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1) -용서하는 사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1. 좋은 사람(1) -용서하는 사람) / 본문 : 마 6:14-15, 참고 창27장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 옆에 있는 사람 한번 쳐다봅시다. 어때요. 좋은 사람 같습니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고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또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복중의 복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복을 받아 건강하고, 부자가 되어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은 늘 기도하고 있지만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성장하고 교인이 많이 모이고 교회당을 건축하고 하는 일에는 관심이 집중될 수 있으나 우리교회가 얼마나 좋은 교회가 되느냐 에는 별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혼자 행복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냥 커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전도주일을 지켰습니다. 어느 성도가 전도했다고 자랑합니다. “목사님, 이번 전도운동 때 대어를 한 마리 낚았습니다.” 그럽니다. 목사님이 “무슨 말입니까?” 했더니 “에쿠스 타는 사람을 전도했습니다.” 그러면 소형차 타는 사람은 피라미입니까? 사람은 보이는 것이 가치기준이 아닙니다.

인도의 힌두교 같은 종교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팔자가 정해져 있어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정해진 운명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도 비슷한 경우처럼 보이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창세기 27장에 보면 이삭이 장남 에서에게 축복을 하려고 하지만 그가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여 부인인 리브가가 동생 야곱에게 축복을 받도록 아버지 이삭을 속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서는 사냥터에서 사냥한 고기를 가지고 별미를 만들어 드렸지만 상황은 이미 끝나있었습니다. 이미 야곱에게 축복한 것입니다. 에서는 “아버지여 나도 축복해 주세요. 나도 축복해 주세요.” 하면서 방성대곡을 합니다. 어느 어머니가 이렇게 같은 자식을 차별할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에서가 잘못되었다면 이것은 어머니인 리브가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만일 아버지를 속이다가 들통이 나면 축복은커녕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고 했습니다(창27:12). 그랬더니 리브가는 말하기를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 오라”(창27:13)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본문을 대할 때 우리는 모두 나 자신이 야곱과 같다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드라마에서 자기가 늘 주인공인줄 착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약의 최악의 인물로 꼽을 수 있는 가룟유다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마 26:24)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너무나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에서와 가룟유다와 같은 인물은 팔자가 정해져 있었단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고 인정한다고 하면 기독교 역시 정해진 운명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이들이 비록 악역을 맡기는 했지만 분명히 에서를 통해서 야곱이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선의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희생시켜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이들 또한 우리에게 복을 주기 위한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야곱의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자신의 축복을 위해서 어머니 리브가의 말을 따라서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여러분은 리브가와 야곱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축복만을 바라면 부러운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에서의 단점과 부족함이 많았다고 인정합시다. 저는 한 어머니의 편견적인 사랑이 낳은 불행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리브가와 야곱은 먼저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이삭을 속였습니다. 이삭이 리브가와 야곱에게 속을 것을 알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창27:33). 여러분! 이삭의 생각이 틀리고 리브가의 생각만 옳았다고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야곱의 좋은 점은 본받을만한 하지만 거짓말을 해서라도 언제나 형님의 것을 빼앗으라고 가르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토록 정의를 외쳐온 하나님의 말씀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5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시 33:4-5)

이제 축복을 빼앗긴 에서를 생각해 봅시다.
에서는 아버지 장례식만 마치게되면 아우 야곱을 죽여버리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창27:41). 리브가는 이 소식을 듣고 하란에 있는 자기 오빠의 집으로 야곱을 피신시킵니다.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냥 넘기게 되었던 문제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창세기 27장 40절입니다.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창 27:40 -한글개역)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다시 원문으로 번역을 해 보았습니다.
“너는 칼을 의지하여 살고 네 동생을 섬기리라. 그러나 네가 끊임없이 몸부림치면 그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을 것이다.”(창 27:40 -이영제목사 역) 에서에게는 큰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을 받아 쉽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여전히 에서에게도 소망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에서가 야곱과 같은 축복을 받지는 못했지만 저주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에 에서와 같이 “억울하게 되었는데 정말 몸부림 쳐서 그 멍에를 벗었던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자신 있게 “있습니다.”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 욥입니다. 욥은 창세기 때의 인물입니다. 욥기서는 시대적으로 아브라함 세대의 내용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로는 아브라함이 175세를 살았고 그의 아버지 데라는 205세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욥은 고난 이전의 나이는 알 수 없으나 고난을 을 겪은 후 140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200년은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나이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 점차적으로 줄어드는데 바로 아브라함 시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에서도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욥기의 목적은 진정 하나님은 공의로우신가? 하는 답을 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욥은 좋은 사람(의인)임에도 고통을 당했고, 극심한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하기도 했지만 그는 자기 아내와 그의 친구들(엘리바스, 빌닷, 소발)에게 원한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에서에게 내린 말씀처럼 그 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이야기를 에서도 듣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욥과 같이 살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에서의 이야기는 창세기 33장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을 용서하고 따스하게 맞아들이는 것으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에서에게도 하나님은 많은 축북을 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을 만나러온 에서는 먼저 400명이나 되는 사람을 앞서서 보냈습니다(창 33:1). 이 사람들을 마을에서 사 왔겠습니까? 아닙니다. 에서의 종들일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양과 가축들 많은 선물을 주려고 할 때 에서는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내게도 쓰고 남을 만큼 많은 물질이 있다고 합니다(창 33:9) 그리고 에서에게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창 27:40) 했는데 야곱은 에서를 만날 때 7번 절하고 부를 때 늘 “내 주”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에서 또한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나폴레옹은 온유한 면을 지녔던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유명한 장군으로, 유럽을 점령하고는 곳곳에 보초병을 세웠습니다. 하루는 나폴레옹이 한밤중에 보초막을 살펴보려고 나갔습니다. 한 보초막에 갔더니 사병이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서 총을 보초막 옆에 세워 놓은 채 쭈그리고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폴레옹은 조용히 그 사병이 놓아 둔 총을 들고 보초를 섰습니다. 한참 후에 깨어난 보초병은 자기 대신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이 나폴레옹 장군임을 알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래, 얼마나 피곤한가? 잠깐 쉬지. 내가 대신 보초를 서 줄께.”라고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이때 그 사병은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일생동안 나폴레옹을 위해서 충성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좋은 사람은 남에게 명령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궂은일을 대신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제 신약의 가룟유다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3년 이상 따라다닌 제자입니다. 그리고 전도를 나갔을 때도 유다도 갔습니다. 그런 유다를 끝까지 지켜야되는 것 또한 예수님의 바램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온 유다에게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그를 끝까지 친구로 부르고 계십니다.

제자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을 팔 자로 의심을 받은 것은 가룟유다가 아니라 베드로였습니다. 예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16:23)는 꾸중을 들었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고 하셨습니다.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것은 완벽한 부인입니다. 그러나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사실 운 것으로 보면 가룟유다도 후회하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목메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 또한 에서에게 내렸던 말씀처럼 몸부림을 치면서 그 멍에를 벗기 위해 살았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울이었던 바울 또한 예수믿던 사람들을 잡아가던 사람입니다. 첫 순교자 스데반이 죽을 때 함께 있던 자입니다. 초대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던 사람들이 사울 같은 사람들 때문에 스데반이 죽었고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끝까지 추적하여 잡겠다고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버린 사람은 없습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나이다.”(렘3:22)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과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모든 것이 세 번 입니다. 그러니까 용서에 있어서도 세 번 하면 많이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아무리 많이 용서해 주어도 한 4-5번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한마디로 끝까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남을 끝까지 용서해 주는 사람 이 사람이 진짜 좋은 사람입니다.
가룟유다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을 먼저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 자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도 마음을 넓게 써야 합니다. 나 자신을 용서해 주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나 자신을 용서하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지금이 최악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동안은 아직 최악은 아니다.”(셰익스피어)

신문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가짜 대학생 행세를 하며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안 아버지가 그냥 묵과할 수 없어서 아들을 불러 훈계를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훈계가 사랑의 훈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그만 가출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방탕한 자식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을 하며 정신 없이 돌아다녔지만 아들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다행히도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 뉘우침의 표시로 삭발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러한 아들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참으로 그 아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해주면서 아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이발소에 가서 삭발을 하고 아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러한 행동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며 아버지 품에 안겨 통곡을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아버지와 같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그의 품안에 거하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나 자신이 용서했을 때 용서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내게 대해서 용서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도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용서해 달라고 하는데 먼저는 나 자신이 용서해야 합니다. 본문은 또 한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용서란 한정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같은 것입니다. 성경의 전체 중심 주제가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