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질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3. 피할 수 없는 질문) / 마16:13-17(막8:27-30, 눅9:18-21)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영국의 런던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꼭 찾고 싶어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유명한 웨스트민스턴 사원입니다. 저도 이 교회를 방문했었는데 오래 전에 이 사원을 방문했던 방문객들의 입에서부터 이런 흥미 있는 일화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방문객들이 이 유명한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들을 인도해 주던 안내자가 있었습니다. 이 안내자는 사원에 대한 역사적인 내력과, 그리고 무덤에 묻혀 있는 지나간 세기의 찬란한 영웅들의 삶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또 현재 그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을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가를 정황 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이 끝난 후에 안내자는 방문객들을 향해서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미국의 아니오아 주에서 이곳을 방문했던 어느 여신도 한 사람이 안내자를 향해서 던진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이 유명한 일화로서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과 내력에 관해서 훌륭한 설명을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질문을 한가지만 하겠습니다. 최근에 이 사원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이 뜻밖의 질문 앞에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안내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화는 오늘의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종교나 혹은 교회의 이름으로 수없이 교회 안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 모임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와 내용은 무엇이며, 오늘 우리가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 모든 형식과 허상은 그 내용과 어떤 관련이 되어져야 하는지 우리는 뒤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은 당시 제자들에게만 한 질문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임할 질문입니다. 누구든지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지리설명과 서언 - 프리젠테이션 참고]
예수님이 오늘 질문을 한 곳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입니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와는 다른 곳입니다(행 10:1). 본문의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호수 북방 약 40km 지점으로 헬몬산 기슭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은 약 345m에 위치한 작고 조용한 마을입니다(막 8:27). 이 마을은 원래 작은 마을이었는데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 빌립’(눅 3:1)에 의해서 커진 마을입니다. 마을의 이름이 “가이샤라 빌립보”라고 붙여진 이유는 ‘헤롯 빌립’이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가이사랴’라고 하였고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추가하여 ‘가이샤라 빌립보’라고 지었습니다.
또한 ‘헤롯 빌립’은 이곳에 황제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한가지를 더 만들었는데 그것은 ‘황제의 신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이 지역의 구약시대 이름은 ‘바알갓’(수 11:17) 또는 ‘바알 헤르몬’(삿 3:3)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알 갓’은 ‘행운의 바알’이라는 뜻이고 ‘바알 헤르몬’은 헤르몬 산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바알 우상을 섬기던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구약의 이름으로 보나 현재의 이름으로 보나 우상이 만연한 곳입니다. 깊은 산과 바다 근처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상을 많이 섬깁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상의 땅에 도착하셔서 자신에 대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태국에 갔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우상이 많은 줄 몰랐습니다. 절도 많지만 우상이 길가에 작은 탑을 만들어 그 안에 손바닥만한 우상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 깔린 것입니다. 선교사님들과 자연스럽게 하게 된 이야기는 이렇게 우상이 많은 곳에서는 더 열심히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시험에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도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통해서 믿음을 확실히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부르신 이름 인자
“13…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본문을 원문에서 직역하면 “나는 스스로 인자라고 부르는데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말하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인자’라고 표현하셨는데 공관복음서에만 69번 나오고, 사복음서에는 81번나옵니다. 단 두 번(눅 24:7, 요 12:34)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예수님이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성을 입으시고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기가 신으로 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그럼 당신이 사람이지 신이야?”라고 말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라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자신을 ‘신’이라고 말하지 않고 스스로를 ‘인자-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질문
예수님은 먼저 객관적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제자들은 ‘더러는 … 더러는 … 어떤이는’이라는 연결 어가 사용됩니다. 사람들이 아직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한 메시야 이심을 알지 못하고 의견이 분분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한 사람 정도로는 보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가장 최근에 폭발적인 영적 능력(눅 1:17, 80)을 행하고 있었으며 엘리야는 구약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백성들의 타락을 꾸짖고 선지자로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사람입니다(왕상 19:10, 왕하 1:11, 말 4:5-6). 예레미야는 백성을 위해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리며 백성을 긍휼히 여긴 선지자입니다(렘 9:1, 14:17). 그리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보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 믿으세요.”그러면 “나도 예수를 믿지, 그분은 좋은 분이야”정도로 끝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도의 힌두교가 그런 양상을 보입니다. 힌두교의 신중의 하나로 예수님을 모신다고 하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태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고백으론 안됩니다.

주관적 질문을 던지십니다.
“15절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제 사람들의 생각과 관계없이 내 생각을 말해야 합니다. 이 질문은 당시 12제자에게만 내려진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단 한 사람도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누구에 의해서도 대신 대답되어질 수 없는 질문입니다. 또한 질문은 대충 얼버무거나 피할 수도 없습니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꾸며서 말하거나 조작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나의 중심을 아시는 분에게 중심에서 나오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삼상 16:7). 이 한마디의 말이 나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꿈에서 소리질러 보신 적 있으시지요. 막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소리가 질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이 질문에 꾸며서 대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예수님의 질문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한 마디는 예수님에 대한 가장 완벽한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메시야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인자’라고 스스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로 인성을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신분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는지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말에 흡족해 하셨습니다. 물론 조금 있다가 21절에서부터 보면 예수님이 고난받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그리 마옵소서”하는 바람에 엄청난 책망을 듣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고백만 생각합시다.
여러분! 때로는 자녀가 다 지키지 못하지만 말로만 해도 부모는 고마운 것입니다. 자식이 지금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때가 되면 정말로 집을 지어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전의 아버님들은 그런 허풍 같은 말씀을 많이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머님들은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아버님이 고마운 것입니다. 그런 말도 하지 않으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여자들은 별을 따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당신을 위해서는 별을 따다 줄 수도 있어!”라고 말하는 남자가 좋은 것입니다. “야 그걸 어떻게 따다주니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라!”라고 하면 그 남자는 그 즉시로 차이는 겁니다.
이런 얄미운 아들도 있습니다. 일곱 살짜리 철이는 금붕어를 몇 마리 키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싫증이 났습니다. 결국은 철이 엄마가 금붕어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는 데 지친 엄마는 하루는 철이에게, “금붕어를 내다 버리든지 누구한테 주든지 해라, 알겠니?”하고 말했습니다. 얼마 뒤 슬그머니 나타난 철이가 엄마에게 직접 만든 카드를 하나 내밀었습니다. 그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어머니께 귀여운 금붕어를 선물로 드립니다. 철이로부터.“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고백에 축복해 주십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이렇게 부르신 것은 이래 적입니다.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하셔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때는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가 사용되었는데 아람어는 평상시에 제일 편하게 꾸밈없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즉 고향 사투리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신 말씀 중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도 아람어입니다. 사도요한이 요한복음 22:20절에 사용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도 아람어 “마라나타”입니다.
“바”는 아람어로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의 아들 이런 식으로 부른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이렇게 어르신들이 부르던 것을 기억합니다. 저희 아버님 함자는 ‘헌’자 ‘국’자를 쓰십니다. 그래서 ‘헌국이 아들 영제’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팔레스틴이나 중동에서는 이런 식으로 부릅니다. 예수님이 “바요나”그러셨는데 그러면 시몬의 아버지 이름이 무엇입니까? ‘바’가 아버지라는 뜻이니까 ‘요나’입니다. 히브리어로 ‘요하난’(요 1:42)이 베드로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이 뜻은 ‘비둘기’입니다. 즉 평화라는 의미도 담겨있는 것입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본명으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베드로를 부르신 것은 매우 친근한 의미도 있지만 천연적인 신분인 상태로 부르신 것입니다. 즉 갈릴리 어부의 아들로서 참다운 신앙고백을 한 것은 자신의 지혜로, 지식으로, 신분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고백이 사람의 혈육에서 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이러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무엇이 복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이 복입니다. 다른 것이 복이 아닙니다. 제일 큰복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원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만 살아 계십니까? 예수님도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계신다는 것은 곧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세상에서 말하는 서정적인 의미에서 말이나 글이 살아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 삼위일체이신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말씀도 살아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일찌기 비상한 위험과 공포에 직면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될 때, 기운 없이 멍청히 앉아,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비비드! 비비드!” (vivid! vivid! – 그는 살아 계시다! 그는 살아 계시다!) 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서도 희망이고, 인류 전체의 희망입니다. 고난 속에 빠졌어도 선지자가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고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비비드”의 신앙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는 내과의사 출신으로 영국의 청교도 출신의 후예로 1940년대에 활동한 목사입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확실한 소명을 가지고 설교한 목사님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한번은 이분이 웨일즈 지방에서 설교하기를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고 바닷가로 피서 가시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가족이 죽었을 때 교회로 오시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즉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이왕 교회에 다닐 것이면 확실히 구원의 은혜를 받으며 다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한다고 여러분이 보이지도 않는 분을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인줄 모르는 분들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분들은 돈이 제일인줄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식교육 시키는 것이 제일인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건강이 최고인줄 알고 있습니다. 다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살아 계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아멘

죄인임을 고백할 때 알게 하십니다.
주님을 따를 때 알게 하십니다.
겸손할 때 알게 하십니다.

양 계명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2. 양 계명) / 마 15:1-9, 막 7:1-13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 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양 계명’입니다. ‘두 계명’으로 하려다가 ‘양 계명’으로 했습니다. 중국동포들은 2천년을 양 천년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2천년으로 말해야지 양 천년이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그럼 남쪽에선 ‘양팔이라는 말을 안 씁니까?’그러는 것입니다. 숫자가 계속해서 이어질 때는 ‘양’이라는 말보다는 그냥 수를 말하는 것이 맡고요, 단 두 가지나 서로 다른 것을 말할 때는 ‘양’으로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양’이라는 것은 다른 두 가지의 경우를 뜻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양 계명이 나옵니다. 7절에 ‘사람의 계명’과 8절에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이 두 가지의 계명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1956년 5월 8일 조용한 영국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로열 코트 극장이 그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극이 끝나고 막이 내려지자 사람들은 양편으로 갈라졌습니다. 한 쪽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고, 한쪽에서는 조소 섞인 야유가 튀어나왔습니다. 관객들은 찬, 반 양쪽으로 갈라선 것입니다. 왕관처럼 근엄했던 《타임스》지도 이 문제에 끼어 들었습니다. 세익스피어의 극이 아니면 좀처럼 거들떠도 보지 않던 런던 시민들로부터 이와 같이 튼 인기를 얻은 주인공은 무명 작가였으며, 삼류 배우에 가난한집 자식인 빈털터리 존 오스본 이었습니다. 《분노의 얼굴로 돌아다 보라》는 3막 5장의 희곡 한 편을 상연하여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진 것입니다. 결국 승리는 오스본의 것이었습니다. 이 날을 오스본의 날로 재정 된 것뿐만이 아니라 영국의 안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젊은이들의 다이너마이트 같은 분노를 터뜨린 날입니다.
극중에서 런던은 지저분하고 음산한 독특한 스모그에 더러워진 노후한 건물들이 노출되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저분하고 자욱한 안개와 같은 영국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영국 사람들은 교양과 신사도, 체면을 그 안개로 감춘 것입니다. 위장한 것입니다. 거짓이요 위선이라는 이야기입니다. 18세기의 스크리블러스 클럽 문인 회원들은 영국인의 위장과 위선을 풍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설들이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 포프가 쓴 《우물경愚物經》, 게이가 쓴 《삼문三文 오페라》과 의사였던 아버스넛이 쓴 《존 불의 역사》 등입니다. 존 불은 주인공의 이름이지만 ‘거세지 않은 황소’를 말하는 것인데 영국의 속물을 야유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영국인을 존 불이라고 불렀습니다. 한없이 근엄한척하고 살아가는 영국의 위선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정도에는 비교되지 않는 진짜 위선자들이 나타납니다. 위선자의 원조라고 하면 지나칩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배경설명]
본문 1절에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랬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이스라엘의 수도이고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곳은 갈릴리입니다. 한마디로 서울에서 시골의 촌마을에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파견된 것입니다. 중앙에서 시골에 유능한 관리들을 뽑아서 보낸 것입니다. 이들이 왜 파견되었을까요? 이미 갈릴리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수님의 사역이 중앙에 보고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활동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무너뜨리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경쟁 상대로 보고 어떻게 하든지 꼬투리를 잡아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경쟁상대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아니라 사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회를 엿보던 중 드디어 빌미가 될 수 있는 광경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 중에 몇 명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본 것입니다. 손을 씻는 것은 유대인에게와 중동지방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정결 예식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도 더러워진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자들 몇 명이 어째서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게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고고한 척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하고는 분명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의 수도에 사는 깨끗한 사람들하고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더럽고 싶어 더러운 사람들이 아니라 갈릴리 지방의 특징상 바닷가에서 살던, 어부들이 많은 예수님 제자들은 손을 씻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평소에 하던 버릇대로 떡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볼 때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러면 그렇지 무식한 것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1936년 올림픽에서 우수 민족을 자랑하던 독일이 미국에 패했을 때 나치스들은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우리는 짐승과 경주해서 진 것뿐이다. 사람들끼리의 게임에서는 우리가 이긴 것이다.” 미국 선수들의 대부분이 흑인이었기 때문에 가해진 모욕적인 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러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서 이런 촌사람들과 자신들을 비교한다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해있을지 모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5절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 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어찌하여”라는 말속에는 ‘어떻게 그렇게 무식하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해 오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세 가지로 말씀 드립니다.

첫째,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6절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대해서 손 씻지 아니한 것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이들의 근본적인 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즉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어떻게 말해야 그나마 이해하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자주 인용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구약성경인용은 적대자들을 물리치실 때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자체가 진리이시고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실 만큼 당신의 진리가 미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이사야보다, 엘리야보다 훨씬 크신 분이며 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아멘.
그런데 왜? 예수님이 이사야의 성경을 인용하시는 줄 아십니까? 그렇게 해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납득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 근거를 그들의 수준에서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해외에서 본 것을 그냥 말하면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행 가이드 책을 보여주면서 말하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하고만 있을 때는 구약성경에 있는 것을 말씀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구약성경에 있는 것만 말씀하셨다면 새 교훈이 아닙니다. 또한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예언한 것을 보여주니까 예수님께 달려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 새롭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인정하는 선지자가 말한 것에 대해서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야의 글을 인용하시기 전에 이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라고 하십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25번 나오는데 복음서에서만 22번나옵니다. 모두가 예수님이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이중에 마태복음 23장에만 7번이 나옵니다. 모두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외식”(外飾) ‘휘포크리테스(uJpokrithv”)’는 ‘연극배우’라는 뜻으로 자신을 속이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속과 겉이 다른 이중 인격자, 위선자라는 말입니다.

둘째,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는 자들입니다.
6절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사 29: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는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본문 5절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예수님께 질문할 때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은 ‘구전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전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계명이외에 보다 상세한 율법이 적힌 것을 말합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더 이상 선지자가 나오지 않았고 율법을 제 해석하고 문서화된 체계적인 가르침이 필요하여 사회의 발전과 필요성에 맞추어 집대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탈무드’ B.C. 300-A.D. 800년 사이에 구전을 율법화 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탈무드는 제1부인 미쉬나(Mishna:‘반복’이라는 뜻)와 제2부인 게마라(Gemara:’보완’이라는 뜻)로 구성된 것입니다.
탈무드의 내용자체가 모두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제자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것 자체가 잘한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좀더 본질적 문제로 접근해 가면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는 것입니다. 즉 이제 껍데기만 남은 것입니다.

서커스단의 곰은 피리를 불면 춤을 춥니다. 서커스단의 곰은 자기 마음으로 춤을 배운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길들여진 것입니다. 뜨거운 철판에 곰을 올려놓으면 뜨거워서 자연히 펄쩍펄쩍 뛰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사람은 옆에서 피리를 불어 줍니다. 이러한 일이 수없이 반복되면 곰은 뜨거운 철판 위에 올려놓지 않아도 조건 반사적으로 피리만 불어도 춤을 추게됩니다. 그러나 이 곰에게 기쁨이 있습니까? 서커스단의 곰처럼 구전으로 내려오기 때문에 아무 감정도, 마음도 뜻도 없으면서 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유전의 법”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교묘히 피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고르반’(코르반:하나님께 드림)이라고만 하면 그만이 되는 재산법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출 20:12, 신 5:16절의 십계명 중에 제 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그리고 출 20:12절은 “아비와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부모님 잘 섬겨야 합니다. 이것은 ‘유전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땠는지 아십니까? 자기 재산을 두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코르반” 그 뜻은 ‘하나님께 드렸다’입니다. 그러니까 내 재산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기 때문에 부모님을 위해서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입니까?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두 얼굴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이상 부모를 잘 섬겨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일만 조금 잘 되게 해 달라고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이것이 외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으면 같은 말씀을 8, 9절에 연속적으로 하십니다.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하고 있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 십자가를 잘라 주셨는데, 그녀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사람들이 십자가를 강에 걸치고 그것을 다리 삼아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도 자기의 십자가를 걸치려 했지만 길이가 너무 짧아 걸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 자매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무거운 십자가를 불평 없이 지고 갈 수 있었습니다.

몇 일 있으면 우리 나라 최고 명절인 설날입니다. 이 날은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 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하는 날로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더 잘 믿는다고 만든 “사람의 계명”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해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법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유교에서 내려온 전통이든 어디서 생겨났든 관계없습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마십시오. 죽은 귀신을 부르기 위해서 상을 차리고 절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유전을 따르려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부모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이, 우리들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의 유전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와 같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는 말씀을 하나님께만 적용하지 마시고 먼저 부모님에게 적용시켜 보세요. 올 설날부터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존경해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멘.
 

표적만 구하는 자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1. 표적만 구하는 자들) / 마 16:1-4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어떤 노총각에게 요정이(천사?) 나타나 한가지 소원만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그랬습니다. 이 말을 들은 청년은 세 가지를 한가지처럼 빨리 말했습니다. ‘돈, 여자, 결혼’이요.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 소원이 이루어졌대요. ‘돈 여자하고 결혼한 것입니다’ 욕심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제가 늘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정직 하라’입니다. 그리고 정직한 사람은 자기가 심지 않은데서 거두지 않는 것입니다.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의 심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짜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짜를 좋아하는 것도 비 정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병든 자 가난한 자의 친구로 오셔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불쌍히,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의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다.’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단순히 표적만을 구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실 때는 마음이 동했습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사단의 역사로 귀신들리고 병이 들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런 동기 없이, 이유 없이 표적을 나타내시지는 않습니다.

표적만 구하는 자들은
1) 예수를 시험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한 적이 있습니다(마 4:1).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자신들의 신앙체계만 고집하고 예수님을 선입관을 가지고 대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예수님을 음해 하려는 생각만 있는 자들입니다.

2) 자신은 노력하지 않고 말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말로만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와 행함이 있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속죄하는 고백(회개)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너갈 때 뒤에는 바로의 군대와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바다를 가른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지금 구하지 않으면 죽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표적을 보여줄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출애굽기 17:10-12절에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 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아말렉과 싸울 때에도 모세가 손을 들고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수고가 있어야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홍수가 나서 섬처럼 고립된 마을에 사람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살려달라고요. 그런 하나님의 도움은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왜! 나를 구원해 주시지 않았냐고 따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배도 보냈고, 헬리콥터도 보냈지만 너는 그것을 타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노력이 동반된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 그렇게 행해야 합니다. 공부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시간을 정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돈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3) 진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 좋아하십니까? 진심으로 예배하는 자를 좋아하십니다. 진심이나 진리에 응답하는 말이 아멘입니다. 아멘의 뜻이 진리와 진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아멘하는 자를 좋아하십니다. 아멘은 순종의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 표적만 구하는 이 사람들은 진실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정말로 기적이 필요해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증한 것입니다. 여러분 돈도 무조건 많이만 모아놓으려고 하지 마세요. 돈도 필요한 사람에게 가야합니다. 만일 네게 돈이 있다면 바르게 사용하세요. 무조건 물질의 축복만 간구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잘 쓸 수 있는 사람, 그런 그릇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하신다고 하셨습니다(사11:4).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고 판단이 정직하시기 때문입니다(시119:137).

4) 악하고 음란한 자들입니다.
본문 4절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 21:13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강도가 악한 사람입니다. 강도의 특징은 요 10:1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 10:8절에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러한 강도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악한 사람입니다.
예레미야 시절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를 예레미야 3:2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네 눈을 들어 자산을 보라 너의 행음치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지금 얼마나 음란한 세대인지 모릅니다. 특히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서 돌아다니는 음란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병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원래 모텔이라는 곳이 가족이 여행을 하면서 하룻밤 묵고가는 곳이 모텔입니다. 그래서 고속도로 옆 같은 곳에 이런 숙박시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하루면 갔다가 오는데 왜 모텔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한 것이 없으면 미안해서 달라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그런 마음을 갖아야 합니다. 꼭 악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자신만 알고, 달라는 사람을 보면 가까이 하기 싫어집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주기를 좋아합니다. 베풀면서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5) 천기는 분별할 줄 아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틴 사람들은 하늘의 변화에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일기예보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늘을 자주 관심 있게 처다 보게 되었습니다. ‘저녁 하늘이 붉으면 다음날 맑은 하늘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날이 궂겠다”는 찌푸린 날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폭풍우가 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들은 “천기”(하늘에 나타나는 자연적인 제현상)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 일어나야 할 최대의 사건, 표적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농사를 짖고 살아가려면 천기를 알아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정치이야기하면 안 빠집니다. 심지어는 정치인 주변의 인물들까지 꿰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연애 인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스포츠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출세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식이나 경제에도 상당히 높은 관심이 있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처럼 살아가는데 필요해서 ‘천기’를 잘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살아가려면 시대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시대의 표적을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최대 표적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나가 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을 ‘요나의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시대의 표적을 분별해야 합니다. 본문 3절 하반 절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최대의 표적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제일 큰 표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와 함께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시대의 표적입니다. 바로 이것을 분별하고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을 몰랐던 사람처럼 정치와 경제, 연예계에 대해서는 훤히 알면서 이 시대의 표적에는 무관심한 자들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인도의 선교사로 갔던 한 핀란드 여인이 그만 심한 폐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돕던 중 이번에는 탈곡기에 한쪽 팔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겹치는 고난에 그 여인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기도했습니다.”주님, 저는 이제 오른팔이 없습니다․.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그 여인은 왜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오직 무엇을 할지를 물었습니다. 참으로 귀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탓인 양 하나님을 향해 “왜 이런 일이 저에게 일어나야 합니까”하고 따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 속에 ‘왜’라는 말 대신에 ‘무엇’이라는 말이 먼저 떠올린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감사하게 전개될까요.
우리 한국 성도들은 아직도 기복 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의 영혼이 잘됨같이 모든 일이 범사에 잘돼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약속을 받은 우리들이기에 그분이 가신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칠 때에도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몇 년 전에 가나에서 풍토병으로 어린 딸을 잃은 한국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곳 풍습에 따라 사흘 동안 장작불에 딸의 시신을 태우면서 견디기 힘든 슬픔 속에 선교를 포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헌신의 행군은 계속되었고 주님께서는 많은 결신 자와 함께 현지에 학교 병원을 세우는 등의 열매를 허락하셨습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한 차원 성숙된 눈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표적만 구하면 예수님은 떠나갑니다.
본문 4절 하반 절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시면 끝입니다. 예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비전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람이란 말만 무성하지 창조의 역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창 4:16).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할 때, 민수기 12:9-10절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니까 10절에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통령이 떠나면 호위하던 모든 사람이 함께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나면 하나님의 모든 축복도 떠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가면 성령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돕는 천사가 떠나갑니다. 축복이 떠나갑니다. 여러분! 우리는 착각하지 맙시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 무엇인가 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 없이는 하나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영국의 한 광고회사가 큰상을 내걸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런던까지 가장 빠른 시간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묻는 퀴즈를 내었습니다.
워낙 상품이 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응모했습니다. 비행기가 가장 빠르다느니, 기차를 타고 오다가 어느 시점에서 버스로 갈아타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느니, 새벽에 지름길로 승용차를 운전하고 오면 가장 빠르다느니 등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고 실제 시간을 재어보면서 서로 자기들 아이디어가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상을 탄 사람의 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먼길이라도 무척 가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거리 계산법입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떠나가게 만드는 것은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욕심입니다. 자신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하나님이 해 주신다고 말만 하는 자들입니다. 공짜만을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란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예배와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주앙교회에서, 우리가정에서, 내 삶에서 떠나지 않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깃털보다 가벼운 짐을 지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0. 깃털보다 가벼운 짐을 지세요) / 마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도시 빈민지역과 농어촌의 가난한 중고생들 가운데 68%가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며, 61%가 가출충동을 느낀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부스러기선교회가 최근 선교회에 소속된 도시 빈민지역과 공단지역, 농촌지역의 25개 공부방에 다니는 초.중.고등학생 4백3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교생은 3백19명 중 1백8명(33%)과 92명(31%)이 각각 자살이나 가출을 생각한 적이 있는 반면, 중고생들은 1백36명 중 93명, 84명이 각각 자살과 가출을 생각한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결혼적령 인구(남 26-30세 여 23-27세)의 남녀성비 불균형이 심화돼 2011년에는 여자 1백명당 남자가 1백25.1명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어, 현재 남자 중고생이 결혼할 때쯤이면 20%정도는 장가가기가 힘들어 진다고 합니다. 치열한 신부 쟁탈전이 벌어지고 중국 연변처녀, 베트남 처녀까지 외국으로부터 색시감을 데려오는 일도 비일비재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여성 1명이 가임기간 동안 갖는 평균자녀수인 합계 출산율은 지난 70년 4.5명에서 80년 2.7명, 90년 1.6명 수준으로 계속 낮아져 왔으며 지난 95년에는 1.74명으로 다소 높아졌으나 2005년에는 1.71명으로 다시 낮아질 전망입니다. 출생아 수도 지난 70년 1백만7천명에서 80년 86만5천명,90년 65만7천명 등으로 낮아졌으며 앞으로도 소폭 감소세를 지속해 오는 2015년에는 59만 명에 그칠 것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노인인구는 자꾸만 늘어나고 젊은 사람들이 작아져 그만큼 국가적으로 큰짐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설교가 비처(Beecher)는 말했습니다. “사람은 한 가지 일을 하면서 세 가지 고생을 한다. 일 하기 전에 실패할까 걱정하느라 고생이요, 일 하면서 수고하느라 고생이요, 일 끝나고 결과를 걱정하느라 고생이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각자 지고 갈 수밖에 없는 짐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호이 코피온테스:oiJ kopiw’nte”)는 노동을 하여 피로를 느끼고 쇠약해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스스로 많은 일을 해서 스스로 피곤에 지친 상태입니다. 언젠가 설문 조사한 것을 보니까 한국남자 40대가 세계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일에 지친 상태입니다. 몸에 병이 들 정도로 쇠약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제 쉬지 않으면 병이 듭니다.
“무거운 짐진 자”(페포르티스메노이:pefortismevnoi)는 성경전체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화물의 짐, 뱃짐’을 의미합니다. 이 짐은 타인에 의해서 지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어른들도 무거운 짐이 있지만 학생들 또한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금요심야 예배드리고 나오면서 옆 건물 학원에서 나오는 학생들을 보았습니다. 밤 11-12시가 되었는데도 학원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빨리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또 학교를 가야합니다. 어른들이 너무 무거운 짐을 어른들이 지우게 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짐은 율법과 유전의 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에게 강조하여 지우게 했다고 예수님이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23:1-4).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다 내게로 오라)
우리가 수고하고 짐진 자 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은 초청하십니다. 마 11:25절에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한 두 사람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저는 우리 주앙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온유한 사람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자꾸만 대들고 따지고 잘난 체 하면 제가 감당이 안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도 성격은 바뀌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아주 안 뀌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남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특히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한다는 것을 생각도 못했습니다. 사람만 보면 얼굴이 빨개져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여자만 보면 얼굴이 빨개집니다. 아니 빨개지는 것을 제가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지금은 좀 얼굴이 두꺼워 졌나 봅니다. 이렇게 얼굴이 빨개지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간혹 저도 모르게 그 옛날 성격이 마음속 깊이 있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혹시 나는 안될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한 분이 있다면 다음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으로 초대하십니다.
왜 예수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 하셨겠습니까? 단순히 예수님이 온유한 분이다. 겸손한 분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높임을 받으시려고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신 것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저처럼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신 분들은 무서운 사람을 보면 피해 다닙니다. 무서운 사람을 보면 무섭지요. 지금 자기 스스로 만든 일들 때문에 지쳐있는 사람들, 자기와 관계없이 짐을 지우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완강한 분이 나타나서 다그치면 도망갑니다. 여러분! 잘못하고 집 문 앞에서 망설이신 적이 있으시지요? 들어갈까 말까? 그 때 갑자기 누가 큰 소리를 지른다거나, 문을 콱 열고 나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가지 않고 숨어버립니다. 그런데 온유한 아빠가 나오셔서 온유한 음성으로 “어서 와라. 잘 왔다. 얼마나 너를 기다렸는데”라고 말하며 맡아 준다면 집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일로 지쳐있고 병들어 있는 사람들은 신경이 날카롭습니다. 차를 운전해 가면서 조금 천천히 가보세요? 앞 뒤, 양쪽에서 난리가 날겁니다. 조금 천천히 가는 것을 못 봐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사람들이 지금 지쳐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지치고 병들어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려면 온유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화낼 때가 아니라 온유할 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지어야 합니다.
여러분! 학교에서 좋아하는 사람하고 짝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신학기만 되면 제일 신경 쓰이는 것 중의 하나가 짝입니다. 짝 잘못 만나 보세요? 일년이 고생입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 남녀 공학을 다녔습니다. 중학교 때 1,2,3반까지 있는데 1반은 남자 반이고, 2반은 여자 반입니다. 그럼 3반은? 남녀합반입니다. 여기 들어가는 제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불행하게도 남자 반에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3반 남학생들이 부러웠습니다. 거기다 짝이라고 지저분하고 공부도 못하면 더 실망이지요.
29절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들을 지게 하여 그것들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로서 당시 팔레스틴에는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짐승이나 노역자가 함께 메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멍에를 메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하고 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멍에”(쥐고스:zugov”)라는 단어의 뜻은 원문으로 “짝짓기”입니다. 우리 주님과 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메면 그 짐이 무거울까요? 가벼울까요? 여러분! 학교에서 짝 한번 잘 만나도 일년이 기쁜 것입니다. 멍에를 벗어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짐을 다 내동뎅이치고 도망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짐을 지는데 예수님과 함께 지라는 것입니다.

하루는 새 한 마리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누룩을 조심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29. 누룩을 조심하라) / 마 16:11-12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어느 날 염소는 주인에게 귀여움을 받는 나귀를 질투하며 계책을 꾸몄습니다. “얘, 나귀야 ! 우리 주인은 온종일 너를 부려먹기 위해 겉으로만 아껴주는 척하는 거야. 내일 네 등에 짐을 싣고 개천을 건널 때 일부러 넘어져 보면 너를 미워하고 무거운 짐을 다시는 싣지 않을 테니까?”
열심히 일만 하던 나귀는 그만 염소의 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나귀의 다리는 많이 다쳤고 귀한 짐들이 물에 젖었지만 주인은 급히 수의사를 불러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치료를 마친 수의사는 당분간 나귀에게 일을 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염소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자신이 주인에게 신임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수의사는 “나귀의 다리가 빨리 낫기 위해서는 염소의 간을 내어 먹이고 그 피를 마시게 하면 됩니다”라는 말을 농부에게 하고는 가 버렸습니다. 나귀를 아끼던 농부는 할 수 없이 염소를 잡아 간과 그 피를 나귀에게 먹였습니다. 이 모습을 오늘 말씀을 전하게 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제일 많은 세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들의 잘못을 마태복음 3:7에서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책망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아무 증거도 없이 이런 독설을 퍼부었겠습니까? 이미 이들은 누가 보아도 자기들의 배만 부르려고 하고 자기들의 위신만 중요하지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멀어져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 고와와 객을 돌보지는 않고 오히려 그들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온 세상은 고사하고 유대인들에게조차도 빛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최대 방해꾼으로 등장합니다. 우리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새인처럼 사두개인처럼 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형식적인 율법주의자요, 전통주의자로 자기 힘으로 이룬 의를 강조했습니다. 이들의 의식과 유전은 위선적이며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마침내 영적 무지와 죽음을 초래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제일 큰 적대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수 없는 기적과 이적들, 그리고 말씀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고 오직 반대만을 일삼았습니다.
마 9:34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마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막 7: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 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끝까지 부딪히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도(이적과 기적), 말씀으로도 예수님께 상대가 안되었습니다. 이런 부류가 택하는 것은 솔직히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너무 깊이 관여되어 있는 관계로 그곳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택한 것은 예수님을 죽여야겠다는 것입니다.
마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모든 것을 예수를 모함하고 죽이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바르게 보려고 하는 자세가 없습니다. 자기들의 안경을 끼고 예수를 보는 것입니다.

사두개인
모세 오경만 인정하고 부활과 영생과 사후의 영원세계 및 귀신의 실제를 거부하는 현세주의, 이성주의, 자유주의, 기복주의적 이론가들입니다. 사도행전 23:8절에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마 22:23절에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하셨는데 이 대답으로(마22:24-34) 이들은 놀라고 있었습니다. 이 때 짜기라도 한 듯 바리새인들이 다시 의기 양양하여 예수님께 나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마 22:34) 그리고 계명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우리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되지 않으려면
1. 잘못을 인정하면 됩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시작하면 일이 자꾸만 꼬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낀 것입니다.
잘못 인정하기 그렇게 싫을까요?
초등학교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쉬는 시간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교실을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남자아이들 몇이 신발을 신은 채 책상 위에 올라가 이리저리 뛰고 난리입니다. 혼 좀 내려고 “자, 책상 위에 올라간 사람 앞으로 나와”했더니 한 학생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교실 안은 갑자기 조용해지고 놀던 아이들도 급히 제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얼른 나오지 않고 뭣해. 선생님도 몇 사람 봤는데.”
그래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어허 참, 옆반 아이들이 와서 그랬나?”
아이들이 나오면 꾸짖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며 들여보내려고 했는데 아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안되겠다 싶어, 아이들 이름을 불렀습니다.
“정진영, 너 책상 위에 올라갔잖아!”하자, 진영이는 오히려 화를 냅니다. “저만 그랬나요, 뭐.”
“물론 너만 그런 건 아니지만, 네가 책상 위에 올라간 건 맞지.”
진영이는 “으이구, 쟤도 그랬단 말예요”하며 다른 아이를 가리킵니다. 이 아이들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한 아이가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 댁엔 놀러 갔습니다. 그 아이는 새총놀이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아이가 쏜 총이 병아리의 급소를 명중시켜 죽인 것입니다. 당황한 아이는 부랴부랴 죽은 병아리를 땅에 묻었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웃집 아이가 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 일 이후로 그 아이는 이웃집 아이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야만 했습니다. 무척 괴로운 나날이었습니다. 참다 못한 아이는 외할머니께 자기가 한 일을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할머니는 기꺼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아이는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죄책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모두 아뢰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라는 말씀은 연약한 우리들에게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전통과 유전을 우선하면 안됩니다.
그것을 모두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유전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우선될 수 없습니다. 우선 순위를 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먼저 따라야 합니다.
전통의 좋은 점이 있지마는 전통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는 것도 많이 있어요. 또는 전통이 우리로 하여금 가리키려고 했던 진정한 본질 그 본질에 다가서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 요인으로 종종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배드리는 순서와 심지어는 교회의 모습 같은 것까지도 전통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3. 영생과 부활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영의 세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천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사두개인의 모순 점은 모세 오경을 보는데 있습니다. 즉 모세 오경에도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까지 인정하지 않는다면 성경에서 남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을 알았으면(집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싶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 10:28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바리새파로부터 벗어난 두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마가복음 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공회원’이라는 것은 당시 산헤드린공의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회는 이스라엘의 최고 기구입니다. 로마 속국이었지만 이 회의에서 모든 일을 결정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그 전날 밤에 예수의 재판이 이루어졌을 때 없었습니다. 너무나 급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회가 공식적으로 가동되지 않고 졸속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아리마대”에 사는 “요셉”을 말하는 것으로 그가 이곳 예루살렘으로부터 먼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리마대”의 뜻은 “높이 있음”입니다. 이 지대가 높은 곳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서북 32km 지점 현재의 벨라(Shephelah) 지방 구릉지대에 있는 렌티스(Rentis)입니다. 다른 대부분의 회원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달려올 수 있었지만 요셉은 “아리마대”로부터 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잡히심과 재판, 처형소식을 듣고 빨리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형이 끝난 뒤에 도착한 것입니다. 요셉은 목숨을 걸었습니다. 빌라도에게 당당히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집안의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냅니다. 분명히 당시의 산헤드린공의회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아리마대 사람 요셉만큼은 그 깊고 깊은 수렁과 같은 제사장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소굴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저는 역사상 제일 소신 있는 사람을 뽑으라면 아리매대 요셉을 선택하겠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빌립보서 3:5절에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말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26:5절에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리새파가 “가장 엄한 파”라고 소개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데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던 바울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는지 아십니까? 사도행전 8:3절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했습니다. “잔멸”은 교회를 아주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의 개처럼 충성을 다 바치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것도 교회의 성도들을 대제사장에게 고발하고 믿음을 방해하려고 일러바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행 9:4) 하면서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한마디에 그는 고꾸라졌습니다. 이후로는 그가 더 이상 사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바리새파였을 때는 큰 자라고 자처했지만 예수께 돌아와서는 스스로 “작은 자”라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사울”이 아닌 “바울”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완전히 바리새파로부터 빠져 나왔습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청년으로부터 신앙상담을 했던 내용입니다.
이 청년이 시골 보건소에 내려갔는데 이곳에 계신 분들이 약값에서 그리고 다른 행정을 이상하게 하고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입의 얼마를 이 청년에게도 주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부정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갓 내려간 이 청년이 거절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뇌물인지? 공돈인지를 받지 않으면 그 조직으로부터 자기는 왕따를 당할뿐더러 계속해서 그곳에서 근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너무 결백한 척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요즈음은 설교도 그저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식으로 해야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결단을 내립시다. 가만히 있다보면 우리 또한 똑같은 바리새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들의 교훈을 쫓아가는 것은 모두가 누룩입니다.

오래 전에 한 여객 열차가 뉴욕으로 가던 중 다른 열차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고가 났었습니다. 그 사고로 5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당시의 열차 운행은 기차역에서 무슨 표를 받아 가지고 출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열차 조종사도 심한 부상을 당해 죽었는데 죽기 전에 그는 노란 종이 하나를 손에 쥐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된 명령인 이 노란 티켓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사고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잘못된 표하나가 열차를 충돌시키고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잘못된 교훈이 사람을 영원히 죽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다른 곳에도 도덕적인, 윤리적인, 어느 정도의 교훈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말이나 이론들이 예수님께 가는 길을 막고 있다면 그 또한 누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예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아멘

우리의 오병이어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28. 우리의 오병이어) / 막 6:35-44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명이었더라”

[배경설명]
예수님은 몇 시부터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셨는지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오랜 시간 설교를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과 청중들은 말씀을 듣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시간은 어느새 저녁때가 다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있습니다. 남자만 5,000명이 되니까 여자와 어린아이를 합하면 20,000명쯤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금쯤 말씀전하는 것을 중단하고 해산해야 무리들이 저녁을 사먹든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고 건의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건의에 대해서 예수님은 의외의 질문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모여있는 2만 여명에게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답하기를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했습니다. 200데나리온이면 당시 한사람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 이었으니까 한 사람이 약 8개월간 벌어야할 돈입니다. 요 6:7에서 빌립은 200데나리온을 사용해도 청중들을 먹이기에는 부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식으로 계산하면 5,000원짜리 도시락을 2만 명에게 준다고 하면 1억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주 똑똑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세관원출신인 마태가 있었고 회개를 맡은 가룟유다도 있어 샘에는 밝았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러한 고민에 직접 참여하십니다.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확인된 음식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이것도 어떤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도시락으로 서민이 먹던 보리떡과 물고기 몇 마리가 전부였습니다(요 6:9). 지금 먹어야할 사람의 양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마디로 누구 코에 붙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들이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청중들도 가진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모자라 꼭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가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없어도 창조적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럼 왜 이 작은 것을 가져오라고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것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한 큰 것을 가진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십니다. 하나님은 많이 가진 사람들의 것은 관심이 없으십니다. 기드온을 택하실 때도 제일 작은 집안의 막내를 뽑으신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는 지도자가 될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을 뽑으실 때도 너무 많아 줄이십니다. 결국은 300명으로 미디안의 수많은 군사를 상대해서 싸우게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적은 것이로되 생명이 있습니다.
베드로도 복음을 전하면서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합니다. 베드로가 아무 물질도 주지 않고 말로만 한 것처럼 보입니까? 베드로는 그의 삶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한 때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그가 예수님께 고백한 것처럼 그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마 26:35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오늘 우리 주앙교회도 우리에게 무엇이 있는지 그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윤인수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중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어린 소년 윤인수가 길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고 구두닦이를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윤인수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윤인수는 열심히 일을 한 대가로 돈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그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돈을 내놓았습니다. 돈을 받아 든 어머니는 윤인수의 등을 두들겨 주며 “십일조를 먼저 떼자”고 말합니다.
윤인수는 버럭 화를 내며 “십일조는 무슨 놈의 십일조인가, 하나님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나의 눈은 멀게 했고 엄마는 병들게 했고, 공산당에게 쫓겨 피난민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 그런 하나님께 무슨 놈의 십일조를 내라느냐”며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을 꼭 쥔 다음 “인수야 고향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니?”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지 못할 상황으로 끌고 가십니다. 이제 파악이 되셨으면 “해산하라!” 명령을 하셔야 하는데 오히려 무리를 지어 앉게 하십니다.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떼로, 떼를지어”는 U자 형태로 앉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식사 대열입니다. 시골에서 초,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야외로 소풍가면 각 반마다 또는 마을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식사할 수 있는 상태로 자연스럽게 구성되지 않습니까? 바로 그와 같은 상태로 앉은 것입니다.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숫자는 신뢰하셔도 좋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른 공부는 몰라도 숫자 계산하나만큼은 잘했습니다. 누가 있어서요? 세리 출신 마태와 회개를 맡고있는 가룟유다가 있지 않습니까? 아마 베드로와 어부출신인 다른 제자들도 고기가 몇 마리 정도 잡혔는지는 세었으니까 숫자 계산은 아마 빨랐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100% 순종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왜! 해산하지 않고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십니까? 또 무엇을 하시려고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다 이해한 것을 행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지나치게 자신의 논리로 모든 문제에 접근합니다. 자기가 이해가 안되면 안 하는 겁니다. 그런 분은 순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순종이란 내가 이해되지 않지만 나의 주가 시키면 하는 것입니다.

멕시코에 있는 쿠이케텍 인디언과 체르탈 인디언의 방언에는 `믿는다’라는 말과 `순종한다’라는 말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 단어에 두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안 초기 선교사들은 미개한 인종의 언어라서 언어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언어는 불완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그들은 두 단어를 구별하려는 문명인들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들 언어의 불완전성은 문명인들에게 깊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두 말이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믿으면 순종하게 되지 않습니까? 순종한다는 것은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옳은 것입니다. 오히려 문명인들이 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리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주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41 예수께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어리가 예수님께 드려졌습니다. 그냥 있으면 여전히 한 어린아이가 먹을 양뿐이 안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드려졌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그냥 100원이요, 10만원이요, 100만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드려지면 다릅니다. 예수님이 축복을 하시고 남자만 5,000명이 먹었습니다. 그것은 물질의 양과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고기가 다섯 마리였기 때문에 5,000마리로 늘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청중이 먹고 남았습니다.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모자라지 않습니다. 충분합니다. 남는 축복이 있습니다.
단순히 오병이어의 기적이 기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구원자시요, 생명의 떡으로 친히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것도 주님께 드려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주앙교회에서도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아멘.

어려서부터 꼽추로 자라 굉장히 우울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나 같은 불구자를 과연 받아줄 것인가? 누가 나 같은 사람과 결혼해 주겠는가?”
그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 같은 느낌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뒤에서 “꼽추! 꼽추!” 하면서 그를 놀렸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어린 소년이 그를 세우더니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 등에 지고 가는 게 뭐예요?”
그는 생각했습니다.
“웬 꼬마가 나를 놀리고 있네. 왜 아이들까지 나를 괴롭히지?”
그러나 그는 무심코 “혹이란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사랑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저씨, 나는 그걸 믿을 수 없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세요. 하나님은 사람에게 혹 같은 것은 주지 않으세요. 아저씨 등에 있는 것은 천사의 날개가 들어 있는 상자예요. 아저씨가 죽을 때까지 겸손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고 다니면 어느 날엔가 그 상자가 열리고 날개가 펴져서 아저씨는 그 날개로 아름다운 하늘나라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소년의 말을 듣고 그만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아름답고 많은 돈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이것이 우리의 오병이어입니다.

바울은 고전 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것, 약한 것, 부족한 것”이 무조건 이기거나 좋은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택하셨을 때, 그리고 순종하고 나왔을 때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열매일 맺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27. 아름다운 열매일 맺자) / 마 7:16-20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꽃은 스스로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향기는 스스로 향기롭다고 말하지 않아도 향기로운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은 진실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진실한 것입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은 따뜻한 가슴을 가졌노라고 말하지 않아도 따뜻한 것입니다.
새 해에는 진실한 마음과 따뜻한 가슴으로 사랑의 손 내밀 수 있는 사랑의 향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시나무에 포도가 열리지 않으며, 엉겅퀴에 무화과가 열리지 않습니다.
그 나무를 보면 그 열매의 종류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나무입니까? 가시나무, 엉겅퀴입니까? 아니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입니까?
말하지 않아도 된다 구요? 포도나무, 무화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시나무, 엉겅퀴는 사단의 역할을 합니다.
인간 타락의 결과로 먹을 것 대신에 먹지 못할 것이 열리는 것이 가시나무와 엉겅퀴입니다. 창 3:18에 하나님은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고 하셨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에덴 동산에 이런 못된 나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가시가 남습니다. 민 33:55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치 않은 결과로 우상이 남은 것입니다. 이 우상이 가시역할을 합니다. 삿 2: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지난 26일 인도네시아 슈마트라섬 근처에서 64년 알래스카 지진이후 40년만에 가장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보통은 7.0만 넘으면 위험한 것인데 이번 지진은 9.0의 강력한 지진으로 핵폭탄 270개를 터뜨린 것과 같은 위력이라고 합니다. 1000km에 걸쳐 바다에서 발생한 이 지진은 순식간에 해일을 일으켜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몰디브의 수도 3/2을 잠기게 했습니다. 인도와 스리랑카, 태국의 남부를 중심으로 휴양지인 푸켓을 덮쳐 사망자만 100,0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지역은 주종교가 불교, 힌두교, 이슬람 국가들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태복음 24:7-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할 때인 것 같습니다.
가시나무, 엉겅퀴에서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없는 것은 처음부터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씨가 자랄 수 없습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의 종교로는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가시나무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라고 하셨습니다. 가시는 자라게 하는 것을 막습니다. 이 비유의 설명을 마 13:22절에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시는 두 가지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입니다.

하루는 송사리 잠자리 개미 등 셋이 함께 모여 놀고 있었습니다. 송사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평안은 당신의 것입니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26. 하나님의 평안은 당신의 것입니다.) / 눅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우리 격언에 “때린 사람은 오므리고 자도 맞은 사람은 다리 뻗고 잔다”는 말이 있습니다. 육체의 고통보다 마음의 평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이 평안해야 살지 불안하면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속담에 “먹는 개도 안 때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먹을 때만큼은 편안하게 먹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불안하게 먹으면 소화불량생깁니다.

거할 곳이 없는 사람들은 평안이 없습니다.
여러분! 혹 집이 없어 고생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저는 어려운 집에서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저희 집은 길가에 길게 일자로 지어져 있었는데 어려서는 겨울이 되면 춥기는 했지만 그렇게 불편한지는 몰랐습니다. 조금 성장을 하면서 청소년기가 되니까 다 쓰러져 가는 듯한 저희 집이 길가에 그것도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이 창피했습니다. 앞마당이 길이 되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사람 많이 다니는 곳에 집이 있어야 한다고 동네 가운데다 집을 지었는데 그것이 길이 된 것입니다. 방문을 열면 바로 앞이 길입니다. 그나마 이 집의 땅도 남의 땅이라 길가의 초라한 집만이 저희의 보금자리인 샘입니다. 그래도 이 집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편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남의 집 대문간 옆 작은 방 하나 얹어 가지고 산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그리고 한 방에 모든 식구가 다 자는 것입니다. 지금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그렇게 사는 사람은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집이 아니라 거할 땅이 없는 민족도 있습니다. 이 땅에서 제일 슬픈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자기 땅이 없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어느 민족이든 자기 땅만큼은 지키고자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것입니다. 외국에 사시는 분들이 제일 서러움을 받는 것은 자기 국가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땅이 있고 우리 민족이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보존하려고 목숨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누가 이 땅을 조금이라도 손을 대면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뜻으로, 그리고 우리 땅에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경고 성으로 ‘삼천리반도’라고 노래를 만들어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찬송에 넣어 부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이렇게 자유롭게 믿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미국의 민간 인권기구인 프리덤 하우스가 지난 20일 연례보고서인 `2005년 세계의 자유’에서 한국은 정치적 자유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며 시민 자유는 차상위 수준으로 평가하였습니다. 이것은 1위 그룹인 프랑스, 영국, 미국, 캐나다에 이어 그리스, 일본과 같은 수준입니다. 프리덤 하우스가 192개 국가를 대상으로 지난 2003년 12월1일부터 올해 11월말까지 1년간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 각국의 자유 수준을 점검한 이 보고서는 한국의 정치자유를 1점, 시민 자유를 2점, 전체 평점은 1.5(최고점수 1, 최저점수 7로 평가했습니다. 북한은 최저 수준으로 평가되었으며 공산국가와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이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사사기 18장 1절부터 보면 단 지파는 땅이 없어 헤매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다른 지파들은 다 땅을 차지했는데 단지파만 아직 땅을 얻지 못했습니다. 단 지파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단 자손은 자기들의 지파에서 제일 강한 사람 다섯 사람을 뽑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땅을 얻기 위한 특명을 주어 파견합니다. 단 지파대표 다섯 사람은 땅을 구하기 위해서 에브라임에 이르러 미가선지자의 집에서 지내게 됩니다. 이 집에는 미가 선지자가 아주 젊은 제사장을 삼아 가지고 함께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 젊은 사람은 레위인이었기 때문에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젊은 제사장도 사정이 많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 자초지정을 다 이야기하지는 않고 삿 18:4 “여차여차히” 라고 만 말합니다. 어쨌든 미가선지자는 이 젊은 레위인을 잘 대접해 주고 자기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습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이 젊은 제사장에게 하나님께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기도하고 응답을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땅을 얻어야할 단 지파 5인 대표에게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5절 “우리 행하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걱정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 지파를 위해서 땅을 얻어야 할 5인의 대표보다는 가벼운 짐입니다. 우리의 짐은 그래도 나의 가정 아닙니까? 예전에 중국에서 남자가 된다는 것은 한자의 뜻에서 남(男)자를 보면 압니다. 입구 자 안에 ‘열 십자’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아래는 ‘힘 력’자가 있습니다. 남자가 되려면 열 명의 입은 먹여 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결혼정보업체(듀오:www.duonet,com)에 따르면 미혼남자 41%가 처가살이도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처도 자식이므로 부모를 모시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34.3%로 가장 많았는데 속셈은 다른 곳에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표면상으로는 아내의 편의를 위해 22.2%이지만 자녀 양육부담감소 15.5%, 생활비절감 15%나 됩니다. 정말 처가 집 식구도 한 식구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보리쌀 닷 대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 한다는 생각에는 처갓집이 싫어서라기보다는 남자의 책임을 자해야 한다는 뜻이 더 베어 있다고 봅니다. 요즘 너무 남자들이 책임의식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 생각할 때 걱정이 됩니다.
단 지파의 다섯 명의 대표는 어깨가 무거웠을 것입니다. 단 지파의 운명이 자신들의 어깨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많은 염려가운데 있는 단 지파의 대표에게 레위 젊은 제사장은 말하기를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삿 18:6)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주앙교회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고난은 잠시입니다. 힘들고 어려움이 있지만 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영원한 처소를 생각하면서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면 평안이 없습니다.
사람이 꼭 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닙니다. 사무엘상 처음 시작은 그런 여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이름은 한나입니다. 그 남편의 이름은 엘가나인데 첩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브닌나입니다.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없었습니다. 남편은 하나를 더 사랑하지만 브닌나는 자식이 있어 늘 한나를 괴롭혔습니다. 이 당시 사회는 자식이 있어야 아내의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삼상 1:6, 7에 브닌나가 하나를 “격동시키므로”라고 나옵니다. 단순한 말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한나가 이 일로 괴로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년에 한 차례씩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찾아갔는데 이 때에도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게 했습니다. 너무 속상한 한나는 울기만 하고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에 가서 통곡하며 “아들을 주시면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평생에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너무 오래 동안 기도하는 것을 엘리제사장이 보았습니다. 가만히 입을 보니까 분명히 입술은 움직이는데 소리가 안 나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생각하기를 포도주를 너무 먹어서 취한 여인이 중얼거리는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오래 동안 기도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술을 마신 것이 아니요 마음이 괴로워 그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17)고 했습니다.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렇게 태어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되고 초대 왕을 세웁니다.
우리도 많은 한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시고 가실 때는 “평안히 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애창하는 찬송가 470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의 작사자는 미국 시카고 무디교회의 회계집사이자 법리학 교수이며 변호사였던 스페훠드였습니다. 시카고 대 화재로 미시간 호수변에 투자했다가 부동산을 다 잃은 그는 병을 얻은 아내를 요양시키기 위해 유럽 여행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인과 네 명의 아이를 먼저 보내고 화재 뒤처리로 나중에 출발하기로 한 그는 가족을 태운 배가 영국의 철선과 정면 충돌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웨일스에 도착한 아내는 그에게 전문을 띄웠습니다. ‘혼자만 살아 남았음.’
그는 네 자녀를 모두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아내를 데리러 가는 그는 자녀들이 목숨을 잃은 해상을 배로 통과하며 이 찬송가의 가사를 작사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 참을 수 없는 슬픔 앞에 이러한 고백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평안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진정한 평안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눅 7:36절에서부터 보면 본문 말씀의 내용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한사람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진실로 예수님을 영접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관심을 끄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데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목사님을 모시려고 하는 분들 중에는 이러한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야 불러주지 않아서 못 가지만 큰 교회 목사님의 심방을 받으려면 힘듭니다. 교회 또한 그러한 마음에서 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야 그런 분이 있을 수 없어 다행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초청만 했지 손님 대접하는 기본이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이니까 대접을 해야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손님을 초청하면 발 씻을 물을 떠다 주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씻을 물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때 어디선가 갑자가 여자 하나가 뛰어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준비한 비싼 향유 병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립니다. 무엇인가 마음속에 쌓여 있었던 마음이 폭발한 것입니다. 이 여자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여자입니다. 정확하게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의 죄를 속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사랑함으로 그리고 오늘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예수님께 알렸을 때 눅 7:48절 “…네 좌사함을 얻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50절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완료형으로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고 지금 구원받은 상태로 남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구원에 대해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에게 오늘 본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아멘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를 유대식으로 말하면 오늘 말씀의 제목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은 당신의 것입니다. 가지고(믿고) 가시기 바랍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하여 역사를 바꾼 왕입니다. 그는 정치적인 갈등으로 아들 크리스파스를 죽인 후 죄책감으로 고민에 빠졌습니다. 신전에 사죄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신관은 로마 신전에서는 사죄의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플라톤 철학에 심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사죄의 길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골도바의 감독 호레야스를 통하여 십자가의 무한의 은혜를 듣고 제자가 되고 비로소 평안을 얻었습니다.
사죄는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인데 죄를 사함 받는 길은 은혜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평안이란 구원의 결과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확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안을 원합니다. 평안은 십자가의 사죄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병 고침을 받았을 때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눅 8:48, 막 5:34) 또한 70인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도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찌어다 하라”(눅 10:5)고 하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이 말씀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이지만 주앙교회를 시작하고 한 분 한 분 주앙교회에 오실 때마다 여러분들의 가정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여러분!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아기를 찾아라-목자의 경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25. 아기를 찾아라-목자의 경배-) / 눅 2:15-20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빨리 가라
“16 빨리 가서 …
목자들은 천사가 떠나자 곧바로 아기 예수를 찾아 떠납니다. 지체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일 귀한 분이 이 땅에 탄생하시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에게도 아기 예수를 보러 가는 것이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지키던 양떼를 두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데도 한가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목자들도 자기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잠시 뒤로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지금은 예수님의 탄생을 보러 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된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우선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우선 순위가 잘못되면 결코 잘 살았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차선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결코 차선이 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분량입니다.
먼저 천사를 만났던 마리아 역시 ‘빨리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눅 1:38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 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라고 했습니다.
‘빨리’하면 우리 한국사람 아닙니까? 동남아 여행가면 가이드들이 한국말 아는 것 하나가 있는데 “빨리 빨리”입니다. 노는 데만 바쁘면 되겠습니까? 자신의 일에만 바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한 일에 바쁘게 행동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기를 찾아라
“16 …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찾아서 ajneu’ran(아뉴란)”는 원문으로는 “끊임없이, 부지런히, 탐색하여 찾는다”는 뜻입니다. 천사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만 전해주고 떠났습니다. 아기 예수를 찾아야 하는 것은 목자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아무런 수고도 없이 아기 예수를 만날 수는 없습니다. 찾는 수고가 있어야합니다. 목자들은 “여기 산모를 보았습니까?, 혹 아기 나을 때가 다 된 아기엄마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라고 물으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마리아와 요셉이 방을 구하러 동분서주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아마도 여관집 주인들이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소식을 전해 준 것은 천사의 몫이었지만 아기 예수를 찾아 나서는 것은 목자의 몫인 것처럼 우리도 예수를 만나려면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찾아 나서는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사가 할 일과 우리가 할 일을 따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천사가 전하면 되지 이렇게 힘든데 우리가 해야되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큰 불빛을 비추이면서 “너는 예수 믿어야 산다!” 그러면서 겁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 많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으십니다. “누워 절 받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받기 싫은 절을 받을 때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강제 동원된 북한의 칠골교회, 봉수교회와 같은 사람들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아기 예수를 찾아야 하는 것은 목자의 일입니다.

복음을 최초로 듣고 전한 사람들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정확하게 아기 예수님 탄생하신 마구간에 얼마나 사람들이 모여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 예수만 쓸쓸하게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때 목자가 찾아왔다면 그 자체로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천시 받던 제일 하찮은 직업을 가진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고 또 이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달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복음은 전달됩니다. 또한 먼저들은 자는 전파해야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루시와 그의 여동생 빌마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그들의 부모는 가난했고 따라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루시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내가 열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실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크리스마스 때였는데, 우리에게는 아무 선물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동생과 나는 알았습니다. 크리스마스는 다른 날과 아무 다름이 없는 날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아침 우리는 식탁에 앉았습니다. 어머니는 주기도문을 외우셨습니다. 어머니가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는 구절을 말씀하실 때는 그 목소리가 가라앉았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울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내 동생과 나는 끝까지 주기도문을 다 외웠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막 끝냈을 때 어떤 사람이 우리집 문에 왔습니다. 그 분은 우리 이웃집사람인데 우리의 조찬을 위해 새 빵을 갖다 주셨습니다. 크리스마스 그날, 하나님님은 스스로 친히 우리에게 와 주셨습니다.

마음에 지키어
“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는 당연한 것입니다. 저 멀리 밖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어야할 목자들이 어떻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고 물어 물어 찾아왔는지 그리고 천사들의 이야기를 하니 모든 것이 기이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기적 그 자체이며 사람들의 생각에는 기이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이하다고 해서 그것을 믿지 못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고 기이한 것이 전혀 없다면 그것이 어찌 기적이고 그것이 어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곧 기이한 것입니다.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다른 사람들이 기이히 생각할 때 마리아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이미 마리아는 천사의 소리를 들었었고 그리고 아기를 잉태하고 있기 때문에 놀라지 않고 기이한 일로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자신이 그 경험의 장본인이고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험한 사람은 놀라지 않습니다. 자신이 먼저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을 압니다. 그리고 성령 받은 사람의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없는 사람은 기이히 여깁니다.
‘지키어’는 미완료 시제로서 ‘보호하다, 간직하다’의 뜻입니다. 마리아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목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루어진 말씀
“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사실 아기 탄생 그 자체로만 보면 평범한 아기 탄생에 불과하게 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특별한 배려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성령의 신비는 특정하지만 실제로 육체를 입고 오시는 예수님의 상황은 특별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평범한 사람들 이하의 환경 속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물론 자라실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보통 사람처럼 예수님을 탄생시키시고 성장시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목자들이 목격한 광경은 단순히 어린 하나가 태어난 마구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리였습니다. 천사들이 말한 그대로였습니다. 그분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들은 찬송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목자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유명한 복음성가 가수인 생키(Sanky)가 여객선을 타고 멜러웨어강을 건너고 있었다.
마침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승객들은 여객선에 생키가 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노래를 한 곡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생키는 캐럴송인

천사들의 찬송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24. 천사들의 찬송) / 눅 2:8-14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6.25때 있었던 일입니다. 1.4후퇴 때 강아지를 가지고 피난 가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이 강아지는 기차의 출발 소리에 놀라서 그만 창문 밖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젊은이는 따라 내려 강아지를 가까스로 잡아 다시 출발하는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사람들은 이 난리 통에 그깟 강아지를 가지고 다니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강아지를 꼭 껴안고 가는 것입니다.
6.25가 나고 바로 피난 갈 때 처음에는 이 강아지를 집에다 두고 갔었습니다. 그 때 꼬리를 치며 따라오는 강아지에게 “집 잘 지켜야 한다. 그리고 꼭 너를 데리러 올께…”하면서 쓰다듬고 얼마의 먹을 것과 함께 놓고 갔습니다. 드디어 서울이 수복되었고 피난에서 돌아온 이 젊은이는 난리 통에 강아지가 살아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하고 집에 들어가 두리번거리며 강아지를 찾았습니다. 강아지는 주인이 신던 군화 위에 납작하게 널 푸러져 있었습니다. 주인의 냄새가 배어있는 군화 위에 올라가서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젊은이는 튓마루로가서 예전에 강아지를 부르던 데로 휘파람을 ‘휙 ~“불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강아지가 꿈틀거리면서 비틀거리며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다짐했습니다. 다시는 널 혼자 두지 않겠다고… 그리고 지금 기차를 함께 타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 강아지의 사이도 이러한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약속하신 대로 우리 죄를 속하고자 이 세상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재림하신다는 말씀대로 오실 것입니다. 아멘.

목자에게 나타난 천사
요셉은 임신한 마리아를 데리고 이리저리 아기 예수를 해산할 방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천사들은 목자들을 찾아갔습니다. 이 때는 이미 초저녁을 넘어 밤이 깊어가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목자들은 자기의 양떼를 돌보면서 밤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사방에 비추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불 꽃 놀이나 헬리콥터가 나타나서 빛을 비추이는구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당시는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전기 불에 익숙해 있는데 옛날 사람들은 큰 불빛이라고 해봐야 모닥불이 전부였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두루 비취매” 놀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라고 했는데 원문에는 두 단어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경악하는 두려움’(ejfobhvqhsan:프호베데산)이고 하나는 ‘공포’(fovbon:프로보스)로 무서워서 떠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오줌쌌을 겁니다. 발이 안 떨어지고 입이 굳어져서 그저 멍하니 서서 달달 떨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는 나타날 때마다 하는 첫 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서워 말라!”입니다. 천사가 나타날 때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빛만 비추인 것이 아니라 사람은 없는데 말소리까지 들리니 사실은 더 놀랐을 것입니다.
천사들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 율법사들을 찾아갈 수도 있었는데 왜 목자들을 찾아간 것일까요? 목자들은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깨어있었습니다. 당시의 목자들은 천시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피곤한 직업입니다. 밤새도록 깨어있으면서 이리나 맹수로부터 목숨을 걸고 양떼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피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위험한 직업입니다. 천사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이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7: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기뻐할 만한 사람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목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에도 예수님의 탄생 소식에 기뻐할 사람이 있습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고통 중에 있으며, 질병 중에 있으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있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여러분은 모두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천사로부터 먼저 전해들었던 목자 같은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천사들의 찬송
구약에서 두 사람 이상이면 증인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왔습니다. 아마도 동원될 수 있는 모든 천사가 나타난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니 이 자리가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겠습니까? 그런데 이 천사들이 한 목소리로 찬송을 합니다. 이 땅에서 울려 퍼진 최고의 찬송입니다. 지금같이 녹음기가 있으면 녹음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최고의 음악가들은 바로 이 장면을 연상하면서 곡을 쓴 답니다.
제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들렸을 때 아주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맨 안 쪽에 가면 성가대석이 있고 그 바로 맞은편에 좌석이 있는데 이곳은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귀빈석입니다. 영국의 국왕이나 국가 귀빈이 이곳에 초청되어 앉는 자리입니다. 다이애나 공주의 장례식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제가 양복 입으면 한 인물 나지 않습니까? 더운 여름에 남들은 반 팔을 입고 다니는데 양복을 입고 가니까 아마 어느 나라 귀빈으로 생각을 했는지, 착각을 했는지 바로 성가대 맞은편으로 안내를 받아 가서 앉았습니다. 이 성당은 지금까지 천년이 넘도록 한번도 예배를 드리지 않은 적이 없는 성당입니다. 세계 제 1차대전이 일어나고 있던 그 때에도 예배는 계속된 것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하면서 앉아있는 그 자체가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위쪽에서 나는 소리인데 파이프 오르간이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것은 세계최고의 파이프 오르간일 것입니다. 교회의 실내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이 소리는 다른 곳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입니다. 저는 음악적 감각이 별로 없어서 잘은 모릅니다만 성가대에서 은은하면서도 힘차게 부르는 그 소리는 다른 곳에서 들어보지 못한 찬양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한 사람이 부르는 것 같이 음이 조금도 튀어나오는 사람 없이 고운 음으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천사들의 찬송 소리는 어떠했을 까요? 정말 들어보고 싶습니다. 저는 하늘나라가면 만날 사람도 많고 질문도 많지만, 그 중에 하나가 천사들보고 그 때 그 찬송을 좀 해보라고 할겁니다. 다행인 것은 그 소리는 알 수 없지만 내용은 알 수 있습니다. 천사들이 부른 찬송의 내용은 바로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입니다.

첫째 “하나님께 영광이요”라고 노래했습니다.
①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 14:9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미개한 아라비아인들이 프랑스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호텔의 목욕탕을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물이 부족한 사막에서 살던 사람들이라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는 것은 황홀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프랑스의 문화나 관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호텔에 들어가 목욕만 하면 좋은 것입니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날이 되어 출발 시간이 되었는데도 호텔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안내원들은 또 목욕을 하고 있겠지 생각하고 갔는데 수도꼭지를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쏟고있는 것입니다. 안내원들은 어리둥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아니, 도대체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그들은 이구 동성으로 “이걸 가져가 사막에서 목욕을 하려고요.” 단순히 수도꼭지 때문에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닌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에 그 능력은 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②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르쳐 주시기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하라고 가르치셨으며 눅 5:26절에 “중풍병자를 고치셨을 때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을 치라고 하신 뒤에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고 하셨습니다.
앨런 가디너 선교사는 선교하면서 수많은 역경과 육신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에게 힘을 주시는 동안에는, 내게 겁날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1851년 남아메리카의 남단에 있는 픽톤 섬에서 선교하다 57세의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그 옆에는 가디너 선교사가 기록한 선교일지가 있었는데 그가 경험한 베고픔과 목마름, 상처, 외로움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쓴 한 줄의 글은 떨리는 손이었지만 똑똑히 쓰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고 합니다.
“나는 우리 하나님이 어찌나 좋으신 분인지 감격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간 가디너 선교사의 떨리는 손으로 쓴 마지막 글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입니다.

③ 그리스도가 구속사역을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 사람들이 눅 19:38절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천사들과 같은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고 눅 23:47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둘째,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중재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막혔던 담이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했으며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평안이 없었던 것은 불안했었기 때문입니다. 왜 불안했습니까? 죄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죄가 제거되면 평안이 옵니다. 죽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가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가 제거되지 않은 사람은 불안합니다. 죽을 때 무섭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의 문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지키는 크리스마스는 정해서 드리는 것으로 성경에는 그 시기나 날짜가 없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목자를 찾아간 때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알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양을 방목하며 끌고 다니는 것은 보통 4월부터 11월까지입니다. 그러나 12월 달이나 겨울에도 춥지 않을 때는 가끔 끌고 나오기도 한답니다. 누가는 이 때를 기록하지 않고 다만 11절에 “오늘날”이라고만 했습니다.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태어나고 계신 것입니다.
성화 중에 홀맨 헌트라는 화가가 그린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 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성화입니다. 그 그림에는 한 사람이 등불을 들고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것으로 보이는 문 밖에 서 있습니다. 그 문 주변에는 덩굴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어서 그 문이 오랫동안 닫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문은 바깥에서 잡을 수 있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집에 등불을 들고 들어가려 하지만 손잡이가 없어서 안에서 열어 주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문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평화의 왕으로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평안합니다. 우리가 혼자서 걱정하고 염려하던 것 주님이 아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000년 전에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다시 우리를 데리러 이 땅에 오십니다. 이 때 주님의 품에 안기는 주앙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천사들에게 그 때 그 노래 한번 불러달라고 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