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시기를 구하는 거라사인 사람들

예수님의 생애(13. 떠나시기를 구하는 거라사인 사람들) / 눅 8:26-39

“26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35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 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이번 주 토요일이 한글날입니다. 한글을 잘 연구해보면 우리 민족의 모든 비밀이 들어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는 ‘죽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첫 마디가 ‘피곤해서 죽겠다’입니다. 좋아도 죽겠다고 하고 슬퍼도 죽겠다고 합니다. ‘우스워 죽겠고, 재미있어 죽겠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심지어는 죽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계도 죽고, 불도 죽고, 맛도 죽는다고 합니다.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얼마나 살고 싶었으면 ‘죽겠다’라는 말이 이렇게 변화되었겠습니까? 솔직히 이 말은 진짜 죽고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죽도록 살고싶다’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했습니다. 여러분! 진짜 살고 싶으시면 나는 죽고 예수가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기막힌 사람하나가 나옵니다.

그리스도가 찾아간 마을의 불안
본문 27절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이 사건이 당시에 잘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에 공동복음에 모두 기록되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5 고 소개했으며 마태복음 8장 28절에서는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귀신들린 사람 때문에 거라사 지역의 불안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귀신들린 이 사람은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할뿐만 아니라 이 지경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여러 번 사람들은 이 사람을 묶어두기도 했었고, 쇠사슬까지 동원했었지만 그것도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길을 가로막고 있을 때는 지나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사라에게 들어간 귀신은 예수님이 이 귀신을 내어 좇기 위해서 “내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셨을 때 “군대라”(30절)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군대의 단위는 군단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600여명이 최소인원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최소 600개 이상의 귀신이 들어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귀신이 하나만 들어와도 사람은 제정신을 못 차립니다. 그런데 600개가 넘는 귀신이 한사람 몸 속에 있으니 이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군대귀신이 들린 이 사람 때문에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거라사 지역에 도착하시자 바로 이 사람을 만나십니다. 성경은 이 사람을 아무도 제어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이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문제의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님은 만나십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능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학의 존재와 더불어 생각할 때는 상당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맨손으로 3m웅덩이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 나오기 어렵습니다. 군대 귀신들린 사람의 문제는 사람이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들의 근심과 불안은 더 커져만 갑니다. 무엇인가에 제한이나 제재를 받지 않는 것은 고삐 풀어진 소처럼 됩니다. 바로 귀신들린 사람과 마찬가지 상태가 됩니다. 얼마 전 영국에서는 사고로 죽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의 육체를 또 다른 사고로 몸이 다 망가진 사람에게 이식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것은 공감하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의 육체로 바뀐다는 것은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이제 육체와 정신(머리)를 합쳐놓아 또 다른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과학의 능력을 억제하지 못하면 귀신들린 사람처럼 이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불안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문제에 접근하셨습니다. 그리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인간의 윤리 도덕을 푸는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는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
어린이들이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되는 것은 교육의 문제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막아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과 살아보지 않은 아이들은 예의를 모릅니다. 거라사가 있는 데가볼리 지역은 여러 민족과 종교들이 갈릴리나 유대 지역에 비해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몰아내실 때 귀신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32-33절). 이 돼지 떼는 비탈길로 내리달려 호수에 빠져죽었습니다. 귀신들이 한 마리씩 돼지에게 들어갔는지 여럿이 한 마리에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많은 돼지가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돼지가 아깝고 돼지 주인에게 허락도 없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서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아무리 많은 돼지보다 한 사람의 생명이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돼지는 부정한 동물로 사육하는 일은 유대인에게 금지되어있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레11:7-8).
돼지를 사육한 것은 공공연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돼지는 불결한 짐승이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도 돼지와 가까이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데가볼리지역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들의 신앙은 금지된 일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변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하는데 왜 나만해서는 안 되느냐는 생각입니다. 데가볼리 지역은 이방 풍습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란 예루살렘이나 유대지방 보다는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더 어려운 환경이라고 해서 이해하시고 봐 주십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정신차려야 합니다. “어떤 교인을 보니까?, 어떤 집사 보니까?, 어떤 목사도 하는데, 다른 사람 다 하는데”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큰일납니다. 그분들 지옥가면 따라 갈 겁니까?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남들이 다 한다고 해서 안될 하나님의 금지된 명령을 따라하지 맙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기보다는 쉽게 주위의 사람들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가 삶의 영역에 관여하면 싫어합니다.
솔직하게 오늘 말해 봅시다. 그리스도가 찾아오심으로 이익을 볼 때는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과 관계되어 손해를 끼치면 싫어합니다. 데가볼리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주인, 우리 시간의 주인, 우리 관계의 주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주님의 제자인척 하는 사람은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주인이 되는 것은 싫어합니다. 자기 멋대로 하면서 ‘주님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재산에 손해를 입히셨다면 그것은 더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해를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마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많은 사람이 떠날 것입니다. 정신차립시다. 지금 이 세상의 문제 때문에 영원을 영혼을 버리시면 안됩니다.
제가 일본에 갔을 때 어떤 한인교회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얼른 보아도 보통 여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었는데 밤에 일하러 나가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말하기 곤란합니다. 그분들의 삶이 전적으로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생활이 되려면 그 직업을, 하던 일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밤에는 나가 죄를 짓고, 교회에 나와서는 헌금을 많이 드리며 순한 어린양처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분들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은 아직까지 주님에게 굴복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비슷한 경우의 상담을 한 스크로지(Graham Scroggie)목사가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이 여인에게 성경을 펴들고 성경이 지시하는 대로하자고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사도행전 10장 베드로의 환상 부분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늘에서 커다란 보자기가 내려왔고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소리가 났는데 “일어나 잡아 먹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때 스코로지 목사가 말하기를 이 말에 모순이 있습니다. “주여!”라는 말과 “그럴 수 없나이다”라는 말은 함께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단어 중에 하나를 지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둘 중에 하나를 지울 것을 일러주었습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떠났다 돌아왔을 때 이 여인은 성경 책 앞에 머리를 푹 숙이고 “그럴 수 없나이다”에 줄을 그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못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주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추방
37절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이 말씀을 솔직히 표현하면 ‘이 동네에서 나가라’입니다. 그들에게 문제거리엿던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어 멀쩡하게 만들어 주었는데도 이들은 예수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습니다. 이제 귀신들린 이 사람이 고침을 받았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더 이상 길을 갈 때 떨며 마음을 조아리지 않아도 됩니다. 걱정거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예수님이 떠나가실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 이유는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입니다. 그들이 진짜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귀신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에 개입하시는 예수님입니다. 한사람이 귀신들렸다는 것은 조금 불편할 수 있지만 자신들의 이익은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의 영혼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한 처사입니다.
윌리암 기븐 2세는
‘이기심이 지나치면, 당신을 위해 일할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다.
바로 당신. 그러나 만일 당신이 문제점을 지닌 허다한 사람을 도와준다면,
당신을 위해 일할 사람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금문교(Golden Gate Bridge)라는 아름다운 다리가 있습니다. 엷은 구름에 쌓인 다리를 보면 대단히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를 찾는 관광객들은 으레 금문교 다리를 찾아가 본답니다.
그런데 그 다리에서 해마다 투신자살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1964년에는 한국 청년 한 사람이 투신 자살을 했습니다. 그곳의 신문들이 자살한 청년의 신분을 비교적 자세히 밝힌바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미국에 유학을 와서 힘든 공부를 마치고 영주권을 획득하여 부동산업에 종사하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집도 마련했고 돈도 있을 만큼 있었으며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자살을 해야만 했을까?
그의 주머니에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그 유서에 자살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 이유인즉 사랑하는 여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애인은 학생이었습니다. 가난한 학생인지라 그 청년이 애인의 학비를 다 대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졸업을 하자마자 그 청년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택했기에 세상이 모두 그를 버렸다고 생각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세상에 흔히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참고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청년이 자기 중심의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청년의 행위는 모두가 자기 중심이었습니다. 애인에게 학비를 대어줄 때도 자기중심이었고, 자기를 고이 길러 유학까지 보내주신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도 잊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지방을 떠나십니다. 그들이 원치 않았기 때문에 떠나십니다. 그러나 이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의 아들 구주가 아닙니까? 그들이 원하지 않은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결정이었습니까? 말로다 설명할 수 없는 비극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사마리와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바쁘신 예수님을 붙잡고 오히려 더 계시다가 갈 것을 권해 이틀을 거기서 계셨습니다(요 4:39-42).

한 가닥 희망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거라사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쫓아냈지만 희망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 명의 증인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사람은 귀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동네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가실 것을 말했지만 이 사람만은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를 간구 했습니다. 희망은 누구입니까? 귀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귀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군대 귀신은 들리지 않았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온갖 종류의 귀신이 들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거라사지방에 완전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지역의 희망은 바로 귀신 들렸다 고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제일 문제였던 사람이 이제는 제일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이렇게 변합니다. 제일 골치 거리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 됩니다. 세상 사람이 방법이 없습니다. 손을 델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을 예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귀신 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했습니다.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귀신들렸던 자가 복음을 전하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저는 주앙교회 성도님들만 보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성장하실 수가 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마 여러분도 속에 들어가 보면 예수님이 아니면 이렇게 되지 않으셨겠지요?
저도 말할 것 없습니다. 저는 중학교에 다니면서 이미 타락했습니다. 소주 두 병을 중2때 마셨습니다. 그 때 다방이라는 것을 알아 가지고 들락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마담누나들이 이뻐 하니까 자주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예수님 안 만났으면 뭐가 되었을지 한심하다못해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이 귀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주님 앞에 섰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이지요. 따라합시다.
정말(참) 다행입니다.
정말(참) 잘되었습니다.
정말(참) 감사합니다. -박수한번 칩시다.-
모두가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여기에 남겨둔 것은 다시 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오시지 않을 것이면 이 사람을 데리고 가셨을 것입니다. 여기에 남겨둔 목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곳에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이곳에 남겨두신 것입니다. 오시지 않을 것이면 모두 데려가셨을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지역을 한번 더 통과하셨는데 마15장에 막7장에 나옵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나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데가볼리 지방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지금, 사마리아 지역에서는 우물가에 나왔던 여자와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