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위에 은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4-17)

우리에게 최고의 단어는 무엇인가? 과연 저에게 한번만 설교하라고 한다면 어떤 주제로 설교를 할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물 한 방울 속에 태양의 모습이 담겨 있듯이 복음의 진수가 들어 있어야 하는 주제의 단어이어야 합니다. 그 단어는 우리시대의 최고의 단어 “은혜(Grace)”입니다.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이 작곡된 지 200년이 지나서 미국에서는 꾸준히 각종 음악 순위 차트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만들었던 개인홈페이지가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오면 이 찬양 곡이 반주로만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끝까지 나오지 않고 한 소절만 나옵니다. 어떤 분이 미국에서 다 들을 수 없냐고 연락오신 적이 있습니다.
리처드 니버(N. Richard Niebuhr)는 “기독교의 위대한 개혁은 지금껏 몰랐던 것을 새로 찾아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전혀 다르게 보는 사람이 있을 때 발생한다.” 고 했습니다.
스티븐 브라운(Stephen Brown)은 “수의사는 개만 보고도 생면부지의 개 주인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고 했습니다. 세상은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배울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헬라어로 은혜라는 말은 ‘cavrin:카리스’ 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cavria:카이로’ 로 ‘기쁘다, 행복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처음 떠올리는 이미지가 ‘기쁨과 행복’ 이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교회란 거룩한 체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만 생각한다면 교회는 은혜보다 도덕이 먼저인 것입니다.
고든 맥도널드(Gordon MacDonald)는 “웬만한 일에는 세상도 교회 못지 않거나 교회보다 낫다. 집을 지어 주고 가난한 자를 먹여 주고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일은 굳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세상은 은혜를 베풀 수 없다.” 이것은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절대적 사명을 지적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 밖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은혜에 대한 갈망함 이것이 교회를 찾는 이유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은혜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런 다짐을 했습니다. “은혜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전혀 은혜스럽지 못하게 전달하면 안 된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롭게 해 주실 것이다.”
어떤 분(화이트 E. B. White)이 “은혜도 개구리처럼 해부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는 사이 생명을 잃고 만다.” 고 했습니다. 은혜는 설명하려고 하면 은혜가 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은혜는 설명하기보다는 전달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시고자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시기 위해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가 설명되기보다는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설명으로 될 것 같으면 모세를 통해서도 됩니다.

미국 출근길 버스 안에서 있었던 어떤 이들의 대화 내용입니다. ‘뉴욕 타임즈’ 최장기 베스트셀러였던 스코트 펙(Scott Peck)의 [아직도 가야할 길]을 읽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친구가 준 거예요. 이 책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다나요.”
“그래요 어떤 책입니까?” “글쎄요 무슨 인생 지침서 같기도 하고. 아직 별로 못 읽었어요.” 여자는 책을 두르르 넘기더니 “장 제목이 이렇네요. ‘훈련, 사랑. 은혜…’ 남자가 말을 끊고 “은혜가 뭡니까?” “저도 몰라요. 아직 은혜까진 못 나갔어요.”
우리는 이 세상의 상황에 빠져서 은혜까지 못 나간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에게서 은혜를 빼면 그야말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신세가 됩니다. 본문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은혜는 기독교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입니다.
어떤 이혼한 여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15살 난 딸과 함께 교회 본당 입구에 서 있는데 사모가 다가오더니 “이혼하신다구요. 이해가 안 가는군요. 자매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남편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죠.” 라고 했습니다. 평소에 말을 건네지 않던 사모가 그것도 15살이나 된 딸이 있는 앞에서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기가 죽어서 한 마디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잖아도 남편과 손써볼 수 없을 만큼 파국으로 치달아 마음이 무척 아픈 상태였는데… 그녀는 그 때의 일을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사모님이 나를 안아 주셨더라면…”
은혜란 도덕적으로 완벽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크 트웨인은 개와 고양이를 한 방에 집어넣고 잘 지내는지 실험해 보았습니다. 개와 고양이가 잘 지내자 이번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넣어 보았습니다. 약간의 적응 기간을 거치자 이들도 잘 지냈습니다. 이번에는 침례교인과 장로교인과 감리교인을 넣어 보았습니다. 방안에는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기쁨이 되는지 실감이 안나시죠? “6개월 전에 유괴된 딸의 소재지가 파악되었고 딸이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 하는 소식이나 군인 남편의 헬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의 심정, 그러나 잠시 후 “남편은 그 헬기에 타지 않았습니다.” 하는 소식이 우리를 놀라게 하며 기뻐하게 하는 소리에서 주님의 심정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울 대학에 합격해서가 아닙니다. 사업에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금메달을 땄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잃었던 자녀를 찾으신 것으로 기뻐하십니다. 그저 우리가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를 받는데는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시옵소서.”(눅 18:13) 이라고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사람은 성경 공부를 한적도 없고 교회를 다닌 적도, 더군다나 착하게 살았다고 보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십자가에 매달렸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예수여…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43) 라고 한 것뿐인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도 이렇게 외치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누가복음 15:3-7절에 보면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나선 목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마리의 양이 나라면 좋겠지만 나머지 양속에 내가 끼어 있다면 어떤 반응을 할 것인가? 나머지 99마리의 양은 어떡하고 한 마리에 관심을 두시는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2:3-8절에 나오는 예수님께 향유를 쏟은 여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당시 1년치 사람 월급에 해당하는 돈이었다고 합니다. 유다가 보기에는 이것은 말이 안 되는 행동이었습니다. 향품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마가복음 12:41-44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시더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라고 하십니다. 이 여자의 두 동전이 지금까지 넣은 모든 고액 헌금자보다도 많이 넣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1-16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품꾼 중에는 해뜰 무렵부터 일한 사람도 있고 오전에 들어온 사람, 점심때쯤 온 사람도 있습니다. 오후 늦게 온 사람도 있고 마지막으로 일을 마치기 전 1시간 전에 들어온 사람도 있습니다. 아침부터 꼬박 일한 사람도 한 시간 전에 들어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대우를 해 주셨습니다. 주인의 처사는 공정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잔혹한 경제학이라고도 합니다.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비유들을 경제학으로 보면 전혀 말이 안됩니다. 이 비유들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은혜입니다. 은혜란 산수가 아닙니다. 경제학처럼 따져서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것이지 노력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산으로 주어진다면 모세를 통해서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계산을 제일 잘한다고 볼 수 있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인물은 모두가 공감하고 공식적인 세리였던 마태입니다. 두 번 째 인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뽑아 회개를 맡긴 가룟 유다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를 단순무지한 사람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성경을 잘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요 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하도 기쁨에 넘쳐서 세어볼 수 있겠구나 생각하지만 퍼뜩 거리는 고기를 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마 18:21에 보면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라고 합니다. 랍비들은 인간이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는 3번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즉각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 18:22-35절의 배은망덕한 한 종의 비유를 하십니다. 자신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지만 마 18: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고 합니다. 복음의 계산법은 경제학적인 계산법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모세로서 마쳤을 것입니다. 복음의 계산법은 비 경제적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 5:10) 복음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은혜라는 말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은혜입니다. 은혜 없는 복음은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오사카에 몇 번 갔던 적이 있습니다. 교회 강사로 가서 식사를 일본 식당에 좋은 식당에 대접을 받으러 가보면 그렇게 손님을 즐겁게 하는 민족은 일본사람밖에 없어요. 참 즐겁게 해줘요. 웃으면서 손 요렇게 하나 말아서 주고, 말도 ‘아리가또 고자이마쓰’ 얼마나 친절하고 즐거워요. 오사카 공항에서 비행기 출발할 때 제가 한번 끝까지 쳐다 보았습니다. 그런데요 비행기 안보일 때까지 어리를 굽히고 있더라구요. 공항버스 타고 아마가사끼 역에 갔는데요 거기서도 공항버스 짐 내려주는 분이요 버스 도착하니까 고개를 90도 각도로 굽혀 절하더라구요.
손님을 즐겁게 해주는 거예요. 그러나 그 사람이 즐거우냐? 즐거운 건 아니 것 같아요. 직업의식으로 그렇게 하는 거 같아요. 자기는 안 좋으면서 돈벌기 위해서 손님에게 그렇게 해주는 거예요. 성도는 직업교인이 되면 안돼요. 찬양을 잘 부를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 마음에 즐거움이 없는 찬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거예요. 즐거워서 불러야 돼요. 즐거워서. 좋아서 불러야 돼요. 우리는 어떤 독재정권 아래서도 찬양하고 잘할 수 있죠. 우리는 그런 찬양이 아니예요. 내가 즐거워서 부르는 거예요. 즐거워서 기도하고 즐거워서 섬기고 즐거워서 찬양하고 즐거워서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기뻐서 교회를 섬기는 거예요. 며느리가 밥상 하나 가득 가지고 와도 괴로운 마음으로 가지고 오고 얼굴이 무거워 가지고 속으로 ‘오래도 산다’ 그러고 가져오는 거 하고 손자손녀가 그냥 대접은 안 해도 그저 할아버지 그러고 웃으며 즐거워하는 거 하고 다른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무엇을 모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기를 좋아하십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