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5. 예수님의 비유(23)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본문 : 마 25:14-30(23)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저는 어려서부터 이상한 아이였습니다. 어르신들이 볼 때 이상한 행동을 아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저희 집은 작은 오두막집이었는데 뒤에는 다른 집이 있고 깍아진 언덕이 있었습니다. 집 앞에도 내리막이 있고 구렁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것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하여 주변의 돌들을 모아 쌓았습니다. 그러니까 집에만 가면 돌을 모아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새벽에 나가 밤새 떨어진 밤을 주워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아무도 모르게 구덩이를 파 놓고 그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모으기를 잘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방법은 다르지만 컴퓨터에다 선교정보를 모으고, 말씀을 정리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저의 이런 면을 보면 부모님이 자녀를 잘 관찰하면 어려서부터 달란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이 묻어 두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 듯 오늘 본문이 이해가 안됩니다. 어쩌면 저에게 맡기셨다고 해도 묻어두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많은 내용을 공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 글이 조금 부족한 것이라고 해도 공유함으로 유익하다면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어 많은 글들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하신 이 비유가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혼자 가지고 있다가 하드디스크 깨지고, 분실하고 나면 나 자신도 자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주는 것이 남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달란트(talent)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지만 본문의 달란트는 신약시대의 화폐단위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나 미국의 ‘$’와 같은 말입니다.
주인이 집을 잠시 떠나 외국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종들에게는 단순히 집을 잘 지키라는 명령 외에 여덟 달란트를 세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주인을 종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에게 합당한 분량을 준 것입니다. 종들을 단순히 자신의 사업에 이용하려 한 것이 아니라, 사업의 동업자로 생각한 것입니다. 주인은 그만큼 종들을 믿고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두 번째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세 번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15절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따라”라는 말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적절한 이익배당을 약속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일종의 종들은 동업을 통한 이익배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얼마 후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은 장사하여 배로 남겼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배로 남겼는지 흔히 오늘날로 말하면 그 비법을 더 설명해 주셔야 하는데 그냥 배로 남겼다고 만 했으니 더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말씀을 해 주고 계십니다.
달란트를 활용한 두 사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모습을 다시 봅시다.
16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17절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바로 가서”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두 종들은 자신이 맡은 소유에 대해서 즉시 또는 재빨리 그 소유를 사용하기 위해서 어떤 일에 착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기에 맡겨진 사명과 일에 대해서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지체 없이 그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마 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중에 천천히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2:8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이 다음에 만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즉시, 지금, 빨리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다음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즉시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에게 주인은 26절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하셨는데 “게으른”(ojknhrev:오크네오)은 “지체하다, 머묻거리다, 망설이다”라는 뜻입니다. 주인에게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또 한가지는 “그것으로 … 남겼으되”입니다.
주인이 준 달란트로 남긴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나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주고 간 것입니다. 종은 남길 수는 있지만 그것을 창조적으로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잘못된 사람들의 착각은 그것이 자신의 것인 줄 안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왜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가 어렵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선 오늘 이익을 남긴 두 사람의 경우 부자의 경우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20절, 22절에 “주여 내게 … 주셨는데”라고 말합니다. 소유의 출처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겼지만 감긴 것까지도 주인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욥 1:21) 하면서 찬양했습니다.
우리는 달란트의 비유에 대해서 이윤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윤 그 자체에 있지 않음을 아셔야 합니다.
21절과 23절은 본문이 일치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의 관심사가 이윤을 많이 남기거나 적게 남기는데 있지 않고 주어진 여건 하에서 성실히 노력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는 주님의 이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eu’(유)는 “well, 좋은”을 말합니다. 헬라어의 이 부사는 종의 지난날에 대한 주인의 아낌없는 인정과 신뢰를 보내는 말입니다.
이어서 주인은 “착하고”(ajgaqov”:아가도스)라고 칭찬하십니다. 이 단어는 마가복음 10장 17-18절에서 예수께서 길 가 실 때에 한 사람이 달려와 예수님께 ‘선한 선생이여’라고 말합니다. 이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고 하셨습니다. 이런 단어가 두 종들에게 주인이 친히 사용하셨다는 것은 대단한 칭찬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충성된”(pistov”:피스티스)는 “충실한, 믿을만한, 의지가 되는, 확신하는”의 뜻입니다. 이들이 왜 충성된 자들인지는 “작은 일에”있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자에 비해서 배 이상을 받았습니다. 사실 엄청나게 많은 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작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에게 주신 것, 그 모든 것은 우리의 기준으로 크다, 작다 이지 주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충성한 종에가 두 가지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입니다. 이 부분은 현세적이라기 보다는 내세적인 것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회계 이후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것”은 단순히 물질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많은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주인과 종의 사이에 두터운 신뢰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의 “즐거움”(carav:카라)는 열처녀의 비유에서와 같이 신랑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이 단어는 ‘은은한 기쁨’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큰 기쁨으로 마 2:10에서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내면적인기쁨 샘솟는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달란트를 묻어둔 한 사람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장사하지 않고 그냥 땅속에 묻어두었습니다. 이 종이 이렇게 한 것은 단순히 장사하여 손해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 종이 주인에게 한 말은 표면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진짜 이 종이 장사를 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종들이 자신보다 많은 달란트를 받은 것에 대해서 기분이 상했을 수 있습니다. 주인에 대한 신뢰가 없거나 약한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입니다. 15절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나누어 주신 것인데 이것이 불만스러운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에게 맡겨진 한 달란트는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과 두 달란트를 맡은 종에 비해서 한 달란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장사를 포기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24절에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굳은”(sklhrov”:스클레로스)은 “마른, 사나운, 거친”이라는 뜻입니다. 박정할 뿐만 아니라 포악하고 거칠다라는 말입니다. 새번역성경에서는 “무서운 분”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또한 이 단어는 ‘므나의 비유’(눅 19:11-27)의 21절에서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의 “엄한 사람”(aujsthro;”:아우스테로스)보다 더 강경한 단어입니다. 종은 자신의 주인을 악한 인격자로 몰아 세우면서 자신의 불성실과 직무 유기에 대한 변명을 찾으려고 합니다. 죄인의 변명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돌아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라고 말함으로 주인을 아주 나쁜 사람으로 몰고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잘못을 주인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종의 변명에 대해서 주인은 27절에 “취리하는 자들”을 왜 활용하지 않았냐고 하십니다. 취리하는 자들이란 오늘날로 말하면 은행과도 같은 기능을 하는 사람입니다. 조금만 생각이 있었고, 열심히 있었다면 최소한 그렇게 무의미하게 달란트를 두고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이 종은 도망가거나 오지 않을 수는 없었나 생각하지만 주인이 돌아오면 모두가 회계하러 나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예외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
하나님의 일이란 작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 그 자체가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구약의 성전문지기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이 오벧에돔 집안 사람입니다. 이 집안 사람들이 처음에 다윗이 법궤를 옮겨가고자 했을 때 대충 마차에 싫고 가다가 떨어지는 것을 웃사가 만져서 죽었습니다(삼하 6:7). 그런데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러나 오벧에돔 집사람들은 이 법궤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습니다(삼하 6:10, 대상 13:13). 하나님을 무섭게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극진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윗 성에 문지기 역할을 합니다(대상 15:18, 24, 25). 이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기쁨이었는지 그들은 진심으로 성을, 법궤를 지켰던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에 나오는 사람은 세 사람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말고 다음에 나오는 사람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의 들러리 같아 보입니다. 그냥 한 사람 더 소개하나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이 사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보다는 배를 많이 받았지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자신보다 무려 배 이상의 다섯 달란트는 더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떠한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이 행동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 역시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달란트 비유는 전체적으로 예수님 자신의 재림에 관한 교훈의 구조 안에 있습니다. 열 처녀가 등불을 준비하며 주인을 기다려야 함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은사를 사용하며 주님을 기다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