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主)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2. 나의 주(主)이신 예수님) / 본문 : 요 21:1-14

오늘 본문말씀을 정리하면,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요한과 야고보)과 다른 제자 둘(정확히 알 수 없지만 빌립과 안드레로 추측한다) 모두 7명의 제자들이었는데 베드로가 먼저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3절)하고 어찌 보면 먼저 선동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늘 먼저 말하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그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언제나 제자들의 앞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6명의 제자들도 베드로와 같이 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바다로 갔습니다(디베랴 바다는 여러 이름으로 불러졌는데 바다를 중심으로 길게 뻗어있는 지역들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불리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지역적으로 불려진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갈릴리 바다’(요6:1), ‘긴네렛 바다’(민34:11), 겐네롯 바다(수12:3), ‘게네사렛 호수’(눅5:1) 등으로 불러졌는데 “디베랴 바다”라고 불러진 이유는 갈릴리 지방의 수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날이 새도록 그들이 이전에 하던, 갈고 닦았던 방법으로 고기를 잡아보았지만 고기는커녕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날이 새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이 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서 계셨습니다. 아직 새벽인지라 물안개가 가려서인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제자들은 아마 예수님이 그곳에 나타나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얘들아(5절) Paidiva(파이디아) “어린이”를 가리키는 말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현재 어른들에게 사용되기도 하는 말인데 우리 식으로 옮긴다면 “여보게들, 젊은이들” 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예수께서 이 말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에 대해서 여러 해석이 있지만 친근감을 더해주는 애칭으로 불렀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그리고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실 때 (메 티)로 부정관사와 명사를 사용하여 이미 고기가 없음을 알고 계시면서 묻는 것이다). 제자들은 고기가 하나도 없다는 대답을 아마도 기운하나 없이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6절)고 하십니다. 사실 이 장면에서 제자들이 아직도 주님을 몰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다고 보기보다는 그저 지친 나머지 누군지 모르지만 시키는 대로 한번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눅5:1-11에서 유사한 경험(베드로를 부르실 때 예수께서 함께 고기를 잡았던 것.)을 했기 때문에 주님인지 아직 완전히 몰랐지만 그 말씀을 따라하면서 어떤 느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전율이 제자들의 몸 속에서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제일먼저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7절). 그리고 베드로에게 주 kuvriov”(퀴리오스)시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베드로는 벗고있던 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아마 그의 기쁨이 주님을 만나는데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기에 바다로 뛰어내리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아있던 제자들은 작은 배에 옮겨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왔습니다.

사람이 감격과 감동하면 엔돌핀의 천 배나 되는 효력을 가진 사이몰핀이 나온다고 합니다.
사이몰핀은 암세포를 죽이는데 엔돌핀의 천 배나 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건강해지고 강건해진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감격과 감동의 연속적인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육지에 올라온 제자들은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숯불을 피우시고 그 위에 고기가 놓여있었고 떡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잡은 고기도 가져오라고 하셨는데 고기는 153마리가 잡혔습니다. 이것은 자칫하면 그물이 찢어져 버릴 만큼의 많은 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16절)고 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확실히 주(主)신 줄 알게되었고 더 이상 묻는 제자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을 자신들에게 해 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할지 모르고 방황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장면입니까?

사실 제자들이 고기 잡을 정신이 있겠습니까? 마음이 허전하니 잠시 고기 잡으러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다녔던 제자들은 이미 세상의 옛 직업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오늘의 본문내용에서 나타난 주 kuvriov”(퀴리오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본문 말씀을 선택한 것입니다.
주 kuvriov”(퀴리오스)는 “주인, 절대자, 소유자, 통치자”라는 뜻인데 성경에 나타난 주님은 어떤 분인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주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독일의 작은 마을에 ‘프레드의 생선가게’가 있었습니다. 이 식당을 운영하는 프레드는 음식솜씨가 아주 좋아서 생선으로 갖은 요리를 맛있게 만들어 팔고 있었습니다. 손님들은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프레드에게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게을렀던 것입니다. 그는 너무 게으르고 나태해서 식당을 청소도 하지 않고 방치한 채 더럽게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이 더러운 식당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식사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프레드의 식당이 더럽다는 소문이 사람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손님들은 점점 줄고 급기야는 식당 문을 닫아야 할 지경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식당을 다른 사람에게 팔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주인이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식당 분위기를 바꾸었습니다. 더러워진 식당 내부를 완전히 정리하고 청소하고 음악을 틀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식당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할 일도 없어진 프레드를 새 주인은 그의 음식 솜씨를 보고 주방장으로 그대로 쓰기로 했습니다. 모든 작업을 마치고 새 주인은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광고를 보고 한 사람, 두 사람 이 식당을 찾게 되었습니다. 다른 분위기, 깨끗한 식당 안에서 맛있는 생선요리를 맛보고 돌아간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이 식당은 다른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이 바뀌었데.”
이 소문은 금방 퍼지게 되었습니다. ‘프레드의 생선가게’는 다시 활기를 띄게 되었습니다.
포도밭 주인(막12:9), 동물들의 소유자(눅19:22, 마15:27), 청지기의 주인(눅16:3), 종들의 주인(엡6:5-6)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주인인줄 착각합니다. 만물에는 주인이 있는데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에게는 잠깐 맡겨진 청지기일 뿐입니다.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는 땅도 진실로 여러분의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도,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뿐이십니다.
혹 우리가 교회의 주인이 되어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물의 주인도, 교회의 주인도 우리가 아니고 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을 섬길 때 모든 문제들은 해결됩니다.

둘째, 주님은 모든 것의 주관자이십니다.
추수하는 주인(마9:38), 안식일의 주인(막2:28), 주의 날(요20:1, 행20:7, 고전16:2)의 주관자요 주인 되십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의 심판자시요 날의 주인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주일(부활일)은 예수님의 날입니다. 이 날은 온전히 예배하는 날이요 주님만을 위해서 필요한 날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성도의 주님이십니다.
성도들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롬12:11). 서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다 주님께 달렸습니다(롬14:14). 그러므로 주님께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고전11:27). 장차 오실 분도 주님이십니다(딤전4:15).
아버지 하나님도 한 분이시고 주님도 한 분이십니다(고전8:6). 우리는 이런 어마어마한 분을 우리의 주인으로 두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유일하게 주 kuriva/(퀴리아)가 여성형으로 나타나는 곳이 있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부녀’로 번역된 단어입니다. 이 유일한 용법은 요한이서 1, 5절에 나타납니다. 신부 된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교회들은 서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주앙교회도 중국의 00교회를 자매교회로 개척하고 후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예수님의 부활 후에 나타나신 장면에서 주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인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주 kuvriov”(퀴리오스)라는 용어가 이전에 나타난 주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롬10:9, 행2:36, 히2:6). 즉 사탄의 음부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승리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6)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7절에서 요한이 주시라는 말을 할 때 그는 바로 지체할 겨를도 없이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바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바다로 뛰어든 것입니다. 지금 배에 있는 고기 따위에는 미련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 예수님이 제자로 부를 때 이미 배에 가득한 고기와 배를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아왔던 제자입니다. 그가 사실 먼저 다른 제자들에게 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고 나갔었지만 이제 그곳에는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나면 이와 같아져야 합니다. 교회에만 나오지 주님을 아직도 못만 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고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주님이 잡아주셨지만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그 물고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우리 또한 주님을 알아보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 던져 버리고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베드로와 같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최후의 만찬과 그리스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43살 때 루도빈코(Ludovinco) 백작의 부탁을 받아 주님의 최후 만찬 석상의 모습을 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에 걸쳐 완성했습니다. 여기 저기 제자들이 앉아 있고 주님은 오른손을 뻗어서 잔을 쥐고 있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다빈치는 이 걸작품을 완성한 다음 백작에게 넘겨주기 전에 친구들에게 먼저 보여주면서 평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그림을 본 친구는 “훌륭해! 너무 훌륭해! 특히 저 잔이 사실적이어서 그 잔에서 내 눈을 떼어놓을 수가 없네”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친구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빈치는 붓을 들어 그 잔을 지워버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는지요.
혹 다른 곳에 우리의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마6:24절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한자에서는 왕(王)자 위에 점을 더 찍어서 왕보다 높은 것이 주(主)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왕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는 누구에게나 많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인은 한 분인 것입니다. 진돗개 같은 영리한 개는 평생에 주인을 세 번 이상은 바꾸지 않는다고 합니다.
혹 우리들은 주가 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아닌지요.
물질과 명예와 권세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있지는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아내가, 자식이 자신의 주인처럼 되어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주가 되어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모든 것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한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우리의 최우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