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에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9. 경계선에서) / 본문 : 눅 22: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오늘은 본문 읽어놓고 다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제목설교 잘 안 하는데 오늘은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말씀 내내 오늘 본문이 그 어디에도 따라다닌다는 것을!
오늘 설교의 제목 ‘경계선에서(On the boundary)’는 폴 틸리히(Paul Tillich:1886-1965)의 자서전의 제목과 일치합니다. 폴 틸리히는 20세기 개신교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교수자리까지 얻었지만 1차 세계대전에 군목으로 참전하여 사병들이 죽어 가는 참호 속에서 니체의 책들을 읽으면서 전통적 유럽 기독교 문명의 붕괴를 몸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됩니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그는 히틀러에 의해서 자국인 독일에서 추방됩니다. 여행금지국가로 정해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해야 하는 에스라, 에스더 부부가 아쉬움을 진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이 추방당하는 틸리히는 어떻겠습니까?
제가 95년도에 인도를 갔을 때 우리나라에서 6.25가 끝나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유엔군 포로중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일제시대 때 일제에 의해 일본군이 됩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가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후에 중국 군에 잡혀서 중국 군이 되어 6.25때 북한을 지원하러 내려오는 병사들 틈에 끼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북한군에 잡혀서 북한군인이 됩니다. 그리고 또다시 유엔군에 포로가 됩니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고향은 남쪽이지만 남한도 북한도 그렇다고 중국을 일본을 택할 수도 없는 이 사람은 제 3국인 인도를 택하여 그곳에서 살고있었습니다. 이 민족의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폴 틸리히도 이러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자서전 ‘경계선에서’ 그는 두 기질 사이에서 자신을 보여줍니다. 도시와 시골 사이에서, 사회계급들 사이에서,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타율과 자율 사이에서, 신학과 철학 사이에서, 교회와 사회 사이에서, 종교와 문화 사이에서, 루터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관념론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고국과 타국 사이에서 그는 갈등하며 자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종교의 실현(Religiose Verwirklichung)”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경계선은 앎을 얻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다.”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친구를 삼는 데 자격기준이 없습니다. 나이 성별 피부색 사람인지 동물인지 식물인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 조차도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어른들의 기준일 뿐입니다. 작은 나무토막으로 우주선을 꿈꾸고 조그만 인형들을 친구로 사귀어 멋진 우정을 나누는 어린 아이들의 세계가 부럽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과 예수

유대교 율법에 따르면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흠 없는’ 양이나 염소 등을 바쳐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양이나 염소가 없는 사람들은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로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일반 농민의 집에서 사육한 짐승이나 집 주변 혹은 산에서 잡은 비둘기는 ‘흠 없는’ 제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제사용 짐승을 전문적으로 키우는 업체들이 있었고, 이 업체들은 성전 관료들인 제사장의 공인 하에 한정된 일부 가문에 의해 독점되었습니다. 이 독점업체들은 성전귀족에게 많은 뇌물을 바칠 수 있는 가진 가문 중에서 선별되었습니다. 가난한 탓에 죄 사함의 제사를 드릴 수 없었던 대중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부족한 자, 심지어는 민족적 불행을 초래한, 저주받아 마땅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런 종교적 체제로 인해 사회의 모순에 저항할 수도 없는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 이들을 죄의식에서 해방시켜 준 것이 요한의 세례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에게 보다 유리한 죄 사함의 매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은 결국 요한을 좋아하게 되었고,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습니다. 예수도 갈릴리에서 요한에 대한 소문을 들고 세례자 요한을 찾기 위해 요단강가로 갔습니다. 예수님도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활동했던 베레아 지방은 아바태아라는 유목족속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입니다. 때문에 베레아 지방에는 많은 군사요새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과 함께 반정부적 선동을 하고 있었던 요한의 행동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추종자의 일부는 요한과 함께 붙잡혔고 또 다른 일부 사람들은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보다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 예수는 다시 갈릴리로 돌아와 요한의 세례운동에 참여했던 옛 동지들을 포함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의 명성은 널리 퍼졌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 주변에 몰려들었습니다.

요한은 대중을 불러냈으나 예수는 대중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중을 모든 정치적, 사회적 압박에서 해방하시기 위해 병고침과 말씀선포로 영적 활동을 펼쳤나갔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정치적, 사회적 압박에서 대중들을 해방케 하시고자 적극적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경계선에 계셨습니다. 당시 정치적인 로마와 유대와 헬라의 경계에 계셨습니다. 또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계셨으며, 율법과 복음의 경계선에 서게 되셨습니다. 제자들로부터는 세상 권력의 자리(왕)와 섬김의 자리사이에 계셨습니다.
컴퓨터의 내부적인 회로는 2진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0과 1사이에서만 선택이 가능하고 중간은 없습니다. 흑과 백 사이에 어떤 것이든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틸리히는 이 선택을 미루다가 추방을 당한 것이고, 세례요한은 이 덫에 걸려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선택에서 빠져 나오셨습니다. 몇 번에 걸쳐서 이러한 선택을 강요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그 덫에 걸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중의 한가지 사건이 세금문제였습니다. 막 12: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설교자에게도 이러한 경계선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을 강조하였고 요한은 사랑을 강조했으며 베드로는 소망을 특히 강조하여 설교했습니다. 믿음을 강조한 바울의 경우에는 데살로니가서에서는 예수의 재림을, 로마서에서는 믿음을, 고린도서에서는 사랑을 말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일제시대 때의 설교는 일본 침략자에 의해 고통 당하는 백성을 위로하고 삶의 의미를 북돋아 주는 설교가 많았습니다. 당시에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는 찬송이었습니다.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내 어이 여기 살리까
빛나고 높은 저 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전도의 내용도 예수천당이면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 때와 같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국가는 독립하고 세계무역의 10대국에 들어있습니다. 그만큼 국가의 위상과 위치가 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했고 올림픽과 월드컵도 치러냈습니다. IT분야는 세계3위에 올랐고 통신 속도는 세계1위입니다. 눈부신 발전으로 세계가 놀랐습니다. 이런 국력을 바탕으로 우리가 선교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으로 안티 크리스찬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도 분당샘물교회와 박은조 목사님을 비방하는 일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제가 알기로는 그 어떤 목사님보다도 본받을 만한 분입니다. 어떤 분은 교인이 3,000명이라니까 목사가 얼마나 많은 돈을 받겠냐고 합니다. 박 목사님은 서울 영동교회에서 오래 동안 목회 한 분입니다. 이 교회는 손봉호 장로님이 계신 곳이기도 합니다. 강남에 있는 교회가 철 대문입니다. 이 대문을 보고 사람들은 서대문 교도소냐고 그럽니다. 그만큼 절약하는 교회입니다. 그곳에 계시다 분당샘물교회를 개척했는데 분당샘물교회는 성도가 3,000명 정도 된답니다. 다른 교회 같으면 벌써 교회를 건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가를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담임목사를 비롯한 전 교역자 사례비를 100만원으로 정하고 가족 1인당 19만원만 추가하여 받고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한 가정을 파송하고 있는 우리교회 역시 남의 일로 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국가 권유로 철수 준비를 하고 있지만 현지의 같은 팀 내에서 건축한 병원은 경기도 만한 크기의 땅에 이 병원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다 버리고 와야합니다. 단순히 병원을 그동안 애써 세운 건물을 두고 온다는 것만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니라 그곳에 여전히 남아있게 되는 그 땅의 백성입니다. 누가 치료해 줍니까? 누가 아픈 곳을 감싸줍니까?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아닙니다만 현실적으로 너무나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탈레반이 두 여성을 풀어주면서 한 여성이 양보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탈레반은 그 여성은 정말 위대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분은 아프간에 간 것이 ‘선교냐 봉사냐’ 하면서 따집니다. 여러분! 봉사면 어떻고 선교면 어떻습니까? 또 여행이면 어떻습니까?

박은조 목사님은 지난 8일(수) 무겁게 가라앉은 교단에 올라섰습니다. 이날 제시한 성경구절은 열왕기 39장. 동료들을 모두 잃은 ‘엘리야’가 로뎀나무 밑에서 하나님에게 “자기의 생명을 거둬달라”고 애원하며 기도하는 대목입니다. 박은조 목사님은 말하기를 “이제 3주가 지나 4주 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웅적 죽음을 위해 아프간 땅을 밟은 게 아니었습니다. 현지 사역자를 뒷바라지하고 격려하기 위해 간 사람들인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저희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아프간 피랍사태로 또 하나의 경계선에 섰습니다. 폴 틸리히가 말했던 것처럼 경계선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교회를 돌아보고 선교를 점검해야합니다. 이번 일로 아프간이 아주 문이 닫히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또한 우리가 더욱 열심히 기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1889년 10월에는 호주 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Austualia) 소속의 선교사 데이비스(J.Henry Davis)가 조선에 입국하게됩니다. 그를 파송한 호주 장로회는 당시 교세가 3만 5천명 밖에 안 되는 작은 교파였습니다. 1885년과 1887년에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한 바 있는 중국 주재 영국국교회 선교사인 월프(J.R.Wolf)부주교가 한국 선교의 꿈이 영국국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호주에 있는 친구들에게 한국을 위하여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호소문을 보냅니다. 이것을 받은 매카트니(H.B.Maca-rtuey) 목사가 빅토리아 선교신문에 이 내용을 싫고, 이 글을 데이비스가 읽고 한국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당시 호주 장로교회에서는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조차 갖지 않고 있었습니다. 교단에서 파송하지 않자 청년들의 모임인 성서연구 연합 친우회(The Presbyterian Fellowship Union for Bible Study)에서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데이비스 목사의 본 교회인 멜보른 투락(Too-rack) 교회와 협력하여 초대 선교사로 데이비스 목사를 선정하여 한국에 파송 하게 됩니다.

서울에 도착한 데이비스는 부산 지역을 선교하기 위해서 1890년 2월 28일 구한국 정부로부터 전라, 경상 지방 여행허가를 받아 서울-부산 간 장거리 여행을 도보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당시에도 부자 선교사는 말을 타고 다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과천을 지나 수원(3월 15일), 천안(3월 18일), 공주(3월 20일), 경천(3월 21일) 등을 지나며 복음을 전하며 갔습니다. 공주를 지나 논산(3월 22일)을 지나 만경강을 건너 전주(3월 24일), 오수(3월 25일)를 지나 남원(3월 27일)과 하동(3월 29일)사이의 지리산 기슭 산악 지역을 통과했습니다. 전주를 향해 걸어 갈 때에는 많은 비로 인하여 길이 물에 잠겨 장화를 벗고 걸어야 했습니다. 지리산 지역에서는 호랑이 울음소리도 전해 들었습니다. 1890년 3월 27일 드디어 서울에서 부산을 향하여 670리를 걸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힘든 여행 중에도 그는 매일 5-6시간 씩 공부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조금씩 말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마지막 부산 행로는 진주(3월 31일) 부근을 경유한 것으로 추정되나 그 후의 경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약 20일간의 무리한 도보 여행을 하는 가운데 추운 날씨와 불편한 잠자리, 맞지 않는 음식으로 허약해진 체질에 폐렴과 천연두에 감염되어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게일(Gale, J. S.)의 도움으로 4월 4일 비 오는 금요일 부산으로 이동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일본인 병원(北村)에 입원하여 하룻밤을 병상에서 지내다가 치료도 제대로 받기 전에 1890년 4월 5일 순직하였습니다. 임종을 지켜본 게일은 “그는 병원에서 죽어가면서 내게 뭔가를 말하려 했다. 오후 1시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메리(Mary)에게 편지했습니다.
호주장로교회도 경계선에 섰습니다. 교단이 파송한 것은 아니었지만 호주 장로교회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기도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데이비스의 헌신적인 활동과 순직은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를 가능하게 만든 값진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호주 장로교회는 후속 사업으로 멕케이(Mackay)선교사 등이 내한합니다. 또한 호주에서는 여전도회연합회(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가 만들어져 선교를 헌신적으로 돕도록 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한 남자가 남과 북의 경계선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군, 북군 모두를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아래에는 남부 연합군의 회색 바지를 입고 위에는 북군의 푸른색 윗도리를 입고 다녔습니다. 얼마 후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남군과 북군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전쟁 소식을 듣고 모두들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는 남군의 회색 바지와 북군의 푸른 윗도리만 입고 있으면 어딜 가든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남군 바지와 북군 윗도리를 입고 자기 밭에서 일을 했습니다. 드디어 근처에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북군과 남군이 대치하고 곧 총 소리가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북군의 병사들은 회색만 보이면 무조건 총을 쏘았습니다. 남군은 푸른색만 보이면 무조건 총을 쏘았습니다. 그 남자는 온몸에 총을 맞고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젖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구별된 존재입니다. 성도는 세상과 하나님의 사에서의 입장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는 경계선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