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길

예수님의 생애(15. 제자의 길) / 마 8:18-22, 눅 9:57-62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오늘 설교는 아무 교회에서나 아무에게나 편하게 할 수 있는 설교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즉 수준이 아주 높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앙교회는 모두가 예수의 제자되는 교회이어야 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오늘 말씀을 전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세 부류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장 15절에 보면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명이나 되더라.” 11장 24절에 보면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리”란 초대교회 당시,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는 참석한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신자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에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4장 32절에는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5장 14절에는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믿는 사람’이란 ‘신자’를 말합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확실히 믿고 신앙고백하는 신앙 인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험과 고통 중에서도 신앙의 변화가 없이 꾸준하게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보다 더 좋은 신앙인이 바로 세 번째 부류인 ‘제자’입니다. ‘제자’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예수와 동거동락하며,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으며, 예수와 함께 그의 영광에도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며 예수님을 위해서 희생할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부르사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능력과 권세도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막3;13-15).
신약성경에서는 “제자”라는 명사가 265번, “제자가 된다”는 동사가 25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제자’라는 말은 헬라 원문에 ’마데테스‘라고 합니다. 이것은 ’배우는 자’ 또는 ‘같은 방향으로 가면서 같이 행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께 나오는 사람들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필요에 따라 나오는 사람입니다. 병고침, 베고픔, 출세를 위해서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만일 자신이 아프지 않거나 배고프지 않으면 주님께 나오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미 출세했기 때문에 교회에 나올 필요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출세하지 못했지만 교회에 나오면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하지 못한 것을 보상받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예전에 한번 ‘완장’이라는 드라마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자신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떻게 해서 완장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완장에 자부심을 가지고 큰 벼슬한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주번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주번을 하면 완장을 찹니다. 어린 마음에 그 완장이 대단히 자부심을 느끼게 하고 통제하려고 합니다. 공산당의 당 간부들은 붉은 완장을 찹니다. 그 완장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봉사하는 봉사의 완장이라는 의미보다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권위의 완장입니다. 겉에 보이는 완장만 차지 않았지 교회에 나오면서 이러한 완장을 찬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주앙교회야 개척 1년 된 작은 교회이기 때문에 이런 분들이 없습니다만 우리 스스로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둘째, 주님이 인기가 있기 때문에 따라가려는 사람들입니다. 18절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그랬습니다. 지금 주님의 인기는 매우 높습니다. 본문 8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8장에서만 예수님이 고쳐주신 사람은 ① 2-4절 문둥병자를 고쳐 주었습니다. ② 5-13절 백부장의 간청으로 그의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주었습니다. ③ 14-15절 베드로의 장모 열병을 고쳐주었습니다. ④ 16절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한마디로 지금 예수님의 인기는 절정입니다. 함께 따라다니던 제자들의 어깨는 상당히 우쭐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 나온 사람 둘이 있습니다. 물론 밀고 댕기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서기관’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1절에 “제자 중에 또 하나가”라고 소개됩니다. 이로 보아 ‘서기관’으로 소개된 이 사람 역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공관복음에서 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가 처음에 나온 “제자”이고 본문이 두 번째 “제자”라고 나타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제자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예수님으로부터 충분한 가르침을 받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오늘 본문과 같이 이제부터 가르치시는 과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즉 성숙된 믿음이나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지금 쫓으라
이 서기관은 예수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좇으리이다’ 원문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어디로 가시는 중이든지’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모두 현재형입니다. 과거에 믿었던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 다음에 믿을 것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미리 믿어 가지고 그 오랜 시간 교회에 다니면서 시간 없애고 돈 없애고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참 머리가 좋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생각을 가지고 돌아온다 해도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믿음이란 그렇게 계산적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믿음의 현재형은 과거와 미래를 담보한 현재형입니다.
“좇으리이다”의 ajkolouqhvsw(아콜루데오)는 ‘따르다, 닮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인기 절정이기 때문에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이 제자는 상당히 흥분되어 있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가 한 고백은 잘못은 아니지만 상당히 자기 도취에 빠져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에게 제자가 되어 따라 가야하는 참 길을 설명하십니다.

모 대학교수가 [한국 기독교인의 의식구조]라는 논문을 썼습니다. 특별히 사회학적 측면에서 연구 조사한 것을 발표했습니다. 이 중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느냐”라는 질문에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나누어 조사를 했습니다. 긍정적인 면에서는 착하다. 선하다. 진실하다, 상냥하다, 친밀감이 간다. 성실하다, 친절하다 등이며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교회에 출석을 강요해서 싫다. 말이 많다. 위선적이다. 잘난척한다. 자기 도취에 빠져 있다 등입니다. 특히 여기서 말이 많다라는 뜻은 정말 말이 많다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말이 있는 만큼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행위가 있고 말이 많으면 말 많다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행위가 없으면 자연히 말만 남게 되고, 그러니까 말이 많다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차대전 때 일본군은 태국 콰이강에 다리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동남아를 모두 점령하려는 전략 가운데 가장 큰 계획으로 군사와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영국군 포로를 이용, 콰이강의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군은 중요한 장비를 잃어버렸습니다. 일본군은 영국 포로들이 조직적으로 작업을 방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로들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놓고 총부리를 들이대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장비를 숨긴 자는 자수하라. 만일 셋을 셀 때까지 자수하지 않으면 모두가 총살이다. 하나, 둘… 셋”을 외치려는 순간 한 병사가 앞으로 나서며 “내가 숨겼습니다.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순간 즉석에서 총성이 울리고 그 포로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일본군 창고에서 그 장비가 발견되었습니다. 일본군이 그곳에 잘 간수해놓고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구하지 말라
서기관이었던 제자의 고백에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는 말씀으로 대답을 대신하셨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대답으로 제자 되는 것을 거절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절한 것으로 굳힐만한 다른 증거는 없습니다.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가져야 될 자기 부정, 희생, 봉사, 고난 등을 깨우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우의 굴이나 새의 거처는 잠시 지낼 처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처소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사정은 같았습니다. 그분의 일생이 이 땅에서는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오병이어 같은 기적이나 물로 포도주 만드신 기적, 그렇게 많은 병자를 고치셨으면 얼마든지 집 한 채나, 서당 같은 것을 만들어 ‘가말리엘’보다 유대 랍비들의 집보다는 더 나은 것을 준비하실 수 있었을 텐데… 서점에 가보면 10억 만들기, 10년 안에 집 마련하기 등 부동산 관련 책들이 많습니다. 아마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생활은 그야말로 실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 이것만이 예수님이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안식처나 부귀 영화를 위해서, 인기를 얻으시려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욕심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할 것과 영원한 천국을 위해서 때로는 고난과 죽음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세상의 잣대로 성공과 실패로 구분하는 지상의 물질 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이 기뻐하는 교회라면 다시 한번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젊은이 둘이서 깊은 시내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건너가는 도중 한 청년이 다리 밑을 보니까 강물이 소용돌이를 치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을 자꾸 내려다보면 그 청년이,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것을 본 다른 친구가 그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위를 봐! 하늘을 봐!”
그렇습니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은 여러 장벽을 바라보면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을 것 같지마는 위를 바라보고 믿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제자의 우선 순위
21절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두 번째 제자가 부탁했습니다. 자식으로서의 ‘효’와 예수님을 따르는 문제에 대해서 우선 순위를 혼동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전도여행 가시는데 이 제자의 집에 부친이 죽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연로한 아버지를 모시다 그가 죽으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인지의 의미는 문명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부모를 모시는 것은 제5계명에 근거하고 있습니다(출 20:12, 신27:16). 부모를 공양해야 하는 것이나 죽어서 장례에 참석해야 하는 것은 모두 최고 급선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경우이든지 복음전도 사역보다 우선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 유교에서는 국가의 충신이나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을 똑같이 보았습니다. 그만큼 효를 강조한 대목입니다. 하지만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공무원이나 군인은 부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나라의 급한 일이 있으면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을 충신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어찌 한 나라에 충성하는 것보다 못하겠습니까?
오늘날은 학생이 영어를 배운다면 영어만 배우면 그만입니다. 선생의 성품이나 가정생활 또는 그 분의 철학을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영어만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선생과 학생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랍비와 제자와의 관계에서는 독본이 따로 없으며 그 랍비의 무엇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랍비 자신 전체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랍비와 제자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배우고, 따르고, 순종하고, 절대 수락하고, 절대 신뢰하고 절대 신앙하는 것이 제자였습니다. 이 뜻의 좋은 격언으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에서 보여 주십니다. “너희는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여기서 말하는 멍에는 죄짐을 의미하거나 매고 어려운 세상에서 사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멍에는 내가 당하는 모든 일, 내가지는 십자가 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뜻입니다. 내 운명과 같이 가면서 나와 같이 가면서 나와 같이 보조를 맞추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어느 골방에서 명상이나 하며 책이나 참고하면서 예수를 배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멍에를 매고 나와 함께 가면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 따르면서, 본받으면서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학자 존 네이스빗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