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룩을 조심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29. 누룩을 조심하라) / 마 16:11-12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어느 날 염소는 주인에게 귀여움을 받는 나귀를 질투하며 계책을 꾸몄습니다. “얘, 나귀야 ! 우리 주인은 온종일 너를 부려먹기 위해 겉으로만 아껴주는 척하는 거야. 내일 네 등에 짐을 싣고 개천을 건널 때 일부러 넘어져 보면 너를 미워하고 무거운 짐을 다시는 싣지 않을 테니까?”
열심히 일만 하던 나귀는 그만 염소의 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나귀의 다리는 많이 다쳤고 귀한 짐들이 물에 젖었지만 주인은 급히 수의사를 불러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치료를 마친 수의사는 당분간 나귀에게 일을 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염소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자신이 주인에게 신임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수의사는 “나귀의 다리가 빨리 낫기 위해서는 염소의 간을 내어 먹이고 그 피를 마시게 하면 됩니다”라는 말을 농부에게 하고는 가 버렸습니다. 나귀를 아끼던 농부는 할 수 없이 염소를 잡아 간과 그 피를 나귀에게 먹였습니다. 이 모습을 오늘 말씀을 전하게 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제일 많은 세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들의 잘못을 마태복음 3:7에서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책망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아무 증거도 없이 이런 독설을 퍼부었겠습니까? 이미 이들은 누가 보아도 자기들의 배만 부르려고 하고 자기들의 위신만 중요하지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멀어져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 고와와 객을 돌보지는 않고 오히려 그들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온 세상은 고사하고 유대인들에게조차도 빛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최대 방해꾼으로 등장합니다. 우리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새인처럼 사두개인처럼 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형식적인 율법주의자요, 전통주의자로 자기 힘으로 이룬 의를 강조했습니다. 이들의 의식과 유전은 위선적이며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마침내 영적 무지와 죽음을 초래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제일 큰 적대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수 없는 기적과 이적들, 그리고 말씀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고 오직 반대만을 일삼았습니다.
마 9:34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마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막 7: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 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끝까지 부딪히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도(이적과 기적), 말씀으로도 예수님께 상대가 안되었습니다. 이런 부류가 택하는 것은 솔직히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너무 깊이 관여되어 있는 관계로 그곳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택한 것은 예수님을 죽여야겠다는 것입니다.
마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모든 것을 예수를 모함하고 죽이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바르게 보려고 하는 자세가 없습니다. 자기들의 안경을 끼고 예수를 보는 것입니다.

사두개인
모세 오경만 인정하고 부활과 영생과 사후의 영원세계 및 귀신의 실제를 거부하는 현세주의, 이성주의, 자유주의, 기복주의적 이론가들입니다. 사도행전 23:8절에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마 22:23절에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하셨는데 이 대답으로(마22:24-34) 이들은 놀라고 있었습니다. 이 때 짜기라도 한 듯 바리새인들이 다시 의기 양양하여 예수님께 나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마 22:34) 그리고 계명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우리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되지 않으려면
1. 잘못을 인정하면 됩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시작하면 일이 자꾸만 꼬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낀 것입니다.
잘못 인정하기 그렇게 싫을까요?
초등학교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쉬는 시간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교실을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남자아이들 몇이 신발을 신은 채 책상 위에 올라가 이리저리 뛰고 난리입니다. 혼 좀 내려고 “자, 책상 위에 올라간 사람 앞으로 나와”했더니 한 학생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교실 안은 갑자기 조용해지고 놀던 아이들도 급히 제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얼른 나오지 않고 뭣해. 선생님도 몇 사람 봤는데.”
그래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어허 참, 옆반 아이들이 와서 그랬나?”
아이들이 나오면 꾸짖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며 들여보내려고 했는데 아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안되겠다 싶어, 아이들 이름을 불렀습니다.
“정진영, 너 책상 위에 올라갔잖아!”하자, 진영이는 오히려 화를 냅니다. “저만 그랬나요, 뭐.”
“물론 너만 그런 건 아니지만, 네가 책상 위에 올라간 건 맞지.”
진영이는 “으이구, 쟤도 그랬단 말예요”하며 다른 아이를 가리킵니다. 이 아이들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한 아이가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 댁엔 놀러 갔습니다. 그 아이는 새총놀이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아이가 쏜 총이 병아리의 급소를 명중시켜 죽인 것입니다. 당황한 아이는 부랴부랴 죽은 병아리를 땅에 묻었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웃집 아이가 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 일 이후로 그 아이는 이웃집 아이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야만 했습니다. 무척 괴로운 나날이었습니다. 참다 못한 아이는 외할머니께 자기가 한 일을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할머니는 기꺼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아이는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죄책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모두 아뢰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라는 말씀은 연약한 우리들에게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전통과 유전을 우선하면 안됩니다.
그것을 모두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유전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우선될 수 없습니다. 우선 순위를 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먼저 따라야 합니다.
전통의 좋은 점이 있지마는 전통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는 것도 많이 있어요. 또는 전통이 우리로 하여금 가리키려고 했던 진정한 본질 그 본질에 다가서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 요인으로 종종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배드리는 순서와 심지어는 교회의 모습 같은 것까지도 전통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3. 영생과 부활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영의 세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천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사두개인의 모순 점은 모세 오경을 보는데 있습니다. 즉 모세 오경에도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까지 인정하지 않는다면 성경에서 남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을 알았으면(집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싶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 10:28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바리새파로부터 벗어난 두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마가복음 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공회원’이라는 것은 당시 산헤드린공의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회는 이스라엘의 최고 기구입니다. 로마 속국이었지만 이 회의에서 모든 일을 결정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그 전날 밤에 예수의 재판이 이루어졌을 때 없었습니다. 너무나 급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회가 공식적으로 가동되지 않고 졸속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아리마대”에 사는 “요셉”을 말하는 것으로 그가 이곳 예루살렘으로부터 먼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리마대”의 뜻은 “높이 있음”입니다. 이 지대가 높은 곳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서북 32km 지점 현재의 벨라(Shephelah) 지방 구릉지대에 있는 렌티스(Rentis)입니다. 다른 대부분의 회원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달려올 수 있었지만 요셉은 “아리마대”로부터 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잡히심과 재판, 처형소식을 듣고 빨리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형이 끝난 뒤에 도착한 것입니다. 요셉은 목숨을 걸었습니다. 빌라도에게 당당히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집안의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냅니다. 분명히 당시의 산헤드린공의회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아리마대 사람 요셉만큼은 그 깊고 깊은 수렁과 같은 제사장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소굴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저는 역사상 제일 소신 있는 사람을 뽑으라면 아리매대 요셉을 선택하겠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빌립보서 3:5절에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말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26:5절에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리새파가 “가장 엄한 파”라고 소개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데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던 바울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는지 아십니까? 사도행전 8:3절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했습니다. “잔멸”은 교회를 아주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의 개처럼 충성을 다 바치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것도 교회의 성도들을 대제사장에게 고발하고 믿음을 방해하려고 일러바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행 9:4) 하면서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한마디에 그는 고꾸라졌습니다. 이후로는 그가 더 이상 사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바리새파였을 때는 큰 자라고 자처했지만 예수께 돌아와서는 스스로 “작은 자”라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사울”이 아닌 “바울”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완전히 바리새파로부터 빠져 나왔습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청년으로부터 신앙상담을 했던 내용입니다.
이 청년이 시골 보건소에 내려갔는데 이곳에 계신 분들이 약값에서 그리고 다른 행정을 이상하게 하고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입의 얼마를 이 청년에게도 주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부정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갓 내려간 이 청년이 거절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뇌물인지? 공돈인지를 받지 않으면 그 조직으로부터 자기는 왕따를 당할뿐더러 계속해서 그곳에서 근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너무 결백한 척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요즈음은 설교도 그저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식으로 해야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결단을 내립시다. 가만히 있다보면 우리 또한 똑같은 바리새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들의 교훈을 쫓아가는 것은 모두가 누룩입니다.

오래 전에 한 여객 열차가 뉴욕으로 가던 중 다른 열차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고가 났었습니다. 그 사고로 5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당시의 열차 운행은 기차역에서 무슨 표를 받아 가지고 출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열차 조종사도 심한 부상을 당해 죽었는데 죽기 전에 그는 노란 종이 하나를 손에 쥐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된 명령인 이 노란 티켓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사고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잘못된 표하나가 열차를 충돌시키고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잘못된 교훈이 사람을 영원히 죽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다른 곳에도 도덕적인, 윤리적인, 어느 정도의 교훈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말이나 이론들이 예수님께 가는 길을 막고 있다면 그 또한 누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예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