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진리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4. 나의 진리이신 예수님) / 본문 : 요8:31-47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참된 진리를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율법만을 따르던 유대인들은 그것만이 참 진리인줄 알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와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는 말씀 때문에 격론이 벌어집니다.
먼저 이 “진리”라는 말(단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사용된 단어는 ajlhvqeia(알레데이아) “숨기지 않음”으로 거짓, 죄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마22:16절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라고 한 것 외에 모두 요한복음과 바울이 기록한 서신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께 비아냥거리면서 책잡기 위해서 먼저 아부하는 말로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들은 모르고 사용했지만 사실이었습니다.
구약 시편에서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6-7)라고 함으로 진리가 무너진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는 율법으로 씻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고 했습니다.
“진리”에는 이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죄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뿐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이것은 곧 주님자신과 그의 말씀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31절에 보면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반대하던 유대인들이 아니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예수를 죽이고자 했으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40, 58절).
예수님의 자유케 한다는 이 말에 자신들이 남의 종이 되었고 그곳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요 8:33)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도 실상은 거짓임이 들어 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가 애굽에서 탈출할 때 애굽의 종 되었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마다 종살이를 시킨 적이 많이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바벨론 종살이에서 돌아온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완전한 독립국가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압제하에 있으면서 남의 종이 되었던 적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과대 평가하며 역사까지 왜곡하는 발언이며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유대인들의 자존심에서 나온 답변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의 자존심에 대해서 역사적인 관점은 뒤로하고 이들의 개인적인 죄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8:44-45)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들은 개인적인 죄를 회개를 하려고 들지 않고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과 같고 귀신들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믿고 따랐던 유대인들에게조차 이 말씀을 하심으로 돌로 치게 만들 정도로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건들이셨겠습니까? 그것은 곧 진리를 따르지 않으면 죄를 사할 수도 없으며 사람이 새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이 진리가 중요한지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1. 진리가 없이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양이나 비둘기를 잡아 희생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의 시대에는 바로 예수님의 진리 안에서 예배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한글성경에서 “진정”으로 번역된 단어는 본문의 “진리”와 같은 용어입니다). 예배하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여호와께 드렸는데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고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히브리서 11:4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나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서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믿음을 다르게 표현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우리가 죄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속에서 진리가 역사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아직 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내가 왜 죄인이냐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증거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마19:16-22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 그랬습니다. 자신의 죄는 그대로 있는데 무슨 선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와는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요4:1-26의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과 진리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자신은 죄인이었지만 진리에 대해서 알아들을 귀가 있었습니다.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죄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를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3. 진리만이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7-19)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에서 완전히 승리하시고 거룩하게 되셨습니다. 이 거룩함은 이 진리를 믿는 모든 사람도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의 상태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거룩한자입니다.

4. 예수님은 이 진리에 대해서 증거하러 오셨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요 18:37)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왕으로 왔다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왕이 아니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께서 진리를 증거 하러 오신 왕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속한 자라면 내 소리를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사랑에 대해서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진리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 있으면 그것이 불의 한 것일지라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험난한 세대에 다시 바울이 권면하는 것 같이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엡 6:14)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허리띠는 진리입니다. 진리가 있을 때 힘을 씁니다. 진리는 영원한 것이며 변하지 않습니다. 당장은 진리가 지는 것 같지만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진리는 반드시 드러납니다.

5. 진리는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가 심판을 가늠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2)

한국에 오셨던 선교사님 중에 크레인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안식년차 본국(미국)에 들어가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 마침 친구목사도 안식년이 되어 유럽에 가게되어 그 교회를 1년 동안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교인의 집에 엄청난 사건이 생겼습니다. 오랫동안 모아온 재산이 불타 없어졌고 아내가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아들은 캠프에 갔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믿지 못할 이 사건은 실제 있었습니다. 크레인목사는 장례식 설교를 해야하는데 어떻게 위로하고 설교를 해야될지 몰랐습니다. 상주의 오른쪽은 물에 빠져 죽은 아들의 시신이, 왼쪽에는 불에 타죽은 아내의 시신이 있었습니다. 한참을 망설인 크레인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미스씨 당신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선택은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했더니 잠시 후 스미스씨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나님을 선택하겠다고 했답니다. 이 자리에 있던 많은 조문객들은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제 진리를 선택하는 문제와 유대인처럼 예수를 돌로 치는 문제는 나에게 선택권 있습니다.
요한은 이 진리에 대해서 제일 많이 언급한 사도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였습니다. 이런 요한이 자신의 서신에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이 1:3)
,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요이 1:4),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1:3-4)고 했습니다. 아울러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요삼 1:8) 진리 안에서 행함이 있을 때에만 요한이 기뻐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기도해야 합니다. 만일 그 일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반대의 개념에서 불의인 것입니다. 모든 일을 흑백논리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분명한 것은 진리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름으로 하나님을 만나며, 거룩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