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할 수 없는 선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눅 5:18-20)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나는 대통령이 되기 전, 매년 300명 이상을 전도했습니다. 하루에 한 명씩 거의 전도한 셈입니다.
그러다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석 달 동안의 유세기간에 무려 30만 명을 만났고, 30만 명과 악수를 한 카터입니다 하고 자기를 피알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릴 때 양심에 가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일년에 300명 정도 밖에는 전도를 안 했는데 내 이름을 피알 하는데는 내가 석 달 동안에 30만 명과 악수를 하고 다녔으니 내가 과연 대통령을 하나님보다 더 좋게 여기는가? 하나님보다 대통령이 더 좋은가? 스스로 묻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깨끗한 양심의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대통령 임기동안에 단 한번도 주일을 범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간증하기를 나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지내는 시간보다는 선데이스쿨에 나가서 어린 영혼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가리키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할 때 가장 행복하고 보람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는 대통령을 그만 두고 난 후에 더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가 다름 아닌 복음 선교를 위하여 살았기 때문 일 것입니다.
인생은 어떻게 사느냐? 에 달렸습니다. 값지고 멋지게 살다가 주님 앞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길은 바로 선교사명을 잘 감당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본문에 한 중풍병자를 살리기 위하여 네 명의 친구들이 애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이며 선교인 것입니다. 선교는 생명을 구원하는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선교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R. A. 토리 목사가 영국의 브라이튼이라는 곳에서 전도 집회를 가졌을 때의 일입니다. 집회를 돕던 한 사람과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자기에게 음식을 주문 받고 봉사해 주는 웨이터에게 전도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게 무얼….”하는 생각과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 일을 미루어 두고 식사를 하였다.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그래도 한마디 말이라도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돌려 웨이터를 기다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주인이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자기에게 봉사해 준 웨이터를 기다린다고 하자 주인이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손님, 이미 늦었습니다. 그 웨이터는 손님에게 봉사한 후 이층으로 올라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살리기 위하여 네 명의 친구들이 의논을 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 지금하자, 내일하자… 의견이 분분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많은데 조금 기다렸다가 하지 등등… 그러나 지금이 기회입니다. 주님이 이곳에 계실 때가 기회입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내일로 미루어도 안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이 일을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이 귀한 선교사역을 우리는 계속해야 합니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선교는 서로 함께 해야 하는 사역입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막 2:3)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침상에 메고 왔습니다.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 명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한 시인은 이런 시 한 구절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이 떠났는데, 서울이 텅 비었다.” 대단한 통찰력입니다. 한 사람이 없을 뿐인데도 도시가 텅 비어버린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아무리 바람을 일으키며 도시를 헤집고 다녀도 그 한 사람만 떠나고 나면 도시는 텅 빈 도시일 뿐입니다.
아니 한 사람이 없으면 서울이 아니라 온 우주가 텅텅 비는 것이지요?
막 8:36-37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하셨습니다. 자기 생명이 귀한 것처럼 남의 영혼도 그만큼 귀합니다. 한 번 가면 다시 올 수 없는 절망으로 떨어지는데 그 영혼을 구하는 일만큼 귀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지옥 체험을 간증하는데 온 세상 죄인들이 지옥의 자력선에 의해서 끌려가는데 어느 누구도 그 힘에 항거할 수 없이 강하더랍니다. 마치 진공청소기에 먼지가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죄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도 지옥으로 빨려들어 가는데 주님이 지혜를 주시더랍니다. “보혈을 믿으라.” 그래서 “주님의 보혈을 믿습니다. 보혈을 믿습니다.” 했더니 그 강력한 지옥의 흡인력이 자기에게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더니 천국으로 자기를 옮겨놓더랍니다. 복음이 이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복음은 죄인을 죄 없게 만들어주며 죄에서 끌어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교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하는 사명입니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전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선교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본문에 중풍병자를 메고 왔지만 사람들이 많아 감히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생각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지붕위로 올라가자! 지붕을 뚫고 병자를 침상에 달아 아래로 예수님 앞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습니다. 주님도 이 사실을 보시고 감탄을 하셨습니다.
선교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선교는 지속적인 기도와 헌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로는 엄청난 헌신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려움도 닥쳐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망설이거나 주저한다면 선교는 결실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과감한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혜가 어디서 나옵니까? 포기하지 않을 때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본문 25절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오사카’에서 ‘나카사키’로 향하는 배를 타고 가는 미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선교 훈련을 마치고 일본으로 부임해 가는 선교사였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선교의 꿈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미래에 선교 현장에서 영혼을 구원하며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며 조금은 두려움과 그리고 부푼 마음으로 뛰는 가슴을 억누르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 날 밤에 바람이 몹시 불었고 비가 쏟아졌는데 무엇인가 좋지 않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배가 파선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잽싸게 구명대를 메고 갑판으로 올라갔는데 곧 이어 배는 침몰하였고 그는 폭풍 속에서 물 속에 잠겼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자기 앞에서 허우적거리며 살려 달라고 외치는 한 여자가 있었는데 구명조끼도 없는 웬 할머니였습니다. 구명조끼가 부족하여 3등 칸 손님들 모두에게 돌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이 선교사는 갈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른 체 할까? 아니면 살려야 할까? 나는 이제 많은 사람들을 구하려고 가야 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이 여인은 거의 다 산 할머니가 아닌가? 그러니 내가 먼저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혼을 살리려 가는 사람으로 그 할머니를 보고도 모른 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구명대를 벗어 할머니에게 입혀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교사로 최초요 마지막인 설교를 그 할머니에게 한 것입니다. “할머니! 나중에 구출이 되면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전해 주세요! 내가 할머니 대신으로 죽고 내 생명을 할머니에게 드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되어 오셔서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었고 자기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예수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 말을 마친 뒤에 청년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할머니에게 대신 생명을 주고 말입니다. 그런데 구출된 그 할머니는 그의 남은 생애 동안에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을 만나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 대신 죽은 그 청년이 말하기를 그분이 내 죄를 위해서 그 청년처럼 죽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할머니는 늘 울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의 남은 생애에 그 선교사를 대신하여 일평생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살아 많은 사람을 구원했다고 합니다.
무엇이 사람을 움직입니까?
본문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입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하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에게 믿음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까지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정상적인 육체를 가지지 않은 중풍병자와 같은 자들입니다. 예수께 데려간 이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저희 믿음을 보시고” 였습니다. 그리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라고 하셨습니다. 병 고쳐 주셨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 받았다고 합니다. 예, 중요한 것은 중풍 병이 아닙니다. 죄 사함입니다. 그들은 중풍 병을 고치려고 갔지만 결과는 죄 사함이었습니다.
누가 선교할 수 있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언제 받으셨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사도행전 13:9절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부터 사울의 이름이 바울로 변합니다. 7절에 사울이라고 했는데 9절부터 바울로 소개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이름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울이 히브리식 이름이라면 바울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방선교를 시작하면서부터 바울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선교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타드 벤트리라는 전도자가 있습니다. 온 몸에 문신을 하여 온갖 오해를 한 몸에 받고 여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들리는 소문에 단지 부랑자들에게 다가가 전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문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으로 문신을 한 부량자들에게 다가갔더니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를 받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모로카이 섬의 다미엔 신부도 나병 환자들에게 전도하려고 스스로 나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변신을 해야 합니다. 선교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합니다. 선교를 우리는 주님의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명령은이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전도와 선교의 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우리 주앙교회도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