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있는 눈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0. 복이 있는 눈) / 눅 10:21-24

“21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저는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 빈혈이 좀 있습니다. 중학교 때 점심시간에 조회를 했는데 햇빛에 오래 서 있다가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청년 때는 서울역에서 헌혈하다가 얼굴이 하야케 변하고 현기증이 나서 간호사들이 놀란 적이 있어 그 이후부터 헌혈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2년 전에 치과를 갈 때 겁이 나서 집사람 손잡고 갔습니다. 40넘은 사람이 부인 손잡고 치과에 오니까 의사 선생님이 여자였는데 쳐다 보시더라구요. 누구 손잡고 온 사람 있나 보니까 아이들이 엄마 손잡고 왔더라 구요. 아니나 다를 까 병원냄새 나고 속이 울렁울렁 하다가 얼굴이 하얘지고 화장실이 가고 싶더라구요.
제가 이렇게 된 데는 체질도 문제가 있겠지만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도 영향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보아서는 안될 충격적인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었을 때 저희 집 앞에 경춘선 기차가 다니는데 그 뒤쪽에 마을이 있어 사람들이 철길을 넘어 다녔습니다. 그 철길로 할아버지가 건너가시다가 기차가 오는 것을 다 피하지 못하고 한쪽 다리를 기차바퀴에 치이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까이 에서 목격한 것입니다. 발목이 다리에서 거의 잘라져 질질 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본 후로 몇 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 현기증이 났습니다.
저는 지금도 영화에서 끔찍한 장면이 나오면 바로 채널을 돌립니다. 대부분 이런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살인하는 장면이라든가 남에게 상해를 입히는 장면들은 모두 봐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영화가 있었잖아요. 이 영화 나올 때 모방범죄나 유사사건이 생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실제로 모방범죄가 생겼습니다. 외국의 사례에서도 영화를 흉내내는 사건들이 많이 나옵니다. 모두가 보지 않아야 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거나 볼 수 있다고 다 보는 것은 복이 아니라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된 것 만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최고의 것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사람은
주님은 본문 21절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과 “어린 아이들”이 대조되었습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습니다.”
지혜와 슬기는 주님이 다른 곳에서 말씀하실 때는 좋은 것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마 7:24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막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눅 21: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그리고 마 25: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혜와 슬기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 숨겼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위에서 말한 본문의 뜻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율법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높은 학문이 신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만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이미 오래된 생각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지혜로운 현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위경 제4 에스라 12:35-38).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들에게는 나타내셨습니다.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적 지식은 부족하지만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영국의 사상가 콜린스(J. A. Collins)가 어느 날 교회에 가다가 가난한 일꾼을 만나 나눈 이야기입니다. 콜린스는 ‘이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 보자’라고 생각하고 대화한 것입니다.
콜리스 ‘어디를 가십니까?’
일꾼 ‘교회에 갑니다’
콜린스 ‘당신의 하나님은 크신 분입니까? 작은 분입니까?’
일꾼 웃으면서 ‘하나님께선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온 우주를 품어 주시지요. 그러나 제 가슴에 머무르실 수 있을 만큼 작은 분이시기도 합니다.’
후에 콜린스는 그 어떠한 사상집도 이 가난한 일꾼의 말이 준 감명을 따르지 못했다‘라고 술회했습니다.

아버지를 알려줘야 합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무엇이든 알려주어야 아는 것입니다.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독도를 ‘다케시마’이며 자기네 땅이라고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제 우리도 알려야 합니다. 알리지 않으면 지는 것입니다. 일제는 36년 동안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많은 일본말을 남겨놓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깊은지 우리는 아직 까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말을 합니다.
‘삐까번쩍’ – ‘삐까삐까’로 번쩍번쩍이며 ‘쎄쎄쎄’ – ‘쎄쎄쎄’로 놀이동작을 말합니다.
‘싹쓸이’ – ‘쓰리’는 소매치기 이며 ‘아싸리’ -‘앗싸리’는 깨끗하게입니다.
‘쿠사리’ – ‘쿠사리’ 쇠사슬을 말하고 ‘몸빼’ – ‘몬뻬’ 여자 작업용 바지를 말합니다.
‘무대포’ -‘무떼뽀우’는 막무가내를 말하는 것이며 ‘요이땅’ – ‘요이땅’ 요이는 준비이며 ‘땅’은 총이 없을 때 총소리를 흉내낸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일제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우리가 모르는 것들입니다. 속히 버려야 할 말들입니다. 무엇이든 누군가가 알려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알려주신 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을 알려주신 것만이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신 분입니다.
본문 22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하셨습니다.
흔히 제일 알다가도 모를 사이를 부부사이로 말합니다. 그래서 부부문제는 “부부만 안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부모는 우리를 키워주면서 우리 또한 부모와 같게 교육되고 환경에 적응되어 살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부는 다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다가 만났기 때문에 많은 것이 다릅니다. 그러나 부부도 오래 살다보면 닮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닮지 않는 점도 있겠지요. 이것은 서로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똑같이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르면 다른 대로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는 우리가 다 모릅니다. 부부의 문제도 다 알 수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문제를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모릅니다. 주님이 알려 주셨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에게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닭장에서 병아리들이 함께 커 가는데 한 마리가 다른 닭들과 색깔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을 날아가는 독수리를 보았습니다. 당당하고 멋있게 날아가는 그 모습이 너무도 부러웠습니다. 자신은 날수도 없는 닭이며 그것도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닭이 아니라 독수리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한 소년이 장난으로 독수리 알을 꺼내어 닭장에 넣었기 때문에 독수리로 자라지 못하고 닭처럼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어미 새가 길러주지 않으면, 가르쳐 주지 않았으면 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려주고 가르쳐주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롬 10:14-15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복이 있는 눈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주님을 보고있는 제자들은 확실하게 복 받은 눈임에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보는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었던 선지자들(다니엘, 호세아, 아모스, 요나, 미가 등)이 보지 못한 분입니다. 그리고 왕들(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아 등)이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자들이 보고 있으니 이들이 얼마나 복 받은 것입니까. 구약의 선지자나 왕들은 메시야를 보지 못했고 복음의 선포를 듣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보았습니다.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들도 제자들과 같이 복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복음을 다 보고 있지 않습니까?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었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소리를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제일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진정 복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알려주시고 가능하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2절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계시를 받는 자”는 원문의 ‘아포칼륌토’로 “덮개를 제거하다, 나타내다, 밝히다”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바울이 회개하기 전 ‘사울’일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은 제자들을 잡아죽이려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도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다메섹으로 갈 때 홀연히 하나님이 비추는 빛을 보았습니다. 이 빛을 보고 그는 눈이 멀어 사람들에 의해서 직가라는 거리의 유다집으로 옮겨졌습니다. 4일 동안이나 앞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했습니다. 그 때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환상으로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그는 주의 제자들과 믿는 사람을 잡아가려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주님이 일러주신 명령이 부당하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행 9:15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음성을 들은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대로 사울에게 가서 안수했습니다. 바로 그 때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눈에 있던 덮개가 제거된 것입니다. 본문 22절과 같이 아들(주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즉 눈의 덮개를 제거하여 하나님을 보게 한 것입니다.
예전의 눈하고는 다릅니다.
예전에는 주님을 따르는 부활을 믿는 주님의 제자들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는 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눈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눈의 덮개를 제거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일만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남위에 군림할 수 있을까? 명예와 욕심이 가득합니다. 그것만 보입니다. 주님이 우리 눈의 덮개를 제거해 주시기 원합니다. 그 때 우리는 아버지를 보게됩니다. 이 눈이 복이 있는 눈입니다. 아멘.

미국의 한 사업가가 호텔에서 방을 구하려 했으나 호텔이 만원이라 거절당하고 낙망하여 걸음을 옮기는데, 어떤 신사가 그에게 “지금은 어딜가나 방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니 자기와 동숙하자”라고 했습니다. 사업가는 안도의 숨을 쉬고 감사한 마음으로 동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을 제공한 그 신사가 자기 전에 열심히 기도를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자기와 사업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더랍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신사는 먼저 성경을 읽더니 또 열심히 기도하더랍니다. 그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헤어질 때 명함을 주고받았습니다. 신사의 명함에는 ‘윌리엄 제임스 오브라이엔’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해서 사업가는 그 신사에게 “국무장관의 이름과 똑같군요.”라고 했더니 그 신사는 겸손히 “네, 같은 인물입니다.”하더랍니다. 후에 사업가는 회상하기를 ‘나의 삶에 제일 큰 변화를 준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옛날 청교도들이 퓨리탄들이, 믿지 아니하시는 분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할 때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과 지금 우리가 제일 많이 쓰는 ‘예수 믿으세요 그리고 구원 받으세요’ 우리가 이런 말을 제일 많이 쓰겠죠? 그런데 청교도들이 전도할 때 쓴 말 가운데 이런 말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한번 따라서 해보세요. 사람이 두 번 태어나면 한번만 죽고요, 한번만 태어나시면 두 번 죽어요. 청교도들이 그렇게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두 번째 사망, 제2의 사망을 가리키고 있어요. 두 번째 사망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어떻게 쓰여있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21장 8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여기 무슨 단어가 나왔습니까? 둘째 사망, 둘째 사망, 거기다 줄쳐 놓으세요. 둘째 사망.

예수님 믿지 않는 분들은 죽으면 끝난다고 합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죽고 또 죽습니다. 그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그러나 두 번 태어난 사람,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한 사람들은 두 번 죽지 않습니다. 대신 두 번 태어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