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7. 길) / 본문 : 눅 1:79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길’이라는 말은 ‘길다’에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길은 긴 것입니다. 싸움에 지친 모든 하나님의 군사들에게는 격려의 사역이 필요합니다. 때때로 우리 모두는 긴 여행길에 지쳐서 5분마다 한 번씩 “아빠, 아직 멀었어요?”라고 물어보는 어린 자녀들과 같습니다. 인생은 여행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기나긴 여행을 막 시작한 것 같은 때에도 삶을 힘들게 만드는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내가 필요한 싸움입니다.
중용은 “길은 잠깐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길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길로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내가 길이요.”(요 14:6)라고 말씀하심으로 인생의 주인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찬송가 중에도 ‘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가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갈길을 밝히 보이시니’(313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434장),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429장), ‘내 본향 가는 길’(292장), ‘나는 갈길 모르니’(421장), ‘주와 같이 길가는 것’(456장) 등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살펴보면 갈릴리로 가신 길은 책임(Responsibility)의 길이요, 여리고로 가신 길은 생명의 길이요, 갈보리로 가신 길은 희생(Sacrifice)의 길이요, 엠마오로 가신 길은 확신(certainly)의 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바다 위를 이동하는 거대한 화물선들은 그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진행합니다.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는 화물선들이 거대한 태평양도 건너고 대서양도 건너는 것입니다. 배가 가장 위험할 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방향을 잃고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입니다. 배가 바다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엔진이 고장났다든지 아니면 배 안에 있는 구성원들 사이에 큰 난리가 일어났다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이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표류하면 결국 큰 파도를 만나 침몰하거나 아니면 암초에 부딪쳐서 침몰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맨 남단에 희망 봉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언제나 파도가 심해서 배가 많이 침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이름을 희망 봉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곳만 통과하면 파도가 잠잠해져 다시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의 혼란과 어려움의 파도가 강하고 크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능히 이길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다를 갈라서 세웠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지금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신앙의 엔진을 꺼 버리면 안 됩니다. 여기서 신앙의 엔진을 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끝까지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나아갈 때 이 세상의 어떤 시험도 이기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1. 길을 찾으라
우리가 성경을 보는 이유와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길을 찾기 위함입니다. 인생은 길을 찾아야 행복합니다. 길이 보이지 않으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열심히 산 것은 같은데 마냥 그 자리입니다. 서 있는 차와 같고 고인 물과 같은 것입니다. 인생은 길이기 때문에 목적이 있어야 하고 그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거역했습니다. “대저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케 하여”(렘 18:15)
“도와 주고 싶어도 도울 길이 없지 않니?” 이 말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예전부터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어디에 함정이 있는지 알아서 자녀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자녀는 자기 고집만 부릴 때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탄식은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의사들이 환자에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Free-will)를 주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강요나 강제로 하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우리가 길을 찾는 것은 오직 예수께 순종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길이 찾아집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2. 우리가 가야할 길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1) 허리를 동이는 길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나 2:1)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엡 6:14)

2) 정직한 길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신 22:1, 4)
“19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나으니라 20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21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잠 8:19-21)

3) 용서의 길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마 5:25)

4) 전도의 길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마 22:9-10)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마 18:12-13)

3.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
미가서 2장 13절을 보십니다.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그러나 이 길로 갈 때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평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과 같은 본문을 시편 121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2절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산이 아니라 하나님(Not mountain’s but God)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힘과 능력은 마지막 때에 만국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1-2)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잘 생기고 똑똑한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대로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우등생이었고 명문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다 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뜻밖의 불행이 그 가족에게 찾아왔습니다. 첫 휴가를 나온 아들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앞날이 창창하던 아들이 허망하게 쓰러져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노라니 아버지도 그만 삶의 의욕을 잃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그 아버지에게 요한복음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아버지는 아들의 귓전에 매일매일 이 말씀을 큰 소리로 들려주었습니다. 그 날도 아들의 귀에다 대고 말씀을 외쳤는데 말씀이 끝났을 때 아들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습니다. “아-멘”이라고 아들이 누운 지 87일 만에 깨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 김상길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아프간 인질 피납사태가 발생한지 오늘로 벌써 9일째가 됩니다. 현재까지의 상황은 1명이 사망하고 22명이 생존해 있는 상황입니다. 네티즌들의 반응을 보면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왜 갔냐”, “너희들 맘대로 갔으니 너희들이 스스로 책임져라”는 등의 정서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특히 다른 종교를 믿거나 기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합니다. 외국의 일부 언론들도 한국의 지나친 선교경쟁이 낳은 결과라는 비판의 소리도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위험한 지역과 무모한 시도를 하는 것은 잘못일 것입니다. 제가 왜 컴퓨터선교회를 하고있습니까? 바로 바른 선교를 하기 위해서 정보를 제공하고 갈길을 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건의 진실을 말해야합니다. 그들은 의료 봉사단원들이었고 무고하게 붙잡혀있는 것입니다. 탈레반은 하루속히 풀어주어야 합니다. 조건과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앞으로는 더 신중하게 여행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길이란 우리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다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목사를 보십시오. 그는 백령도 근처의 작은 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 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주 일 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대동강변에 좌초하게된 셔먼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되는데. 한편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 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그리고 붙잡혀 나와 곧바로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아마 당시의 영국 사람들이 “무엇 하러 그 위험한 곳에 갔냐?”라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위험을 무릎 쓰고 항해를 계속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영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울러 복음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혜롭게 선교 해야합니다. 그리고 선교의 항해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를 죽이는 자들을 무서워하지 말고 우리의 영을 심판하시는 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