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기도하라(1)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7-18)

지난 2009년 8월 25일(화) 오후 5시 우리나라 첫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 I)’가 발사되었습니다. 굉음과 함께 하얀 연기를 지상으로 내뿜으며 발사대를 떠나 수직으로 상승하면서 우주 상공을 향해 솟구치는 모습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대기권 밖으로 나가는데 불과 2-3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순간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대단해 보였습니다. 한 나라의 과학수준의 총체적인 평가가 위성발사에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과학기술이 총 집합된 기술이라는 겁니다. 비록 실패를 했지만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병을 부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강절(康節) 소 선생(郡先生)이 말하기를 “입을 상쾌하게 하는 물건은 질병을 일으키는 것이 많고, 마음에 상쾌한 일은 지나고 나면 반드시 재앙이 있게 된다.”는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패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만한 자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기도는 늘 겸손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 눈에 기도의 능력이 로켓 발사 장면처럼 보이지 않지만 성령의 힘은 대단한 것입니다. 로켓 발사와 비교할 수 없이 대단한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과학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숫한 문제들을 해결해 줍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나로호가 지상으로 떨어진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우리는 혹시나 나로호가 우주공간 어디에서 신호를 보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잊어버린 위성이 신호를 보내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그저 우주의 미아가 되어버린 위성처럼 하나님께도 아무 의미 없는 티끌 같은 존재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신호를 보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보호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궤도를 이탈한 위성과 교신을 못하는 이유는 위성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주 공간에서 오는 전파를 정확히 수신하려면 위성의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위성에서 전파를 보낸다고 해도 지상에서 그 위성이 어디 있는지를 몰라 교신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에도 응답하여 주십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고 난 후에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눅 4:14) 18절에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라고 합니다. 제자들만 성령이 임하시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성령과 함께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하나님 아버지께 의지하셨습니다.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그 복잡한 제사의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제사 왜 지냅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제사는 실패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만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왔는데 그 때 사람들이 금송아지에게 경배하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이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부터 구속하신 그 목적을 버리시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앞에 더렵혀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출 32:11-13).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께 그 백성을 용서해 주시기를 애원합니다(출 32:32).

용서는 우리 기도의 첫 번째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께 뭘 달라고 요구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미 회개했기 때문에 다시 용서를 빌지 않는 모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용서에 대한 기도를 죽을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만이 왜 자꾸만 생겨나는지 아십니까? 내가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론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래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바로 다음에 또 강조되는 것이 있습니다.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다른 사람에 대한용서 없이, 나 또한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음을 확실히 하셨습니다.

기도는 약속을 신뢰(믿음)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약속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하여 부름 받았던 제사장이요 선지자였던 사무엘은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기억했습니다(삼상 12:22).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시거나 일관성이 없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을 알았고 자기 뜻을 그 하나님의 목적에 굴복시켰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그는 백성들에게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상 12:23) 외쳤습니다.

유럽에 두 명의 위대한 장군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나폴레옹입니다. 이 나라는 믿는 나라입니다. 온 나라가 하나님을 믿지만 나폴레옹은 기도를 잘 안 했습니다. 자기가 워낙 능력이 있으니깐. 그래서 아래 참모가 말했습니다. “전쟁에 나가면서 목사님을 모셔다가 꼭 기도하고 가십시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필요 없어.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는 것이 아니야.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 전쟁과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모든 계획과 지휘를 자기가 합니다. 그는 결국 전쟁도 지고 나라는 다 파멸되며, 자기를 따르던 수많은 참모들을 다 죽이고 자기도 남대서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헬레나로 귀향을 갔습니다.
그러나 또 한 명의 위대한 유럽의 장군이 있습니다. 그는 넬슨제독입니다. 영국 해군제독입니다. 영국은 해군의 나라지 않습니까? 이 장군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이 장군의 요절은 시편 127편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되도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먼저 기도합니다. 특별히 전쟁이 일어나서 전쟁에 나갈 때에는 갑판 위에서 군목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항상 기도하므로 이분은 나라를 건져내었습니다.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 살면서 서러워도, 괴로워도 주님 크신 은총으로 무거운 짐 벗고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기도가 그 간구가 이 죄악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
서러움에 가득찬 내 마음의 이 괴로움
구원하옵소서 주여 크신 은총으로

이 무거운 짐을 벗겨 주옵소서 험한 이 세상에서
나 엎드려 주님 앞에 간구하나이다
나 엎드려 주님 앞에 간절히 바라나이다

보소서 나의 생명 순간 마다 사라져감을
마지막 촛불 같이 양지의 눈같이
주의 품 속에 나의 영혼을 다시 불러 소생시켜주소서

오 주여 구원하옵소서 이 세상 죄악에서
오 주여 구원하옵소서 이 세상 고난에서
구원하소서 나의 주여 도우소서 나의 주여

성경의 역사는 기도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도 기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인과 다른 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다른 것은 부활의 능력이요 사망에서 우리를 부활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그에게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무리 바쁘셔도 기도하셨습니다. 바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말씀을 하실 때는 기도로 시작하셨고 기도로 마치셨습니다(눅 3:21, 22, 24:49:51). 예수님은 기도를 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피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을 택하셨습니다. 그곳은 광야였습니다(눅 5:16). 열 두 제자를 임명하시기 전에는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 6:12)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죄가 없으시지만 기도하셨습니다. 그럼 주님의 기도제목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분에게 능력이 부족하여 능력을 달라는 것이었을 까요? 지혜가 부족하셔서 지혜를 달라는 것이었을 까요? 무엇을 기도하셨든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기도는 나의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기 위하여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결론은 본문에서 봅니다. 기도가 능력이요 기도가 하나님의 일의 시작이라면 우리는 당장 기도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18절에서 “모든 기도와”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형태의 기도를 말합니다. 기도는 다 좋은 것입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 산기도, 금식기도 다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금식기도 언급을 하실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금식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라는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성전재건을 하면서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합니다(에스라 8:21, 23). 이것을 하나님은 응낙하셨다고 했습니다. 성전재건하기도 힘들고 포로에서 돌아와 지쳐있을 것인데 금식을 명합니다. 죽기살기로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기도입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이 삽니다.

우리도 9월 14일-18일(5일) 동안 특별새벽기도를 시작합니다. 아이가 자면 자는 대로 데리고 오세요. 집이 멀면 교회 근처에 와서 주무세요. 여러분! 구약시대에는 전쟁을 했습니다. 지면 죽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죽습니다. 우리 교회가 죽습니다. 선교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기간도 아닙니다. 단 5일입니다. 이번 기간에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여러분! 기도가 성령의 도움을 받으며 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성령 받는 것이지만 동일하게 성령의 인도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지 않는 분들도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성령과 함께 하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해야 합니다. 구하는 것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역사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잠시 이 땅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사도들이 모였을 때 “…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약속하신 것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이 다락방에 올라가 “…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4)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다시 모였습니다. 기도 중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홀연히 성령이 임했습니다. 마치 불의 혀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였습니다. 방언이 터졌습니다(행 2:1-4). 약속의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무식한 줄로만 알았던 베드로가 설교합니다.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음이라”(24), 다윗의 시편도 인용하면서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 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26) 하고 외칩니다. “진짜 베드로 맞아?” 할 만큼 놀라운 설교를 합니다. 성령의 감동 없이는 하지 못할 설교를 합니다.
이제 기도의 능력을 안 것입니다. 기도로 성령 받음을 안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재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곱 집사를 택하면서 사도들은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 6:4)고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합니까? 기도의 능력을 안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교회당 건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교회 건물 짓고 하다가 시간 빼앗기는 것 원치 않습니다. 집사님들이 좀 해 주세요.

바울이 마게도냐 지역의 빌립보(최초의 유럽전도)에 이르렀을 때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행 16:13) 기도할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여기서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를 만나게 되고 그는 유럽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고 그의 집이 유럽 최초의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곳 빌립보에서 복음전하다 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을 곧바로 기도했습니다. 무엇을 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기도는 역사를 동반합니다.