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장애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2. 예수님과 장애인) / 요 9:1-7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미국의 한 보험회사가 100명의 젊은이가 65세에 이르렀을 때 어떤 형편에 놓이게 되는지에 대해 조사하였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1. 이미 죽은 사람(36명)
2. 가난하게 살며 가족, 친구 또는 정부의 원조를 받고 사는 사람(54명)
3. 일을 그대로 하고 있는 사람(5명)
4. 남부럽지 않게 사는 사람(4명)
5. 성공적 삶을 살고 있는 사람(1명)
모두 성공지향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성공의 문은 100대 1의 좁은 문이었습니다.
이 통계는 성공으로만 보자면 100:1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미국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 54명의 절반이 넘는 사람이 정부의 원조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애인 그러면 선천적 장애인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장애인 가운데 선천적 장애인으로 진단되는 사람은 장애인 전부 가운데 6%-10%에 불과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6%-10% 범주 안에 장애인들이 있어요. 이게 선천적 장애인지 후천적 장애인지 그 진단이 불가능한 확률이 10%정도라고 합니다. 나머지 80%는 다 후천적 장애인들입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는 인구의 10%이상은 장애인이란 것을 아십니까? 우리나라 인구가 5000만이라면 우리 나라에 장애인이 얼마나 될까요? 500만이 장애인이라는 통계입니다.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장애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저는 장애인 문제를 함께 나누기 앞서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고 장애인 후보라는 사실입니다. 장애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은 피할 수 없이 장애인의 운명을 살아가고 나하고는 상관없다는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예비 장애인이고 장애인 후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교통사고로 인해 해마다 4만여 명이 넘는 사람이 장애를 입고, 산업재해로 3만 여명, 각종 질병 및 의료사고로 인해 3만 여명, 그리고 기능 장애를 수반한 기형아 출산율이 2.7%로 매년 2만여 명이 넘는 기형아가 출산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각종 대형 참사로 인한 장애발생이 더해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렇게 더해지는 장애인은 매년 10만 여명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군대의 1개 사단병력이 1-2만 명으로 이루어집니다. 적어도 1년에 5개 사단에 해당하는 인원이 정상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장애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체적 장애인만을 장애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정신적 장애가 더 문제입니다. UN장애인 권리 선언에 보니까 장애인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장애인이란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신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원인으로 자기 자신의 힘으로 홀로 서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선천적 원인이든 후천적 원인이든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삶을 유지하기 어려운 장애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이미 우리 가족 중에 장애가 있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애인은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곧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장애를 함께 극복해 가지 않으면 우리의 삶을 올바로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장애를 극복하려면

1. 장애는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본문 2절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이면 누구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이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죄가 없이는 장애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출 20:5, 민 14:18, 례 16:15). 바로 이 죄의 결과로 장애가 생겼다는 편견 때문에 장애인을 소홀히 대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욥의 경우를 보면 자신의 죄 때문에 병이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세 친구들은 죄에 대한 보응이라고 강변했습니다.
신약에 바울의 경우는 하나님이 자고 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눈에 질병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세 번 기도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응답은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장애가 죄의 결과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본문 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중에 장애인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더 교만해 질 것입니다. 장애인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아울러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분들에게 빗진 자라는 것입니다.

2.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제자들을 가르치신 시간들을 뺀다면 거의 모든 시간이 어떻게 활용하셨는지 아십니까? 한마디로 장애인과 함께 보내신 것입니다. 장애인을 위해서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태 세리의 집에서 식사할 때, 바리새인들이 보고 너희 선생이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이 소리를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막 2:17, 눅 5:31)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병든자와 함께 지내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장애인들을 위해서 오셨다면 우리 역시 그분들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먼저 장애인에게 붙여진 그 타이틀, 그 편견의 타이틀을 우리가 먼저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깊은 편견은 먼저 언어 자체에 대한 여과 없는 전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빨리 버려야 할 언어들 가운데 병신 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저도 팔이 부러져 초등학교 때는 한 팔을 기부스하고 다시 내리면 다른 팔이 또 부러져 기부스하고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기부스를 너무 많이 하다보니 늘 친구들로부터 ‘팔 병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지냈습니다. 심지어 한국 문화재 가운데는 병신춤이라는 문화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뿌리깊은 문화적 편견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번역학자들은 우리가 새로운 시대에 이 성경을 다시 번역한다면 성경의 언어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소경이란 말 대신에 어떤 말을 써야 합니까? 시각장애인입니다. 시각 장애인이 어색하기 때문에 새 번역 성경에는 ‘눈먼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성경이 바로 번역되어 새롭게 나왔는데 우리가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보는 성경은 ‘개역한글성경’으로 1962년 판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와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대답한 본문이 마태복음 11:5절입니다. 이 본문을 ‘개역한글성경(1962)’과 ‘표준새벅역’(1993)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개역한글성경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표준새번역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저 또한 병신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저도 회개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남을 향해 돌 던진 한번 있습니다. 제가 살던 마석에, 지금은 성생농장에서 성생가구단지로 바뀌었는데 예전에 이곳에 나환자촌입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하고 이 곳을 지나다가 나환자촌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문둥병자라며 돌을 집어던지고 도망간 일이 있습니다. 그 때는 그분들이 무서웠습니다. 또 시골에서 소문이 어린아이 간을 빼먹으면 그 환자들이 낫기 때문에 어린이간을 빼먹는다는 헛소문까지 들었던 터라 필사적으로 돌을 던지며 도망간 일이 있습니다.

3. 장애에 대한 모세 오경의 오해
우리는 모세 오경의 창세기를 제외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보면 상처가 난 환자, 나환자 등을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구약의 사상에서 유대인은 장애에 대한 편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기록할 때 왜 그러한 기록이 필요했는가 라는 상황을 철저하게 면밀하게 연구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 당시의 이런 상황이 특별히 200만 명에 가까운 수많은 집단이 집단으로 광야에서 이동하고 있었던 상황 속에서 이 교훈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먼저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환자를 지속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거할 목적이지 사실은 그 사람 자신을 제거할 목적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군집된 공동생활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 그것이 어떤 전염병으로 발전할 우려 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일시적으로 격리하는 어떤 제도를 만든 것이지 사람 자체를 제거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에 보호가 필요한 분들을 위해서 이런 명령들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레위기 19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19:9절부터 읽겠습니다. 레위기 19장9절 이하의 말씀은 광야 생활과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종의 사회정의의 규례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가나한 자들에 관해서 연약한 자들에 관해서 장애인들에 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접근해야 하겠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주목할 만한 말씀들입니다. 9절 이하를 보시면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추수를 할 때 반드시 넉넉하도록 추수의 이삭들을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기 위해서 항상 그것을 남겨두라고 말씀하십니다. 10절에도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 하나님이 얼마나 가난한 사람, 또 나그네, 외국인은 자연히 편견 속에서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애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나그네, 장애인 이런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매우 균형 있게 연구하던 성경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의 이런 사람들에 관해 편애를 갖고 있는 듯이 보여진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슴이고 심정이예요. 11절 이하에서는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 다음에 정말 함께 주목하고 싶은 말씀은 사실은 14절입니다. 레위기 19:14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우리가 장애인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구약성경 안에서도 이미 밝혀놓았다는 말씀을 우리는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였던 격리의 일시적인 현상은 그 죄를 초래하는 원인을 격리시키려는 하나님의 마음이지 사람 그 자체를 격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장애인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을 넘어서야 됩니다.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편견을 넘어설 때 우리는 좀 더 자유롭게 당당하게 장애인 이웃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줄을 믿습니다.

4. 예수님처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가끔 안타까운 뉴스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려고 할 때 그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 학생이 한 학교나 반에서 공부하려고 할 때 부모님들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자기 집 값 떨어진다고 반대하고 아이들 교육에 방해받는다고 생각해서 대모 하는 분들 정말 사람도 아닙니다.
제가 한번은 약간 말이 불편한 자매와 지하철을 타고 갔는데 서로 말을 하는데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예요. 그 자매는 말을 하려면 몸을 약간 비틀면서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말을 했거든요. 그 사람들이 왜 쳐다보는지 아십니까? 이런 장면을 많이 보지 않아서 그럽니다. 처음에 외국인들이 거리를 지나다니면 사람들이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쳐다보지 않습니다.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주 대하고 함께하다보면 익숙해집니다.
어떤 장애인 문제 연구소를 보니까 장애인들이 제일 크게 느끼는 불편이 뭐냐 하면 세 가지 제일 큰 불편 가운데 육체적인 불편은 맨 마지막이었습니다.
첫째 불편이 경제적 빈곤입니다. 장애인이 되면 동시에 경제적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돼요. 저는 정의로운 사회는 약자가 보호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의 발생은 개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상당히 사회적 책임이 큽니다. 우리 사회가 이런 산업재해를 발생시키고 그리고 교통 시설도 그렇고 그렇다면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교회도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두 번째가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소외감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된다는 소외감.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 그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중의 한 사람, 식구 중의 한 사람, 우리 지체 중의 한 사람이 되는 것. 주님은 교회를 설명할 때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 부분의 지체라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 눈먼 장애가 있는 한 분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물론 이분 입장에서 보면 더 큰 선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렇게 장애가 있는 분들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장애가 있는 분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건강을 주신 것은 장애인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필요한 분들과 나누어 쓰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