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중심, 인생의 중심 십자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9. 성경의 중심, 인생의 중심 십자가) / 본문 : 요 19:23-30

“23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사복음서들에는, 제일 중요한 사건은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기사는 두 개의 복음서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과 십자가의 사건은 모든 복음서 기자가 기록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엄청난 양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배경과 달리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은 떠들썩하게 지내면서 정작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는 함구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전도서 7:1-2에서는 출생하는 집이나 잔치 집에 가는 것 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났다고 했습니다.

대개 전기의 종류들은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부분들이 아무리 많아도 전체의 10%가 넘지 못합니다. 간디나 마틴 루터킹 목사 같이 암살 당하고 정치적으로 상당히 의미를 가지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약 삼분의 일 가량이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부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관한 기사는 사복음서 모두가 기록하고 있지만 양으로 볼 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개 전기를 기록할 때 인물의 업적이나 공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의 학문적 지식이나 업적들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죽음은 그저 슬그머니 넘어가는 것이 상식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들(통일교)의 주장처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메시야로서 실패를 했다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그가 메시야가 아니었다면 굳이 그의 참혹한 십자가의 사건을 이렇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기록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나 기적을 베푸신 사건이 적어서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야기를 많이 기록하였겠습니까? 요한사도는 그의 복음서 맨 마지막에서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요 21:25)고 했습니다. 엄청나게 몰려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병 고침을 받고 환호하는 사람들, 오병이어 때, 칠병이어 때 예수님께 물고기와 떡을 얻어먹은 사람들의 간증들, 베드로와 제자들이 목격한 물 위로 걸으신 사건과 하늘에서의 소리들 그 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기적이야기, 예수님이 어떻게 숙식을 해결하고 다니셨는지, 경제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을 했는지 등 수 많은 이야기 거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 듯 보면 재미도 없고 비슷한 이야기를 네 명의 성경 기자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의 일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중심이 십자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에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학자입니다. 그런 그가 십자가를 만나고 세상 모든 학문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다 버렸습니다.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 십자가 형벌은 고대 군주 국가인 페르시아나 페니키아에서 유래된 것으로 로마 제국의 확장으로 인해 일종의 사형 제도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형은 당시의 사형 제도 중에서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제도였기 때문에 자국민인 로마인에 대해서는 이 형벌을 적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에 포청천이라는 판관이 나오는데 이 때 사형을 집행하는 방법이 목을 자르는 작두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두형을 받을 때 두 가지 작두가 나옵니다. 하나는 서민을 처형시키는 개 작두이고 하나는 고위층을 사형시키는 용 작두입니다. 한번은 드라마를 보는데 자기는 양반이니 죽여도 꼭 용 작두에 죽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십자가로 말하면 용 작두가 아닌 개 작두인 샘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달려야할 그 참혹한 십자가에 대신 달리신 것입니다.

왜 하필 섭리는 가장 결정적인 때 얼굴을 감추고 마는 걸까?
마치 맹목적이고 멍청하며 무자비한 자연의 법에
스스로 굴복해 버리는 것처럼…(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구약성경을 속독하여 내려오다 보면 유대인들을 택하신 하나님은 애굽을 탈출하여 엄청난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 잘 듣고 순종하면 늘 축복이 쏟아집니다. 하나님의 아들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도 언제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불타는 가마솥에서도 죽지 않았습니다. 출애굽의 여파와 온갖 기적으로 가득 찬 구약의 여운이 아직 귀에 쟁쟁하고 눈에 어리는 가운데 신약의 첫 성경인 마태복음에 이르게 되고 어느덧 오늘 본문의 말씀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마지막 한 마디가 귓가에 남습니다. 본문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셨는다는 것인지?

예수님이 마지막 주간을 보내신 기간은 유월절 기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출애굽 할 때 맨 마지막 재앙에서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까지도 모든 첫 것, 장자를 죽이셨는데 양의 피를 발라 유대인임을 표시한 집안은 심판하지 않고 넘어가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대인의 유월절을 기억하고 모인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기적이 마지막으로 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보여주신 갖가지 기적들로 볼 때 충분히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실 분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그래서 ‘호산나’를 외친 것입니다. 우리는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느꼈을 ‘아 끝장이다!’ 하는 심정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 였습니다. 사람들은 한동안 망치로 머리를 맡은 것처럼 멍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둘 실망에 차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뒤돌아보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누구보다도 제일 실망한 것은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6절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한 그 사랑의 제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마지막까지 있었던 요한이 영적 통찰력이 제일 뛰어난 복음서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 부분에 최후의 만찬 사건을 제일 길게 다룹니다. 요한복음 13-17장에 걸쳐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역시 유대인이기 때문에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먹고 기념하기 위해서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최후의 만찬이지 제자들은 당시 그것이 최후의 만찬이라고 생각한 제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출애굽 기념으로 모였을 때 제자들이야말로 그 날의 영광을 재현할 분임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애굽’이라는 단어 대신에 이제는 ‘로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꿈이 성취되는 듯한 흥분에 사로잡혔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눅 22:29)야겠다고 하셨고,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하셨으니 착각할 만도 합니다. 그리고 계속 요한복음을 읽어가노라면 그 날 밤 만찬의 흐름을 단절시켰던 사건이 소개됩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요 13:3)이라고 하시고선 난데없이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하십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요 13:4) 일어나 마치 종의 모습을 하신 체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에 묻은 흙먼지를 닦아주십니다. 베드로는 발을 예수님께 내 놓기가 민망했던지 안 닦겠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아마 발이 더러웠던지 아니면 지금 예수님이 발이나 닦고 있을 그런 한가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일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가기는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당시엔 발을 씻기는 일은 하도 천해서 종이 유대인인 경우엔 아무리 주인이라 해도 그런 행위를 요구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발을 씻기는 장면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스캇 펙(M. Scott Peck) 같은 작가는 이 일을 예수 생애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습니다. 갑자기 수건을 두르신 예수님이 맨발로 내려와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아마도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상식적으로 당시의 사회 질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신경이 날카로워 졌습니다. ‘서로 누가 높으냐’ 이런 토론 할 기분이 아닙니다. 괜히 갈릴리에서 고기나 잡고 있을걸 3년의 세월이 그 고생이 헛것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런 실망감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 이루었다”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이제 그를 따라 다녔던 제자들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를 성경의 중심에 두셨습니다. 십자가 그 모든 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십자가를 하나님은 오페라로 말하면 클라이막스로 만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모두 맞춘 것입니다. 무엇이 포인트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알면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우리 모두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두 담겨 있는 것, 하나님 은혜의 모든 것, 우리를 위해 대답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대답하십니다. 이 한 분이 지신, 이 하나의 사건이 온 인류의 억 만가지 문제를 풀어주고 짐을 벗겨주며 길을 열어줍니다.

세계 3대 박물관을 꼽으라면 영국 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그리고 사람들이 머뭇거립니다. 미국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거론할지 아니면 중국의 보물을 다 가져다 놓은 장개석의 타이완 박물관일지, 그러나 영국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기는 세계최고의 박물관은 러시아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쥐 박물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르미타쥐 박물관에는 레오나르드다빈치, 라파엘로, 고흐, 피카소 등 엄청난 진품들이 있습니다. 제가 1995년 처음 방문했는데 사실인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 이 박물관을 팔면 러시아가 3백년동안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모나리자, 비너스도 있습니다. 이태리 바티칸 박물관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있습니다. 엄청난 보물들입니다.
박물관마다 최고가 있습니다. 그럼 전 세계 최고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영국 박물관에 로제타스톤(Rosetta Stone)입니다. 로제타스톤은 프랑스군이 이집트에 가서 작전을 하는 1779년에 군인들이 가서 로제타라고 하는 마을에서 작전을 하다가 그곳에서 많은 유물, 문화재를 발굴해냅니다. 그 당시는 점령한 군인들이 가져가는 것이니까 프랑스 군대가 그 모든 것을 가져갑니다. 가져가다가 영국군하고 싸움이 붙어서 영국군한테로 넘어갑니다. 영국 박물관이 갖고 있는 가장 값진 보화입니다. 그건 비석입니다. 길이가 114cm 폭이 72cm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돌로 된 비석이 어떻게 세계에서 최고로 유명한가 하면 그것은 바로 이 비문 제일 위에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있고, 중간에 이집트 Demotic가 있고, 맨 아래 그리스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석이 상형문자을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것입니다. 알파벳은 모두 아니까 이 알파벳을 통하여 애굽의 상형문자의 해석의 길이 열렸습니다. 애굽은 세계를 가장 오랫동안 지배했던 최강대국입니다. 4천년을 강대국으로 내려왔습니다. 세계를 지배했지만 그 많고 많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문헌은 비석이든 책이든 하나도 못 읽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상형문자라 모릅니다. 어떤 고고학자도 어떤 학자도 상형문자를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들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이 상형문자를 알 수 있는 길이 제 각각 어떤 짐작을 할 뿐이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길이 없는데, 로제타스톤이 나오면서 그리스어가 있으니까 그리스어로 이걸 풀다 보니까 전 애굽의 수많은 그 비문, 말할 수 없는 역사적인 자료가 한 순간에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제타스톤이라고 하는 것은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세계에서 가장 귀한 보화 중에도 보화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를 푸는 키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로제타스톤입니다. 로제타스톤은 애굽에 있는 그 글만 알려줄 뿐이지 세계 인류의 문제를 대답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많고 많은 문제, 국가의 문제, 가정의 문제가, 오늘 날 이렇게 과학이 발달해도 못살아 가지고 야단인데 이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인류의 죄의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줍니까? 해결을 고사하고 알 수도 없습니다. 공자도 물론 모릅니다. 공자는 ‘내가 아침에 알면, 나는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또한 獲罪於天(획죄어천), 無所禱也(무소도야)니라 ‘하늘을 향해 진 죄는 빌 곳도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민 고민 하다가 고행을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도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業報衆生 濟度不能(업보중생 제도불능)이라 ‘자기가 진 죄는 자기가 다 당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인간은 어느 길로 가야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인생의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우리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짐은 어떻게 벗어야 합니까? 누가 우리를 자유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밝혀줍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그래서 성경을 보화이며 비밀의 책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푸는 키입니다.

예수님이 이 십자가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막 8:34, 눅 9:23)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한참 전에 십자가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별도로 마 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십자가를 지셨고 다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십자가입니다. 천하를 모두 넘어뜨려도 십자가 앞에는 맥을 못 춥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도 십자가로 무장하지 않아서 어정쩡한 군인이 되어 그렇지, 진짜 십자가 바로 믿고 바로 서면 여러분을 당할 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죽음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굴복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우리 사람의 중심이 되는 십자가입니다.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침표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