고치는 목수 있으면 집으로 데려오라고 했는데 목사가 “장로교 목사요”그러니까 “장롱 고치는 목수요”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부산에 사시는 분이 한번은 저에게 “버니엘을 아십니까?”그러는 거예요. 제가 인터넷에 성경인명사전의 저자 아닙니까? 어지간한 이름은 알지요. 그런데 “버니엘”은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했더니 상당히 실망한 듯한 소리로 “목사님 버니엘’을 모르세요.” 그리고 다시 “정확히 말씀해 보세요?” 그랬더니 “브니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브니엘 해보세요.” 그랬더니 다시 “버니엘” 그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이 말 소리로 사람을 구분한 것이 나옵니다. 사사기 12장에 입다 선지자가 길르앗 사람과 함께 에브라임 사람과 싸웁니다. 그리고 패하여 도망하는 에브라임 사람을 잡기 위해서 요단 나루턱에 미리 도착하여 에브라임 사람을 잡습니다. 이 때 말을 하지 않고 가만있으면 누가 길르앗 사람인지, 에브라임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말을 시켜보는 것입니다. 삿 12:6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명이었더라”
이렇게 습관이 된 발음도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주님을 만날 때 거짓말을 시킬 수 없습니다. 물론 주님이 다 아시는 것도 있지만 내가 아무리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안됩니다. 왜하면 양심이 소리를 지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9:1 “양심이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때에도 그렇습니다. 내 양심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잘 믿으세요. 거짓 믿음은 안됩니다. 주님이 다 아십니다.

오늘은 성령이 우리에게 내주(內主) 하시는 증거들을 8가지로 말씀드림으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자 합니다.

①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나의 사고 방식을 주님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합니다.
본문 13절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라고 하십니다.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②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합니다.
본문 14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성령은 오직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내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③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언제나 우리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본문 14절 후 반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의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것을 알리십니다. 예수님의 것을 알리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알고 싶어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어떤 할머님이 계셨습니다. 성경을 읽는데 인물만 골라서 읽으시는 것입니다. 성경 인명의 이름이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골라서 읽으시는 것이예요. 그래서 목사님이 할머님 성경을 모두 읽으셔야지 왜? 이름만 읽으세요. 그랬더니 할머님이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텐데 천국에 간 사람들의 이름이라도 알아 가지고 가야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독하다보면 오늘날 우리와 관계없어 보이면서, 지명이름이 너무 많이 나와 읽기 힘든 곳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부분이 여호수아 13장부터 21장까지 가나안 땅을 분배하여 12지파에게 지경을 나누어주는 장면입니다. 유다지파에게 준 곳 여호수아 15장 21-32절까지 읽으면 이렇습니다.
21 유다 자손의 지파의 남으로 에돔 경계에 접근한 성읍들은 갑스엘과 에델과 야굴과
22 기나와 디모나와 아다다와
23 게데스와 하솔과 잇난과
24 십과 델렘과 브알롯과
25 하솔 하닷다와 그리욧 헤스론 곧 하솔과
26 아맘과 세마와 몰라다와
27 하살갓다와 헤스몬과 벧벨렛과
28 하살 수알과 브엘세바와 비스요댜와
29 바알라와 이임과 에셈과
30 엘돌랏과 그실과 홀마와
31 시글락과 맛만나와 산산나와 르바옷과
32 실힘과 아인과 림몬이니 모두 이십 구 성읍이요 또 그 촌락이었으며
어때요 이해가 되시고 은혜가 됩니까? 여기서 은혜 받는 분이 있다면 대단한 것입니다. 지명들만 열거된 것 같지만 감동스러운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땅을 이제 분배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이 땅을 분배받는 각 지파의 사람들은 어떠하겠습니까?
만일 이 땅을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이라면 얼마나 관심이 많겠습니까? 예를 들어
“주앙교회 성도들에게 분배해 주는 땅은 남으로 서울 경계에 접근한 성읍들은
석수, 관악, 명악과, 금정, 군포, 산본과, 부곡, 의왕을 지나 왕송저수지와 서수원까지이며 모두 이십구 성읍이요 또 그 촌락이었으며“라고 말하면 얼마나 관심이 많겠습니까? 정확하게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서의 땅의 분배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의 우리 집과 땅에 대한 분배를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이 생깁니다.

④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언제나 하나님을 위한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⑤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더욱 깊게 깨닫게 됩니다.
롬 5:20 “…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죄를 더욱 깊게 깨닫게 될 때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만원을 대신 값아 주었다고 생각하는 분은 많이 고맙다고 생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100만원 아니 더 많은 돈, 내가 도저히 값을 수 없는 돈을 값아 주었다고 생각하는 분은 더욱 감사하며 은혜가 될 것입니다.

⑥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점점더 죄악에 대해서 민감해 집니다.

⑦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⑧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최근의 북한 소식하나 전해드리겠습니다.
추운 겨울에 며칠을 걸렸는지 어렵게 탈북을 해서 중국에 도착을 한 강철(가명)과 진주(가명)는 북한에서 부모님과 살다가 중국으로 넘어온 남매입니다.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민가로 내려와 남매는 먹을 것을 청했습니다. 중국당국이 탈북자를 보호하면 벌을 주지만 같은 민족으로 모른 채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어린 남매를 모른 척 한다는 것은 곧 그들을 굶어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조선족 사회에서는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다 압니다. 그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그저 며칠을 따뜻한 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한참 후에 이들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부모도 오래 전에 탈북을 했다가 복음을 듣고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강철의 아빠는 북한에 돌아와 10일만에 열 한 명을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감격스런 첫 예배를 모여서 드렸습니다. 감시원들의 눈을 피해서 강가에 배를 띄어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강가에서 예배드리는데 군인들이 찾아왔습니다. “동무들 거동이 수상한데? 뭐하고 있었나?”그러는 것입니다. 순간 강철 아빠는 “아무 일 없습네다”그랬는데 욕을 퍼부으며 배를 수색하다가 감추어둔 성경책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 종간나 새끼들! 이거 뭐야?” 하면서 권총을 머리에 대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그 때부터 아버지는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북한에서는 성경 한 권을 소지하다 걸리면 6년형이 확정된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땡크 한대보다 성경 한 권을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그 후 어머니는 아빠가 잡혀갔으니 엄마가 전도해야 겠구나 하고는 과일을 팔러 다니며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남편과 가장 친했던 친구 분에게 한참 전도하고 있는데 군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알고 보니 남편친구가 스파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도 잡혀가 소식이 끊어진 것입니다.
두 남매는 따돌림을 당하여 늘 듣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안기부 공작원 새끼들!”입니다. 북한에서는 예수 믿다가 걸리면 안기부 공작원이라는 누명을 씌워 왕따를 시키는 것입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마을에서 쫓겨나 산 속에 들어가 굴을 파고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이들이 먹고 산 것은 뱀과 쥐였습니다. 강철은 “목사님 뱀을 잡을 때는 전기 줄이 최고입니다.” “그래?” “왠지 아십니까? 어떤 놈들은 대가리를 세워 덤비는 놈들이 있습니다. 이 때 전기 줄로 사정없이 내리치면 그 자리에서 뻗어버립니다. 뱀은 잡자마자 벗겨 곧바로 구워 먹으면 기가 막힙니다.” 남매는 뱀을 잡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맛있는 뱀을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나는 마을로 내려가 남의 집일을 해주고 감자를 받아온 적도 있지만 그 일거리는 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픈 어느 날 쥐를 잡기 위해서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옥수수 몇 알을 놓고 쥐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때 배고픈 쥐가 나타났습니다. 순식간에 내리쳐 쥐를 잡고 있는데 또 살이 찐 쥐가 나타나 그 쥐도 잡았습니다. 모두 세 마리를 잡아 물을 넣고 끓여 다른 반찬 없이 쥐만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쥐 잡아 먹을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 그게 먼데?” “절대 들이나 산에서 사는 쥐를 잡아먹으면 안됩니다. 등에 하얀 줄기가 있는 쥐는 출혈열 쥐입니다. 그 쥐를 먹으면 독이 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쥐 잡아 먹을 때는 집에 사는 쥐가 최고입니다.
이 아이들은 영양보충이 되지 않아 초등학생 2-3학년 정도의 상태였습니다. 진주는 지금도 다리를 쓸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괴로워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들이 즐겨 부른 찬송은 455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였습니다.

강철이 언제 가장 힘들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한참을 머뭇거린 강철은 “엄마, 아빠가 잡혀가고 나서 갈 곳이 없었습네다. 그리고 먹을 것도 전혀 없었습네다. 그리고 마을에 구걸하러 다니는데 아세끼(아이)들과 아저씨들이 우리한테 ‘거지 새끼들, 안기부 공작원, 꽃제비’라고 놀릴 때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한마디 더 들려주기를 “목사님, 하지만 감옥에 있는 아빠 엄마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네다. 감옥에 있는 부모님이 더 힘들지 이런 것이 뭐가 힘들겠습네까?”

배불리 먹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남조선에 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 내가 남조선에 가서 뭘 합네까? 나 같은 놈 누가 받아 주기나 한답네까? 북조선에 가서 예수님 전해야지요.”
그러다가 엄마, 아빠처럼 잡혀가면 어쩔려고“ ”그럼 잡혀가면 됩네다“
무섭지 않느냐고 했더니 “무섭긴 뭐가 무섭습네까? 일 없습네다(괜찮습니다).”
남매는 지혜롭게 토굴에서 납짝한 돌맹이를 가져다가 구들장을 만들고 아궁이도 만들고 불을 피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불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주변의 낙엽들을 모아 이불을 대신했습니다. 이들이 입고 있었던 옷은 거의 다 떨어져 이곳 저곳에 살이 삐죽삐죽 나와있었습니다.

남매의 기도제목은
1. 부모님이 하루빨리 석방될 수 있도록.
2.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도록.
3. 진주의 부어있는 몸과 질병의 치유를 위해서.
4. 남매의 꿈과 미래를 위해서

세상 사람들은 은과 금으로 자신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예수님으로 자신을 보입니다.

세상 사람은 은과 금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피 묻은 십자가로 세우려고 합니다.

 

복이 있는 눈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0. 복이 있는 눈) / 눅 10:21-24

“21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저는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 빈혈이 좀 있습니다. 중학교 때 점심시간에 조회를 했는데 햇빛에 오래 서 있다가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청년 때는 서울역에서 헌혈하다가 얼굴이 하야케 변하고 현기증이 나서 간호사들이 놀란 적이 있어 그 이후부터 헌혈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2년 전에 치과를 갈 때 겁이 나서 집사람 손잡고 갔습니다. 40넘은 사람이 부인 손잡고 치과에 오니까 의사 선생님이 여자였는데 쳐다 보시더라구요. 누구 손잡고 온 사람 있나 보니까 아이들이 엄마 손잡고 왔더라 구요. 아니나 다를 까 병원냄새 나고 속이 울렁울렁 하다가 얼굴이 하얘지고 화장실이 가고 싶더라구요.
제가 이렇게 된 데는 체질도 문제가 있겠지만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도 영향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보아서는 안될 충격적인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었을 때 저희 집 앞에 경춘선 기차가 다니는데 그 뒤쪽에 마을이 있어 사람들이 철길을 넘어 다녔습니다. 그 철길로 할아버지가 건너가시다가 기차가 오는 것을 다 피하지 못하고 한쪽 다리를 기차바퀴에 치이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까이 에서 목격한 것입니다. 발목이 다리에서 거의 잘라져 질질 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본 후로 몇 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 현기증이 났습니다.
저는 지금도 영화에서 끔찍한 장면이 나오면 바로 채널을 돌립니다. 대부분 이런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살인하는 장면이라든가 남에게 상해를 입히는 장면들은 모두 봐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영화가 있었잖아요. 이 영화 나올 때 모방범죄나 유사사건이 생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실제로 모방범죄가 생겼습니다. 외국의 사례에서도 영화를 흉내내는 사건들이 많이 나옵니다. 모두가 보지 않아야 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거나 볼 수 있다고 다 보는 것은 복이 아니라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된 것 만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최고의 것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사람은
주님은 본문 21절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과 “어린 아이들”이 대조되었습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습니다.”
지혜와 슬기는 주님이 다른 곳에서 말씀하실 때는 좋은 것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마 7:24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막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눅 21: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그리고 마 25: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혜와 슬기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 숨겼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위에서 말한 본문의 뜻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율법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높은 학문이 신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만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이미 오래된 생각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지혜로운 현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위경 제4 에스라 12:35-38).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들에게는 나타내셨습니다.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적 지식은 부족하지만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영국의 사상가 콜린스(J. A. Collins)가 어느 날 교회에 가다가 가난한 일꾼을 만나 나눈 이야기입니다. 콜린스는 ‘이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 보자’라고 생각하고 대화한 것입니다.
콜리스 ‘어디를 가십니까?’
일꾼 ‘교회에 갑니다’
콜린스 ‘당신의 하나님은 크신 분입니까? 작은 분입니까?’
일꾼 웃으면서 ‘하나님께선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온 우주를 품어 주시지요. 그러나 제 가슴에 머무르실 수 있을 만큼 작은 분이시기도 합니다.’
후에 콜린스는 그 어떠한 사상집도 이 가난한 일꾼의 말이 준 감명을 따르지 못했다‘라고 술회했습니다.

아버지를 알려줘야 합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무엇이든 알려주어야 아는 것입니다.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독도를 ‘다케시마’이며 자기네 땅이라고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제 우리도 알려야 합니다. 알리지 않으면 지는 것입니다. 일제는 36년 동안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많은 일본말을 남겨놓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깊은지 우리는 아직 까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말을 합니다.
‘삐까번쩍’ – ‘삐까삐까’로 번쩍번쩍이며 ‘쎄쎄쎄’ – ‘쎄쎄쎄’로 놀이동작을 말합니다.
‘싹쓸이’ – ‘쓰리’는 소매치기 이며 ‘아싸리’ -‘앗싸리’는 깨끗하게입니다.
‘쿠사리’ – ‘쿠사리’ 쇠사슬을 말하고 ‘몸빼’ – ‘몬뻬’ 여자 작업용 바지를 말합니다.
‘무대포’ -‘무떼뽀우’는 막무가내를 말하는 것이며 ‘요이땅’ – ‘요이땅’ 요이는 준비이며 ‘땅’은 총이 없을 때 총소리를 흉내낸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일제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우리가 모르는 것들입니다. 속히 버려야 할 말들입니다. 무엇이든 누군가가 알려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알려주신 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을 알려주신 것만이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신 분입니다.
본문 22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하셨습니다.
흔히 제일 알다가도 모를 사이를 부부사이로 말합니다. 그래서 부부문제는 “부부만 안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부모는 우리를 키워주면서 우리 또한 부모와 같게 교육되고 환경에 적응되어 살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부는 다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다가 만났기 때문에 많은 것이 다릅니다. 그러나 부부도 오래 살다보면 닮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닮지 않는 점도 있겠지요. 이것은 서로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똑같이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르면 다른 대로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는 우리가 다 모릅니다. 부부의 문제도 다 알 수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문제를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모릅니다. 주님이 알려 주셨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에게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닭장에서 병아리들이 함께 커 가는데 한 마리가 다른 닭들과 색깔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을 날아가는 독수리를 보았습니다. 당당하고 멋있게 날아가는 그 모습이 너무도 부러웠습니다. 자신은 날수도 없는 닭이며 그것도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닭이 아니라 독수리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한 소년이 장난으로 독수리 알을 꺼내어 닭장에 넣었기 때문에 독수리로 자라지 못하고 닭처럼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어미 새가 길러주지 않으면, 가르쳐 주지 않았으면 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려주고 가르쳐주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롬 10:14-15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복이 있는 눈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주님을 보고있는 제자들은 확실하게 복 받은 눈임에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보는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었던 선지자들(다니엘, 호세아, 아모스, 요나, 미가 등)이 보지 못한 분입니다. 그리고 왕들(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아 등)이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자들이 보고 있으니 이들이 얼마나 복 받은 것입니까. 구약의 선지자나 왕들은 메시야를 보지 못했고 복음의 선포를 듣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보았습니다.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들도 제자들과 같이 복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복음을 다 보고 있지 않습니까?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었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소리를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제일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진정 복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알려주시고 가능하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2절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계시를 받는 자”는 원문의 ‘아포칼륌토’로 “덮개를 제거하다, 나타내다, 밝히다”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바울이 회개하기 전 ‘사울’일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은 제자들을 잡아죽이려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도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다메섹으로 갈 때 홀연히 하나님이 비추는 빛을 보았습니다. 이 빛을 보고 그는 눈이 멀어 사람들에 의해서 직가라는 거리의 유다집으로 옮겨졌습니다. 4일 동안이나 앞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했습니다. 그 때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환상으로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그는 주의 제자들과 믿는 사람을 잡아가려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주님이 일러주신 명령이 부당하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행 9:15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음성을 들은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대로 사울에게 가서 안수했습니다. 바로 그 때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눈에 있던 덮개가 제거된 것입니다. 본문 22절과 같이 아들(주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즉 눈의 덮개를 제거하여 하나님을 보게 한 것입니다.
예전의 눈하고는 다릅니다.
예전에는 주님을 따르는 부활을 믿는 주님의 제자들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는 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눈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눈의 덮개를 제거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일만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남위에 군림할 수 있을까? 명예와 욕심이 가득합니다. 그것만 보입니다. 주님이 우리 눈의 덮개를 제거해 주시기 원합니다. 그 때 우리는 아버지를 보게됩니다. 이 눈이 복이 있는 눈입니다. 아멘.

미국의 한 사업가가 호텔에서 방을 구하려 했으나 호텔이 만원이라 거절당하고 낙망하여 걸음을 옮기는데, 어떤 신사가 그에게 “지금은 어딜가나 방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니 자기와 동숙하자”라고 했습니다. 사업가는 안도의 숨을 쉬고 감사한 마음으로 동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을 제공한 그 신사가 자기 전에 열심히 기도를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자기와 사업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더랍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신사는 먼저 성경을 읽더니 또 열심히 기도하더랍니다. 그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헤어질 때 명함을 주고받았습니다. 신사의 명함에는 ‘윌리엄 제임스 오브라이엔’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해서 사업가는 그 신사에게 “국무장관의 이름과 똑같군요.”라고 했더니 그 신사는 겸손히 “네, 같은 인물입니다.”하더랍니다. 후에 사업가는 회상하기를 ‘나의 삶에 제일 큰 변화를 준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옛날 청교도들이 퓨리탄들이, 믿지 아니하시는 분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할 때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과 지금 우리가 제일 많이 쓰는 ‘예수 믿으세요 그리고 구원 받으세요’ 우리가 이런 말을 제일 많이 쓰겠죠? 그런데 청교도들이 전도할 때 쓴 말 가운데 이런 말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한번 따라서 해보세요. 사람이 두 번 태어나면 한번만 죽고요, 한번만 태어나시면 두 번 죽어요. 청교도들이 그렇게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두 번째 사망, 제2의 사망을 가리키고 있어요. 두 번째 사망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어떻게 쓰여있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21장 8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여기 무슨 단어가 나왔습니까? 둘째 사망, 둘째 사망, 거기다 줄쳐 놓으세요. 둘째 사망.

예수님 믿지 않는 분들은 죽으면 끝난다고 합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죽고 또 죽습니다. 그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그러나 두 번 태어난 사람,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한 사람들은 두 번 죽지 않습니다. 대신 두 번 태어납니다. 아멘.

 

부활의 증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9. 부활의 증거) / 눅 24:1-12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8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11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새날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역사상 오늘만큼 의미가 깊은 날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주일을 성수 하는 것은 구약의 안식일이 아닌 새로운 날 부활 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민족으로 택하게 하셨다면, 오늘날에는 부활일(주일)을 지킴으로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택하시는 것입니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레물린에 가면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종이 깨져있기 때문에 울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종의 높이는 5.4m, 무게는 219톤 가량 됩니다. ‘자유의 종’의 무게가 0.9톤입니다. 이 종이 깨진 이유는 쇳물을 주조틀 내에 부었을 때 그곳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물방울 하나가 주조틀 안으로 들어가 종에 틈이 생겨 금이 간 것입니다.
이 물방울처럼 작은 의심이 생겨 부활을 의심하지 말고 온전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부활을 의심하는 것은 이 물방울과 같습니다. 전체의 신앙을 망가트립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1. 예수님은 죽은자를 살리심으로 자신의 부활도 알렸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생전에 죽은 사람 두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 것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8:41절부터 나오는 12살 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한 두 사람이 보는데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집에는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를 보려고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조롱하는 무리들이 한 말을 통해서도 증명하고 있습니다.
눅 23:35-37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여기서 ‘구원’이라는 말은 ‘살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은 살렸으면서 예수님 자신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느냐는 말입니다. 이들의 조롱이 오히려 예수님이 생전에 살린 나사로와 야이로의 딸 그리고 죽어가는 수많은 병자들을 살리신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들의 말대로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에서 십자가에서 뛰어내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벽한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증거
본문 6절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것을 수 차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대답입니다.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나왔습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도 무덤 속에서 있다가 살아나실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사역이 점점 마지막을 향해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제자들에게는 모든 사실을 솔직히 말해줄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 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본 것은 세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살아나 기전에는”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제자들에게는 숙지시키시고 군중들에게는 암시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미래예언을 잘한 사람으로 알려진 한 사람을 꼽으라면 사람들은 ‘미셸 노스트라다무스’(Michel Nostradamus, 1503~1566)를 꼽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 생 레미라는 곳에서 태어난 유태인입니다. 이 사람이 예언가로 알려진 것은 오랜 작업 끝에 완성된 『백시선』이라는 책 때문인데, 그가 친구들에게 “이 책 속에 세계의 미래가 모두 담겨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말 그의 예언이 맞는 것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저서를 지금까지 수많은 학자들이나 판문가 고서적 애용 가들이 읽어보고 자기들이 예언을 조금씩 바꿔서 거짓으로 일궈낸 것들이 전부입니다. 실제 그의 예언은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노스트라 다무스가 나폴레옹, 히틀러를 예언한 것, 핵무기를 예언한 것, 지구멸망을 예언했다는 것 등은 모두가 후세 인들이 덧붙여 꾸며낸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의 종말에 대해서도 이 사람의 이야기를 부풀려 흥미 거리로 만들어 사람들을 믿게 한 것입니다. 그의 예언이 맞은 것이 있다면 그의 책 후반에 장난기처럼 쓴 것입니다.
“이 이야기들을 종교가나예언가 자신의 부를 축적하려는 자,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남을 속이려는 자로부터 멀리하소서 후세에 내가 예언한 것을 믿으려는 자가 있으면 처단하소서 그리고 누구도 모르게 하소서 내가 죽고 수세기가 지난 후에 이 예언의 기일이 전부 끝났을 때 열 수 있도록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에 얽매여 백성을 속일 것이오”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왜 썼는지 의심이 갑니다. 이런 이야기로 볼 때 노스트라다무스는 이 책을 통해서 사람들을 농락한 것입니다.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들고 끊임없이 자기가 한 말을 현재처럼 후세 인들에 의해서 살이 붙어져 거짓이 돌아다닐 것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천재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후세 인들이 농락 당하는 것이 우습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이렇듯 농락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 예언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하고는 다른 분입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능력을 가지고 계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완전히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분입니다.

3. 빈 무덤
먼저 말씀드린 것이 예수님의 예표와 예언이었다면 빈 무덤과 수의들은 부활의 실증입니다. 말씀하시던 것이 사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인봉되었습니다. 인봉이 무엇인지는 아시지요? 이스라엘의 무덤은 우리처럼 땅에다 묻는 것이 아니라 돌 굴로 된 것이며 이 속에다 시체를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로 입구를 막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입구를 인봉한 것입니다. 인봉을 하게되면 누가 돌을 굴렸다가 다시 닫게되면 표시가 납니다. 한마디로 몰래 시체를 훔쳐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인봉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면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경우입니다.
첫째는 인봉하고 서있는 파숫군과 예수 적대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쳤다는 가정입니다. 여러분! 흔히 상식적으로 살인사건이 나면 살인동기가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살인 동기가 없으면 그 사람을 살인자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죄인의 몸으로 죽었습니다. 사람들의 원성이 높았습니다. 스스로 십자가형을 집행한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예수의 시체를 훔쳐간다는 말입니까? 그럴만한 명분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마 27:64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고 빌라도에게 청하고 무덤을 굳게 지켜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이 구절은 두 가지를 동시에 증명합니다. 자신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치지 않았다는 증명이고 둘째로 제자들이 훔쳐갈 것을 방지한 것입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훔쳐갔다는 억지 주장입니다. 예수님 부활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이것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리아와 여자들이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의 시체가 없는 것을 제자들에게 고했을 때 본문 11절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라고 한 말은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제자들의 행동에서도 전혀 앞뒤가 맡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부활은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쓰지만 저는 압니다. 제 경험으로 비쳐 볼 때 증명이 안되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라는 것을 압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부활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믿음을 성령께서 주시기를 원합니다. 부활을 믿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여러분!
부활을 믿으면 반드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종교로는 부활이 안되지 않습니까?
불교에도 부활과 비슷한 의미인 ‘열반’이라는 말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부활하고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주이십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어디 가서 물건을 사게 되면 “이것이 제일 비싼 것입니까?”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독일사람들은 “이것이 제일 튼튼합니까?”라고 묻고,
불란서사람들은 “이것이 최신형입니까?”라고 묻는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뭐라고 물을 것 같습니까?
“이것, 진짜입니까?”라고 한답니다. 너무 불신사회에서 살아서 그런 것일까요?
아무리 그래도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이후에 제자들의 증거를 보면 가룟유다 대신에 제자를 뽑을 때
(행 1:22)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 4:1)…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행 4: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 17:18)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고전 15: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종교개혁자 칼뱅은 세상을 떠날 때에 오직 한 절의 말씀에 의지했습니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을 25번 외우면서 이 말씀에 의지하고, 승리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지조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을 철새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 철새는 아무 생각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북극에서 남극으로 이동하는 철새들은 15,000km를 단 한치의 오차 없이 이동한다고 합니다. 철새는 태양, 성좌를 기준 삼아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강풍에 휩쓸려가다가도 제 위치로 돌아오는데 그 원리까지 사람들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또 태양의 위치를 통해 방향, 위도, 경도까지 정확하게 계산해 이동하는 것도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류학자들은 철새의 뇌가 자석처럼 지구의 자기장 방향을 파악해 이동하는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우리는 철새처럼 정확하게 주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곳에 우리의 영원한 길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부활을 전하는 주앙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 이루신 사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8. 다 이루신 사랑) / 요 19:28-30

“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우리말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땅속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 보다 자식이 죽은 것이 가슴아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불효 중에 불효가 부모님보다 자식이 먼저 죽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님은 귀 암으로 17년 동안이나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귀 암은 암 덩어리가 바깥으로 돌출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도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까지 지켜보는데 자식이 아닌 부모님이지만 정말 보는 사람이 어떻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한가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그저 아프지나 말고 하나님 편히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지난주에 저희 어머님 장례식 중에 와서 예배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감사헌금을 하니까 저희 집사람이 “그것은 좀 이상한데…”라고 했습니다. 이상한 것이 아니라 제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말기 암 환자는 마지막에 너무나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것을 저는 몇 번 보았습니다. 그래서 “고통 없이 하나님 데려가 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들어주셨으니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실 때는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그곳을 지나다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별의 아픔과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님의 임종을 지켜보는 것도 마음이 아픈데 우리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스스로 죽이셨으니 그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도 우셨습니다. 눅 23:44에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이 어두움이 임하여”라고 했습니다. 마 27:51에는 땅이 진동했습니다. 하늘이 울고 땅이 운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울음소리였습니다. 이 모진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원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본문은 “이 후에”라는 접속어를 사용하면서 얼마의 시간이 경과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 시간에 공관복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를 조롱한 사건(마 27:29-44)과 한 강도의 구원받은 것(눅 23:40-43)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내용을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은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조롱소리, 한 강도의 구원받은 것 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신 “다 이루었다”를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해서 좀더 깊게 살펴봄으로서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기 원합니다. 여기에는 세가지 뜻이 있습니다.

1. 육체적 고난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고난받는 여러 인물이 나옵니다. 그 중에 고난의 대표를 뽑으라면 욥일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도 예수님의 고난하고는 다릅니다. 욥은 하나님께 그 믿음을 시험하려는 사단에 의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결국 욥의 나중은 고난 전 보다도 더 많은 축복으로 끝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 또한 고난을 받은 인물 중에 하나입니다. 형들의 시기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로 꿈을 해석하여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과 출애굽하여 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로 그의 기력이 떨어지지 아니한 상태에서 죽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고난이나 죽음이 인류를 구원해 내기 위한 고난과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 마지막을 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육체적으로 받는 고난은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2.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율법을 위반하며 심지어는 율법을 폐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 5: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면 예수님이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십자가가 필요 없어도 될 것입니다. 우리가 왜 안식교나 유대교를 이단시합니까? 그분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율법에 매이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는다면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만으로는 안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우선 순위를 정해두는 것이 연구 과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율법 중에 먼저 지켜야 할 것과 나중에 지켜야 할 것을 구분해 놓지 않으면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마 22:36)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묻습니다. “크니이까?”는 “어느 것을 먼저 지켜야 합니까?”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제일 된 계명은 실천적으로 말한다면 부모의 장례였습니다. 시체는 부정한 것이고 장례는 모든 순위 중에 최고였습니다. 부모의 장례을 위해서는 율법을 강론하다가도 가야되고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다가도 가야합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장례가 최우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렇지 않았습니다.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1-22)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유대인에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최고의 계명 즉 우선 순위가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 것입니다.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마침이 되시는 것입니다(롬 10:4).

3. 최후 승리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공생애가운데 내내 따라다녔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려고 할 때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미 그 때 사단은 자신이 처한 입장을 알고 예수님의 사역을 처음부터 방해하려고 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로 굶주린 예수님께 빵(음식)으로 시험합니다. 세상을 자기가 다 줄 수 있는 것으로 위장하여 자신에게 절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높은데서 뛰어내려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단은 사람들을 통해서 계속 따라다닙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들어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조롱하며 시험합니다. 급기야는 가룟유다에게 들어가 예수님을 팔아 넘깁니다.
그러나 창세기에 예언된 대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예수님의 발꿈치 정도를 해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했습니다. 완전한 승리를 얻으신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예배드리면서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어머님의 시신을 장례식장에 모셔놓고 와서 예배드리는데 어머님의 죽음에 슬픈 것이 아니라 “사단에게 질질 끌려 다니면서 다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주일 예배도 제대로 성수하지 못한다면 어찌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까? 부모의 장례 우리가 치르지 않는다면 죽은 자들이 치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별다른 일도 없는데 주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떡합니까?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 부끄럽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단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패배한 삶을 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마지막에 “영혼이 돌아가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원문으로 ‘파라디도미’인데 이 뜻은 ‘넘겨주다, 내 맡기다’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가상칠언중에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입니다. 이것은 서로 같은 뜻입니다. 다만 본문에서 “돌아가시니라”고 번역했을 뿐입니다. 본문도 누가복음처럼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로 번역해도 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지난 토요일에 돌아가셨는데 저희 집사람하고 어머님 손을 꼭 붙잡고 “하나님 아버지 부족한 종의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편안히 모셔주세요. 이를 위해서 주님이 오셨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을 하고 났는데 바로 그 순간 어머님 숨이 멈추셨습니다. 한때 저희 어머님이 죽음에 대해서 두려우신 것 같았습니다. 검은 그림자가 보이면 당신을 데리러 누가 왔나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가 있으셨습니다. 제가 그 때 “엄마! 엄마는 하얀 천사가 와서 모셔가기 때문에 절대 겁내실 것이 없어!”라고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혼은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아멘.

요한과 베티는 이제 갓 태어난 아들과 네 살 된 딸을 데리고 깊은 산골에서 농장을 하며 살고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남편 요한은 읍내로 장을 보러 떠난 뒤 베티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장작더미로 같습니다. 그 때 장작더미 속에 있던 독사가 뛰어 나오면서 베티의 다리를 물었습니다. 베티는 순간 장작을 들어 뱀을 내리쳐 뱀은 잡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린 다리는 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운 곳에 집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장에서 돌아오려면 최소한 1주일은 걸리는 상황이었습니다.
베티는 부엌으로가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어린 아들과 네 살 된 딸을 돌봐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베티는 1주일이상 아들과 딸이 먹을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먹을 것을 만들면서 네 살 된 딸에게 말합니다.
“너도 이제 네 살이 되었으니까 네 동생을 잘 돌봐 주어야 한다. 엄마가 먹을 것을 만들어 놓고 엄마는 오랫동안 잠을 자야하니까 동생하고 엄마가 만들어 놓은 것을 먹으면서 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해!”
그녀는 온 몸에서 땀이 비오듯하면서 손가락에 힘이 하나도 없어져 갔지만 음식을 만들어 놓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계속 음식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죽어야 될 시간이 지났는데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베티는 “네가 살아있다니…” 몇 시간동안 음식을 만들면서 땀을 흘려 독이 혈관을 통해서 빠져 나왔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녀를 살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살립니다. 아멘.
미국에 사는 이사벨이라는 부인은 해산을 하다가 갑자기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는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그 부인은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수많은 재산을 허비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병 치료를 포기하고, 나머지 돈으로 당시 한국 동란 중에 고생하는 전쟁 고아를 위하여 보내 주었습니다.
그것을 기금으로 해서 부산에 고아원이 생겼는데. 후일 그 고아원은 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사벨 부인은 그 후로 1년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 모인 가족과 친지들은 이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치료비를 한국에 보내서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놀랐습니다.
부인의 최후의 치료비에 의해서 세워진 그 학교가 창립된 지 2주년이 되던 날, 그의 남편인 데이비드 씨가 초청을 받고 창립 기념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아내가 치료비를 모아서 보내 세워진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그는 매우 감격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 학교의 교사가 건축 중에 재정이 부족하여 곤란을 당한다는 사정을 들을 데이비드씨는 미국에 있는 자기의 집과 재산을 저당 잡혀서 약 6만 불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오늘날 4,500여 명의 학생들이 교육받고 있는 부산의 이사벨 여자중고등학교입니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보다는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 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다시보는 주기도문(우루과이의 한 작은 성당벽에 주기도문이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루마니아 감옥에서 있었던 일
리챠드 범브랜드 목사가 약 30명의 크리스챤들과 함께 루마니아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감옥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감옥 속으로 밀쳐 던져졌는데, 침침한 감방 속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가 알아지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갔다. 감방 속의 모든 크리스챤들은 곧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던 비밀경찰의 대위였다.
그가 왜 감옥에 들어 왔는지 너무나 의아해 하는 크리스챤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에, 열 두 살 된 소년이 자기를 면회 왔다고 하여 사무실로 들여보내라고 했다. 수줍어하며 자기의 사무실에 들어오는 소년의 품에는 아름다운 꽃다발이 한 아름 안겨져 있었다. 소년은 입을 열어서 말을 했다.
‘대위님, 당신이 우리 엄마와 아빠를 체포해 가신 분이에요. 오늘은 우리 엄마의 생일이에요. 나는 엄마의 생일이면 꼭 꽃다발을 사서 엄마에게 선물하고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려 왔어요. 그런데 금년에는 당신이 우리 부모님을 체포해 갔기 때문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꽃을 선물할 수 없게 되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크리스챤이기 때문에 나에게 늘 가르쳐 주시기를,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나에게는 지금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이 꽃으로 대위님의 애기들의 어머니를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어서 가지고 왔어요. 이 꽃다발을 대위님 부인에게 전달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대위는 그 소년의 꽃다발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소년을 부둥켜안고 눈물로 울었다고 했다. 그 후로 그의 마음에는 양심의 가책과 회개가 왔고 남은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바람개비에 붙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어느날 유명한 챨스 스필젼 목사님이 농촌을 방문하는 중에 어떤 농장 건물 꼭대기에 세워 놓은 바람개비가 있어서 보았더니 그 뱅뱅 돌아가는 바람개비의 꼬리에다

예루살렘 입성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7. 예루살렘 입성) / 요 12:12-16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것인줄 생각났더라”

예수님이 예루살렘 올라가시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장난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황금마차를 타시든지 아니면 적어도 군마 정도는 타셔야 어울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나라의 대통령도 그 나라에서 제일 좋은 차를 탑니다. 만일 대통령이 티코(소형자동차)를 타고 나타나셨다면 사람들이 과연 대통령으로 인정을 하겠습니까? 반대로 대통령 부인이 값싼 가짜 다이아몬드 반지를 하고 있어도 사람들은 진짜라고 믿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는데 그것도 어린 새끼나귀입니다. 예수님의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시는지 모르지만 어린 나귀는 고생 좀 했을 겁니다. 지금 미국에 있는 김능수 전도사님이 제주도에 신혼여행 갔다가 조랑말을 탔는데 그분이 좀 덩치가 있거든요. 조랑말이 다리를 후들후들 떨어서 불쌍해서 얼른 내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세상의 다른 왕들과는 달랐습니다. 겸손의 모습으로 오신 왕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왕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도 예루살렘으로 가신 주님을 따라가는 신앙이 되십시다(마 16:24).

예루살렘에 가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지금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어린 시절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한번 언급되는데 바로 12살 때 예루살렘에 갔다가 어머니 마리아를 잊어버린 사건입니다. 눅 2:41-50에 나옵니다. 유월절을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어머니 마리아는 얼마나 많은 사람가운데 섞여 있었는지 예수님이 함께 가지 않는 것을 몰랐습니다. 친족 중에 끼어있는지 알았습니다.
본문에 “명절에 온 큰 무리가”라고 나옵니다. 역사가들은 이 당시 예루살렘에 모이는 사람들의 수가 270만 명 정도로 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서로 잃어버리는 일이 많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동행하지 않는 것을 모르고 간 길이 하룻길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금은 무심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또한 예수님이 어려서 여러 사람들에게 붙임성이 있어 잘 지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선생들과 묻기도 하며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혼자 보낸 날이 4일입니다. 한마디로 4일 동안 성전에서 성경공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성인이 되면 누구나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냅니다. 예수님은 적어도 12살 때부터 매년 예루살렘에 가셨을 것입니다.
공생애 사역초기에도 예루살렘에 다녀오셨습니다. 그 때 하신 일은 성전정화였습니다. 대략 20여 번은 예루살렘성전을 찾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많이 예루살렘에 가셨었는데 지금 예루살렘 가시는 것 자체가 새로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에 가셨던 것하고는 두 가지의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1. 사람들의 관점에서
예수님이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중입니다. 베다니에 들른 것은 이곳에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시는 이곳에 몰려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만 보려고 모여든 것이 아니라 살아난 나사로도 보려고 온 것입니다(요 12:9). 나사로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의 인기는 기적과 이적을 베푸신 고로 이미 유대지방 전체에 퍼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공생애기간이 3년이었는데 사역초기에 올라가셨고 한번은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여든 군중들이 이왕 예루살렘에 왔는데 예수님도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시는 모습을 보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마 21:7-8, 막 11:7-8, 눅 19:36)에 보면 더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장면에 나옵니다. 그러나 요한은 본문과 같이 요약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오늘 본문 말씀을 누구의 입장을 더 따르겠다는 것입니까? 요한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공관복음에서 전한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요한은 이 사실을 크게 장황하게 펼쳐놓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군중들의 외침은 고난을 향해 가는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역시 이 순간만큼은 군중들과 함께 흥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것은 아닌가? 아주 이번 기회에 밀어붙여서 예수님을 왕위에 앉혀놓고 자신들은 평소에 꿈꾸어 왔던 대로 영의정, 우의정이 되어 치리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군중들이 비록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 찬송은 했지만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선민사상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의 왕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요한이 또 한가지 이 사실에 대해서 축소해서 전하는 것은 바로 이 군중이 일주일만 있으면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빌라도의 재판장에서 소리지른 장본인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손바닥 뒤집듯이 말이 바뀌는 이 사람들의 소리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한의 입장에서는 그 이후에 전개될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에 대한 사건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관점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모릅니다. 십자가를 지시러 올라가시는 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사람들 앞에서 멋있게 보이고 화려하게 보이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진실한 구원이 무엇인지 아직 모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 곧 십자가를 지시는 문제를 알고 계십니다. 이제 그 때가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찾으신 예루살렘입니다.
제가 동남아 여행을 패케지 상품으로 두 번 다녀왔습니다. 제돈 들여서 간 것이 아니라 어떤 회사에서 다녀오라고 해서 갔던 것입니다. 이때 다른 팀에서 오신 나이든 어르신들이 계신데 어디를 가면 그렇게 눈여겨보시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언젠가 또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갑니다. 그러나 나이든 어르신들은 그렇게 눈여겨보실 수가 없어요. 언제 이곳에 오나 싶어서 그러신 것입니다. 다시 못 오실 것이라는 생각에 그냥 지나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이제 사랑하는 제자들과 수많은 병자들과 눈물 흘리며 죄악에 고통스러워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루살렘성도 헐릴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쓸쓸한 가을저녁 같습니다.
그러나 이모든 무거운 짐을 벗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때가 되어 이 예루살렘을 찾으신 것입니다. 단순히 부르짖는 군중들의 목소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호산나 찬송하지만 얼마 있으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를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3일 길을 갑니다. 3일이면 흔히 사람 마음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아브라함이 칼을 빼 들고 이삭을 치려하는 것을 보시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3일 길을 가는 동안 변하지 않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삭의 입장에서 볼 때 아버지 아브라함만 알고 있었고 자신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떠나는 길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물론 이삭은 아브라함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왜 하필 나이었냐고 아버지에게 대들지 않았습니다.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롬 9:7)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가는 길은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비록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만 지금은 그들의 입에서 찬양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왕에게 뿌렸던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흔들며 환호했습니다. 이때 시끄럽게 한다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제자들을 좀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눅 19:40절에 나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 자체가 예수님이 임의로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시는 것입니다. 15절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공관복음에서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마 21:1-3, 막 11:1-3, 눅 19:30)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구약성경 스가랴 9: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를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해당된 말씀인지 제자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는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 16절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것인줄 생각났더라”

지금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 뿐이셨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지옥의 고통을 당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나귀를 타신 예수님에 대해서조차도 이와 같이 정확하게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처음 하실 때부터도 이미 당신의 십자가를 염두 해 두신 말씀이십니다. 공생애 초기에도 이미 마태복음 10장에서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시면서 마 10:38절에서는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별 의미 없이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 십자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왜 예수님이 흉악한 죄인들이 죽어야 하는 십자가형을 말씀할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저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후 공개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적대자들이 있는 예루살렘에 스스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밀히 일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신앙고백을 받았을 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막 8:27-30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 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②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을 때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눅 8:54-56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③ 예수님의 형제들이 비밀히 행동하시는 주님을 비난했습니다.
요 7:1-5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 함이어라”
④ 예수님은 유대지방에서 가능한 은밀히 활동했습니다.
요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은밀히 하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는 공개적입니다. 한마디로 죽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숨길 것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훈련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 21:15-16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눅 19: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눅 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했습니다.
눅 20: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이 가르친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은 재판석에 말씀하시기를
요 18:20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도둑이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할머니랍니다. 할머니는 도둑이 생각할 때 별 것 아닌 것 훔쳐가는 데 “야 이놈이 차라리 날 죽이고 가져가라”하면서 소리지르면 대책이 없답니다. 스스로 십자가를 선택하시는 예수님을 말릴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는 것입니다.

달리는 기차의 한 창문 쪽 좌석에 어떤 젊은이가 매우 초조하게 앉아있었습니다. 특히 사람이 지나갈 때는 몸을 움츠리며 안절부절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노신사가 이를 보고 넌지시 말을 건넸습니다.
“이봐 젊은이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나?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겠네.”
고개를 푹 숙인 젊은이는 경계의 눈빛을 띠고 노인을 처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노인의 따뜻한 눈길에 마음이 놓였는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파 회사에서 작은 횡령을 했는데 그것을 안 사장이 다른 회사의 기밀 품을 빼내 오는 것에 동행을 시켜서 어쩔 수 없이 가담을 했는데 그만 들켜서 경비를 사장이 죽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교묘하게 자신에게 죄를 다 뒤집어 씌여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자가 되어 도망을 다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노신사는 언제까지 이렇게 다닐 수는 없으니 자수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법정은 겁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노신사는 지금 나에게 한 것처럼 법정에서도 말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노신사의 말대로 자수했습니다. 변호사를 살 돈도 없지만 노신사가 말한 대로 진실만을 고백하겠다고 생각하고 법정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소란스런 법정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기차 안에서 고백했던 노신사가 앉아있는 것입니다. 이제 진실을 말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6.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 마 16:21-23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미국의 유명한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통증에 관한 연구를 했습니다. 통증을 느낄 때 그 통증을 약하게 하기 위해서 아스피린을 먹습니다. 그런데 통증을 느낄 때 자기의 과거 추억 중에서 좋은 것을 생각하면 아스피린이 미치는 영향보다도 더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발표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은 아스피린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심지어 마약보다도 더 강력하게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대개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에 대한 생각을 했고, 실패한 사람은 실패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클린턴 부부 이야기입니다. 미국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가 주유소에 갔다가 우연히 힐러리 여사의 옛 남자친구를 만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클린턴이 부인에 물었습니다. “당신이 저 남자와 결혼했으면 지금 주유소 사장 부인이 돼 있겠지?” 그러자 힐러리가 되받았습니다. “아니 바로 저 남자가 미국 대통령이 되어 있을 거야.”
생각이 여러분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면에서는 환경보다도 내가 생각하는, 내 마음과 내 생각이 크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도 바뀝니다. 그리고 운명도 바뀝니다. 여러분! 인생을 새롭게 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생각부터 올바르게 하시기 바랍니다. 생각부터 새로운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 생각 중에 제일 되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은 베드로
“이 때로부터”는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사람들이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3-16절)라고 고백한 때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분위기를 보아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지금이 고난에 대해서 말할 때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고백으로 제자들의 신앙이 이 말씀을 받을 만 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곡하게 만류했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이 대답으로 인해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엄청난 충격적인 책망을 듣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단이 틈탄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시험이 옵니다. 인본주의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이 영과 육이 함께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육체를 위한 일과 영을 위한 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육체를 위해서 일하는 것인지, 아니면 영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육체를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을 생각하지 않고 육체만을 생각하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6:20-27절에 보면 예수님의 비유에 거지 나사로가 있습니다. 부잣집 대문 앞에서 구걸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지나가던 개가 거적데기를 핥고, 한마디로 노숙자처럼 생활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그러나 부잣집 주인은 지옥에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로 사는 사람은 모두가 잘못되었고 반대로 모두 노숙자로 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 극단적인 비유를 들으셨습니까? 그만큼 육체보다는 영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육체는 100년을 못삽니다. 하지만 영은 영원히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하셨습니다. 즉 육이 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이 육을 살리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우리에게는 육과 영은 동시에 존재하지만 영에 비해서 육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가 살아가는데 모든 것이 영 중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해서 하루에 밥 세끼를 먹어야 한다면 영을 위해서는 무엇을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면 자신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 헛수고가 아닌가? 등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면 고통스럽고, 또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이 정말 안타까워서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정말 마음이 좋은 분입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먼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옆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려고 하던 꿈을 버려야 합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슬피 웁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 울음소리를 잘 들어보면 모두가 자기 한탄에서 운다고 합니다. ‘나는 어떻게 살라고…’하면서 운답니다. 남편의 죽어서 불쌍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갈 것이 한심스러워서 운다고 합니다. 결혼이 진짜 무엇인지 아십니까? 결, 결론적으로 혼, 혼자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만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들의 영을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는데 출애굽기 16:26-27에 보면 모세가 안식일에는 주시지 않기 때문에 나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27절 “제 7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먹을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안나오고 공부하면 잘할 것 같아요. 여러분! 해 봐서 알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일만 한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해야 합니다. 무엇이 내 삶에 우선 순위인지 분명히 정해 두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하나님의 일이 보입니다.
본문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방법을 설명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십자가는 지고 있는데 자기 이름으로 지고있는 분이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그렇습니다. 내가 했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를 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내가” 빠져야 합니다. 내가 있으면 자기를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러면 “내가”대신에 누가 들어가야 합니까? “주님”입니다. 지금 이영제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설교를 하는 것입니까? 이영제 목사가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육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을 보시는 분들은 주님이 하시는 것을 보십니다. 아멘.
베드로는 아직까지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자기의 욕심이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아는 분이 전화가 왔습니다. 어느 곳에 장로님이 한 분 계신데 지금 교회를 쉬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이분이 하시는 말은 자기는 평신도가 와서 교회를 가자고 하면 안가고 꼭 목사가 와서 교회를 가자고 하면 혹시 갈지 모른다고 저에게 가서 전도해 가지고 모시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전화한 것입니다.
잠시 기도하면서 생각한 것은 장로님도 시험에 드실 수는 있습니다. 베드로도 시험에 들었고 사단이 들어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려고 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 제가 모셔 올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모셔다 놓고 그분 대접하느라 상당히 바쁘지 않을까 생각해서 감당이 안될 것 같아 원래 다니시던 교회, 장로로 피택하신 교회가 있을 것이니 그곳으로 다니시는 것이 좋겠다 싶어 그곳 교회로 안내하라고 했습니다. 지난 한번은 또 교회가 어느 교단이냐고 물으시는 장로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이해는 됩니다. 신학과 신앙이 같은 곳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좋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래저래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전주안디옥교회 이동휘 목사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합니다. “성도는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 아멘.

훗날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만을 생각했습니다.
육체만을 생각하다 한 때 예수님의 엄청난 책망을 들었던 베드로는 훗날 영혼의 귀중함을 누구보다도 철저히 깨닫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아멘.
베드로와 같이 변화되는 주앙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 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는데 특별히 제한을 두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 하고 싶다고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목사가 구약시대의 제사장하고는 물론 차이가 있지만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을 감당했었고 지금의 목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집행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지파 사람이어야 하지만 그 중에서 육체적으로도 흠이 없어야 합니다. 레위기 21:16-23절까지 제사장 될 수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저는 특별히 19절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라고 나옵니다. 제가 왜? 특별히 이 구절에서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제가 손 부러졌거든요. 구약성경에서 손이라고 하는 것은 팔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팔이 부러져 군대 현역을 못 가고 방위를 받았습니다. 총 쏘고, 훈련받는데 별로 지장은 없는데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 아니면 살맛이 없는 세상이 될 뻔했습니다. 군대도 현역으로는 오지 말라지요,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도 못되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수 있는 자격도 없지요.
그러나 로마서 10:12-13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사우나 이발소에 머리를 깍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아저씨는 갈 때마다 당신이 한 때 청와대에서 머리를 깍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나 청와대에서 머리깍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아멘.
우리 주앙교회는 개척한지 얼마 안되어 작아서 성가대도 없고, 아직까지 각 부서도 없고 해서 오히려 봉사할 수 있는 기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없는 것이 많기 때문에 또한 할 일이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맡겨진 직분과 사명 열심히 감당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천하보다 귀한 생명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5. 천하보다 귀한 생명) / 눅 9:23-27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지난 22일 25세의 한 젊은 연예인(이은주)의 자살로 사회적 패닉증상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중스타의 죽음은 연예계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마치 아는 사람, 친한 사람이 죽은 듯한 심리적 충격을 안겨줍니다. 자신이 좋아하던 드라마나 영화속 주인공이 현실에서 사라짐으로써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허상과 현실을 구분해야 합니다. 일본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욘사마’ 열풍도 알고 보면 허상인 것입니다. 그가 실제 인물이기는 하지만 드라마 속의 인물을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허상 속에 살아가지는 않나 우려가 됩니다. 이번에 자살한 연예인은 모두가 의아해 합니다. 왜! 스스로 목을 메어 죽었는지 얼른 납득이 안가는 것입니다. “돈과 명예, 일을 하고 싶었다.” 등의 내용은 더욱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며 부모님이 모두 살아 계시는데 자신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는지 보통 사람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만족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에게 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독일속담에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여인은 향기 없는 꽃과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좀더 넓게 이해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바로 믿게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의 것에 비전을 두지 않습니다. 목적을 삼지 않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 세상을 보고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다가아니며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생명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대로 우리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생명입니다.
창세기 1:26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자연이나 동물에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말이 없습니다.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지음을 받은 사람은 창 1:31절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을 지으시고는 “좋았더라”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지으시고는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동물과 식물들을 사람을 위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창 1:28-30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동물이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까? 동물이 아무리 똑똑해도 하나님을 찾지는 않습니다. 사람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범죄한 인간에게는 허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 된 것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면 동물보다 그저 머리가 좀 나을 뿐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 것을 고쳐야 합니다. 다시 원상복귀 되어야 합니다. 죄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죄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범죄 한 죄인들뿐입니다. 성경이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선열들 또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이런 죄인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죄를 없게 하는 것이 예수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원상복귀 시키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고전11:1).

하나밖에 없는 생명입니다.
본문 25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행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베드로와 사도들이 산헤드린공의회 앞에서 증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입니다(요 14:6).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분이십니다(요 6:35). 우리 각자는 이 생명을 좌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결코 내가 내 생명의 주인이 아닙니다. 잘 간직하고 , 받아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를 착각하여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잘못 아는 데서부터 엉뚱한 생각, 엉뚱한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인터넷상의 자살 사이트는 계속해서 단속을 하는데도 생겨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생명이 자기의 것인 줄 알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알고 생명을 죽일 방법을 찾아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내가 내 생명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내 생명을 찾으시면…. 지체 없이 떠나야 할 내 생명입니다(눅 12:20). 여러분의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세요. 조금도 함부로 생각하지 마세요. 내 생명의 주인 되시는 주님 앞에서 소중하게 잘 가꾸어야 합니다.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생명입니다.
고전 8: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형제를 대신하여, 아니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피로 값 주고 사셨다는 말씀입니다(행 20:28).
여러분! 우리 목숨은 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피로서 죽을 죄인을 사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을 불러모은 곳,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셨습니다(마 18:20).
여러분! 성도들의 몸값을 계산할 수 있습니까? 그냥 사람의 목숨도 계산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의 피로산 성도의 몸값은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영원합니다.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며 이 땅의 모든 삶이 정리됩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신 것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물질을 조금 더 가지고 살았느냐, 아니면 명예와 권세를 누리며 살았느냐,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살았느냐, 건강하게 살았느냐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모두가 죽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정리될지 모르지만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착각하는 것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죽으면 다시 심판을 받게되어 있습니다.

1892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윌 피어비스란 남자는 은행강도로서 도망을 치다가 은행 문지기를 쏘아 죽였다는 죄목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본인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했으나 그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가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는 증인이 있었습니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 이 사람이 진범이라고 단정한 7명의 배심원들은 그의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에, 사형수는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죽을 수 없다. 나는 무죄다. 죄 없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워 죽이려는 이 배심원 놈들아 나보다 네 놈들이 먼저 죽을 테니 두고 보라!”고 발악을 했으나 그는 끝내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날 사형수의 시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가 죽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판명된 것입니다. 이에 법관은 그를 다시 죽이려고 했는데 그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고장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한 번 죽인 사람을 하나님이 되살려 놓았는데 인간이 어찌 주님의 뜻을 거슬리고 다시 죽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법관과 목사의 논쟁으로 8년 동안이나 형 집행을 못하고 있었는데 사형수는 어느 날 무죄로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조라는 이름을 가진 사형수가 사항을 당하면서 은행 문지기를 죽인 사람은 자신이라고 실토하였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단 한가지
본문 24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할 때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생명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렇게 귀한 존재이기에 우리의 삶을 헛되이 살아서는 안됩니다.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생각할 때 열심히 살게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살다보면 주님이 부르실 날이 있습니다. 그 때 아멘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가시면 됩니다. 성도 여러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사단이 이기지 못합니다. 건들지도 못합니다. 주님의 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앙모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최근에 아주 감동적인 얘 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중학교 선생님의 얘기예요. 중학교 1학년을 가르치고 있는 여 선생님, 그리스도인 여 선생님의 얘기입니다. 자기 반에 가르치는 학생이 하나 있는데 아주 우수한 학생이었대요. 아주 top. 성 적이 아주 제일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왔던 학생이었는데 한 1년 동안에 이 학생이 망가져 가는 거예요.. 점 점 성적이 뚝뚝 떨어집니다. 반항적 인 아이가 되어가고 불량한 학생이 되어갔습니다. 점차 친구들이 그를 따돌리기 시작합니다. 선생님들도 그를 문제아로 취급하기 시작합니다. 친구가 없어요. 그는. 점점 반항적이 되어가고 그는 점점 학교 수업을 거부합니다. 선생님이 ‘이유가 있겠지.’ 이 학생에 대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알아봤습니다. 그랬더니 부모가 별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별거하고 있다 는. ‘그랬구나’ 환경조사서를 봤더니 배경이 기독교인이예요. 자기도 기독교인이니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어느 날 양쪽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 선생님이.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걸어보니까 따로따로 있어요. 이미. 같은 집에 있지 않고 따로따로 있었습니다. 아들 성적문 제로 의논하고 싶다고 학교에 오실 수 있냐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 소에 양쪽 부모를 학교에 같이 오시게 합니다. 와서 보니 깜짝 놀랐어 요. 혼자뿐인 줄 알았는데 자기 아내가 있거든요. 자기 남편이 있거든요. 처음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고 이 선생님에게 아주 좀 안 좋은 태 도로 나오시더래요. 그리고 설명을 드렸대요.
“이 아드님의 이 성적을 도울 수가 있는지 그리고 제대로 자 기 인생의 페이스를 찾으려면 두분 중의 한 분의 도움 가지고는 안되고 두 분의 도움이 다 필요하기 때문에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두 분을 다 학교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선생님에게 충격이 되었던 이 학 생의 시험지 답안지하나를 보여드렸답니다. 이 선생님이 영어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는데 답안지에, 어느 날 답안지에 한문제도. 답을 하나도 안 쓰고 낙서를 해버렸대요. 전체를.. 그의 일종의 반항이었죠.
그런데 이 학생의 휘갈겨 쓴 낙서에 맨 마지막부분에서 이 학생의 마음속에 있었던 진실을 이 선생님 이 본 것입니다. 거기다 빨간 줄을 쳐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걸 좀 보시죠.”

휘갈겨 쓴 낙서의 밑바닥에 숨어 있었던 이 학생의 진실한 독백이 기록되어있었습니다.
“아빠 엄마 난 누구하고 살아? 난 누구하고 살아? 이혼하면 누구하고 살아? 아빠 엄마 난 누구하고 살아.. 아빠 엄마 난 둘 다 필요해. 난 둘 다 필요해”
그리고 또 한마디 마지막에 맨 구석에
“아빠 엄마 우리를 사랑해? 아빠 엄마 우리를 사랑해?”
보여준 순간, 순간 아버지가 고개를 떨어뜨립니다. 엄마도 고개를 떨어뜨립니다. 깊은 정적이 지났습니다.
“두 분이 기독교 배경을 가지고 있지요? 저도 그리스도인 입니다. 기도해 드릴까요?”
선생님이 이 아빠 엄마의 손을 잡고 기도하자 순식간에 교무실은 통곡의 장으로 변합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합니다. 이 것이 이 가정의 회복의 전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합쳤어요. 이 부부 는. 그리고 이 아이는 다시 인생의 길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이 쓴 글을 제가 직접 읽어봤는데
“맨 마지막에 함께 기도하고 교정을 나서는 이 부부. 이 학생의 아버지 와 엄마. 교정을 나설 때 나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내 생애에서 이것보다 더 귀한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이웃을 살리는 축복. 저와 여러분은 이웃을 살리는 자일까요? 죽이는 자일까요? 기도하십시다.

반석 위에 세워 주시는 교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4. 반석 위에 세워 주시는 교회) /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교황 인노센트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발코니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교황은 13세기에 교황권을 크게 휘두른 사람이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의 대신학자였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썼는데 이 책을 보고 회개한 사람중의 하나가 노예상인 ‘존 뉴톤’입니다. 이 사람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썼습니다.
그 때 마침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 시로 돈주머니가 수송되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것을 본 교황은 “저기 봐요. 이제는 `금과 은은 내게 없노라’고 교회가 말하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소.” 그러자 아퀴나스가 이를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앉은뱅이더러 ‘일 어나 걸으라’고 교회가 말할 수 있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 속하게 될 때,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의지하게 될 때, 이미 하나님의 능력은 사라진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모두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보다, 예수님 보다 그것들을 먼저 의지하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반석은?
예수님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이름으로 예수님은 페트로스(Pevtro”) 남성형 고유명사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반석” 페트라(pevtra/) 여성형 명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제자 베드로를 말씀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 반석”이 무엇을 가리키느냐가 중요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해석은 제자 “베드로”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성경을 깊이 보지 않으면 그렇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베드로”이름이 ‘돌, 반석’으로 예수님이 “반석(페트라) 위에”라고 하신 뜻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 반석”이라고 하신 것과 베드로의 이름을 연관지어서 혼란을 일으키면 제대로 해석을 못합니다. 그러면 “이 반석”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16절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한 신앙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 베드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한 신앙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 고백을 한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 베드로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가 아무리 예수님의 수제자라고는 하나 그 또한 인간임이 분명합니다. 23절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반대했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엄청난 책망을 듣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반석을 세우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는 있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고전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신앙 고백을 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주앙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에 살면서 물을 찾아 목말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은 큰 바위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바위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바위가 깨지면서 엄청난 물이 솟아 나와 목마름을 해결하고 새 힘을 얻어 살았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를 가면서 목이 말라 지치고 죽을 위기에 있을 때 바위를 터뜨려 생수를 마신 기사가 두 군데가 나옵니다. 그 하나는 출17장의 사건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한달 반쯤 되었을 때 신 광야를 지나서 목이 말랐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르비딤 어느 바위로 인도하여 모세의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거기서 나오는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또 하나는 40년이 지난 민20장의 사건으로 바란 광야를 지나 가데스라는 곳에서 목이 마를 때 이스라엘을 그 곳 어느 바위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곳에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위에 명령하여 물이 나게 하라 하셨는데 모세는 감정이 북받쳐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쳐서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40년간 사는 동안 신령한 바위가 함께 따라 다녔는데 그 바위는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생수를 주시는 분, 생명을 주시는 분이 교회의 반석이 되십니다.

주님의 교회
예수님은 “내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가 된다면 그것은 베드로의 교회가 됩니다. 그리나 예수 그리스도가 기초이시면 예수님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회사가 주주총회를 하면 제일 많이 주식을 가진 사람이 그 회사의 주인이 됩니다. 교회는 기초석이 없으면 무너지기 때문에 교회의 기초가 제일 중요합니다. 즉 교회를 세우신 분이 그 교회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내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교회(에클레시아:ejkklhsiva)는 성경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입니다. 즉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처음으로 예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이 뜻은 “불러내었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죄 때문에 떠난 사람들을 예수님은 다시 부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모인 사람들이 있는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불러 모은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교회”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주님이 불러모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아멘.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 보시고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을 주십니다. 같은 질문을 세 번했는데 예수님은 그 때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 “내 양을 치라”(16), “내 양을 먹이라”(17)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내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양입니다. 사람의 양이 아닙니다. 사람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서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단 두 마디로 감동적인 설교를 한 목사님으로 유명합니다. 단 두 마디는
“ ‘인간보다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여기 사람과 하나님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람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5:11-32절에 흔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탕자’ 사람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시는 아버지’, ‘용서하시는 아버지’, ‘감싸주시는 아버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변화되고 회개되고 새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모든 것이 내 중심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 바울, 스펄전, 칼빈, 로이드 존스, 빌리 그래함 목사님 모두, 역사상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나 설교자라고 해도 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단 한 생명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워 주시는 교회
“내 교회를 세우리니”의 “세우리니”(oijkodomhvsw:오이코도메소) 원문의 뜻은 “내가 세울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미래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셔서 죄 사함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세운다”가 됩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 한군데 더 나옵니다. 막 14: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드려 일으켜 세우실 교회를 말한 것입니다. 교회의 의미가 분명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림으로서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단순히 사람이 많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초청에 응한 사람들의 모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제가 1986년 컴퓨터선교회 시작하기 전에 미국에 계신 ‘모리스쎄룰로’목사님을 모시고 잠실 실내체육관과 광림교회에서 전도학교를 열었습니다. 그 때 이분이 주장하기를 당시 현재 전세계 교회의 실내에 들어와 꽉 차게 서서 예배를 드려도 세계인구의 단 2%도 수용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2%가 아니라 단 1%도 수용을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제일 작은 지하실 교회라고 해도 그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것이며 백악관이나 청와대보다도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며 축복의 장소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웅변가요, 정치가인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는 워싱톤에 살면서도 교회는 촌 교회에 다녔다고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워싱톤에 있는 교회에서는 그가 출석할 때에 교역자들이 높여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촌 교회에 갔을 때에는, 설교자가 그를 모르기 때문에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얼마든지 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듣기 위하여 촌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모인다면 그 교회는 반드시 성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참 음성을 외면하면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 주앙교회 주님이 세워주신 것인 줄 믿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이렇게 세워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아멘. “권세”는 문자적으로 ‘대문’을 말합니다. ‘음부의 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의 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주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죽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죽었다고 할 때는 분명히 구분을 해야 합니다. ‘일시적으로 죄의 육체가 죽었다’고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이미 영원한 생명에 들어간 것입니다. 롬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숨을 거두었을 때 죽었다고 하지 않고 행 7:60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누가 뭐라고 하든지 유명한 성경 주석가 윌리암 바클리가 40년 동안 교회를 봉사한 다음에 한 말에 동의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교회를 믿는다.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부패하고 사람들 눈에 허물 투성이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그래도 믿을 것은 교회 밖에 없다는 것을 저는 인정합니다. 그리고 한 때 좌절에 빠졌던 미국인들에게 소망을 불어 넣어주었던 백만인의 애인이라고 불리웠던 노만 빈센트 목사가 한 말도 저는 전적으로 수긍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교회는 우리의 모든 희망이 실현되는 곳이다.’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꿈,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지만 남몰래 숨기고 있는 소원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은 교회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나라도 21세기에는 교회에 희망을 걸어야 된다고 생각하며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믿고 교회에서 건강한 신앙 생활을 할 때 이 나라의 미래가 밝아질 것을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복 주시기 위해서 불러모은 백성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미시간주에 리차드 디한이라는 유명한 방송 설교가가 있습니다. 같은 시에 어떤 문제가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