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처럼 가르치라

예수님의 생애(8. 예수님처럼 가르치라) / 누가복음 4:31-37

“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여러분들은 교회에 나오시면서 기도하시면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데 동의하십니까?
그렇다면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아동교육가들은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제든, 무엇이든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쉽게 손에 넣으면 인내나 노력이라는 소중한 정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자기 힘으로 성취해 나가는 기쁨을 모른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가진 아이는 양보를 모른다고 합니다. 이 말에는 동의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것에 먼저 ‘하나님의 뜻’이라면이 전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그 믿음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교육을 받아야 하고 교육을 시켜야합니다. 교회에 오셔서 잠깐 눈감았다 뜨고서 기도했다고 무엇이든지 다 되어있으면 여러분 우리는 망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가지고는 순교는커녕 작은 고난에도 이기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이 됩니다. 환난이 오면 쉽게 무너집니다. 포기합니다. 아이들도 ‘스스로 인내에 도전할 때 아이는 행복의 첫걸음을 내디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셔서 인내와 사랑, 그리고 이웃과 나눔에 대해서 배우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가르칠 수 있을까?
오늘 설교의 제목에 의아심을 품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님처럼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물음입니다. 그런 의구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본래부터 “죄가 없으셨으며”(요일 4:15, 히 4:15), “죄를 범치 않으셨으며”(벧전 2:22), “죄를 알지도 못하신”(고후 5:21)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아무도 “죄로 책잡을”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예수 님을 우리가 어떻게 따라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바로 예수님의 인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처음 이 땅에 보내실 때(초림)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보통의 사람과 같이 탄생하게 하시고 자라게 하셨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마지막 재림할 때처럼 공중에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천사를 대동하고 큰 나팔을 불고 하늘에게 직접 올리워 가실 때처럼 초림하셨다면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부정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바로 우리는 그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성장하셨고(눅 2:52), 피곤해 하셨으며(요 4:6), 배고픔을 느끼셨고 목말라 하셨습니다(요 4:7-8). 또한 주님도 유혹을 받으셨고(마 4:1-10, 눅 4:1-12, 히 4:15), 눈물을 흘리셨으며(요 11:35, 38), 분노와(막 3:5) 슬픔과(마 26:37-38) 기쁨과(요 15:11, 17:13) 죽음을(요 19:30) 경험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모습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 방식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지 예수님이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자신이 예수님처럼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을 넘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모든 일을 똑같이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성령 하나님이 직접 도와주시고 그분이 교사이기 때문에(요 14:26, 16:12-19, 고전 2:10-16) 우리의 부족함이 채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이 있지만 가르쳐야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내가 너희에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만 하시고 우리에게 교수법을 가르치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교사였는가?
예수님에 대한 호칭 중에서 두 개 이상의 복음서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28개가 있는데 그 중에 ‘예수님(615번)’, ‘주님(191번)’, ‘인자(80번)’, 그리고 네 번째로 많이 나타나는 단어가 ‘선생(70번)’ 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처럼 선생님이라고 많이 부른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한마디로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3-14)
여러분!
선생님이라는 말을 들으려면 무엇을 해야 됩니까?
가르쳐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기적만 베풀었으면 선생이라는 말보다는 ‘요술사’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선생이라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가르치다. 가르치심의 단어는 54번이나 나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에만 관심이 많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정말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초자연적인 이적을 보고 이분은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언제나 오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가난한 자의 모든 쓸 것을 공급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 26:1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요술사가 아니라 교육가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장소를 보면
‘회당’(마 4:23, 9:35, 13:54, 막 1:21, 6:2, 눅 4:15, 6:6, 13:10, 요 6:59, 18:20),
‘예루살렘 성전 뜰’(마 21:23, 26:55, 막 11:15, 17, 12:35, 14:49, 눅 19:47, 20:1, 21:37, 요 7:14, 28, 8:2, 20, 18:20),
‘집’(눅 5:17-18, 7:36-50),
‘마을이나 동네에서’(마 11:1, 막 6:6, 눅13:22)
‘야외에서’(산에서 마5:1-2), (호숫가의 배에서 막4:1, 눅 4:3), (거리에서 눅 13:26)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람들
서기관들(마 8:19-22, 눅 9:57-62, 막 2:6-10)
바리새인들(마 12:1-8, 19:3-9, 22:41-46, 눅 14:12-14)
대제사장과 장로들(마 21:23-46, 막 11:27-12:12, 눅 20:1-8)
사두개인들(마 22:23-32, 막12:18-27, 눅 20:27-44)
율법사(눅 10:25-37, 눅 11:45-53, 눅 14:1-6)
세례요한의 제자들(마 9:16, 11:2-6)
제자들(마 17:19-20, 막 9:14-29, 눅 10:1-20)
회당장(눅 13:14-17)
여인들(눅 10:38-42, 눅 11:27-28)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때와 장소, 대상을 가리지 아니하시고 기회만 있으면 가르치셨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가르치다보면 선생님이 이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가르치지 않으면서 선생이라는 말을 듣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정말로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하라!

질문과 대화
예수님이 하신 질문은 복음서에 모두 304개 나옵니다. 이중에 겹치는 것을 빼고도 225개의 다른 질문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토록 많은 질문을 던지신 것은 가르치신 내용이나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대화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사실과 반대되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동의를 얻기 위해서, 잘못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등입니다.
그러나 결코 사단하고는 대화하지 않는 예수님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도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질문을 많이 하신다는 것은 그만큼 대화를 많이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부부간에도 많은 대화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내 주장은 강하게 하는데 대화하는데 익숙하지가 못합니다. 대놓고 화내는 것이 대화가 아닙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대화입니다. 예수님이 질문을 많이 하셨다는 것은 대화하기를 좋아하신다는 뜻입니다. 요즘말로하면 상담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가셨다는 뜻입니다. 대화는 일방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상대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장난감을 자녀의 동의 없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하면 교육이 안됩니다. 어쩔 수 없이 장난감을 버려야 한다면 아이에게 직접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사주고 쉽게 버리면 그 아이는 물건의 소중함을 모를 것입니다.

확실함
본문 “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교육은 “아마”라든지 “그럴 것이다” 혹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등의 불확실한 상상적인 이야기는 없습니다. 언제나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와 같이 명확히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지도자인 랍비나 서기관, 율법연구가들은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라든지 “랍비는 이렇게 말했고, 율법과 예언가들은 이런 말을 했다”였습니다. 즉 오랜 전통으로부터 내려오는 방법이고 이것을 잘 할수록 많은 학식이 있는 선생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에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 1:27)고 했습니다.

겸손
거만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칭송과 찬양을 받으려 했던 율법학자들과 랍비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겸손을 보여주셨고 그것을 명하셨습니다.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2-14)곻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직접 오신 목적에 대해서도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과는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지적하신 후,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1-13)라고 하셨습니다.

일관성
우리(한국)의 교육은 이 문제를 일찍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바닷가의 ‘계’에 대한 비유를 잘 사용합니다. 자신은 옆으로 가면서 자식들에게 ‘앞을 보고 똑바로 가라’고 해야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만 됩니다. 학생들에게, 자식에게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한참을 그 이유의 타당성을 이야기하고 정작 자신이 담배를 피우면 학생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목사가 어려운 것은 말하는 것, 설교하는 것만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말한 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으로만 선교하는 것은 무의미 합니다. 그저 큰 교회의 단점을 자격지심에서 꼬집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내가, 우리교회가 바르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말한 대로 실천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조금도 모순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요 14:6)라고 말씀하시고 진리로 사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고(마 5:43-48) 자신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자신이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지키시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정신은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인다”고 어거스틴은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사랑과 고난에 대해서 말씀만을 하시고 자신이 그와 같이 살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이 모두 순교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선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모습대로 우리도 본을 받는 것이고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종적인 교육인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도 인류 역사상 제일 위대한 이 교육 대열에 참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