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사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9. 십자가의 사랑) / 본문 : 마가복음 15:22-37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자가에 못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 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없음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33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미국 프로풋볼 슈퍼스타 한국계 미국인 하인스 워드의 방한으로 “혼혈인”에 대해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나라가 작아서 인지, 아니면 언론의 힘 덕분인지, 그도 아니면 민족성 때문인지 늘 우리 나라는 온 민족이 관심을 가지는 화두가 있습니다. 아마 또 그런 것을 만들어 내야 사는 재미를 느끼는 민족성이 있나 봅니다. 하인스 워드는 어머니와 조용한 한국의 정취를 느끼고 싶은가 본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니니까 곤란한가 봅니다. 우리는 너무 성공신화주의입니다. 하인스 워드로 인해 혼혈인에 대한 편견과 법적 제도를 개선해 보려는 것은 좋으나 하인스 워드가 없었으면 언제까지 사람 차별할 겁니까? 혼혈인 만 문제입니까? 아파트 담장 하나 놓고도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윌리엄 보더스는 ‘Handyman of the Lord(주님의 종)’이라는 책에서 가난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간 한 흑인 남자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남부에 있는 한 저택에 벨을 눌렀습니다. 그는 “뒷문 쪽으로 와 보라”는 말을 듣고 먹을 것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저택의 주인 남자가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선 식사 기도부터 하시오. 자 나를 따라 말해 보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굶주린 흑인이 따라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 집주인이 말합니다. “틀렸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러나 흑인은 완강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 지친 나머지 주인이 물었습니다. ”어째서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데 당신은 계속해서 ‘당신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게요?“ 흑인 남자가 대답하기를 ”내가 만일 ‘우리 아버지’라고 말한다면 당신과 나는 형제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빵 한 조각을 주겠다고 형제를 뒷문으로 오라고 하는 사람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와 동일한 분일 리가 없으니까요.“ 우리는 한 하나님, 한 분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가능해 진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그것을 대하는 심적 거리의 원근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십자가란 객관적인 이해에 의해서 보다도 체험적인 경험에 의해서 체득될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멀리서 볼 때 십자가란 결코 흠모할 만한 것도 사랑할 만한 것도 못됩니다. 오히려 흉하고 부끄럽고 멸시와 조롱의 대상밖에 되지를 못합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사형하는 형틀이기에 아무도 그것을 정면으로 쳐다보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도 그런 흉측스런 죽음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찌그러진 초막집도 오래 살면 정이 들어 그곳을 떠날 때는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지만 그 훌륭한 양옥집도 형무소만은 두 번 쳐다보기 싫다는 것이 형무소생활을 마치고 나오는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형무소 안의 사형장이나 형틀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도 현대의 사형은 그다지 잔인하지는 않습니다. 전기 의자나, 총살이나 교수형이라 할지라도 형장까지 끌려 갈 동안에만 심적 고통이 크지 막상 죽을 때의 육체적 고통은 순간적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산 사람을 못 박아서 세워놓고 몇 시간 동안 또는 며칠을 고통 가운데서 죽어가게 하는 참으로 잔인하고 참혹하기 짝이 없는 형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이런 흉악한 십자가를 좋아하고 정면으로 바라보려 하겠습니까?
십자가형은 도저히 살려 둘 수 없는 흉악범이나 반역자들만을 처형하는 극형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달리는 사람은 세상에 그 얼굴을 내놓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사람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그의 가문을 더럽히는 사람이요 그의 자녀들까지도 감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부끄러운 대상이었습니다. 만일 자기 아버지나 또는 가까운 친척이 그 형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가장 큰 수치요 모욕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형을 받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멀리서 그 사형수를 보고 멸시하면서 욕설을 퍼붙는 것이 상례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몹쓸 인간의 하나이기에 그렇게 모욕당하는 것이 마땅하며 멸시 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지나가는 자들이 예수를 모욕해서 말하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했으며 제사장과 서기관들도 희롱하기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강도들도 예수를 향해 비웃어 말하기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면서 모욕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가까이 갈수록 영상이 달라집니다. 예수라고 하는 특정한 분이 거기에서 처형된 후 십자가는 새로운 의미를 띠고 우리 앞에 다가서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싹 그 밑에 가서 쳐다보면 그 십자가는 그렇게 보기 흉하고 부끄럽고 멸시와 조롱의 십자가가 아니라 대속의 십자가요, 사죄의 십자가요, 사랑과 화해의 십자가입니다.
못 박힌 손과 발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로마 병사가 창으로 찌른 옆구리에서는 물과 피가 쏟아질 때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부르짖는 예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의 극형은 자기의 죄 값을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에 누구를 원망하거나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지금 이처럼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절규하는 이 분은 누구이기에 하나님이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 분이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극형을 받기에 합당한 살인강도, 반역죄, 이적행위 등의 그 무서운 죄들을 언제 어디서 그가 지었단 말인가요? 그러한 죄를 지었다면 어찌 하나님을 향하여 그와 같은 당돌한 호소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와 같은 의문은 필연적으로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는 어떤 분인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는 천상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고 그는 가난하고 짓눌리고 병든 마을 사람들을 돌보신 분, 그에게는 아무런 죄도 아무런 잘못도 없으신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분이 살려 둘 수 없는 무서운 죄인이 되어 십자가의 극형을 받아야 했습니까?” 다시 질문은 계속됩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외쳤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자로 간주되어졌습니다. 그의 형벌은 그의 죄 값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아무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특수한 저주와 고통을 예수께 내리신 것입니다(갈 3:13). 그래서 그는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 호소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바 되어 그 고통스런 극형을 받아야만 했고 그 고통과 저주를 받아야 했습니까? 그것은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 없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우리의 양심은 꿈틀거립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죄인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양심은 나를 향해 외칩니다. 멀리서 바라보며 그 십자가가 흉하고 부끄럽고 멸시할 만하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너무도 자신을 의로운 사람으로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자신에 대하여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의 십자가 밑에 바싹 다가서서 쳐다보는 십자가 위의 예수는 내 죄의 심판을 대신 받고 저주와 고통을 그가 담당하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 때 신실하고 예민한 양심은 부르짖습니다. “주여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무죄하신 예수가 내 대신 극형을 당하시고 심판을 받은 줄 알면서도 모른 체 하고 슬그머니 그 밑에서 빠져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매여 달려 죄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 우리는 냉담했던 내 심령이 갈기갈기 찢기며 주와 함께 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히 “제가 죽어야 할 죄인입니다”라고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이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용서의 은총을 경험한 바울은 로마서 8장 1절 이하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범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의 대속적 죽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는 풀리고 무서운 죄가 용서를 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얼굴을 쳐들어 하나님의 자비하신 얼굴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나와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단절의 벽이 무너지고 우리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런 신분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두려움과 고통은 사라지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 새로운 삶의 환희와 용기가 내 마음속에 타오릅니다. 입술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격의 찬송이 끝일 줄을 모르고 눈에서는 미워하고 저주하던 원수들마저 나의 사랑하는 형제로 보여지는 화해의 즐거운 눈물이 흐르게 되며 나의 손과 발은 가난하고 억울하며 고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수고의 봉사를 아끼지 않으려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구속된 성도들을 자기 도취의 자리에 남겨 두시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폐쇄적, 자기 목적적 이용물이 아닙니다. 이제 주님은 명령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고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이 명령에 누구도 항거할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사죄의 은총만 입고 도망해 갈 천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상 위에서 사죄를 받고 죽은 강도도 그 동료에게 예수를 증거하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십자가를 몸소 지고 나서야 합니다. 십자가는 이 때 가장 가까이 우리 몸에 밀착됩니다. 나와 십자가와의 거리는 완전히 없어집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란 결코 안일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전에 멀리서 바라보며 모독하던 그 멸시를 나 자신이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이제 두렵지를 않습니다. 조그만 고통에 못 견디어 십자가를 벗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큰 감격이 나의 전체를 사로잡습니다. 이 때 십자가는 헌신과 승리와 영광의 십자가로 변합니다. 이미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예수를 쳐다보고 믿음으로 그 십자가를 붙들며 예수와 함께 죄를 못박아 버린 후 과거의 자기에서 죽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 안에 사심으로 사는 것입니다(갈 2:20). 따라서 사죄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로마서 14장 7절 이하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오직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게 하려는 그것입니다.” 이제 나는 간 곳이 없고 구속한 주만 보입니다. 우리를 어떤 박해나 어떤 시련도 넘어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해서 무려 250년간이나 끊임없이 박해의 바람은 불었으나 십자가는 넘어지지 않았으며 도리어 십자가가 로마제국을 완전히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나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총구를 들이대고 칼날을 번쩍이었으나 십자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패망의 웅덩이를 판 것은 저들 자신이었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십자가를 향한 바람은 불어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말은 “십자가는 영원히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그 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이기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삶이나 천사나 주관자들이나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십자가의 수욕과 고통은 곧 승리를 통하여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그 모든 싸움이 그치고 하나님 나라에의 부름을 입는 날 우리는 주 예수와 함께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지고 매맞음과 옥에 갇힘과 굶주림과 헐벗음의 고난을 당했으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고 있으나 속 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시적인 가벼운 환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큰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오기 때문입니다”(고후 4:16-17)
아! 이 얼마나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사람의 영광스런 소망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중에 아직도 멀리서 십자가를 바라보고만 서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제 대속의 십자가 밑으로 바싹 다가가서 사죄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몸소 지고서 이 세상 삶 속으로 뛰어들어 보십시오. 분명히 승리와 영광은 내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을 쓴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28세 때에 국가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영하 50도나 되는 추운 겨울날, 그는 사형 받기 위하여 기둥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형집행 시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시계를 쳐다보니 사형집행까지는 정확히 5분이 남았습니다. 이 천금같은 5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그는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5분이라는 시간 가운데 2분은 자신을 찾아준 귀중한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데에 쓰고, 2분은 자신이 살아온 28년 동안의 생을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쓰고, 마지막 남은 1분은 이 아름다운 세상, 이 대자연을 휘둘러보는 데에 쓰기로 합니다. 계획한대로 2분 동안 친구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3분이 남았습니다. 이제 그는 지나온 생을 회고하려고 합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나는 3분 후에 어디로 갈 것인가’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순간적으로 돌이켜보는 28년의 생이 모두 후회스럽고 뉘우쳐지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혼미해지고 아찔해집니다. 설상가상으로 형리가 총에 탄환을 장착하는 소리가 철커덕하고 들려옵니다. 불현듯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오면서 온몸이 가눌 수 없게 떨립니다. 바로 그 순간, 난데없이 떠들썩한 소리가 나더니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면서 형장으로 달려 들어왔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총살형 대신 시베리아 유형을 보내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던 것입니다. 그는 시베리아로 가 유형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는 늘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졌던 5분간을 생각함으로 시간을 금쪽 같이 아끼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경험으로 훌륭한 작품도 많이 남길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빼째르부르그에 갔을 때에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무덤을 찾아보고 그 앞에서 시간의 소중함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