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 121:1-8)

1951년 1월 4일, 꼭 58년 전 오늘 한국전쟁 중에 국군이 서울을 철수하고 수도를 부산으로 이전한 1.4 후퇴가 있었던 날입니다. 그 때의 겨울은 얼마나 추웠는지요. 꽁꽁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피난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그렇게 피난했습니다. 당시 노량진 역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 매달린 사람들을 보면 은이요 기가 막힙니다. 어린아이 하나는 부모를 잃고 깡통하나 손에 쥔체 한없이 울고있지만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여자 사진을 보면은 이요 그 추운 겨울에 옷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젖가슴이 다 보였습니다. 영락교회 김응락 장로님은 더 이상 나는 공산당에게 쫓겨 도망가지 않겠다고 하여 영락교회당 안에서 공산당에게 총알 일곱 발을 맡고 순교하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청와대를 보면 바로 뒤에 삼각산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정부 계획도시로 과천을 선택한 것도 정부 종합청사를 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곳도 바로 뒤에 관악산이 있습니다. 이 산들은 모두 북쪽에 두었습니다. 바로 북한의 남침을 염두 해 둔 것입니다. 비행기나 로켓포로 공격할 때 바로 뒤에 산이 방어막 역할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전쟁중이지만 시편이 기록될 다윗 당시에도 수많은 전쟁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제일 안전한 요새로 예루살렘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미터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 아래에 동쪽으로는 기드론 골짜기가 있고 서남쪽으로는 힌놈의 골짜기와 혈 로겔 골짜기가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노래는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백성들에게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이렇게 세 번의 절기를 지키게 하셨는데 이 때에는 전국의 모든 남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은 항상 즐거운 길만은 아니었습니다. 우선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만 남겨두고 모든 남자들이 1-2주 동안 집을 비워야 했습니다. 만일 이럴 때 이웃나라가 쳐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집을 떠나면서 얼마나 마음이 불안했을 것입니다. 또 제물을 끌고 예물을 등에 지고 걸어서 먼길을 걸어서 가야하는데 산을 넘고 강과 계곡을 건너고 뜨거운 사막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또 곳곳에 여행객들을 노리는 강도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전에 올라가는 길은 모험과 고난의 길입니다. 우리가 설날에 고향 가기 어렵다고 하지만 기차표 구하는 것이나 차가 좀 밀린다는 것이지 위험을 무릎 쓰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어렵고 힘든 길을 통과하여 예루살렘이 보입니다. 주변에 오면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산이 보이고, 언덕이 보이고, 건물도 보입니다. 그러나 산이나 언덕이나 건물이 자신들을 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1절 본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분이 하도 외로워서 강아지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강아지가 다 살고 먼저 죽었습니다. 너무 정이 들어서 오동나무 관에 백 만원을 들여서 장사를 치러 줬습니다. 그러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짐승하고 친하게 지내서 얻은 것이 없다.” 는 결론을 내리고 교회에 왔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를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만납니다. 나를 구원하실 구원을 베푸시는 분을 만납니다.
1642년 1월 4일 오늘은 영국의 물리학자 뉴턴(1642-1727)이 태어난 날입니다. 그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비롯해 수많은 업적을 남긴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가 쓴 책 중의 하나인 <프린키피아>가 있습니다. 그곳에 보면 “오!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 네가 한 짓을 너는 모르리라! 오 물리학이여! 형이상학에서 나를 구해다오!” 그랬습니다. 여기서 다이아몬드는 무엇이냐 하면 뉴턴이 기르던 개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다이아몬드를 개처럼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서로 화답하는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시인은 망설일 필요도 없이 2절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산이 아닙니다. 건물이 아닙니다. 강아지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과 나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나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켜주시는지 본문에서 봅니다.

3절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실족이라는 말은 “모트”에서 나왔습니다. 미끄러지다, 흔들리다는 뜻입니다. 실패나 실수를 일부러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다보면 나는 원하지 않지만 미끄러지는 것과 같이 수렁에 빠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실족하지 않도록 미끄러지지 않도록 도와주신 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주님께 늘 간구하며 살아야 됩니까? 우리는 언제나 실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도 시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까지 끝까지 따라다닙니다. 아주 질깁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에게도 틈탔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복음 22:31-32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토록 교만하지 말 것을 강조하셨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성품이 고상해 져서 하나님이 좋아하시게요? 예 틀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탄에게 빠져 시험에 들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유도 사탄의 방해에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빌 1: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라고 하셨습니다.

4절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고대에 이방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신은 평상시에 항상 주무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고 있는 신을 깨워야 되니까 그렇게 요란하게 광적으로 신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왜 무당이 딸랑딸랑하면서 시끄럽게 하는지 아십니까? 자고 있는 신을, 듣지도 않는 신을 불러내야 하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열왕기상 19:11-12 보면 하나님은 강한 바람과 땅이 무너지는 소리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으며 오히려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셨습니다. 항상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고 항상 우리에게 귀기울이고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찾는 소리를 즐거워하십니다. 기뻐하십니다.
물론 우리가운데 하나님이 주무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는 우리를 살피시지만 우리가 집에서 설거지하고 빨래할 때, 직장에서 일할 때는 하나님이 무관심하신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우리를 보살피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 때가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5절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는 그들의 고마움을 잘 모릅니다. 제가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하셨던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건설현장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자동차를 몰고 가는데 그만 자동차가 어떤 이유에서 모르지만 고장이 났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서 마냥 있을 수가 없어 자동차에서 내려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모래 바람이 한번 불어오더니 길 자국이 다 없어져 도무지 어디가 길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막을 방황하는데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갈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태양은 비쳐옵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 언덕 쪽을 바라보니까 나무하나가 있더랍니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하여 그 나무 밑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햇빛을 피하기 위해서 나무 그늘아래에 누워있는데 자기만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벌래, 곤충들이 그곳에 다 모여들어서 있을 수가 없었답니다. 사막의 태양은 그렇게 뜨겁고 무서운 겁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길에 만나게 될 모든 위험에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여행을 하다보면 열사병에 걸리게되기 쉽습니다. 밤에는 차가운 냉기에 시달립니다. 옛날 중동지방에서는 이 차가운 냉기가 달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꼭 낮의 해와 밤의 달뿐이겠습니까? 시인은 확신에 찬 믿음을 고백하고있습니다. 6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8절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출입’ 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인데 우리가 아침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행하는 모든 일을 의미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순례자들이 집을 떠나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을 가리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산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아들은 다시 불안해져서 아버지에게 또다시 묻습니다.
“아버지, 두고 온 엄마랑 동생들이 잘 있을까요? 들판에 두고 온 양들이 무사할까요? 그동안 이웃나라가 침략해오면 어떻게 하지요? 산 속에는 강도들이 있다는데 강도를 만나면 어떻게 하죠?”
이때 아버지가 다시 대답을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가는 길이니까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주실 거야, 우리가 집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 주실 거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나아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겁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출 34:24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모이라고 해놓고 안 지켜주시면 말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책임져 주시는 분입니다. 그만한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한 소년이 예수님의 모습을 정성껏 그렸습니다.
어머니가 “야! 우리 아들, 정말 잘 그렸는데! 그런데 왜 예수님 손을 그렇게 길게 그렸니?” 하자 “엄마는 그것도 모르세요? 그것은요, 예수님의 손은 세상의 구석구석 까지 미칠 만큼 길고요, 또 제가 풍선을 잡아끌 듯이 우리를 이끌기에 충분할 만큼 강하거든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만나러 온 시간에 다른 사람은 돈을 법니다. 다른 학생은 공부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만나러온 우리가 손해 봅니까? 우리가 망합니까? 우리가 공부 못합니까? 영국의 웨스트민트 교회는 1천년이 다된 교회입니다. 1,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배는 중단된 적이 없었습니다. 전쟁 중에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외부의 요소가 우리가 하나님 만나는 것에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실 줄 믿고, 그것도 육체적 안전만 지켜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도 책임져 주십니다. 언제까지요?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