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가 사는 것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전에 뉴질랜드 섬에 30마리의 고래가 와서 자살을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것을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고래가 왜 죽었는가?’ 왜 이렇게 큰, 수 십 톤 되는 고래가 자살을 하느냐? 그런데 밝혀진 연구 중 하나는요, 고래의 리더가 살기 싫어서, 정신이 옳지 않아서 육지로 올라와서 죽으면 다 따라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우상숭배 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 나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를 벤치마킹하느냐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방법에 있어서 유대교와 이슬람은 우리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방법에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그 예수님을 제일 모범적으로 따라 살았던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바울입니다. 제가 유대인이 쓴 책을 읽어본 일이 있습니다. 거기서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아까운 사람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유대교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모범적으로 따랐던 사람입니다. 오늘도 그가 전해주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바울은 자기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만이 의미가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먼저 영광을 생각하기보다는 고난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말합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우리가 말한다면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하는 사람들 만에게만 불려질 수 있는 이름입니다. 십자가 버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바울이 증거 하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 1:4)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라는 말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를 건지셨는데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져야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이기 때문에 걱정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그분이 나를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하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사신 것이라.

오늘 본문 원문에 보면 세 단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살다(zw:자오)라는 말이 ‘산 것이라(zh)’를 포함하여 4번나옵니다. 그런데 ‘자오’(살다)가 나오고 나서 반드시 따라붙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말은 접속사인데요 그냥 단순한 접속사가 아닙니다. ‘기본 불변사’ 입니다. 그 단어는 “de;:데”입니다. 우리 한글성경이 재미있게 번역했습니다. ‘데’는 “그리고, 그런즉, 또한”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요 이 단어가 계속 나오니까 “오직” 이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그냥 단순히 “그런즉, 또” 이렇게만 번역하려고 하니까요 너무 밋밋한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오직” 이라는 말은 ‘알라’ 에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문법과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기본 불변사인 ‘데’를 “오직”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따라다니는데요 그 단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ejn:엔” 이 뜻은 “…안에” 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세 단어를 합해봅시다. “조이:살다, 데:그러므로(반드시), 엔:…안에서”
본문은 우리가 어디서 살 수 있는지 세 가지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 안에서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8) 여기에 사용된 “a[xio”:악시오스”는 “칭찬을 받을 만한. …비길 수 없는” 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버린 사람들이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버리고는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여기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주간에 부산에 내려가 부산대학병원 응급실에 24시간 있었습니다. 한 의사가 얼마나 피곤한지 야간 조에 들어왔는데 환자에게 한마디하고 가서 책상 앞에 엎드려 자고, 또 한마디하고 가서 자고 그러더라구요. 아마 투 잡을 뛰는 지 모르겠습니다. 경미하게 다친 교통 환자가 들어와서 링거루 주사 놓고 여러 조치를 했는데 자꾸만 환자가 벌떡 벌떡 일어나는 겁니다. 의사가 가서 “안됩니더, 이러시면 안됩니더” 그러더니 가서 또 자더라구요. 또 환자가 실려왔습니다. “복어를 잘못 먹어서 위독하여 실려왔습니다.” 처음에 의사들이 쫓아가서 산소호흡기 달고 난리를 떨었습니다. 나중에 깨어났는데 그 졸던 의사가 가서 “왜 먹었습니꺼? 복은 자격증 있는 사람이 요리해야 되는거 모릅니꺼?” 그러더니 또 가서 자더라구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공부하고 알아야 됩니까?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셨는지를 알고 순종하려고 배우는 것입니다.

셋째는 믿음 안에서입니다.
믿음은 모든 기초를 놓습니다. 믿음 위에서 세워지지 않는 모든 것은 비바람이 불면 허물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은 좋을 때만을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를 위하여 더욱 주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 서를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목사인 저를 믿어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돕고 있는 선교사를 믿어야 합니다. 나와 함께 사는 남편, 아내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예수님이 오셔서 알려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떠나도 부모는 자식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저희 누님이 시골교회를 다니는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 시골교회 목사님이 저를 보시더니 “제가 부족해서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제가 기도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시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이요 여러분들의 영적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믿어야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우리의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미국에 유명한 기업에 회장 잭 웰치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의 회장이 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자기를 믿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믿어주지 않을 때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나는 너를 믿는다, 네가 하는 일이 잘 될 거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그의 어머니의 말에 용기를 얻어서 오늘의 세계적인 기업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은 어떻게 자녀들을 대할까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자녀들을 이와는 반대로 양육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야 이놈아 내가 속을 줄 아냐? 턱도 없어, 내가 너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있어 …”
사랑하는 여러분, 보모가 아이를 믿어주기만 해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바울은 남은 자신의 삶의 존재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것은 세 가지 변화가 자신에게 나타났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나’ 대신에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하면 기쁘지만 그리스도는 기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싶지만 그리스도는 기뻐하실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 보십시오. 돈, 달러에다가 삼백년 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찍었습니다. 그 때에 미국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을 때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나라이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도장을 찍었습니다. 1센트에서 100불까지 모든 돈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믿음의 돈을 가지고 살겠다. 믿음의 돈이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는 ‘율법’ 대신에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고보서에 나온 행위하고 율법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율법주의’라는 것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의로워지고 구원을 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믿고 여리고 성을 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출애굽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요단강에 발을 디디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나타나는 행위입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행위가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는 ‘과거의 옛 사람’ 대신에 ‘새 사람’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예수 믿고 변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옛날 육체 가운데서 나의 이익을 위하여 살던 사람이 아닙니다. 내 육체의 이익을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545장)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세상 죄 가운데 있던, 내 방법대로 살아가던 것을 주님의 인도함에 완전히 순종하여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중한 것일수록 함부로 하지 않잖아요. 꼭꼭 숨기던지 잘 보관하지요. 제일 소중한 것은 나의 영혼이 아닙니까? 주님께 맡깁시다. 십자가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 아이젠하워라는 대통령이 있습니다. 그분은 어려서 너무 가난했습니다. 아이젠하워 어머니는 너무너무 가난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외할아버지 댁에서 살았습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자기 외손녀를 데려다가 학교는 보내지 않고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보냈습니다. 주일학교를 다니게 해서 성경을 늘 가르쳐주고 외우게 했습니다. 여러분! 지내놓고 보면 교회에서 배운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내 것이고, 학교에서 배운 것은 잠깐은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명과 내 진리와 내 능력은 될 수 없습니다.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해야 되지만 우리는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어려서부터 그것을 축복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처녀 때에 외할아버지 댁에서 성경을 많이 외웠습니다. 외운 성경만 600절 이상입니다. 단어도 600개를 외우려면 쉽지 않은데 그렇게 성경을 많이 외워서 하나님 말씀으로 훈련을 받고, 결혼해서 아이젠하워를 낳았는데 이 아들에게 또 신앙교육을 잘 시켰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어려서 가난하니까 사관학교를 들어가서 등록금을 내지 않고 공부를 했습니다. 1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 소위가 됐습니다. 군에 가서 소위가 되어도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전차 안에, 탱크 안에 아이들을 주일이면 꼭 데려다가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말씀을 지킨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이 동행해 주십니다. 이분은 2차 대전 때에는 이미 세계의 모든 연합군의 책임자가 되어서 전 세계 연합군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여러분! 믿을 것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빨리 자라납니다. 이 사람은 믿을 거리가 없으니까, 하나님만 믿으니까 그의 믿음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한 분도 아이젠하워입니다. 2차 대전을 이끌어 승리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이것은 누구나 할 것이 없이 아이젠하워이고 그때 대통령은 루즈벨트입니다. 이분은 한국전쟁도 휴전을 이끈, 이 전쟁이 오래 갈 터인데 이것을 끝낸 분도 아이젠하워입니다. 신앙의 사람, 믿음의 사람입니다. 아이젠하워는 성경 한 구절을 늘 품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외우는 성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가랴 4장 6절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 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힘으로도, 능으로도, 권력으로도 못살고, 이 세상의 어떤 군사적인 힘으로도 승리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이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 4장 6절이 여러분의 요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1959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소련의 흐르시초프를 초청했습니다. 9월 27일, 그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흐르시초프에게 교회에 가자고 간절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교회가, 하나님이 원수이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 이것이 첫째인데, 하나님을 믿는 것 이것을 물리쳐야 되니, 교회에 가자 그러니까 갈 리가 있겠습니다. 안 갔습니다. “오늘은 주일이니까 나와 함께 교회에 갑시다.”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말했습니다. “제가 교회에 다녀올 때 까지, 예배드릴 때까지 한 시간 반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흐르시초프를 만났습니다. “한 시간 반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때 흐르시초프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한 시간 반 동안 생각을 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를 이렇게 먼 길에 초청을 해 놓고 나를 떠나서 아이젠하워가 교회에 갔다 와서 내게 무슨 핑계를 댈까?” 이것을 생각했다는 겁니다. “나를 데려다 놓고 교회에 간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때에 아이젠하워가 말했습니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흐르시초프를 제가 초청해서 귀하지만 예배보다 귀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예배가 정말 제일 귀한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