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높은 곳을 향하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21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눅 10:20-23)

“… 때문에 기뻐하지 말고, … 때문에 기뻐하라” 전형적인 히브리어 격언구 형식으로 기록된 본문 말씀은 귀신들을 제어하는 권세를 기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내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사역의 목적이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라나야 합니다. 늘 어린아이처럼 우유만 먹고살면 안됩니다. 목사님이 비위맞추어 줄 것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베토벤의 바이러스’ 인가요. 거기 나오는 주인공 지휘자는 말이 거칩니다. 그것이 옳은 것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아래 있는 단원들은 그가 곰살맞은 곳이 있어서 붙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매일 어린아이처럼 나만 바라보아 달라고 떼쓰는 그런 성도가 되면 안됩니다. 살아있는 것은 자랍니다. 우리신앙이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마십시오.

25절에 보면 율법사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율법사는 자기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행실로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여야”라고 질문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허물 많고 무능력한 존재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제 내가 산 것도 주의 은혜요, 일할 수 있는 것도 주의 은혜이어야 합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 2장 7-8절에서 “8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8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 율법사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메너리즘(mannerism)에 완전히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보시고 나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외식입니다. 반대로 예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 역시 외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식(外飾)이란 ‘겉치레. 바깥쪽을 장식함’ 이며 또한 외식과 비슷한 말은 ‘위선, 가식, 표리부동’ 입니다.
위선(僞善)은 겉으로만 착한 체 하는 것입니다. 가식(假飾)은 말이나 행동을 거짓으로 꾸미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가 되는 이유는, 눈치나 체면 때문이며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무려 7번씩이나 반복적으로 “화 있을찐저”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토록 심하게 저주하시는 장면을 저는 성경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사단은 거짓과 외선의 영이며 하나님은 예수님은 성령님은 신령과 진정, 진심의 영입니다.

토인비는 “은퇴와 복귀”를 잘하는 사람이 영웅이 된다고 했습니다. 부루스는 “우리가 감추고 싶을 때 나타나야 하고 나타내고 싶을 때 감추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참된 경건은 인간들의 칭찬이나 영광 앞에서는 숨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의 십자가 앞에는 주님처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고 골고다까지 지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요 12:24)것입니다. 목사는 인기나 사람들에게 얻은 영광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성도들도 물론 안됩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기 집 벽에 이런 글귀를 써 붙여놓고 자기를 감추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사(我死)면 교회생(敎會生)하고 아생(我生)이면 교회사(敎會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목사의 무대도 장로의 무대도 아니고 우리 주님의 출연 무대입니다.
신약교회는 주인이 성령님이십니다. 사도행전 13장 1-3절에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누가 가라사대가 아닙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입니다. 인간 지도자들은 숨고 주의 성령님이 나타나 역사하는 교회가 참되고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가계부에는 이웃을 돕는 구제가 얼마나 적혀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이름 내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면 강대상을 해 놓겠다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지붕을 덮겠다든지 벽돌장을 사겠다든지 보이지 않는 부분을 헌납하는 이가 적습니다.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주의하라” 상당히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점검하고 또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인지? 예수님은 마 6:4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6, 6:18) 약속해 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용하다는 점쟁이 집에 옷을 곱게 입은 귀부인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귀부인 – “선생님. 제 딸이 하라는 공부는 않고 맨 날 놀러만 다니고, 남자친구랑 못된 짓을 해서 엊그제는 산부인과도 갔다 왔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제 딸이 왜 그러는 걸까요? 누굴 닮아 그런 걸까요?”
점쟁이 – “…… (눈을 지긋이 감고) 한번 봅시다. 딸랑딸랑… 누굴닮아 누굴닮아 누굴닮아…”
- “혹시 집안에 외국인이 있습니까?”, 귀부인 “… 아뇨. 왜요?”, 점쟁이 “이상하다… 따님이 외국인을 닮았다는 점괘가 나오는데…” 귀부인 “그럴리가요. 사돈에 8촌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외국인은 없습니다.” 점쟁이 “다시 한번 보죠 뭐.” 딸랑딸랑… 아무리 해도 외국인을 닮았다는 점괘밖에 안나오는군요.” 귀부인 “제 딸이 닮았다는 그 외국인 이름이 도대체 뭡니까?”
점쟁이 – “지에미(Jiemy)”입니다. “댁의 따님이 공부하지 않고 그렇게 속썩이는 것은 “지에미” 를 닮아서 그런 겁니다. 여러분! 정말 쪽 집게 점쟁이 아닙니까? 하라는 공부하지 않고 속썩이는 딸이 누구를 닮아서 그렇겠습니까? “지에미(Jiemy)”를 닮아서 그런 것입니다. 점쟁이에게 가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6:16에 보면 점을 치는 귀신들린 여종이 나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에 도착하였습니다.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은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한 여인은 세례를 받고 자기 집을 내어 유럽 최초의 빌립보 교회를 세운 자주 장사 루디아요, 한 여인은 바울의 선교사역을 방해하는 귀신들린 여종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포기하고, 유럽에 도착한 바울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함께 사단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그 귀신을 물리치는 것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귀신을 쫓아낸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보증 수표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마 7:22, 23). 또한 이 말씀은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일 때문에만 흥분하고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다가 아닙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9)고 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십시오.

막 8:36-37 “37 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우리는 세상에서 명성과 재물을 얼마간은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온 천하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은 사람은 역사상 없습니다. 올해에도 노벨 상 받는 분들이 발표되었는데요 그분들 다 얻었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더 많은 것을 잃은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연구하다 집에 제대로 들어갔겠습니까? 아이들하고 많은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세상은 하나를 얻기 위해서 많은 것을 버려야 하는 곳입니다. 다 얻지 못한다면 목표 설정을 잘 해야 합니다. 필요한 것 먼저 얻고요, 그 다음에 다음의 것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한1서 4:7)
평생 사랑을 느껴보지 못하거나 사랑을 갈구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거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도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며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인간이 사랑의 존재에 의하여 창조되었음을 증명해주는 단적인 예가 아닐까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요한1서 4;12) 진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남을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늘에 이름이 기록됨을 기뻐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매일 기쁠 수 있다는 논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고난이 있습니다. 연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왜 기뻐할 수 있습니까?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매일 웃고 다닐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울증의 증상으로 2주 이상 계속 우울하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아무 의욕도 없으면 우울증의 시작일 수 있다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때, 잠시 우울할 수 있다는 겁니다. 기분이 조금 안 좋다고 우울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울증의 진단기간으로 2주로 보잖아요. 2주면 장기간에 들어간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2주면 이요 교회 다시시는 분들에게는 절대 나타나면 안됩니다. 2주 동안 교회에 한번도 안나옵니까? 교회에 나와서 기쁨을 찾아야 됩니다. 천국을 찾듯이 말입니다. 잃어버린 나에게 준 하나님의 선물을 찾아가야 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은 사람처럼 말입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잃었던 보화를 찾았으니 말입니다.
전시(戰時)때에 행방불명되고 또 어떤 사람은 사망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나중에 살아있는 사람으로 판명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 책에는 이런 실수가 없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된 것을 알았습니다(출 32:32). 이사야 선지자는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켜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 한 자 중 녹명(錄名)된 모든 사람”(사 4:3)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도 자신이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빌 4:3). 여러분의 이름은 생명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대로 산 사람에게는 생명 책에서 이름이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시 69:28, 렘 17:13, 계22:19). 또한 생명 책에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증언합니다(계 20:12, 1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12세기 영국의 귀족들이 국왕으로부터 대헌장을 지키겠다는 계약을 체결한 후, 왕자를 인질로 잡아두었습니다. 국왕이 자기 권세를 이용하여 무력으로 계약을 파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태평양 군도에 거하였던 원시 부족들 간에 평화의 언약을 맺을 때 부족의 추장들이 서로 아들들을 교환하였습니다. 상대편 추장의 아들을 담보로 잡고 있는 한 상대편 부족이 임의로 침략 행위를 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인간은 그 어떠한 부귀영광과도 아들의 생명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미개하고 야만적인 식인종 부족일지라도, 부모 자식 사이에 문명인 못지 않게 숭고한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육체적으로 연약하고 아무 힘이 없는 어머니라도 어떤 괴한이 무기를 들고 아기를 헤치려한다면 그녀는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아기를 보호하려 할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에게는 칼이나 총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는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나니…”(요한1서 4:18) 그 어머니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초자연적인 사랑의 능력은 다름 아니라 죽임을 당할 것을 빤히 아시고도 그의 사랑하는 외아들이 기꺼이 인류의 손에 넘겨주신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한1서 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