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것이 되었도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3-17)

예수께 미치세요.

노아가 미쳤습니다. 그 식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도 오지 않는데 배를 산에다 만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미쳤습니다. 아들하고 3일 길을 가더니 갑자기 아들을 장작더미 위에 놓고 태워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미쳤습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불타는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미친 사람들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저는 모든 성경을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이 기록된 고린도후서 5장을 무척 좋아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다가 아마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수 믿다가 미쳤다는 소리 듣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 가끔씩 미쳤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실 목사님들 중에는 부모님들께 미쳤다는 소리 한번 들어보지 않은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에 미쳐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미치지 않으면 뭔가 다른 것에는 미쳐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학문에 미쳐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연애하는데 미칩니다. 어떤 사람은 돈버는데 미쳐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미쳐있는 것 같습니다. 한 때 사행성 오락으로 유명했던 바다이야기에 미쳐있던 사람도 많습니다. 그게 아마 고래가 나오면 큰 것이 터진 것인가 본데 고래가 나오기 전에 상어가 왔다 갔다 한답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하면 고래가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자꾸만 땡긴 답니다.
고이주에타 전(前) 코카콜라 회장은 자기 몸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콜라가 흐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콜라에 미쳐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태국에 벧엘타이교회가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개척한 교회인데요 태국여자 어린아이인데 한 7살 되었나요. 교회에 하도 열심히 나오니까 부모님이 집에다 가두어 놓고 못 가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가위를 가져다 자기 머리를 다 잘라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이 어린아이의 부모님이 손들고 교회에 보냈습니다. 아침 9시에 나와서 어린이 주일학교 예배드리고요 어른예배 11시 참석하고 오후 3시 성경공부시간까지 하고 저녁에 어두캄캄할 때 돌아가는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예수에 미친 아이 같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딘가 미쳐있어야 된다면 예수께 미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얻은 구원이 얼마나 값지고 영광스러우며 확실한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감격과 기쁨이 차고 넘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강권하시는 사랑 때문에 삽니다(13-15)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항상 ‘예수님, 예수님’ 소리만 했습니다. 입만 열면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까? 궁리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참으로 재미없고 따분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한번은 바울이 자기를 심문하는 왕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총독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행 26:24). 그러자 바울이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고 반박했습니다(행 26:25). 그는 미쳤다는 비난을 받을 만큼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오직 하나님과 양떼들을 위해 헌신을 다했습니다(13).
나의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에 내 마음을 주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다른 것에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어디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이렇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를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의무감이라든가, 동역자 들의 눈치 때문이라든가, 영향력을 생각해서라든가, 양에게 본을 보여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강권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벌레만도 못한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고 생각하니 그는 조금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예수님이 push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push를 받으면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push하시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거나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자원해서 하게 됩니다.

아내가 추운 겨울밤에 갑자기 호떡을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밥통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러더니 한참을 있다가 밥통을 다시 들고 들어왔습니다. 아내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남편은 호떡이 추운 겨울에 식지는 않을까 해서 밥통을 들고 나갔던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 대한 사랑을 강하게 확인했습니다. 마음속으로 다짐합니다. 내 남편을 죽도록 사랑해야지. 그 사랑이 아내를 강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스스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새로운 피조물(16-21)

솔로몬은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전 1:9) 라고 했습니다. 죄 아래 머물러 사는 인생은 새것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수도 없습니다.
만일 도적질과 강도를 일 삼았던 한 죄수가 옥살이를 마치고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세상으로 나왔다 하더라도 도적질과 강도 짓 하고자 하는 마음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새로워집니다. 그 이유는 죄 아래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죄의 결박을 끊어 우리를 자유케 해 줍니다.

새로운 삶을 살려면 영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래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낡아지고 쇠하여 지고 부패하거나 부식되거나 죽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새것이 있습니까? 아무리 좋은 것 새것을 사거나 만들었다 하더라도 얼마가지 않아서 낡아지고 맙니다.
낡아지고 썩어지고 죽게되는 것은 인간이 죄를 저지른 결과입니다. 이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남으로 영적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부패한 인생을 새롭게 하기 위한 몇 단계의 계획을 준비하셨습니다.

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영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영이 깨어나면 하나님을 찾게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사탄은 세상의 것으로 육신의 것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당장은 그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잠시 있다가 안개와 같이 사라질 뿐입니다. 물질도 건강도 명예도 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범죄한 인간의 영은 죽어있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살려주셨습니다(엡 2:1). 다시 죽지 마세요. 다시 죄의 구덩이에 들어가지 마세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 새로운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죄 아래 있고 죄의 습성을 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죄는 영적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포로가 되어 새롭게 살지 못하게 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죄를 참회하며 회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회개하면 마음을 정하게 하며 정직한 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해 줍니다.

세계적인 물리 학자요, 수학자요 사상가였던 파스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새로 태어나는 날이 있었습니다. 1654년 그는 팡세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4일, 화요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나 지식인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 확신을 주시고, 환희의 감정을 주시고, 평화를 주시는 나의 하나님,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 일체의 것이 망각되었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은 당신을 모르나 나는 당신을 아옵나이다. 환희, 환희, 환희, 눈물, 눈물, 눈물.”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이날 말씀에 의해 주님을 영접한 후 매일 아침 5시면 기도하고, 많은 날을 금식하면서 성자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파스칼은 그 모든 책은 다 집어치우고 성경과 어거스틴의 참회록만 읽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완전히 바꾸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성형수술 하듯이 보이는 얼굴 몇 군데만 뜯어고쳐 놓는 정도가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속 사람까지 완전히 새롭게 고치는 과정입니다. 그럴싸하게 치장하고 잠시잠깐 위장하고 살다가 정해진 시간만 지나면 감춰두었던 옛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생활하는 그런 삶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본문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육체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도 겉 사람인 육체의 조건만을 생각하고 대해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도 영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육체의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적인 부분을 볼 줄 알아야 한 영혼을 귀히 여기며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리모델링(remodeling)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래된 건물이나 상가를 보수하고 개축하여 새로운 건물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교회도 리모델링 했습니다. 우리는 건물만 리모델링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리모델링 해야 합니다. 죄를 지닌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작업입니다.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본문 17절에 새로워지는 비결을 소개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됩니다. 인생을 새롭게 단장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새것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워지면 쓸모 있는 인생이 됩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워진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우리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 일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을 화목 제물로 삼으사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화목한 삶을 살아가려면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20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화목하기 위하여 하나님과의 화목하는 관계를 깨뜨립니다. 우선해야 할 것은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코의 극작가 카를 차펙은 “만일 개가 지껄일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우리 인간은 인간끼리 사귀기 어려운 것만큼 개와 사귀기도 힘들어질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차펙은 로봇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입니다.) 우리는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와 같은 신앙이 아니라 진실하신, 아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