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7. 나의 해방자이신 예수님) / 본문 : 히 2:14-18

오늘은 486주년이 되는 종교 개혁주일 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노예나 마찬가지였던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가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스스로의 모순 속에 접어들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이 낳은 신학자요 천주교 신부였던 마틴 루터가 당시 천주교의 부패성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내걸고 어두워진 영적 암흑기 속에서 종교 개혁의 깃발을 든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때를 기념하여 드리는 주일예배(10월 마지막주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상태에 있는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는지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스스로 된 종’ 즉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종이란 의미는 “노예”를 말하는 것으로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된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만큼 종의 역사를 가진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것을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은 바로로부터 구출해 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가 곧 유대인의 역사를 만들어냈습니다. 하나님께 스스로 된 종 외에 정말로 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종은 사람 취급을 못 받습니다. 때로는 개나 짐승만도 못한 것이 종입니다. 그래서 종은 사고 팔 수 있는 사유재산으로 간주되었습니다(레25:44-46).
출애굽기 21장, 레위기 25장, 신명기 15장에는 노예에 관한 제도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대인에게 있어서 상전을 섬기는 종의 제도에 관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면 진짜 노예는 어떤 것입니까? 애굽에서 노예 생활할 때 그런 법이 있었겠습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노예생활을 할 때 그런 법이 통했겠습니까? 이런 혹독한 노예 생활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주님은 오신 것입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5)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가 노예가 됩니까?

1. 전쟁의 포로입니다.
성서시대 근동지방에서의 최초의 노예는 전쟁에서 졌을 때 한꺼번에 거의 모든 부족이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뿐만이 아니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 까지 모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적을 모두 죽여버렸는데 이에 비하면 노예로 삼는 것은 인도주의적으로 개선된 상태로 말했습니다(민31:7-35, 신20:10-18, 왕상20:39, 대하20:8-15).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대하36:20)고 했습니다. 죽일 것을 살려준 것이니 이들이 인간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노예가 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단에게 지면 사단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단은 우리를 죽여야 하는 것인데 잠시 살려둔 것뿐입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종으로 삼아 부려먹기 위함입니다. 이 얼마나 딱한 노릇입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런 비참한 것이 노예이며 종입니다.

2. 채무 노예입니다.
성서시대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어서 노예가 되는 주요 원인은 자신의 능력으로 빚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출21:2-4, 신15:12). 만일 도적질을 하다 걸리면 노예가 됩니다. 왜냐하면 물건을 훔쳤기 때문이 아니라 물건을 변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출22:2). 빚을 값기 위해서 노예가 된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아둘람 굴에서 다윗과 같이 합세한 사람들도 빚진 자들이었습니다(삼상22:2).
우리들은 하나님께 빚진 자들로서 하나님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가 값을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노예의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는데 출애굽기 21:32에 의하면 30세겔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은 30에 팔리셨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우리의 빗을 대신 값아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3)고 하셨습니다.

3. 상속된 노예입니다.
부모가 되어서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주고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일 비참한 것이 노예상속자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이 해결할 수 없기에 노예가 되어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노예는 상속되었습니다. 노예가 주인 소유이기 때문에 노예에게서 태어난 자식들 역시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후에 자유인이 되었을 때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출21:4, 레25:54).
이와 같이 우리가 죄에게 노예 된 것 역시 아담으로부터 상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고리를 끊으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적인 죄에 매여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8)고 하십니다. 이제 상황은 역전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 『지난 (2000년) 9월말 교황청은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유일한 전통성을 지닌 교회이며, 개신교의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라는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인 요제츠 라칭거 추기경이 발표한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Jesus) 이란 36쪽 분량의 선언문은 “성 베드로와 그의 영적인 교감을 가진 주교들에 의해 주도되는 카톨릭교회만이 유일한 참된 교회”라며 로마 카톨릭교회가 유일한 교회임을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베드로의 법통을 이어온 교황의 지위, 사제들에 의해 진행되는 성찬의식을 개신교회는 인정치 않고 있기에 개신교는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회가 아니라 “교회적 공동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교황청은 그동안 “자매교회”로 불러온 개신교를 “교회적 공동체”로 부르라는 지침을 각 국 카톨릭 주교회 의장들에게 내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답답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할 당시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 당시의 내용은 현재까지 대부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변했다고 하는 것도 그 중심에는 여전히 그런 정신이 남아있습니다.

1.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성경중심의 신앙, 성경중심의 삶을 사는 자가 되자는 운동이 종교개혁 운동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의 권위보다는 교권의 권위가 더 힘이 있고,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교황이 성경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성경은 뒷전으로 미루어 놓고 교권이 교리를 앞세워 별 이상한 짓을 다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속죄권 판매였습니다. 속죄권이란 1515년 교황 레오10세가 베드로 대 성당을 짓다가 자금이 모자라게 되자 교인들에게서 돈을 모으기 위하여 속죄권이라는 것을 팔았는데, 이 속죄권이란? 죄지은 사람이 죄 사함을 받으려면 돈을 내고 이것을 사야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엉터리지요. 또 이 속죄권만 사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주장하고 팔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믿고 현혹되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이 속죄권을 사게 되었고 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거액을 내고 종이 쪽지에 불과한 속죄표를 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없는 순전히 종교 사기꾼들의 엄청난 죄요, 신앙의 타락인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현상이 있는 것 같아 염려됩니다.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규모가 큰 교회인데 그곳에서 안수집사나 장로가 되려면 돈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직분을 받게되면 얼마를 헌금할 수 있는지 미리 써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사를 한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그리고 정말 이런 교회가 없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속죄권을 판 로마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한국교회가 회개할 일입니다.

2.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 질 수 있는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카톨릭의 교리는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있습니다. 또 자기의 고행으로 인해 의로워 질 수 있다고 믿고, 속죄권을 돈을 주고 사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괴롭히며 높은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올라갔다 내려오고 고행과 수행으로 의로워 지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기독교는 불교나 힌두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오늘날도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원주의 신앙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하신 말씀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H 대학에서 “사이버시대의 문화와 종교”라는 세미나를 하는데 저에게 기독교 쪽 발제를 맡아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가만히 보니 불교, 천주교 등에서 전문가라고 하는 분들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제가 단순히 학문적인 자리라고 생각하여 참여해도 그만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타종교 지도자들과 한자리에서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인데 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가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요? 저는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입장의 목사입니다. 결코 하나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고 했습니다.

3. 종교개혁은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마리아를 중보자로 믿고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마리아를 숭배하고 그 앞에 가서 기도합니다. 카톨릭의 이단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출생시키는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에 의해서 성령으로 된 일이지 마리아에게 어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마리아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할 여인일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리아는 성도에게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은 될지 몰라도 예배의 대상이나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예수님 보다 더 높이고 숭배하고 예배하는 이단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중간에 누구를 거쳐서 나가는 자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예수님이 친히 영원한 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휘장을 찢어 주시므로 이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이 말씀에 근거하여 만인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이라고 했는데 오늘날 우리를 종노릇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솔직히 말합시다. ‘돈’아닙니까? 그리고 또 솔직해 집시다. 그 돈 죽어서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 돈으로 천국을 살 수 있습니까? 잠시 이 땅에서 편안하게는 살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돈 많은 사람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닌지 모릅니다. 너무 많으면 그 돈 때문에 오히려 고민하고 많은 시간을 낭비합니다.

유대인들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어떤 유대인 노인이 세상 떠날 날이 가까이 옴을 알자 자신에게 있는 3만불을 어떻게 사용할까 걱정하다 유대인 선생인 랍비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1만불을 헌금을 하고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랍비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유대인 노인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천주교 신부를 찾아갔습니다. 내 비록 유대인이지만 신부님께 천국가기 위해서 기도 받기를 원합니다. 하고 1만불을 헌금하고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천주교 신부도 응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확신이 오지 않아서 더 안전하고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개신교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만불을 헌금하고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을 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현재에도 로마 카톨릭이 범했던 위험한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카톨릭처럼 조직화된 교회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제일먼저입니다. 성경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이 아니라 사람이나 교회 건물이나 선행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보다 앞서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었다면 오늘 우리도 개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러한 교회를 비판하면서도 진정 내 신앙은 그들의 모습을 닮고 있다면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21)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해방시켜준 이 고귀한 해방의 자유를 다른 것으로 막을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이러한 올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8. 나의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 / 본문 : 출12:13, 고전 5:7-8

“내가 애굽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5:7-8)

유월절(逾越节)의 ‘유월’이란 말은 원어의 ‘페사크’인데 영어로는 ‘패스 오버’(pass over), 즉 ‘넘어서 지나가다’는 뜻입니다. 이 절기는 니산월 10일에 처음 난 어린양을 골라 두었다가 14일 밤에 이것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15일부터 1주일 동안 누룩 없는 무교병을 먹습니다. 이 절기가 무교절입니다(출12:1,27, 레23:4-14, 민9:2-14, 신16:1-8). 그러니까 유월절과 무교절은 한 절기처럼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풍습은 세계 최고의 절기로 기억되어 남아 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3천년이나 지켜온 절기로 이렇게 오래 된 절기는 세계에서 유월절 외에는 없다고 합니다. 후에 유월절은 국가적 축제일로 공식 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설립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중에 20세 이상 된 남자는 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각 곳에서 모여들었습니다. 일년 내내 유월절에 가기 위하여 돈을 모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습관화되었습니다. 유월절에 참여하지 않는 유대인 남자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없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도 역시 가장 큰 절기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 중 제일 먼저 오는 절기로 유월절을 시작으로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로 이어집니다(출12:2).
유월절이 생겨난 것은 애굽 왕 바로가 9번째 흑암 재앙을 만나고 모세에게 양과 소 떼만 남겨 두고 다 가도 좋다는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짐승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모세를 쫓아내면서 다시 나타나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 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에 마지막 재앙을 내림으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내듯이 내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애굽의 모든 장자들과 생축의 처음 난 것들이 죽는 무서운 장자 재앙이 임할 것을 경고 하셨습니다. 9가지 재앙은 모세를 통해서 하셨는데 이번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하나님이 직접 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재앙은 이 마지막 재앙을 내리기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장자 재앙이 내릴 때에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통곡이 있을 것이라며 마지막으로 바로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번에도 듣지 않았습니다. 유월절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애굽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 찌라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 찌니라”(출12:13-14)
유월절은 애굽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진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을 잡아 피를 발랐습니다 천사가 그것을 보고 유월(넘어감)하였습니다.
유월절은 히브리어로 유월의 ‘페사크’는 ‘지나간다, 넘어간다’의 뜻도 있지만 ‘용서한다’는 의미도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피가 있는 집은 유월하신 것은 곧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나라 가운데 처음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 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1-13)
이 날의 밤은 무서운 밤이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장이 고조되는 긴 밤이었습니다. 장자가 있는 집들은! 아니 장자가 없는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신, 죽음의 그림자가 지나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문설주에 양의 피가 묻어 있으면 죽음의 그림자가 다음 집으로 넘어갑니다. 만일 양의 피가 묻어있지 않으면 그 집의 장자는 사람과 동물 모두 죽는 것입니다. 비록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있었다고 해도 뜬눈으로 밤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 날밤 애굽 전역 집집마다, 왕의 아들부터 종의 아들까지 장자는 모두 다 죽임을 당했으므로 집집마다 초상이 났습니다. 옆집에서 나는 죽음의 통곡의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으며 하나님의 심판이 피해간 것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했겠습니까? 어찌 이 날을 기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즉 생각이 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날이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세계최초, 최고의 절기가 된 것입니다.

둘째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유월절은 430년 간 노예 생활하던 애굽에서 해방된 감격의 날입니다. 유월절에 해방된 것이 아니고 해방된 날을 유월절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어린양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려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너희는 누룩없는 자인 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7)
우리 나라는 일제의 침략으로 36년의 치욕적인 강제 통치를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방 운동의 불씨를 집힌 3월 1일과 드디어 광복한 8.15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인 것입니다. 36년의 강제통치에서 해방된 것이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430년간입니다. 올해가 루터가 개혁한지 486주년 됩니다. 우리가 그 때를 지금 제대로 기억이나 합니까? 사실 전해들은 이야기로 약간 알고 있을 뿐 잘 모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은 이렇게 오랜 기간을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방된 기쁨의 날인 것입니다.

셋째 언약의 피입니다.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양을 취할 찌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의 식양을 따라서 너희 어린양을 계산할 것이며 너희 어린양은 흠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중에서 취하고 이달 십 사일까지 간직하였가다 해 질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묵을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12:3-7)
유월절 어린양은 가족의 수효에 따라 선택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피 흘려야 되는 양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일년 된 양, 가장 힘이 좋을 때 드려야 합니다. 가장 살이 찌고 완전할 때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씨와 힘을 상징하는 수컷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미리 선택한 양을 14일간 두었다가 저녁에 잡았습니다.
죠세프스에 의하면 14일 해질 때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간인 오후 3시에서 5시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시뻘겋게 발랐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집집마다 피 색깔이었습니다. 이 피는 바로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발라야 합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넷째 유월절은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에 먹을 음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밤에 그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12:8-11)
1)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무교병은 맛이 없는 떡입니다. 누룩을 넣어서 맛을 즐기며 먹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음식을 여유 있게 맛을 즐기면서 먹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살려고 먹는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무교병은 누룩이 없는 떡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누룩이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바울은 제안을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5:7-8)고 합니다. 복음 외에 다른 것은 누룩입니다. 너무 배부르면 사람들은 맛있는 것을 찾아 나섭니다. 오늘날의 복음도 자꾸만 다른 사상과 혼합되어 순수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재미있는 것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에게 누룩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2)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노예 시절을 회상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 당했던 고통을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교병과 쓴 나물을 7일간 먹었습니다.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이 쓴 나물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애굽노예생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3) 허리띠를 매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애굽을 출발할 때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그때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는 아침까지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가 급히 애굽을 빠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출12:22). 죄의 고통에서는 조금도 더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회개하는 것은 급히 해야할 일입니다.

다섯째 고백을 드립니다.
현재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에 행하는 가정예식을 ‘세다’라고 부릅니다 ‘세다’에서는 네 가지 질문이 어린아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이 질문은 “너는 그날에 네 아들에게 뵈어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인함이라”(출13:8)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이것을 가르쳐 이스라엘 대대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시키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의가 무엇입니까? 한자로 한번 써 볼까요? ‘(義)’는 어린양(羊) 밑에 내 아(我)가 있는 글자입니다. 내 머리 위에 양을 올려놓으면 의(義)가 되는 것입니다. 이 한자를 만든 사람은 옛날 유월절을 아는 유대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말한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는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을 일컬어 구약을 인용하여 말한 것입니다(시14:1). 그러나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고 했습니다. 의인은 많습니다. 누구입니까? 그리스도를 자신의 모든 것 위에 올려놓은 사람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진기한 물건 한 가지씩 갖고 있는 삼 형제 이야기가 있습니다.
형에겐 망원경, 둘째에겐 요술 담요, 셋째에겐 만병을 다스리는 사과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형은 망원경을 통해 왕의 담화문을 보았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공주를 낫게 해주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둘째가 즉시 요술 담요를 타고 삼 형제는 공주에게 갔고, 막내가 사과를 줌으로써 공주는 나았습니다. 누가 공주와 결혼했을까요? 막내였습니다. 첫째와 둘째의 물건은 그대로 있었으나 막내의 사과는 줌으로써 없어졌습니다. 왕은 이 ‘희생’을 택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속죄의 양으로 드려질 때는, 사도 요한에 의하면 유월절 첫 날이었습니다. 애굽의 탈출을 위해서는 어린양의 피 흘림과 문설주에 바른 것이 하나님의 재앙이 넘어갔다면, 이 세상의 끝 날에는 예수그리스도 어린양의 피의 공로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느냐 아니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 흘림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유월절 희생양이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