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4) – 예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4. 좋은 사람(4) – 예배 ) / 본문 : 요 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마다 소중히 여기는 바하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라이프찌히의 조그마한 토마스 교회라는 예배당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했습니다. 오랫동안 일하면서, 남이야 알아주든 말든 매일같이 새로운 곡을 작곡해서 연주했습니다. 그 곡이 출판된 일도 없고, 발표회 한 일도 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나 매일같이 성실하게 새로운 곡을 작곡해서 연주해 나갑니다.
결과로 265개의 오르간 곡과 263개 합창곡, 162개 피아노 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그 후에 그는 유명해 졌어요. 그가 인정받게 될 때 그 옛날에 작곡해 놓은 것들이 전부 높은 값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유명해 져서 작곡한 게 아니에요. 오로지 성실했던 것입니다. 무명의 오르가니스트로 그저 성실, 성실, 진실, 이것이 마침내 바하를 만든 것이에요.
우리가 존경하는 안창호 선생님은 학벌이 중학교 2학년 중퇴입니다. 그의 이력서에는 이렇게 써 있다고 합니다. 이력서에 거침없이 ‘중학 중퇴’, 그리고 특기는 ‘배 노 젓는 일과 청소하는 것’ 이것입니다. 특기를 ‘청소하는 것’이라고 써 놓고 담대하게, 정직하게 산 안창호 선생님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그 중요성으로 말하면 비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할 일도 예배입니다.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입니다.

예배라는 말은 원문의 proskunevw(프로스퀴네오) “고개를 숙이다 예배하다.”
이며 proskunou’nta”(프로스퀴네테스)는 예배자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예배하는 자들은” 바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옛날 독일어에서 Kuss(입맞추다)와 연결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이교도에서 땅의 신들을 숭배하는 의미로 땅에 입을 맞추기 위해 엎드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외부적인 몸짓을 거부했지만 내적 태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예배는 겸손한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는 예배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또 추수하는 장면들을 보면 꼿꼿이 서서 하지 않습니다. 늘 반쯤 고개를 숙인 자세이거나 반쯤 무릎을 꿇은 모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의 자세는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세를 영적 거장이신 예수께 배워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제일 영광된 일입니다.

예배의 대상
proskunou’nta”(프로스퀴네테스) 예배자는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예배하는 자를 나타낼 뿐이지 그 대상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이교도들도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요한계시록 16:2, 19:20절에 보면 짐승의 표를 받은 우상에게 예배(경배)하던 자들이 나옵니다. 중국사람들도 자신들의 신에게 절하면서도 “빠이빠이” 예배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래서 먼저 이 예배의 대상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첫째는 아버지께 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라는 자들은…”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말합니다.
이 두 단어를 연결하면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께”가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전통적으로 하늘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님, 하느님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자식 표현으로 천주로도 사용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하나님’ 은 마포삼열(마펫)선교사와 캐나다 선교사 게일 선교사가 만들어낸 용어입니다. 마포삼열은 105년 전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했는데 1936년 일제에 의해서 쫓겨나 3년 뒤 별세한 선교사입니다.

“나는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기 전에 황주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 있었다. 나는 이 나라에서 십자가의 도(道) 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오직 하나님의 그 뜻대로 죽든지 살든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로 굳세게 결심했다.”
그는 미국 땅에서 죽으면서도 “나를 조선 땅에 묻어 주오.” 하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정말 한국을 사랑한 목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선교사들에게 “조선 사람보다 조선을 더 사랑한 사람”이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성경은 말해줍니다.
우리 예배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예배의 초점입니다. 누구를 섬기느냐 하는 것은 예배의 성격이 규정되는 일입니다. 창조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성경에서 요구하는 예배이며 참된 예배입니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고백하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께 경배하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대상은 결코 타협할 수 없고 양보될 수 없는 예배의 최고가치입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출 22:20)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창 2:4) 이 구절이 처음 나오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에서만 11번이 나옵니다. 3장(아담이 쫓겨나는 장면)에서 8번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직접 부르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영향으로 표준새번역성경과 2000년도에 번역된 가톨릭 성경인 새성경에서는 “여호와”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단어를 모두 “주” 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호와라는 단어는 아브라함 때에 가서 다시 나타납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창 13:1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창 18:26)
그리고 다시 이 단어가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출애굽 때입니다. 출애굽기 4장(바로와의 싸움)에서는 무려 14번이 나옵니다.

제가 여러분께 질문하나 드리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킬 때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네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출 3:18)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출 5:3) 이런 표현이 출 8:8, 27 등에 계속 나옵니다.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하오니”를 [개역개정]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다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것을 막고 나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제일 큰 방해는 예배를 방해하는 행위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용서할 수 없는 죄가 됩니다.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즘 교회 예배는 기획된 한 편의 인기 드라마처럼 진행되어야 즐거움과 감동을 받습니다. 편안함과 안락한 시설 속에서 분위기 있고 고급스러운 한 편의 예배가 연출될 때 흡족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배에 참여한 관객이 아니라 예배자입니다. 목사는 여러분을 위하여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저 또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연극을 보러 찾아온 관객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현재형입니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예배하는 자들을 지속적으로 찾으시는 것처럼 예배하는 자들은 예배를 계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시 29:1)라고 표현했습니다. “돌리고 돌릴지어다.” 일회성이 아닙니다. 반복되고 지속적인 것을 말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1:1에서는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라고 하십니다. “척량하되” metrevw(메트레오)는 재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여러분은 여러 무리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큰 교회에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거룩하게 찬양하고 훌륭하신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오면 그런 곳에서 적당히 예배를 드리고도 마치 내 자신이 예배를 잘 드린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예배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재어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철저하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을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하면 반드시 이와같이 죽임을 당하리라”(계 11:5)고 말씀하십니다. 예배가 얼마나 소중하며 예배하는 자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개역개정]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는 “ejn pneuvmati kai; ajlhqeiva/ dei’ proskunei’n.”(엔 퓨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데이 프로스퀴네온)입니다. 두 개의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엔’입니다. 이것은 …안에서입니다. 앞의 문장을 다 연결하면 “하나님의 영 안에서” 라는 뜻이 됩니다. 예배는 인간의 생각과 방법으로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 안에서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dei’(데이)라는 동사인데 진리(알레데이아)와 예배 사이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뜻은 “반드시…해야 한다, 마주치다, 틀림없다.”입니다. 데이는 ‘묶다, 동이다’의 동사 devw(데오)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다시 번역하다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 안에서(엔) 반드시(데이) 예배할지니라”가 됩니다.

찬송가에 보면 “제목, 목차”보다도 먼저 나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목 분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예배, 성부, 성자, 성령, 구원, 천국 등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배자로 부름 받은 자가 예배를 등한히 하고 있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배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배의 자유를 위해서 그들은 생명을 걸고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4개월의 항해 끝에 혹독한 겨울인 1620년 12월 11일 플리머스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인디언의 화살이 날아오는 가운데 추운 벌판에서 도착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추위와 역병으로 고생하는 가운데, 이듬해 가을까지 46명이 괴혈병과 폐렴으로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1621년 가을 추수를 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배였습니다. 눈물의 예배, 감격의 예배였습니다. 이것이 미국 추수감사절의 시작입니다.

「광야를 정복한 영적 거인」이라는 책을 쓰신 마크 애터베리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에 암으로 죽어 가던 여성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자신이 걸을 수 있는 한 교회에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말을 지켰습니다.
나는 그녀의 삶이 거의 다해 가던 어느 날에 그녀가 여위고 허약해진 몸으로 천천히 예배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고 얼굴빛은 매우 창백해 보였습니다. 남편이 산소 마스크를 들고 그녀 옆에서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맨 뒷자리에 조심스럽게 앉혔고, 그녀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손을 들라는 가사의 찬양을 부르는 동안 그녀는 야윈 양손을 위로 들어 올렸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녀는 힘없이 떨리는 손이었지만 계속해 들고 있었고, 눈을 감고 약간의 미소를 띤 채 나지막하게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 날 예배에는 두 개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내가 단상에서 전한 설교였고, 다른 하나는 맨 뒷자리에 앉았던 그녀가 한 마디 말도 없이 행한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두 설교 중에 그녀의 것이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관객은 자기가 보기 좋은 공연만 찾아다니지만 예배자는 자신이 섬기는 공동체인 교회에 출석하여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을 들으며 자신을 쳐 변화시켜 가는 예배하는 성도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