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으로 맞이하는 하나님의 말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41. 겸손으로 맞이하는 하나님의 말씀) / 본문 :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감리교의 창시자는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입니다. 두 사람은 목회의 방법이 같았고 구령의 열정도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신학에 대한 이해는 달랐습니다. 하루는 이 두 사람의 신학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던 한 사람이 휫필드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웨슬리 목사님과 신학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다른데, 목사님께서 천국에 가시면 웨슬리 목사님을 만나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휫필드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천국에서 웨슬리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을 것이고,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휫필드의 대답이었습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튼은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우주에 관해 아는 지식은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이 바다의 신비에 대해 아는 지식보다 적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교만한 자가 세상의 큰 인물이 되었거나 존경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혜롭고(sofw’n:솝혼)는 ‘현명한, 깨끗한’ 이라는 뜻인데 이 단어는 본문과 평행 구절인 눅 10:21에 나오고 두 번 더 나오는데 바울이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고전 1:19)와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20)로 사용함으로 예수께서 사용하신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와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에 사용한 ‘frovnimo”:프흐로니모스’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슬기 있는 자들(sunetw’n:쉬네톤)은 ‘집중하다, 현명한’ 인데 어근은 ‘sunivhmi:쉬니에미’에서 나왔습니다. 이 뜻은 ‘모으다, 이해하다, 경건하게 행동하다, 고려하다’입니다. 이 단어 역시 바울이 고전 1: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라고 사용했습니다.
이 두 단어의 결론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원에 이르기 위한 지혜와 슬기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자신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예수님 보다 하나님 보다 더 똑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신 무리는 놀랍게도 어린 아이들입니다.
어린 아이들(nhvpio”:네피오스)은 ‘말 못하는 갓난아이’를 말합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e[po”:에포스’(말)이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아이를 강조하기보다는 ‘말’을 강조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본문과 평행 구절인 눅 10:21에 나오고 성경에서 한번 더 나오는데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고 했습니다.

말 못하는 이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이란 마음이 닫혀 있는 것도, 무비판적인 것도 아닙니다. 겸손이란 자신의 한계점을 인정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또한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서는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6)라고 고백합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라고 했습니다. 왜 이 고백을 먼저 하셨겠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천지의 주재’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임을 고백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반(反)계몽주의도, 반(反)지식주의도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하나남의 무한하신 존재가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초월하시며, 그의 생각과 길이 마치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그렇게 우리의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사 55:8, 9),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그를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고전 1:25)는 것을 겸손하고도 진지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고후 10:5에서 바울은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은 무엇을 말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대로 바울은 자신의 지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도 공부해야 하고, 구원에 이르는 방법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가 오랜 해외 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하여 독창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팬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공연 시간이 다 되었는데 가수는 나타나질 않습니다. 사회자가 사색이 되어 지금 비행기가 늦게 도착하여 좀 늦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다리는 동안 촉망받는 신인가수 한 분의 노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신인 가수가 무대로 올라와 정중하게 인사를 하지만 청중들은 본체도 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누구 한사람 박수를 치지 않습니다. 그 때 갑자기 2층 출입구에서 한 아이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빠 정말 최고였어요.” 신인 가수의 눈에선 눈물이 반짝였습니다. 그리고 청중들 사이에 따스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신인 가수는 바로 루치아노 파바로티였습니다. 훗날 그는 오페라 공연 때 한시간 동안 박수가 그치지 않아 165번이나 커튼콜을 받는 기록을 남기며 세계 최고의 테너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는 말 못하는 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호랑이요? 곳감이요? 아닙니다. 교만이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교만 때문에 죄가 하와와 아담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그런데 교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들어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 교만의 죄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목사입니다. 목사의 책임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용기 없는 자에게 용기를 주고, 힘이 없는 자에게 힘을 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 자신은 힘들고 어려워도 말하지 못합니다. 목사가 힘이 없어 축 늘어져서 설교해 보세요. “목사님께 은혜 받으려고 왔는데 내가 은혜를 주고 가야 되겠네” 그러실 겁니다. 그렇다 보니 저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늘 거짓으로 설교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단에서 용기를 가지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면 자칫 거만하게 될 소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사의 딜레마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강단이란 “높이 들린 곳” 이어서 오직 여호와의 보좌만이 누려야 할 그런 높고 고귀한 장소입니다(사 6:1). 감히 그곳에 홀로 서 있는 목사의 심정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목사를 위해서 왜 기도해 주셔야 하는지 아셔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것이 두려워서 교회 목회를 안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을 뭐라 할 것이 못됩니다. 목사 자신도 자신의 영혼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용감한 목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만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윌리엄 캐리는 위대한 선교사이며 우수한 언어학자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인도의 34가지 방언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가 선교사로 인도에 왔을 때 어떤 이들은 혐오와 경멸의 눈으로 그를 보았습니다. 어느 만찬회 석상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한 사람이 캐리를 망신시키려고 여러 사람이 듣도록 큰 소리로 “캐리씨, 당신은 옛날에 구두 짓는 사람이었다면서요?”라고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캐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저는 구두 짓는 사람이 아니라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겸손한 설교자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사색에 따라서 성경에 다른 것을 덧붙이거나, 자기 자신의 편견에 따라서 성경의 내용을 제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자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바로 여기 또 있습니다. 성경이 밋밋하다고 생각하여 자기들의 끓어오르는 거품으로 그것을 신선하게 만들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다 자기 자신의 독창성을 부여한다고 번쩍이는 아이디어로 그것을 개선시키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때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는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말씀을 빼는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오늘날에도 신학을 계속하여 발전시킨다는 명목아래 행해지는 신학적 자유주의(theological liberalism)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가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창안해 내는 사색가가 아닙니다. 현재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고 해서 그것을 잘라내는 편집가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복음주의적 설교가로 유명한 존 스토트(John R.W. Stott)목사 같은 분도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을 한 절씩 설교해 나가는데 이혼 문제에 대해서 주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5:31, 32절을 다룰 차례가 되었습니다. 목회사역 25년째 되는데 그동안 한번도 이혼 문제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문제를 덮고 지나가고 싶었습니다. 이혼 문제는 아주 복잡하고 수많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목사로서 전문가가 아니야 하고 지나갈 수 있는 문제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설교를 하게 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교인이 나온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로 얼마나 고민하고 그냥 넘어가려고도 몇 번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는 청지기어야 합니다. 누구의 청지기입니까? 하나님의 청지기이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존경할만한 청지기 역할을 한 분들이 있습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선구자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당시 제도권의 교회에 홀로 잘못된 것을 지적한 사람입니다. 이 당시에 다른 성직자의 잘못을 비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교황주의의 부패와 화채설의 오류들을 담대하게 공박했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롤라드(the Lollards)라고 부릅니다. 이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단 죄목으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John Knox)의 용기도 대단했습니다. 1559년 제네바의 유배 생활에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는데 이 때 잉글랜드에서 란돌프(Randolph)를 특사로 임명하고 엘리자베스에게 긴급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여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500개의 나팔을 귀에다 계속해서 울리는 것보다 한 시간 동안의 한 사람의 목소리가 더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Queen Mary)이 스페인의 왕 펠리페(Philip)의 왕자 돈 카를로스(Don Carlos)와 결혼을 추진하자(이 일을 통해서 교황의 권세와 스페인의 종교재판(Inquisition)을 스코틀랜드로 끌어들이는 일) 녹스는 공개적으로 그것을 반대하고 설교했습니다. 메리 여왕은 그를 몹시 싫어하게 되었고 눈물을 흘리면서 원수를 갚을 것을 다짐했습니다. 녹스는 1572년 사망하여 에든버러(Edinburgh) 센자일스(St. Giles’) 교회당 뒤뜰에 묻혔는데 그 당시 섭정을 했던 모튼백작(the Earl of Morton)은 그의 무덤에서 말하기를 “절대로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은 한 사람이 여기에 누워있다” 하였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목숨을 걸고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으며 이를 위하여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스스로 말씀을 피하거나 더하는(꾸미는) 일을 우리 자신들도 모르게 하고 있습니다. 전달하는 목사는 골라 전할 수 있지만 말씀을 받는 여러분 또한 골라서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까? 내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함입니다. 그 출발선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됩니다. 내 것은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그것만이 말씀을 받는 비결입니다. 말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될 때 하나님이 내게로 들어오십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해서 마지막 때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바로 여기서 말하는 이 지식의 의미가 오늘 본문이 말하는 지식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교환합니다. 지식이 빨리 교환된다는 것은 이 지식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오늘날 교만한 자들도 힘을 합합니다. 사단은 겸손을 막고 있습니다. 바로 지식으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위대한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 선교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있었던 일화입니다.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슈바이처가 도착할 기차역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기차가 도착하고 사람들은 1등 칸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손님이 다 내릴 때까지 슈바이처 박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2등 칸을 타고 왔나 생각해서 사람들은 다시 2등 칸 쪽으로 몰려갔습니다. 역시 거기에도 슈바이처 박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3등 칸 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3등 칸의 맨 끝에서 슈바이처 박사가 내리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박사님처럼 위대하신 분이 왜 3등 칸을 타고 오셨습니까. 1등 칸을 타고 오실 수 있었을텐데요.” 그러자 슈바이처 박사가 말하였습니다. “4등 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