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않는 기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6. 포기하지 않는 기도 ) / 본문 : 눅 18:1-8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휴대폰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저는 휴대폰을 잘 안 가지고 다닙니다. 금요일에 나갈 일이 있어서 어쩌다 한번 가지고 갔는데 “오빠, 지금 전화 줘.”라는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기가 막히고 놀라웠습니다. 저는 누나는 있어도 여동생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저더러 오빠라고 할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00자매가 나한테 오빠려고 할려나? 스팸으로 들어온 메시지입니다. 전화했다가는 아마 돈이 몇 만원 그냥 빠져나가든지 아니면 분명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스팸에 걸리면 80넘은 할아버지도 오빠가 되는 것입니다. 컴퓨터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도라는 선물은 단 한가지도 부정적 요소나 역기능이 없습니다. 100번 기도하면 100번 다 손해볼 것이 없습니다.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고 말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합니다(토마스 카라일).”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남겨놓아 걸림돌이 되게 하는 사람과, 하나님께 기도하여 디딤돌로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걸림돌도 디딤돌로 만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야기에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재판장입니다.
이 재판관은 그냥 재판관이 아니고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 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사람을 얼마나 무시하겠습니까? 동정심도 없고 백성의 억울한 사정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빈정거리며 골치 아프지 않은 사건을 중심으로, 그리고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할 그런 위인인 것 같습니다.
또한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근심에 찬 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이 과부는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탄원하기 위해서 재판관을 계속 찾아갑니다. 우리는 이 과부의 억울한 사정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 당시의 과부들은 아무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를 가집니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이 다른 나라에 가 계십니다. 가끔 자동차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내가 들이 받히고도 나중에 경찰서에 가보면 반대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외국인으로서 권리가 없기 때문에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원문의 과부라는 말은 “버림받다. 빈곳에 남겨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재판관과 과부는 상대가 안 됩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가벼운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무감각한 재판관은 과부의 탄원하는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4절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재판관과 과부의 의지가 격돌하는 것을 봅니다. 한참동안 과부의 탄원을 무시했지만 재판관은 스스로 생각합니다. 이 과부가 얼마나 더 괴롭게 할까? 과부는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무기도 없습니다. 그녀의 무기란 끈질긴 것입니다. 끝까지 해 보겠다는 의지입니다. 원문의 “괴롭게 하다”는 말은 “눈언저리에 멍이 들게 하고 타박상을 주기 위한”이란 뜻입니다. 그녀는 결국 지칠 줄 모르는 간구로 재판관을 굴복시킵니다. 여기서 한가지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굴복하신 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비유의 대조는 비교입니다. 무엇을 대조한 것인지 그 답은 7절 말씀에 나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불의한 재판관과 같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불의한 재판관과 다르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고 속히 좋은 것으로 주시기 위해서 늘 준비하고 계시고 속히 응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7절 하반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속히 응답이 오지 않을 때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왜?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네 가지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항상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것을 지금 다 응답 받으셨다고 하면 하나님께 간절히 나오실 것 같습니까? 아니면 집에서 또는 어디 경치 좋은데 놀러 가셨을 것 갔습니까? 어쩌면 오늘 교회에 안나오시는 분들은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처음부터 모르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다 응답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절에 “항상 기도하고”라고 합니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 105:4)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제방에 구멍이 뚫어져 있어도 물이 없을 때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물이 차면 제방에 물이 세어 들어오니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물보고 저기 제방이 뚫어져 있으니까 들어가라고 그 때 그때 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루 다니다가 어느 곳에든지 틈이 있으면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단도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2.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나의 요구를 분명하게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과부는 그 요구가 무엇인지 우리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 요구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인생을 걸만큼 중요한 것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응답하신 것이 값없이 버려지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요즘 학교에 가면 학생들이 물건을 잊어버리고도 찾아가지 않는답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물자가 귀해서 몽당연필에 볼펜 껍데기를 끼워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가방을 잊어버리고도 찾아가지 않는답니다. 부모님이 쉽게 다시 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면 우리는 그것이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자녀가 작은 것에도 감사를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땀을 흘려서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값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기도의 응답이 지연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테스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 하시느니라”(잠 17:3)

3.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우리를 더 성장시킵니다.

때로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좋은 것을 가지시기를 원하십니다.
영국에 갔을 때 WEC선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프리카 한 지역의 선교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부족에게 20년 동안 선교를 한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20년 동안 선교본부에 아직도 한 사람도 구원시키지 못했다고 선교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아들이 다시 그 부족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또 20년을 선교했습니다. 그 아들 역시 아직까지 한 사람도 구원시키지 못했다고 편지했습니다. 그러다가 근래에 그 부족마을의 사람들이 추장부터 예수 믿겠다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약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헌신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아들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왜 진작 나의 아버지가 계실 때 믿었다면 좋았을 것을 이제야 믿느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부족의 사람들이 사실은 우리가 당신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를 보고 믿는 것이라고 헸답니다.
제가 여러분 부모님들 전도하시고 구원시키기 위해서 말씀드립니다. 그분들이 지금 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시고 또 듣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늘 복음을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증거 해 놓는 일입니다. 어린아이가 10가지 셀 때 1,2,3,4하고 5,6,7을 다 순서대로 이해했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1부터 10까지 자꾸 말하면 어느 날 그것이 순서대로 다 연결되어 알게됩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현재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4.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기 위함입니다.

젊은 사람일수록 기다릴 줄 모릅니다. 죽도록 사랑한다고 하고선 군대 가고 나면 2년 6개월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무신 거꾸로 신고 많은 남자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8절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끈기 있게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믿음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모태신앙이신 분들을 보면 “못해, 못해” 그래도 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때로는 형식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꾸준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을 보면 언제는 참 믿음이 좋은 것 같고 열심인 것 같은데 금방 시험에 들고 왔다 갔다 합니다.

아프리카는 조용할 날이 없을 정도로 반군의 활동이 활발합니다. 지금 케냐, 소말리아, 챠드 등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지난달 말 차드 반군과 정부군간의 전투가 수도 은자메나에서 치열하게 벌어져 몇 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챠드에 모두 38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는데 수도인 은자메나에 17명, 수도에서 18km 떨어진 외곽의 센터에 18명의 선교팀이 구성되어 활동 중이었고 김영섭 선교사 가족(3명)이 카메룬 국경의 남쪽지방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수도에 있던 17명은 프랑스군 기지로 먼저 대피했고, 김영섭 선교사 가족은 국경을 통해 카메룬으로 무사히 빠져나간 상황. 센터에 남아 있던 18명만 최후까지 고립되었던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양승훈 선교사님은 저희 선교회를 방문하셨고 저도 잘 알고 있는 분입니다. 챠드에는 지난해부터 반군과의 간헐적인 교전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주 초에 북쪽지방이 반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목요일(1월31일)에는 전화가, 금요일에는 모든 통신과 라디오 등도 끊겨버리면서 긴박한 상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금요일 오전에 인편으로 편지가 도착했는데, 주불 대사관을 통해 전해진 소식은 빨리 대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시간에는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는 양상이었습니다. 시내에 체류하고 있던 박근성 선교사님과 이시우 한인회장님 가족이 대피소로 우선 피신했고, 두 분은 끝까지 현지에 남아 한국대사관 프랑스 대사관 외무부 등과 계속 연락을 취하면서 고립된 저희 18명을 피할 수 있도록 진두지휘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는 반군이 대통령궁을 제외한 시내 전역을 완전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수도에서 서남쪽 카메룬 국경까지 20킬로 되는 그곳까지 이미 피난민들로 꽉 차 있어서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센터에 남아 있던 저희 18명은 고립된 상태에서 국경쪽으로 빠져나갈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12킬로 지점의 미군기지로 이동하면 안전할 것 같아 상황을 알아보았는데, 이미 미군기지는 민간인들이 장악했다고 전해들었습니다.
그때는 모든 통신이 두절돼 현지인들을 통해서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미 피난민들의 행렬로 꽉 차 있어 국경을 넘을 수는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할 지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일단 저희는 시내로 들어가 프랑스 군 기지로 가야 살 수 있다는 판단이 들어 현지인을 통해 계속 상황을 파악해 본 결과 후퇴하는 반군을 쫓아 정부군이 뒤쫓고 있어, 시내 쪽에는 군인들이 대부분 빠져나갔다는 것을 파악하고 다리를 건너 시내진입을 시도하기로 결정하고 3대의 차량에 18명이 타고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전쟁의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사체들이 이곳저곳 나뒹굴고 있었고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건물들… 약탈과 방화로 무법천지로 변한 아비규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이동하는 저희 차량을 누군가 세워 빼앗았다면 뺏길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7km를 이동해 시내로 통하는 다리에 도착했는데, 그곳 역시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뤄 꼼짝을 못하는 상황, 그런데 시내 쪽으로 가는 사람이나 차량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들 그곳에서 빠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저희는 오히려 그곳을 향해야 했으니…
적막이 흐르는 그곳으로 가던 도중에 우리는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하고 나서 고개를 드는 순간 차드 적십자 차량을 만났습니다. 저희는 상황을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자, 그 사람들이 본부와 연락하더니 저희 차에 깜박이를 켜게 하고 저희를 에스코트해 주었습니다. 얼마 안 가서 코너를 도는 순간, 시내를 지키고 있던 정부군의 대포가 저희 쪽을 향해 겨누고 있었습니다. 만약 당시에 적십자 차량을 만나지 못하고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면 정부군에 의해 폭격을 맞을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최고의 기도는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대화할 때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 이것이 최고 아닙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톨스토이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변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회가 아니고, 아내가 아니고 나 자신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렘 25: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을 때, 하나님도 우리의 기도를 기쁘게 들어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일방적인 과부의 기도를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포기하지 않는 기도를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