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믿을 수 있는 책인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일 1:1-4)

한 때 유행했던 사오정 시리즈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오정이 회사 면접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먼저 앞에 사람이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면접관이 물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축구선수는 누굽니까?” “과거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요즘은 박지성입니다.” “당신은 UFO가 존재한다고 믿습니까?”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또 면접관이 묻습니다. “산업혁명이 언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까?” “예. 19세기 초반부터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대답을 잘 했기 때문에 면접관도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보냈습니다. 그가 나오자마자 사오정이 들어갔습니다. 자신을 가지고 질문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면접관의 질문이 달랐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전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요즘은 박지성입니다.” 면접관이 기가 막혀서, “당신 바보 아니야!”했더니 “과학적으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면접관이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당신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소?” 물었더니, “19세기 초반부터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더랍니다. 세상에서 바보중의 바보는, 문제도 모르고 답만 외우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기준에 넣어버리는 겁니다. 요즘 우리가 이런 교육을 하지 않나 생각해야 합니다. 요즘 심지어는 예의 범절 까지도 회사에서 가르쳐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고 CEO들은 혀를 찹니다.

예수를 찾아 나섰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처음에 발견하고 싶었던 모습의 예수를 발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샬럿 엘런은 <인간 그리스도>에서 말하기를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 예수를, 이신론자들은 이신론자 예수를, 낭만주의자들은 낭만주의자 예수를,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주의자 예수를, 해방신학자들은 계급투쟁의 선봉에 선 예수를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요즘 기업들은 흔히 마케팅 도구로 사용해 오던 설문조사기법(FGI:Focused Group Interview) 등을 폐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다 정해진 것에 마치 소비자의 의견을 듣는 척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급스런 플로랄 향의 샴푸가 새로 나오는데, 아카시아 향이 좋을까요? 라일락 향이 좋을까요?. 이미 다 써놓은 소설을 가지고 주인공에게 어떤 옷을 입힐까요?” 의견의 수렴도 아니고 자기들이 다 만들어 놓은 것이, 자기들의 생각이 타당하다는 증거를 만들어 내는 장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질문도 모르는 사오정처럼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믿는 진짜 성경, 진짜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 덮어놓고 믿으면 안됩니다. 믿음은 우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성경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권위가 흔들리고 성경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면 그 안에 기록된 것도 모두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를 그렇게 혼란에 빠뜨리게 만드는 경우는 소설과 같은 형식으로 쓰여진 책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은 2003년, 덴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입니다.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교회사와 예수에 대해서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든 겁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고 복음 전도에 열정이 넘치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거치는 통상적인 통로를 무시한 채 자신들의 연구결과나 또는 믿음과 영적이라는 등의 이유로 밀어붙이기 식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이것은 거짓 이론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도울 뿐입니다. 또 그것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마치 무슨 숨겨야할 비밀이 많은 것처럼 보여 오히려 믿음이 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제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4복음서 외에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없냐는 겁니다. 심지어는 예수와 무관한 이론도 그것이 성경이라고 우기거나 그 권위에 못지 않다고 주장하고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80년대 초에 신학교 다녔는데요 한번은 전철 타고 부천역에 내렸습니다. 역전앞에 예수님의 그림도 아닌데 이상한 것을 붙여놓고 전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호기심이 생겨서 가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설명하는 것은 요셉 스미스가 부활한 모로나이로부터 1827년 9월 22일 받았다는 <몰몬경>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몰몬경은 구세계에서 미대륙으로 이주하였던 세 무리의 백성에 관한 종교적 기록이다.
그들의 종교적 및 세속적 역사를 금속판에 기록하였는데, 그것들을 서기 421년경에 숨겼고 1823년 부활한 모로나이는 조셉 스미스를 방문하였으며 그에게 전달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참 당황스럽고 황당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의 유사성이나 특히 성경이 금판에 기록되어 1800년대에 그것도 예수님 외에 부활한 사람이 전달했다는 아메리카 대륙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요셉 스미스는 히브리어와 애굽어를 못하는데 몰몬경은 히브리어와 애굽어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번역의 일부를 우림과 둠밈을 사용해서 했다고 합니다. 그 우림과 둠밈은 또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황당한 이야기를 쫓아 믿는 사람이 미국의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 약 500만 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있는 4개의 복음서 외에 도마복음, 비밀마가복음, 베드로복음, 마리아복음 등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성경의 복음서는 오직 예수를 증거 하는 데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 이외에 그 어떤 인물도 변호되거나 신성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리아 복음에는 베드로와 안드레를 “오만하고 무지한 남자들”로 묘사하고 막달라 마리아가 ‘참된 사도적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제자들처럼 동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복음에는 ‘말하는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도마복음에는 예수를 성경이 말하는 구원자가 아니라 제자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비밀 교훈들을 전해주는 지혜의 인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속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통해 온다는 초대교회 이단인 영지주의 주장과 일치하는 부분입니다. 도마복음 114장에는 이런 이상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자신을 남자로 만드는 모든 여자는 천국에 들어가리라.”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거짓 문서들은 전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 부분들만 뽑아다 사람들에게 소개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것이 얼마나 엉뚱하고 근거 없는 이야기들인지를 알게됩니다.

학문적으로 역사가들이 고대의 문서들의 신뢰성 여부를 결정할 때 사용하는 기준은 대략 4가지 정도입니다.
첫째는 기록시기입니다. 세종대왕시대의 문서라면 세종대왕을 알던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기록된 것이 맞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사역하신 시기인 30년 정도 후에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시작했으니까 A.D. 60년에 기록할 때 살아있는 증인들이 그것을 교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거짓으로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A.D. 150년에 기록된 문서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A.D. 60년이면 예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생존합니다. 일제 시대의 문서가 위안부의 내용이 그분들이 살아 계실 때 기록되어야 더 신뢰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3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제자 요한은 예수께 직접 듣고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도마복음은 기록연대가 2세기 후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직접 기록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 당시의 만연한 영지주의자들의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두 번째는 지리적 연관성입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신 지 30년 후 지중해에서 발견된 문서는 2세기의 스페인이나 프랑스 미국에서 발견된 문서보다 휠씬 신뢰가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복음은 1880년대에 이집트 아크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9세기에 죽은 기독교 수도사의 한 관속에서 코텍스로 발견되었습니다. 발견 시기나 지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세 번째 기준은 해당 문서의 문화적 정확성입니다. 당시 정치상황이나 사건에 대한 언급을 살펴보면 실제보다 앞선 시대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허위 문서들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2-3세기의 저술가들은 그 당시 유대인이 아니면 정확한 세부 내용을 모르는 매장 풍속, 시신 정결 문제 등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네 번째는 동기입니다. 저자에게 다른 생각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의심스러운 문제들을 확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지는 않은가? 등입니다. 몰몬경의 경우 3증인과 8증인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자주 쓰는 표현입니다만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보다 자신이 인자(人子)라고 소개한 적이 휠씬 더 많습니다. 또한 마태는 자신이 쓰는 복음서에 자신을 우상화하기는커녕 12제자의 이름을 소개하면서 유독 자신의 이름 앞에만 ‘세리 마태’라고 소개합니다.

성경이라고 말하는 문서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베이전트 베스트셀러 <지저스 페이퍼>가 있습니다. 베이전트는 아람어로 된 파피루스 두 개를 발견했고 두 문서 모두 예수의 십자가 처형 당시의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습니다. 그 문서의 저자는 자신을 “이스라엘 자손의 메시야”라고 부르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할 의도가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영의 화신일 뿐이라고 산헤드린공의회에 해명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발견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쓰신 최초의 문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발견한 상황에 대해서 들어보면 1961년 이스라엘에서 누군가를 만났는데 고대 유물수집가였다고 합니다. 그는 금고에서 아람어로 된 두 개의 문서를 보여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자신은 아람어를 모릅니다. 그러니 그 문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두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과 나흐만 아비가드가 파피루스를 확인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참 그런데 그 두 사람은 모두 죽었습니다. 발견당시 사진을 찍어놓은 것 한 장도 없습니다. 원본은 내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한가지 사실은 예루살렘 땅에 묻힌 파피루스는 2000년 동안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음모 술책이 있었고 그 사이에 원본이 사라지거나 불태워졌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당골 손님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로마 교황청입니다. 아마 그곳이 비밀스럽기는 하나 봅니다. 베이전트는 교황 요한 23세가 이 문서를 다른 문서들처럼 없애 버리려고 했지만 오히려 고고학자들이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베이전트의 이런 빈정거림은 늘 초대교회나 기독교가 불리한 자료들을 불태워 없앴다는 등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유다복음도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교회가 불태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다복음의 진위성은 그 제목에서부터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신약성경의 4복음서는 모두 “마태 복음, 마가 복음, 누가 복음, 요한 복음”이라고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유다 복음에는 “유다가 전하는 복음(Gospel According to Judas)”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복음서 기자가 자신이 아니라 유다에 대한 복음서라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건 이것은 유다가 죽고 한참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의 복음서들 외에 다른 복음서라고 주장하는 문사들이나 기타 문서들은 역사성이라는 시험대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도마복음은 2세기의 신비주의와 영지주의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고, 말하는 십자가와 거인 예수가 등장하는 베드로 복음은 신뢰성에서 낙제했습니다. 마리아복음과 유다복음은 그 기록시기가 너무 늦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를 복사, 짜깁기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비밀마가복음과 지저스페이퍼는 위조품이었습니다.

위에서 말한 역사가들의 네 가지 기준이외에 다중증언(multiple attestation)이 또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서로 증언이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일관성의 문제도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기록시기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4복음서의 대항복음서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 서신 대부분은 4복음서보다 기록이 앞섭니다. 대항복음서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로 1세기에 모아서 불태워졌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기독교인이 정치, 군사 모든 면에서 장악하고 있어도 될까 말까하는 일입니다. 그 당시의 기독교인은 카타콤과 같은 동굴로 피신해 다녀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복음서가 왜곡되었다는 이야기로 아이들의 전화놀이를 비유하곤 하는데 성경은 구두 전승이 아니라 문자 전승되었습니다. 그 정교함은 성경 사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것들이 너무 똑같다는데 놀라고 있습니다. 도대체 다른 곳이 없는 사본들을 쳐다보는 일은 지겹다고 할 정도입니다. 신약성경의 헬라어 사본만 5,700종이나 됩니다. 라틴어로 1만종이상의 사본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콥트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그루지아어 등 다른 언어들 사본도 있습니다. 이것을 다 합치면 1만개 이상으로 봅니다. 다 합치면 25,000-30,000종의 필사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본들을 다 파기하면 어떻게 될까요?
고대 교부들이 신약성경 말씀을 자주 인용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시 재구성하면 성경을 만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교부들의 저작은 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이어집니다.
로마가 대단한 나라답게 역사 또한 정리하려고 무진 애를 섰습니다. 그래서 요세푸스 같은 사람도 유대인인데 로마가 결국 로마인으로 만들어 역사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예를 들어 리비우스는 로마 역사에 대해서 142권을 썼지만 그 가운데 35권만 남아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증거들을 믿지 못한다면 아마도 고대 문서에서 믿을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한 두 개의 책이나 문서만 발견되어도 그것을 의심 없이 믿기 싶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성경의 사본들은 다 무시하고 한두 권의 다른 책만 인정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인터넷에 떠도는 예수님에 대한 이상한 주장들도 모두 역사적 자 대를 들이대야 합니다. 그것들의 진실성 여부를 따지고 검증을 해야합니다.
인터넷에는 휴지통이 없습니다. 아무거나 다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개인 컴퓨터 안에는 휴지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휴지통은 필요 없는 파일을 그곳에 버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소입니다. 휴지통에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 두면 컴퓨터 속도가 느려집니다. 어느 순간 불필요한 것들 때문에 컴퓨터가 먹통이 되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가 좋으면 뭐합니까? 쓸데없는 것만 모아 놓는다면 쓰레기 더미에 불과할 것입니다. 세상 것 버리시고 하나님의 것 보관하시기를 바랍니다.
착각은 자유입니다. 선택도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에 따른 책임은 내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자라는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오직 믿을 수 있는 것은 성경뿐입니다. 본문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저는 사도 요한의 이 말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은 이상한 소리 안 합니다. 후세에 다른 사람들이 제자들의 이름으로 해야 권위가 서기 때문에 제자들의 이름을 팔아먹으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교묘히 넣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철저하게 그것들을 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입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가 잘 선택한 결과입니다. 성경은 역사적으로도 사실일 뿐만 아니라 성경만큼 수많은 사본으로 정확하게 그 내용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이야기는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합니다.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어느 분의 이야기입니다. 여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뒤 어머니는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당신 혼자 힘으로 키우셨습니다. 그 고생이 오죽했으랴. 그러나 그런 형편에서도 어머니는 늘 우리에게 ‘정직해라’, ‘책을 읽어라’, ‘남에게 폐 끼치지 말아라’ 하는 세 가지 당부를 하셨습니다. 나는 공부하다가 ‘기하학’에 대한 책을 사야된다고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더니 읍내에 다녀오신 어머님은 내 방으로 슬그머니 책을 넣어주셨습니다. 나는 밤이 되어 어머니 곁으로 갔는데, 수건을 쓰고 주무시는 어머니가 이상하여 수건을 살짝 벗겨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머리가 짧아져 있었습니다. 머릴 짤라 책을 사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냥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약속의 책이라고도 말하지만 다른 표현으로는 증언, 증거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살며시 펼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나를 사랑하신 증거로 십자가를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